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0)화 (20/134)

20화

“그럼… 그러면요….”

“…?”

“나와 당신 중 한 명만 살 수 있고 한 명은 죽어야 한다면, 당신이 사는 게 이 세상에 더 이롭지 않을까요?”

“….”

나 하나 사는 일밖에, 내 목숨밖에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보다는, 당신 같이 여러 명을 살리는 사람이 세상에 남아야 하는데.

내가 해놓고도 참 뻔하디뻔한 질문이었다.

그가 말이 없길래 나는 웃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서 저런 질문을 한 걸까 빠르게 후회했다.

내 질문은 솔직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으니까.

아마 대충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답이 돌아오겠지.

레이디를 위해 이 한목숨 내놓겠습니다, 하고 농담을 내뱉거나.

진지한 얼굴로 모두의 목숨은 평등합니다! 할 수도 있겠군.

“농담이에요. 농담.”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을 농담이라며 갈무리했을 때였다.

“아뇨.”

“….”

“당신이 살아야죠.”

왜냐하면… 말을 이어가며 그가 귀에 묻은 거품을 문질렀다.

“내가 100명을 구한다면, 당신은 내 목숨을 포함한 101명을 구한 거니까 그렇게 따지면 당신의 목숨이 더 소중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당신이 살아야 해요.”

“….”

“목숨의 무게를 그런 식으로 재고 싶진 않지만, 가정한다면 말이죠.”

그건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대충 지어낸 대답도 아니란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머리는 혼자서 헹궈요.”

들고 있던 수건을 그 주변에 대충 던지고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 공간을 너무나 벗어나고 싶었지만, 목욕 중인 사람이 밖을 돌아다닐 순 없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내가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보이는 건지 알지 못하는 그의 시선이, 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작은 공간에서 나는 숨을 죽였다.

저런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답을 진심으로 하는 저 남자가 싫었다.

그 상황이 싫었다.

자꾸 원작 따위를 떠올려 대면서, 그의 진심을 외면하려 애써왔지만 나는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가 거짓이라곤 하나도 없이, 너무나 올곧게 제 진심을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

“아가씨?”

식당 한편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녀 한 명이 식당을 지나다, 어둠 속에 있는 날 용케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밤에 여기서 뭐 하고 계셔요.”

“어? 어… 나… 물을 좀 마시려구 내려왔어.”

마땅한 핑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대충 둘러대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얇게 떨리는 내 목소리에서 이상한 낌새를 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녀가 손에 든 초를 내게로 들이밀었다.

대번에 밝아진 시야에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아마 얼굴이 엉망일 테니까.

“오늘 담당이 아가씨 방에 물병 채우는 걸 깜빡 했나 보네요. 제가 가서 다음부터는 잊지 말라고 얘길 할게요. 아가씨. 물 드셨어요?”

나는 힐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저 하녀의 이름이 뭐더라, 아, 엠마였든가. 그래.

나이가 좀 있는 엠마는 평소에도 과하다 싶을 만큼 친절한 여자였다.

지금처럼 혼자 있고 싶은 순간에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디 있는지 모르시죠? 제가 찾아드릴게요.”

“아냐, 엠마.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그녀는 역시나 참 살가운 사람이었다.

“누가 아가씨가 할 수 있는 걸 몰라서 이럴까요? 제가 해드리고 싶으니까 그렇죠.”

“아니야, 진짜 내가 혼자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냥….”

“에헤, 다 찾았….”

“제발!!!… 제바알… 그렇게까지 왜 친절한 거냐구….”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찢어질 듯한 내 목소리가 텅 빈 식당을 울렸다.

저택이 큰 게 참 다행이었다.

“아가씨….”

“흐어어어어엉. 허어엉… 흑….”

꺽꺽거리며 울음을 토해내자, 그녀가 손에 든 물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눈치도 없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어깨 위에서, 손을 내려 쓰다듬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의 방황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제가 또 오지랖을 부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아가씨.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시는지 저한테라도 털어놓으시면 좋지 않을까요? 저 같은 무지렁이가 귀족분들이 무슨 일로 고민이 많은지 알 턱이 없지만, 그래서 이해하고 도움을 드리기 어렵지만요. 그래도 귀는 달려있으니까요. 아가씨 앞에 있는 사람이 제가 아니라 아가씨가 좋아하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한번 말해보세요. 네?”

그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내 어깨에 내려놓았다.

따듯한 엠마의 체온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친절한 거야, 당신들.

지금 이건 나한텐 독이란 말이야.

“엠마가 아니야. 정말 하잘것없는 사람은 나란 말이야… 흐어어엉… 정말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나야 엠마.”

“에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엠마는 비어있던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아가씨가 얼마나 좋은 분인데요? 누가 그래요? 물론 얼마 전까지 아가씨가 좀 철부지, 에구머니나… 근데요 아가씨. 사람은 다 아기였다가 어른이 된답니다. 처음부터 어른이면 괴물이죠 그게. 그러니까 괜찮아요. 네?”

남자가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나를 정말 믿는 거야? 내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나는….

엠마 엠마 있잖아.

그가 나를 진짜로 믿어.

나는 거짓말투성이인데 나는 정말 못된 사람인데 왜 나를 믿을까.

나를 믿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나는….

