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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32)화 (32/134)

32화

구렛나루 할아버지가 ‘아주 재미있는 형제로구먼.’ 하며 돌아간 이후, 그는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나는 갑갑하게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데, 너는 잘난 그 얼굴로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았던 벌이다.

설마 그것 좀 놀렸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아무 말도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옆에서 본 그의 얼굴은, 꽤 굳은 채로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수첩을 들었다.

- 에이 형, 설마 그걸로 삐진 건 아니겠지. -

적어서 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자,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씩 웃었다.

“형을 뭘로 보고.”

짜식, 그렇게 나와야지.

나는 그제야 마음을 편히 갖고 벽에 등을 기댔다.

주인장 말로는 방이 나올 것 같다고 했는데 아직인가.

오늘 밤 안으로 나오는 거 맞아?

이렇게 사람 많고 보는 눈 많은 곳에서 자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분명 이 방엔 좋은 자들도 있겠지만, 잠든 사람의 주머니를 노리는 도둑이라든가 하는 나쁜 놈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선 잠들 수 없고, 방이 나와야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신은 버티려고 했지만, 피로한 내 몸은 어서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좀 자요.”

그가 작게 말을 건네 왔다.

“안 자요.”

“눈꺼풀 감기는 거 다 보이는 데, 뭘 안 자요. 자요.”

진짜 안 잘 건데, 참을 수 있는데.

나는 남자의 말에 반항하듯, 손가락으로 눈을 뒤집어 깠다.

“안 자요, 안자.”

그런 나를 보며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그가 기대 자라는 듯, 손으로 제 어깨를 툭툭 쳤다.

“내일 말 타고 꼬박 한나절은 달려야 호수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빨리 자요. 푹 자둬야 내일 움직일 수 있으니까.”

못 이기는 척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긴 정말 피곤했나 보다.

무거웠던 머리를 기대는 것만으로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데 나 데려다주는 겁니까?”

“뭘요?”

“호수까지요.”

“아…”

머리를 기대고 나니, 피곤함에 찌든 내 몸이 점점 그에게로 기울었다.

머리 무거울 텐데….

“잘 데려다주겠다고 말만 하고 쓸모없는 호위라 미안해요.”

말을 해놓고 큭큭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누가 누굴 데려다주고 있는 거냐고 지금.

그도 내 웃음의 이유를 눈치챘는지, 어깨가 잘게 들썩거렸다.

“저도 이젠 도망가는 처지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서제국 2황자가 언제까지 나를 신경 쓰려나.

“나랑 호수까지 가고 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 이후에는….”

가족들에게 몰래 연락해서, 2황자가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까먹을 동안 다른 데서 살면 되지 않을까?

러브도 아니고 그런 변태가 얼마나 오래 이 사건을 생각하겠어? 금방 까먹겠지.

그럼 한 1년 정도 집 밖에서 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당분간은 집에 돌아가기 좀 그럴 것 같고 상황 봐서요.”

“…생각해 둔 곳은 있어요?”

조심스레 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해 둔 곳이라.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습니까.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어찌 알았겠냐고!

“이제부터 생각하려고요.”

그가 뭐라 말을 더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잠이 나를 점령했고, 나락으로 떨어지듯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이 여자한테 분명 내가 동제국의 중요인물이라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까먹은 건가?

동제국의 황자 나일 리베르라고까지는 다 말하지 않았지만, 나름 중요인물이라 신고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정도까지는 얘길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신에게 도움 따위 요청하는 일이 없었다.

서제국의 2황자를 피하려면 동제국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나?

그가 아는 한은 없었다.

셀린 저택을 떠나 있을 거라고 해봤자, 결국 코딱지만 한 빌론 왕국 안이다.

그로서는 전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최 자신에게 기대려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질 않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일은 제 어깨에 기대 잠이 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어깨에서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다시 말을 꺼내볼까.’

나와 함께 동제국에 가지 않겠냐고.

그 제안과 함께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사연 있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그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사연 많은 남자인 나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솟구쳤다.

‘나랑 뭘 어쩌자는 게 아니잖아.’

그냥 그녀가 안전하게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뿐인데, 그럼 상관없지 않나.

황자궁에 텅텅 빈방이 수십 개인데, 누가 써주면 좋잖아.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며 제 어깨에 기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곱게 감겨있는 도톰한 눈꺼풀이 귀여웠다.

‘속눈썹이 가운데가 유독 기네.’

