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삶의 의지라….’
그게 그렇게 쉽게 생길 수가 있는 건가.
무슨 봄에는 없던 모기가 여름이 오면 생기는 것처럼 눈 깜빡할 새에 생겨버렸냐고, 나참.
계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니 겨울의 정원은 역시 좀 허전한 느낌이었다.
발밑으로 겨울나무의 마른 잔가지가 바람에 쓸려 데굴데굴 굴러갔다.
갈 길을 잃은 내 마음 같군.
“에취.”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대충 입고 나온 탓에 기침이 났다.
“피비야.”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오빠 래빌이었다.
그가 양손에 두툼한 외투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
그는 내 어깨에 외투를 둘러주고는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뭘 보고 있길래 기침까지 하면서 앉아 있는 거야?”
나와 남매인 래빌 역시 금발에 싱그러운 연초록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삭막했던 겨울 풍경 안으로 봄의 색깔을 가진 그가 들어오자, 주위가 한결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삶의 의지란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 중이었어.”
“삶의… 의지…?”
내 대답이 기대했던 답변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모양이었다.
두 단어를 느리게 발음한 그의 입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근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어?”
그걸 알아야 그걸 없애버릴 수 있거든.
“혹시 삶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니?”
래빌이 걱정된다는 마음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오빠, 문제가 생기기 전에 고민해야 하는 것들도 세상엔 있거든.”
“그러네. 삶의 의지라….”
짤막하게 대답한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아 겨울 정원을 바라보았다.
사다리에 올라선 정원사들이 바쁘게 나뭇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 듯한 데도 내 곁을 지키는 그의 옆모습이 꽤 듬직해 보였다.
그만큼 내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던 걸까.
맞아, 나 고민 많아.
“오빠. 삶의 의지라는 게 어떻게 하면 생길까?”
“음,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오지 않을까?”
“그러면, 오빠 삶의 의지는 어떻게 없어져?”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 날 버린다거나 큰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그가 질문에 대답하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의 내 표정은 아주 떨떠름 가득한 표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무슨 대답이 몽땅 다 소중한 사람밖에 안 나오냐.
“오빠. 약한 소리 하지 마.”
“응?”
“소중한 사람한테 큰일이 생기면, 없던 삶의 의지라도 만들어서 더 열심히 살 생각을 해야지,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오… 너 다시 보인다??”
오빠가 가져다준 외투를 여미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역시 누군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의 삶의 의지까지 건드리려면 소중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소중한 대상이라면 모를까, 스쳐 지나갈 아무개가 뭐라고 해봤자….
“그럼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나?”
“첫눈에 반하는 일도 있으니까… 피비 너 설마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니? 그런 사람이 생긴 거구나?”
“어.”
무심결에 대답하자 래빌이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 근데 그 사람이 남자를 좋아하는데도 가능할까?”
“남…!”
질문한 것도 나지만 답을 알고 있는 것도 나였다.
내가 무슨 마성의 여자도 아니고 비엘 주인공의 성적 지향성을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인가.
너무 아쉽긴 하지만 손 안 대고 코 풀기는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아쉬움을 달래는데, 오빠는 그런 내 모습에서 안쓰러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생아, 힘든 사랑은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으니 오빠는 안 했으면 좋겠….”
‘뭐?’
“오빠!”
싸늘한 겨울바람을 타고 내 목소리가 정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고마워.”
역시 사람은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도움을 청하고 대화를 해야 돼.
오빠를 보면서 오늘 난 그걸 깨달았어.
나는 래빌을 향해 함박웃음 지었다.
*
저택의 긴 복도를 걸으며 오빠에게서 얻어낸 그 단어를 계속 되뇌었다.
‘트라우마다.’
해답은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를 건드려야 한다.
나는 지난번 황자와 나눴던 대화 중, 내가 했던 말을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요약하자면 죽고 싶어 했었는데 왜 지금은 아니냐, 라고 물어본 것이 다였다.
그의 어두운 면을 건드릴 만한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트라우마를 건드렸어야지.’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지 백날 물어봐야 상처에 자극을 줄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가 걸린 저주가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으면서!
‘흥. 삶의 의지가 생기셨겠다?’
조금 전까지 없었던 삶의 의지인데 그게 과연 얼마나 강하고 굳셀까.
성냥개비에 붙은 불처럼 바람만 살짝 불면 휙 꺼지는 약한 불이겠지.
‘하하하. 그깟 막 피어난 삶의 의지’
내가 꺼주마.
그런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과적으로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을까.
남은 한 가지 문제는 방법이었다.
저번처럼 잔잔하게 대화로 풀어나가는 방법이 제일 쉽고 간단했지만, 쉬운 만큼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좀 더 시각적이면서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아가씨!”
돌아서자 식당 입구에서 하녀가 날 보고 있었다.
“간식 요청하셨죠? 지금 올릴까요?”
“어, 그래 줄래? 고마워. 내 방 입구에 두는 거 알지?”
“네. 알아요!”
