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씻는 걸 도와달라니.
“그냥 대충 씻어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몸 좀 닦아주는 게 별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네, 도와드립죠!’ 하고 방을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팔이 안 올라가서 상체를 씻기가 어렵습니다.”
“아예 못 씻는 것보다 하체라도 씻은 게 어디에요.”
“하지만 하체만 깨끗한 사람은 이상합니다.”
“….”
묘하게 설득당할 뻔했던 나는 침묵을 지켰다.
“…아닙니다, 제가 좀 귀찮게 했죠. 혼자 하겠습니다.”
아….
내 침묵이 거절의 의미인 걸 알아챈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기가 죽어있었다.
방 밖에서 사부작사부작 몸을 씻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어째선지 그의 다친 팔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 왜 낑낑거리면서 팔 꺾어 혼자 등 닦는 애처로운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냐.
상상 속, 불편한 몸으로 혼자 등을 닦는 남자의 모습은 정말이지 쓸쓸해 보였다.
차라리 아 왜요왜요 해줘요 이러면서 고집 부렸다면, 내 마음이 아예 차가워졌을 텐데.
오히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거절을 못 하겠더라.
“바지 입었어요?”
“바지요? 아니요.”
아니 바지도 안 입고 씻어달라고 부른 거야? 돌은 놈 보소.
“바지 입어요. 나 나갈 거니까.”
이 정도 시간을 줬으면 다 입었겠거니 생각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서자, 바지를 골반에 비스듬히 걸쳐 입은 남자가 욕조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거품이 퐁퐁 난 수건을 손에 들고서.
‘네가 나오라고 해놓고 고개는 왜 떨구는데.’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비스듬히 떨궜다.
욕조에 담긴 물 때문인지 방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창유리에도 뿌옇게 서리가 가득했다.
방이 무척이나 더웠다.
“덥네요.”
도와달라고 할 땐 언제고 나오니까 바닥만 보고 있는 이 행태 뭔데.
괜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쭈뼛거리자 나한테까지 쭈뼛거림이 전염되는 느낌이었다.
“덥나요? 창문 열까요?”
젖은 몸으로 창을 향해 손을 뻗는 그를 말렸다.
“감기 걸리고 싶어요? 당신 환자에다가 젖었어요, 지금.”
“네… 그렇죠.”
그가 머쓱한지 붉어진 콧등을 문질렀고, 덕분에 콧등 위로 작은 거품 꽃이 피어났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팔을 쑥 내밀었다.
수건을 달라는 얘기였다.
“아.”
거품이 가득 난 수건을 건네주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수건을 건네받은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뒤, 그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바닥에 벌레 있어요? 있으면 잡아주고요.”
허세였다. 난 벌레 못 잡는다.
“….”
“어디 닦아주면 돼요?
그는 팔을 많이 올려 닦아야만 하는 어깨와 목 근처를 가리켰다.
“이런 부분 아직 못 씻었어요.”
나는 무심결에 소매를 팔뚝까지 쭉 걷어 올리다 재빨리 다시 소매를 내렸다.
내 목숨 구하는 데 하등 필요 없는 죄악감을 짓누르기 위한 상처들이 팔 안쪽에 가득했으니까.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그에게 노출되어 좋을 것은 없었다.
“욕조에 걸터앉아 볼래요? 그게 닦아주기 편할 거 같아서.”
씻기기 편한 높이에 그의 상체가 들어오자, 나는 조용히 그의 어깨와 목을 수건으로 문질렀다.
수건이 지나간 자리마다 터져버린 거품들이 물줄기가 되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지 다 젖겠네.’
마른 수건으로 닦고 나면 새 바지를 가져다줘야 할 것 같았다.
빨래하기가 무섭게 세탁실에 개어놓은 시종의 옷들이 사라진다고 하녀장이 괜한 남자 사용인들한테 요즘 결벽증 걸린 놈 누구냐고 묻고 다니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헐렁한 바지 허리춤이, 허리를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 덕에 조금씩 젖어 가고 있었다.
“원래….”
그가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요?”
“….”
“아, 머리 아직 안 감았어요?”
그래, 팔이 안 올라가서 목도 못 닦았는데 머리는 감을 수 있었겠니.
마침 그의 머리는 딱 내 가슴 위치 정도, 감기기 좋은 높이에 있었다.
“머리 감겨줘요?”
내 질문에 곧바로 그의 정수리가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렸다.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래. 내 손은 이미 젖어버린 것을, 목 어깨에 머리 하나 추가된다고 큰일 나겠니.
따듯한 물을 적시자, 떡졌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머리카락 되게 얇다.
보기에도 그렇게 보였지만.
“원래….”
“?”
“그러지 않는데, 미안해요. 나도 놀랐어요.”
그 얘기였나.
나는 대화가 그 주제로 전환되길 원치 않았다.
“됐어요. 별거 아니니까 굳이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
내 뜻을 이해한 것인지 황자는 말이 없었다.
대충 물로 적셨으니 머리에 거품을 낼 차례였다.
그런데 이렇게 곧게 앉아서 비누칠하면 눈을 지나 턱으로 다 흘러내릴 것 같은데.
