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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화 (12/134)

12화

나일은 커튼을 젖히고 창을 살짝 열어보았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라 예상했지만 날씨는 생각보다 포근했다.

바람 대신 불어 닥친 것은 저택 하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였다.

그녀들이 노느라 정신이 팔려있기도 했고, 불만 켜지 않으면 3층에 위치한 이 방 창문이 눈에 띌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일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비슷비슷한 외투를 걸친 하녀들 사이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여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럼 잘 놀고 있어요!

말과 함께 휙 몸을 돌려 방을 나가는 여자의 등을 바라보며.

- 어디 가요!

라고 물었지만, 여자는 제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3층을 내려갔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했더니만.

‘눈싸움하네.’

무슨 애도 아니고 눈싸움하러 그렇게 신나게 뛰어나간단 말인가.

눈덩이 그거 맞으면 축축하기나 하지.

애네 애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자에게 꽂힌 나일의 눈동자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꺄아~ 얘들아 아가씨한테서 도망가!”

여자가 술래인가?

하얀 눈밭 위에서 여자를 중심으로 하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하녀들을 쫓아가는 여자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그는 어느새 창틀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여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내가 예비 살인마야 이것들아~~”

“꺄~~ 아가씨 너무 무서워요~~”

여자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하녀들을 잡기 위해 팔을 휘저으며 달려나갔지만, 눈이 많이 쌓인 탓에 여자의 발이 눈 속으로 푹푹 꺼지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겠군,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여자가 눈 쌓인 바닥 위로 퍽 고꾸라졌다.

나일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까먹은 채, 그는 반쯤 열려있는 창을 왈카닥 열었다.

여자가 찬 눈 바닥에 계속 넘어져 있었다.

“어떡해!”

“아가씨!”

놀란 하녀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계속 일어나지 않자, 하녀들이 달라붙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때.

“왁!!”

“으악!!”

벌떡 일어난 여자가 화난 곰처럼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하녀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여자가 제 바로 앞에 넘어진 하녀의 팔뚝을 잡아챘다.

“흐핳하핳, 잡았다! 속았지?”

여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일어나 잘 걷는 걸 보니 어디 하나 다친 부분은 없어 보였다.

차가운 눈 속에 파묻혔던 그녀의 양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긴 머리도 엉망이 되었는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빨개진 콧잔등을 구기며 웃는 여자의 얼굴이 붉게 핀 카멜리아 같았다.

‘내가 왜 일어나있지?’

집중해서 창밖을 보던 나일은 제가 일어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조금 열려있던 창은 끝까지 다 열려있었고, 자신은 그 창밖으로 몸을 쭉 뺀 상태였다.

뭐야 언제 일어났어.

당황해 두리번거리던 나일은 머쓱해진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다른 사람들 노는 걸 내가 계속 보고 있을 이유는 없지.

그는 약간만 남겨둔 채 창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어두운 방 안으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들이 침입해 들어왔다.

오가는 소리를 들어보니 술래잡기를 그만두고 다시 패를 나눠 눈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여자들 목소리는 다 비슷비슷해.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조용한 방 안, 차분히 숨을 고르며, 나일은 마구 섞인 웃음소리 중 여자의 웃음소리를 골라냈다.

‘이거다.’

평소 말투나 목소리가 고저 없이 차분한 편인 것에 비해, 유독 웃음소리는 튀는 편이었다.

그는 쉽게 여자의 목소리를 골라낼 수 있었다.

“도망간다! 맞춰 맞춰!”

한번 들리기 시작하자, 굳이 골라내려 하지 않아도 여자의 목소리만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녹색 눈동자가 그려졌고, 그 옆에서 물결치는 금발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코는 어떻게 생겼더라, 볼은… 턱은….

그때 나일은, 자신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여자를 직접 보는 것처럼, 정확히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내가 왜….’

하긴, 요즘 보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저 여자가 다니까.

아침에 눈 떠서 잠들기까지 자신이 머물러 있는 공간에 드나드는 사람은 여자가 유일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그래서 눈에 익었나 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평온했다.

“와 저거 맞는 사람은 내일 못 일어날 것 같은데?”

다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마 누군가 엄청 큰 눈덩이를 들고 있나 보군.’

그래. 이왕 던지는 거 약하게 던지면 재미가 없지, 라고 생각하며 이제 그만 창문을 닫으려던 나일은 다시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럼 아까 전 그것도 눈덩이라는 소린데….’