“아가씨. 괜찮아요. 괜찮다~ 괜찮다~ 우리 아가씨 괜찮다~”

어쩌면 나는 그가 무슨 좋은 말을 하든 그는 나쁜 사람이라고, 사람을 죽게 해놓고 장례식에도 오지 않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고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야 내 마음이 덜 무거우니까.

“흐어어어어어엉.”

팔뚝에 난 상처들이 쓰라렸다.

*

그날 새벽,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내 가방에서, 그와 동행할 때 필요한 물건만을 남기고 나머지 물건들을 몽땅 빼냈다.

그를 살해할 마음이 증발해버렸으니 이제는 다 필요 없어진 물건들이었다.

‘호수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고 내 입으로 말했으니 거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동제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지 뭐.

최대한 몸 사리고 꼭꼭 숨어 살자, 그러면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숨어 살았는데도 발각되어 동제국 황실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의 난 오늘의 이 결정을 후회하려나.

그럴지도 모르지, 나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미래의 내가 할 테니까.’

미래의 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의 나는 저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 따위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으니까. 나를 제 목숨 구한 이로 철석같이 믿는 이에게 칼을 꽂을 수는 없었다.

‘어 이건.’

가방 안쪽에 넣어두었던 마비약이 든 유리병이 대구루루 굴러 나왔다.

이것도 이젠 필요 없으니까 버려야겠지, 유리병을 꺼내 버릴 물건 쪽에 두었던 나는 그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비싸게 사서 아까운데. 이건 그냥 두자.’

*

“아가씨 얼굴이 왜 이러세요?”

하녀가 날린 돌직구에 나는 놓았던 정신을 붙들고 거울 속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여자는 표정이 그야말로 죽을상이었다.

다크써클이 가득 내려온 퀭한 눈가는 화장이 필요 없을 만큼 붉은 기가 가득했다.

새벽 내내 운 덕분에 퉁퉁 부어있는 꼴이 아주 볼만 하달까.

생선 한 마리가 사람 흉내를 낸답시고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게.”

“어제저녁에 목욕도 하고 꿀잠 주무시지 않았어요?”

대외적으로는 남자가 아닌 내가 목욕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하녀 입장에서 저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하! 서제국 2황자님 때문에 긴장돼서 잠을 설치셨구나?”

혼자 말하고 혼자 이해한 하녀가 손뼉을 짝 치며 해맑게 웃었다.

나로서는 딱히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나 할까.

엠마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구나.

그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내가 어제 식당에서 그녀에게 안겨 통곡을 한 에피소드를 아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엠마에겐 신뢰 포인트를 적립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이… 억지로라도 주무시지! 제가 힘내볼게요!”

“응, 고마워.”

하녀는 제가 한 말을 정직하게 실행했다.

그녀가 있는 힘껏 내 얼굴 위로 팡팡팡팡 분을 두들겼다.

‘힘내자, 힘.’

나는 오늘 훌륭한 신랑감의 등장으로 기분이 매우 좋아진 귀족가 여식 중 한 명으로 보여야 했으니까.

거울 속의 피비가 어설프게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

‘대단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꽃길인가.

서제국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셀린 백작가의 일원들은 모두 저택 앞에 모여 있었다.

백작을 필두로 백작 부인, 오빠, 나.

그리고 그 뒤편으로 사용인들이 다 나와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나는 저택 앞의 상황을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서제국 일행의 행렬이 조그맣게 보였다.

서제국 일행이 오는 길을 중심으로 많은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다들 한 번씩 입에 올리는 서제국 2황자가 궁금한 사람, 어떻게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싶은 귀족 영애들까지.

곱게 차려입은 영애들이 저마다 까치발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북적북적 모여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

‘듣긴 했지만 정말 인기 많네.’

양 제국이 빌론 왕국의 주요 관광 수입원이라 그런가.

다들 기쁜 얼굴로 그들이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작은 점으로 보이던 서제국 일행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셀린 백작.”

“어서 오십시오.”

제일 먼저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백작과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그가 환한 얼굴로 백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다음 내린 인물도 신수가 훤한 남성이었다.

‘과연 비엘 소설 안이로다.’

서제국 장교들이라길래, 나이 좀 드신 푸근한 아저씨들이 내리지는 않을까 잠시 예측했었는데.

마차에서 내린 두 명은 모두 어리고 인물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 저 사람인가보다.’

총 세 명이라고 했는데, 아직 자신을 황자라고 소개한 이가 없었으니,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마지막 사람이 서제국 2황자란 얘기였다.

때마침, 마차 문이 열려 나는 흘끗 눈동자를 돌렸다.

‘이야.’

마차에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나는 속으로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제국의 2황자는 미남 중의 미남이요, 그것도 내가 제일로 치는 찰랑이는 장발의 안경 냉미남이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이야 조합도 저런 꿀 조합이 없다. 살맛나는 풍경이로구나, 했을 터인데.

새벽 내내 펑펑 울었기 때문인가.

한번 바닥을 쳤던 기분이 올라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아직 다 올라오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죽을상을 쓰고 있다 오해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도 잘생긴 미인 앞이라 그런가, 입꼬리가 수월하게 올라갔다.

어느새 그가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제 여식입니다.”

백작의 소개에 나는 예를 갖춰 무릎을 굽혔다.

“피비 셀린입니다.”

“테오 세리에입니다.”

제국의 황자씩이나 된 사람의 자기소개치고는 참 간결하고 담백하군, 생각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2황자가 웃는 낯으로 날 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