“눈 꼭 감아요. 거품 들어가면 따가우니까.”
욕조에 가볍게 걸쳐 앉은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내 두피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좋다고도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머리에 보글보글 거품이 난 그가 꽤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좀 많이 큰 강아지를 목욕시키는 기분 같기도 했고.
“안 물어봐요?”
눈을 감은 채 그가 또 질문을 해왔다.
“뭘요? 내가 궁금해야 할 게 있나요?”
“내 정체요. 왜 그곳에 있었는지… 어떤 사정 때문에 혼자 이곳에 떨어진 건지.”
“음.”
그의 말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얘기해 주려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궁금하지 않아요. 얘기하지 말아요.”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상하고 뻔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마 지금 ‘그게 끝이에요?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 질문이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상관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를 제게 더 협조적으로 만들어 보려는 그에게 순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도 않을 게 뻔했다.
잘 모르는 내게 제 정체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만큼 그가 제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테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땀이 나는 건지 그가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가슴이 왜 자꾸 답답해지지, 욕조의 열기 때문인가.
“후우… 나는 당신이 동제국으로 돌아가게 도울 거라구요. 적극적으로. 이미 그러고 있지 않아요? 부족해요?”
내 대답이 그가 생각했던 답변 중 예상외의 대답이었나 보다.
그가 눈을 반짝 떴다.
나를 올곧게 직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당신을 이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며칠 후면 안 볼 사이잖아요.”
“….”
“지금 나는… 하… 그래요. 당신은 지금 나한테 충분히 좋은 이미지고, 나는 당신을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더 알고 싶지 않다구요.”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날이 서 있는 나와는 다르게 다정함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내 검지 손끝을 매만졌다.
“겁이 많은데 손톱이 이렇게 짧아요? 이런 짧은 손톱으로는 아무도 못 해쳐요.”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내 정체를 모르니까, 내가 혹시 나쁜 사람일까 봐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거잖아요. 탈영병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도 알고요.
하지만 그걸 모르는 황자는 단단히 착각한 듯싶었다.
“말해주고 싶어요.”
“얼마나 솔직하게 말할 건데요?”
“다는 솔직할 수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줄 것도 아니면서.”
“….”
“내가 굳이 물어보고 들어야 하나요? 그럼 듣고 나서 내 기준에 옳지 않으면 당신을 고발해도 되나요?”
당당히 안 묻냐고 하더니 저 흔들리는 눈동자는 뭐란 말인가.
어차피 나는 네가 내게 솔직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전혀 없지.
난 너를 진심으로 구하려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만….
“찝찝하잖아요. 찝찝한데도 내가 당신한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나요?”
기울어진 남자의 얼굴선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똑, 똑… 턱에서 떨어진 물이 그의 아래 고이고 있었다.
*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말을 뱉은 건, 순간 눈을 감아버렸던 내가 다시 눈을 뜬 순간이었다.
“저는 일반 병사가 아닙니다.”
“….”
“저 꽤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신고하면 아마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하하.”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손에 쥔 수건에서 거품이 꺼져가고 있었다.
수건에서 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바닥은 이미 비누 거품과 이리저리 튄 물로 엉망이었다.
‘언제 바닥에 물이 이렇게 고였지.’
더러워진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가 숨을 고르며 이쪽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축축하고 더운 수증기 사이로 긴장된 그의 숨소리가 몸을 웅크렸다.
“그런 말을 나한테 왜 해요?”
“….”
“나를 믿어요?”
“….”
“아니면 그 정도 위험은 걸어줘야 내 신뢰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상황이 게임 같아요?”
내 말끝에는 그의 언사에 대한 조롱이 달려있었지만 그건 곧 나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너는 목숨을 참 가볍게도 여기는구나.
나는 내 목숨이 너무나 무거워서 이걸 들고 숨쉬기도 버거운데.
그가 목을 뒤로 쭉 젖혔다.
한참이나 천장의 벽화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당신이 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요. 그게 이상하지 않아요.”
“….”
“나는 이 상황을 게임처럼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당신을 시험해 보려는 마음도 없어요. 그저….”
“….”
“진중하지 못해 보였다면 미안해요. 오늘 사과할 일을 많이 만드네요.”
거품이 낀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지는 그의 웃음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끝마다 내 눈동자를 찾아가며 말해왔다.
“전쟁의 양상이 서제국의 승리로 기울어 갈 때, 그걸 뒤집기 위한 패가 필요했어요. 저는 그러기 위한 패였죠.”
“….”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더 많은 동제국의 병사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별것 아닌 가벼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농담조로 그가 짓궂은 웃음을 지어가며 말을 마쳤다.
신분을 드러내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너한테 물어본 적도 없잖아, 궁금하다고 알려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런데 왜 굳이 스스로 실토해서 위험을 감수하려 드는 거야?
“그래서 많은 병사를 살렸나요?”
“네, 다행히… 그럴 수 있었죠. 결국 이렇게 혼자 떨어져 버렸지만.”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 공기가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그가 쑥스럽게 웃었다.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