그는 조금 전 날아와 창문에 부딪힌 그것도 눈덩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눈을 꽉꽉 뭉쳐서 딱딱하게 만들었으면, 눈 뭉친 것 따위가 중력을 이기며 3층까지 날아와 창문에 부딪힌단 말인가.

또한 그것은 눈덩이만 딱딱하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팔 힘이 얼마나 세야 3층까지 날릴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지.

어떤 하녀의 팔 힘이 그렇게 센 거지?

그 하녀가 던진 눈덩이를 여자가 맞았다간, 여자는 몸 어디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지고 말 것이다.

나일은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 하녀를 급히 찾았지만, 죄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탓에 하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한 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빙글빙글 뛰고 있었다.

저런…!

그만하고 들어오지 좀.

나간 지가 언제인데, 봄이 올 때까지 놀 생각인가.

바깥 하늘은 이미 저녁을 지나 밤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소리 지를 수도 없고, 나가서 들쳐 업고 올 수도 없고.

제게 여자를 들어오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그저 하염없이 여자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난 만큼 여자의 양 볼이 더 빨개져 있었고, 웃음도 더 만개해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즐거우면 된 거지 뭐.

여자를 지켜보던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창문을 닫았다.

*

‘허, 너무 놀아버렸네.’

나는 3층으로 올라가며 하녀에게서 건네받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저녁 내내 눈밭에서 굴렀더니 머리가 잔뜩 젖어있었다.

황자의 트라우마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장치만 만들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언니들이랑 노는 게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잠깐만 놀아야지 했는데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흐흐, 만들건 다 만들었으니까.’

어차피 황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려면, 사람이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새벽 말고는 답이 없었다.

‘자나?’

- 똑똑

“자요?”

“아뇨,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자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

“졸려요? 안 졸리죠?”

고개를 슥 들이밀자, 그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눈동자가 똘망똘망한 게 잠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지금 보니까 눈이 되게 초롱초롱하네요.”

“하ㅎ….”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 눈빛을 논하는 나를 향해 그가 싱거운 소리를 냈다.

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가죠.”

“나가자구요?”

“네, 지금요. 밖으로 나가자구요.”

대뜸 나가자고 하니 그가 저런 황당한 얼굴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그를 향해 세탁실에서 훔쳐온 남자 사용인의 옷을 펼쳐 보였다.

“하녀들은 피곤에 쩔어서 곧 곯아떨어질 거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자는 분위기에요. 볼 사람도 없지만 이거 입고 나가면 들킬 일 없어요. 나가요.”

“…알겠어요.”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느냐, 무슨 이유 때문에 나가자는 것이냐 등등 이어지는 질문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군말 없이 옷을 받아들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옷을 건네받은 그를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나왔다. 짜식.

“왜 웃어요?”

“네?”

“혼자 웃길래….”

“아, 아니아니 아무것도.”

손을 휘젓자 나를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그가 뒤돌아 상의를 탈의하기 시작했다.

상의를 들어 올린 탓에 드러난 그의 매끈한 허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그제야 내가 멍청하게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나도 옷 다시 갈아입어야지 참.”

“….”

“밖에 추우니까 잘 입고 나와요! 내가 신호 보낼 때까지 문 열고 나오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오자, 문 너머로 그의 볼멘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뭘로 보고….”

*

황자의 트라우마는 자신의 저주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착실하게 받아온 모든 부당한 대우들은 그의 저주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할 때면 늘 저주로 시작해 저주로 끝이 났다.

그만큼 저주는 그를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 저주에 갉아 먹혀 죽음을 맞이할 거란 사실이었다.

실제로 황자가 자살 시도를 했던 때를 돌아보면, 눈이 다 멀었는데도 치료제를 찾지 못해 죽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저주에 먹혀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이 지겨웠던 그는, 결국 안타까운 시도를 하고 만 거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으니까.

치료제를 찾지 못하면 그의 짧은 생은 곧 끝이 난다.

죽음을 기다리는 삶, 그것 자체가 그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근데 왜 안 나와.’

저택 입구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서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도무지 남자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방 따라 나올 줄 알고 먼저 나왔더니만, 무슨 옷을 천년만년 입고 있네.

입에서 나오는 허연 입김을 쳐다보며 굼벵이 같은 황자를 욕하고 있는데.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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