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작은 마을엔 여관이 단 두 곳뿐이었다.
처음 갔던 곳에서 방이 모두 찼다며 퇴짜를 맞았던 터라, 나는 여관 입구의 낡아빠진 나무문을 밀며 방이 있기를 빌었다.
‘생각보다 안은 깔끔하네.’
겉에서 보기엔 건물이 너무 허름해서 ‘이런 데서 잠들었다간 건물이 무너져서 압사당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내부는 정갈했다.
여관의 1층은 식사 겸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인 듯했다.
새벽의 늦은 시간인데도, 작은 여관의 1층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테이블을 지나쳐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삭발 머리가 멋진 주인장이 이제 막 여관에 들어선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긴 금발 머리를 위로 묶어 모자 속으로 쏙 감추었으니 영락없이 잘생긴 군인으로 보일 테지.
나는 당당하게 걸어가 주인장에게 방을 주문했다.
“방 두 개 있습니까?”
“방이 지금….”
주인장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내 뒤에 서 있던 황자가 걸어 나오며 카운터 테이블 위를 손으로 내려쳤다.
“방 하나.”
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런 내 반응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친근하게 내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피터 이 자식 네가 방값 낼 것도 아니면서, 무슨 형제끼리 방을 따로 쓰냐. 주인장, 방 하나면 됩니다.”
그가 내게 팔을 두르고 있어 거리가 가까웠다.
남자의 귀에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피터가 누구….”
“그럼 피비로 불러줘요?”
도망자 신세에 당당하게 본명으로 불릴 수야 없지.
그건 안 될 말이지, 빠르게 긍정 후 두 번째 질문을 속삭였다.
“방은 왜 하날 잡아요, 두 개….”
“방 각각 썼다가 추격자들이 들이닥치면요. 그쪽이 날 구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나 혼자 쓰기 무서워요.”
“….”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혼자보다는 아무래도 둘이 함께 있는 게 덜 위험하겠지.
아, 편하게 혼자 자는 건 날아가 버렸구나.
“피터 표정이 왜 그래, 형이랑 같이 자는 거 싫어?”
“….”
“어렸을 때는 무섭다고 꼭 형아랑 같이 자고 싶다고 했으면서.”
“….”
“오늘도 형이랑 손잡고 같이 자자.”
이익.
졸지에 내가 그의 남동생이 되어버린 이 상황을 남자는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경쾌하게 두들겼다.
내 어깨에 둘러진 그의 팔의 움직임마저 신나 보였다.
나는 그의 귓가에 조용히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형. 적당히 해. 동생 짜증나려고 해.”
“예.”
그가 짧게 대답했다.
“아무튼 방 하나 주십시오.”
“방이 다 찼습니다.”
주인장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어쩌지, 여기도 방이 없으면 갈 곳이 정말 없는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여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째 주인장의 얼굴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표정이었다.
“방이 하나 나올 것 같긴 한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아직 예약한 사람은 없군요.”
그러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저 눈빛이 무슨 말인 줄 안다.
재빨리 가방을 뒤져 금화 한 닢을 손바닥 밑에 감춰 테이블 위로 밀었다.
금화가 아니라 은화 열 닢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급한 대로 챙겨온 돈이 금화뿐이었다.
“그 방을 예약할 수 있을까요?”
“예약해드리겠습니다.”
“거스름돈 되나요?”
“….”
“거스름돈은 주인장께서 가지는 거로.”
내게서 건네받은 금화를 챙긴 주인장이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방이 나오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다인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거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여관에는 1인실과 2인실, 그리고 3인실 외에 다인실이란 것이 존재했다.
침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큰 방에, 모포만 깔고 모르는 사람들 옆에서 잠을 자는 대신 가격이 매우 싼 곳이었다.
그와 나는 따라오라고 눈짓하는 종업원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인실에 들어가면 말하지 말아요.”
“왜요?”
황자가 몰라서 묻냐는, 정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군복만 입으면 남자로 봐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 지금 그냥 군복만 입은 여자나 다름없어요. 방금 여관 주인이랑 대화할 때도 완전히 본인 목소리였다구요. 계속 말하다 보면 누군가 당신을 주시할 거고 그럼 들키게 될 거예요.”
그런가.
그냥 좀 귀엽게 생긴 남자네, 할 것 같은데.
“그럼 목소리를 낮게 깔아볼게요. 자 이렇게, 형 밥은 먹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목소리를 낮게 깔아서 표현해 보았는데, 오 그의 표정이 매우 언짢아 보였다.
“제발, 나 불안해 죽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알겠어요.”
그래 뭐, 나도 안전한 게 제일 좋지. 알았다구.
종업원을 따라 코너를 도니 커다란 방이 나왔고, 그곳은 오.
‘여기가 현실판 지옥인가.’
커다란 방에 수컷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어디서는 술판이, 어디서는 취침을 하고 있었으며, 또 어디서는 둘러앉아 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커다란 방이었지만 이미 정원은 초과되어 보였고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씨.”
내 어깨를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아이씨라고 하다니, 방금 황자의 입에서 아이씨가 나온 건가?
그를 발견하고 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욕짓거리에 내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취도 없이 생으로 살을 꿰맬 때도 말 한마디를 안 했던 사람이.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처참한 방 상태를 보고 나니, 나도 좀 긴장이 되었던지라 고민 없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란히 방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험악한 인상을 한 용병이나 군인으로 보이는 자들의 시선에, 나는 눈을 내리깔고 내내 땅만 보고 입장했다.