밝게 대답하는 하녀를 확인하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식당으로 다시 들어갈 줄 알았던 하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와.”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복도에 나 있는 큰 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밖에 뭐가 있길래.
‘와….’
눈이었다.
그냥 눈이 아니라 정말 새하얗고 커다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너무 예쁘다, 예쁜데… 어쩌면….’
저 눈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한 노을빛 하늘을 배경으로 큰 송이 눈이 내려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반대편 복도 끝에서 나와 같은 표정으로 바깥을 감상 중인 하녀를 돌아보았다.
“나가서 놀고 싶지 않아?”
“네? 저요?”
“응.”
내가 일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태도를 트집 잡는 것이라고 여긴 하녀는 손사래를 쳤다.
“죄, 죄송해요. 눈이 예뻐서 그만. 일하러 가겠습니다.”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세웠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어디가.
“아니야. 거기서!”
“예? 그럼 왜….”
나는 복도를 쭉 걸어가 하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내 의도를 모르는 그녀의 표정엔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다들 지금 뭐 해? 불러와, 놀자.”
“….”
“눈 오잖아. 눈싸움해야지. 오늘 일은 끝났어. 놀자.”
“정말요??”
“응, 진짜래도.”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물음표가 점점 커지고 있는 듯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효과적으로 황자의 트라우마에 소금을 뿌릴 방법을 찾은 것 같았으니까.
*
작은 방에서 혼자 체스를 두던 나일은 손에 쥐었던 체스 말을 체스판 위로 던졌다.
그의 손에서 내던져진 까만색 퀸이 체스판 위를 빙그르르 돌다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모습이 꼭 나 같군.’
방 한구석에 있는 낮은 수납장 위에는 그가 저녁 식사로 비워낸 식기들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여자가 혹시 금방 배고플지 모른다며 잔뜩 두고 간 간식들이 쌓여있었다.
- 심심하면 체스하고 놀아요.
심지어 체스와 각종 놀이도구가 담긴 상자를 한 상자 들고 와, 두고 나가버렸다.
나일은 놀이도구가 빼곡히 담겨 터질 듯한 그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짜증이 나지.’
그녀가 넘칠 만큼 풍족하게 마련해준 음식과 심심하지 말라고 챙겨준 놀이도구를 보고 있으려니까 속에서 은근한 짜증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분명 여자는 자신을 잘 대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동제국의 황자, 나일 리베르라는 것을 여자는 전혀 몰랐다.
그녀에게 자신은 우연히 발견한 어려운 처지의 평민 병사 1일뿐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이 평민 병사를 이렇게까지 돌보고 친절하게 대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목숨을 구해준 것만 해도 절을 할 일인데.
대륙을 다 뒤져도 찾지 못할 만큼의 친절과 배려를 그는 여자에게서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친절한데 짜증이 나냐고.’
친절해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왜 자꾸만 짜증이 일어날까.
여자가 자신을 잘 치료하고 잘 먹이고 잘 재운 덕분에, 상처는 눈부신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3일 후면 서제국 일행이 저택에 당도할 것이고, 그는 그 기간 동안 잘 숨어 있다가 저택을 떠나 동제국으로 향하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문제없이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는데…
나일은 협탁 위에 펼쳐진 체스판을 반으로 접었다.
아니 심심할까 봐 신경이 쓰인 거면 옆에 앉아서 같이 해주든가.
누가 체스를 혼자 둔단 말인가.
그는 찬 바닥에 외로이 누워있던 체스 말을 주워들어 체스 함에 넣었다.
- 그럼 잘 놀고 있어요!
밥과 놀이도구를 챙겨준 여자는 경쾌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귀를 기울이자, 3층 복도를 우다다 신나게 달려 내려가는 여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 아가씨 빨리요!
- 어 알았어! 다들 따듯하게 입었어?
- 당연하죠~
자신의 방으로 식사를 가지고 들어올 때는 무슨 개미처럼 힘없이 걸어오더니… 하.
돌아서서 나가는 발소리는 어찌나 발랄한지.
상처가 회복되기 전에는 수시로 방에 들어와 자신을 닦고 문지르고 신생아처럼 신경 쓰더니.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로는 방에 들어오는 횟수 자체가 적어졌을뿐더러, 들어와도 밥만 주고 나가기 일쑤였다.
‘당연히 그게 맞는 거긴 한데….’
나일은 제 배를 손으로 쓸었다.
자취를 감추었던 복근이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여자가 자신을 돌보며 거침없이 옷을 휙휙 벗기는 통에 플랭크도 꾸준히 했는데.
정작 복근이 돌아왔더니, 여자는 이제 혼자 가능하지 않냐며 물수건만 던져줬다.
옷을 막 휙휙 벗길 때는 이 여자 왜 이렇게 거침없지 생각했는데, 혼자 옷을 벗으려니까 그게 또 짜증이 나는 거다.
‘하, 짜증 난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에 나일은 제 머리를 벅벅 털었다.
그때.
- 퍽
하고 창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