속눈썹의 길이가 전체적으로 긴 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의 가운데 부분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나일은 훅, 하고 가볍게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여자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피식 실소를 흘리며 다시 바람을 불려던 나일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아까 전 자신들을 안내했던 종업원이었다.

“예약하셨죠?”

“예.”

종업원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가 어깨 위에서 잠든 여자의 볼에 부드럽게 손을 대자, 그녀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요.”

졸린 눈을 하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소맷자락을 끌자, 아직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가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렇게 둘은 종업원을 따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

여관이 외관에 비해 내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긴 했지만 역시나 오래된 여관이었다.

여자 종업원을 따라 오르는 허름한 나무계단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나일은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여자가 비몽사몽 계단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불안해.’

자신이 그냥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렇게 행동하면 이 여자는 또.

매우 언짢다는 표정을 팍팍 지으며.

- 동생 껴안는 형은 별로. -

라고 쓴 수첩을 제게 들이밀지도 몰랐다.

농담으로라도 그녀에게서 별로라는 말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일은 계단에서 멈추었다.

여자가 왜 멈추냐는 표정으로 저를 올려본다.

“내 앞에 서요.”

앞에 두고 넘어지지 않고 잘 올라가는지 보면서 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안심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 말인데 왜인지 잠에서 깬 여자가, 정말 터무니없이 몹쓸 인간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비죽이던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형, 걱정 마 안 죽어. 계단 튼튼해.”

그러더니 ‘허, 나 참.’ 이러면서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일 앞서 계단을 오르던 여자 종업원도 그 말을 듣고는 한 마디를 보탰다.

“이래 보여도 안전해요, 병사님~ 보기랑 다르게 걱정이 많으신 분이네.”

“그렇다니까요. 우리 형이 허우대는 멀쩡한데 마음이 저렇게 콩알만 합니다. 흐하하핳.”

“어머, 마음은 콩알만 해도 허우대가 저런 게 좋은 거죠.”

“하하핳, 누님~ 실속있는 타입이시군요?”

그러더니 둘이서 시답잖은 잡담을 꺄르르 나누며 저만 두고 빠르게 올라가는 게 아닌가.

허, 나 참은 무슨 나 참이야. 나야말로 나 참이다.

나일은 어이없어하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

뒤늦게 3층으로 올라서자, 그녀에게 방 열쇠를 맡긴 여자 종업원이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방 안에 가볍게 마실 거랑 드실 것 넣어뒀어요. 방 열쇠는 동생분에게 드렸구요.”

종업원의 말에 나일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여자가 서 있는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관이 그들에게 제공한 방은 3층의 맨 끝방이었다.

방 앞에 선 여자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있었다.

- 철컥철컥

잠금쇠 부분이 뻑뻑한지 열쇠를 계속 돌려대는 모습이 보였다.

“안 열립니까? 내게 줘요.”

“아뇨. 다 열었어요. 이미 문이 열려있었는데 잠긴 줄 알고 돌려버려서.”

절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와 잠금쇠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일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복도는 양 벽에 붙어있는 초에서 번지는 은은한 빛만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복도는 매우 적요했다.

이미 깊은 밤, 늘어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잠시나마 편하게 눈 붙일 수 있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자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요?”

“….”

말을 걸었는데도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일은 비스듬히 고개를 내려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벌어진 입술,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녹색 눈동자, 핏기가 싹 가셔 푸른 기가 도는 뺨이 보였다.

벌벌 떨리는 여자의 작은 손에서 툭, 열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그가 여자의 앞으로 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손안에서 여자가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요!?”

“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그녀가 허공에 입만 벙끗거렸다.

걱정되고 답답한 마음에 여자의 어깨를 쥔 나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천천히 말해 봐요.”

“어… 저기….”

결국 여자의 녹빛 눈망울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크게 소리 내 우는 것조차 무섭다는 듯, 여자는 울면서도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한 곳을 가리켰다.

방금 그녀가 문을 연 방이었다.

그가 고개를 홱 꺾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어두운 방 안쪽, 서 있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확인한 나일이 방문을 거칠게 열어 재꼈다.

쾅 하고 방문이 벽에 부딪히며 벽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과격한 동작에 놀란 검은 인영이 급하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나일이 그의 멱살을 낚아채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나일이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자, 나일에게 멱살을 잡힌 그가 발버둥을 쳤고, 주먹 쥔 나일의 손 위로 정체 모를 이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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