문제는 나만이 아니었다.
거적때기를 걸쳐놔도 빛이 나는 얼굴의 남자가 내 옆에 있었으므로.
나만 말을 안 하면 뭣하냐고.
당신 얼굴이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황자의 얼굴을 슬쩍 보니, ‘이놈들 이쪽보다 눈 마주치면 뒤진다.’라는 느낌으로 험상궂은 표정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잘생겨 보이니, 그를 슬금슬금 쳐다보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를 따라 방에서 제일 구석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은 그가 가방을 뒤졌다.
그가 가방에서 꺼내 내게 건넨 것은 목도리였다.
내가 그를 떠나보낼 때 춥지 말라고 가방에 넣어준 목도리.
“왜….”
아, 나 여기서 말 안 하기로 했지.
자연스럽게 왜냐고 소리 내 말 할 뻔한 나는 급히 입을 다물고 입 모양으로 질문했다.
‘목.도.리.왜?’
내 입 모양을 본 그가 연이어 꺼낸 것은 작은 수첩과 펜이었다.
그가 열심히 수첩에 뭔갈 적더니 내게 건넸다.
- 목도리 얼굴에 둘러요. 눈만 보이게. -
목도리를 얼굴에 감으라고? 아니 안 그래도 여기 더워죽겠는데.
사람의 신체에서 내뿜는 열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으니 방 안의 공기는 마치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군복도 겨울용 군복을 실내에서 그대로 입고 있는 중이라 안 그래도 곧 땀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가 건넨 목도리를 다시 그에게 떠밀었다.
‘됐.거.든.요.’
내 입 모양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미간을 좁힌 채, 그가 뭘 또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 목소리만 안 낸다고 그 얼굴이 남자로 보일 것 같아요? 불안해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제발 둘러요. -
남자 옷도 입었고, 긴 머리도 가렸는데 거기다가 말도 하지 말라 그러고 이제는 얼굴까지 가리라니.
아예 그냥 여자인 거 들키기 싫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라고 하지 왜.
사돈 남 말 하시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서 수첩을 빼앗아 내 할 말을 적었다.
- 님 얼굴이 더 시선 집중이거든요? -
내 메모를 본 그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올라갔던 입꼬리를 정리하며 그가 다시 수첩을 뺏어 들었다.
- 거참 말 안 듣네. 제발요. 부탁할게요. -
그가 애원하는 눈빛을 쏘았다.
남자가 잘생긴 얼굴로 잔뜩 애달픈 표정을 해 보이는 통에, 그래 내가 졌다.
나는 그의 손에서 목도리를 가져다 얼굴에 히잡처럼 둘렀다.
그러자 그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잘 듣네. 우리 피터.”
히죽 웃는 그를 향해 눈총을 쏘는데, 우리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굉장히 덩치가 큰 노병이었는데, 귀 옆으로 잘 정리된 구렛나루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자네들은 어딜 가는 길인가?”
정확히는 우리 둘 중 내게 시선을 주면서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말을 못 하는 처지였으므로, 자연스럽게 황자에게 시선을 넘겼다.
“저희는 라울 호수로 갑니다.”
“라울? 공동경비구역 말인가?”
“예.”
“거긴 경비 인력이 많이 필요치 않은 곳일 텐데.”
이 할아버지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네.
속에서 약간 불안함이 올라왔지만, 나는 지금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경비를 보던 이들 중 몇이 호수에 빠져 식인 식물에게 잡아먹혔다더군요. 지원 요청이 있어서 가는 중입니다.”
“음, 그렇게 된 거로구먼. 거긴 동제국 병사보다 식인 식물이 더 위험해, 안 그런가?”
“예, 맞습니다.”
황자의 그럴싸한 대답에, 구렛나루 할아버지는 이해가 되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거 해결하셨으면 이제 가세요, 제발. 이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지만.
할아버지는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친구는 왜 머리에….”
그가 정확히 내 목도리를 가리키며 물어왔다.
거봐! 이거 써서 더 눈에 띈 거잖아!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황자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 하하, 제 동생인데 감기에 걸렸습니다. 어찌나 심하게 감기에 걸렸는지 목이 다 쉴 정돕니다.”
“아~ 어쩐지, 형제였구먼. 사내놈이 사내놈 보는데 왜 눈에서 꿀이 떨어지나 했더니 그게 우애였구먼? 하하하.”
할아버지의 말에, 그의 얼굴을 일부터 티 나게 바라보았다.
분명 잔뜩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고 머리를 비볐다.
“제가 동생을 워낙 좋아해서요. 너도 그렇지?”
제 반려견 쓰다듬듯, 모자 쓴 내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 그를 아주 빤히 바라봐 주었다.
“그렇지. 동생 사랑은 형 몫이지. 에? 근데 동생은 그런 거 같지가 않은데? 형이 말로만 형 노릇 하는 거 아냐 이거? 하하하하.”
구렛나루 할아버지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자, 그가 살짝 당황한 듯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피터 너 형 민망하게 이럴 거니?”
그가 재차 내게 질문하자,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할아버지도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거의 대답 강요 아니냐?
나는 다시 수첩을 들었다.
빠르게 내 할 말을 적은 후, 그 둘에게 들어 보였다.
- 나는 형 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