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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3)화 (3/134)

3화

내가 붕대를 들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잘 참았다며 입속에 넣어준 사탕을 굴리면서.

여전히 손에 붕대를 든 채로,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눈이 잘 안 보이죠.”

눈이 잘 안 보인다는 상태를 숨기고 싶었던 걸까. 그가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눈썰미가 좋네요.”

그가 무엇을 볼 때마다 눈을 찌푸린다는 것은 알아챘지만, 그게 눈이 멀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의 허리에 있는 문양을 보지 못했더라면.

“어느 정도로 안 보여요?”

“아주 멀리 있는 건 잘 안 보여요.”

소설 시작지점에서 황자는 완전히 실명한 상태로 나온다.

그러니까 소설이 시작되려면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남았다는 얘기였다.

‘내가 빙의한 소설이 이 소설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내 역할은, 아. 어떻게 이 인물을 기억 못 할 수가 있지.

피폐 비엘 소설 <악몽을 꾸는 이유>. 주로 황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었다.

작가가 주로 황자의 시점으로 썼다는 건 황자한테 감정이입을 해서 읽으란 소리고, 당연하게도 독자들은 소설의 남주인 황자와 공작 로건의 사랑을 응원하며, 그들을 훼방 놓는 악역 피비 셀린을 미워했다.

피비 셀린. 그녀는 저주에 걸린 황자의 유일한 치료제였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하여 황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주위 인물들에게 갖은 패악을 부렸던 악역.

영리한 황자는 피비를 곁에 두고 치료제로 써먹으면서도, 그녀에게 조금의 마음도 내어주질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거겠지. 만약 그런 순간이 소설 속에 있었다면 독자들은 저 수는 뭐냐, 공을 두고 왜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휘둘리는 거냐, 댓글 창을 욕으로 도배했을 테니까.

피비를 포함해, 이놈 저놈 몸을 섞어대는 황자의 유일한 쉴드는 그것이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몸은 섞어도 단 한 번도 공 외에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더 무서운 놈이지만.’

피비가 패악을 부리다 결국엔 자신에 대한 황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마다, 독자들은 황자가 역시 영리하다며, 오로지 공인 로건에게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응원했다.

- 피비 저년의 꼴 좀 봐.

아픔으로 얼룩진 그녀의 참담한 마음을 비웃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나 황자, 그래 나는 황자가 인간 같지도 않았다.

그럼 황자가 악역과 이어지길 바란 거냐고? 그럴 리가. 나 역시 두 남주의 사랑을 응원한 건 마찬가지다.

남주 둘이 이어지는 걸 보려고 비엘 소설 보는 거지. 웬 이물질 여자 악역이랑 이어지는 걸 보려는 게 아니니까.

다만, 황자나 공작 모두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는 점이 내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악역이라는 배역에 걸맞게 못된 짓을 일삼는 그녀였지만, 피비는 황자에게 만큼은 희생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였는데.

황자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동정은 할 줄 알았다. 다른 놈은 몰라도 황자 놈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공작 놈도 마찬가지다.

공이 좋아하는 황자를, 살리고 있는 게 누구였는데? 피비야. 그럼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어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두 놈 다 책 속의 종이 인간이라 그런가. 진짜 사람이라면 피비에게 저럴 순 없다. 그게 내가 중간에 책을 덮기 전 했던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그가 스윽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어왔다. 붕대를 감으려다 말고 가만히 있으니 이상하다 싶었겠지.

내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건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괜찮아요. 붕대를 처음 감아봐서 어떻게 둘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제까지 어려운 소독, 봉합을 다 휙휙 해놓고 붕대 감는 걸 망설이는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감아주세요.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해주셨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감추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상체를 숙여가며 붕대를 감는데 손이 벌벌 떨려왔다.

‘죽겠지.’

다름 아닌 내 눈앞의 남자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다. 소설을 중간까지 읽다가 때려 친 이유는 피비가 죽기 때문이었다.

욕을 하면서도 황자와 공작이 펼치는 그 애증 관계가 참 맛있었기에 참고 읽었는데, 피비가 죽는 장면에 가서는 내 인내심이 결국 바닥났다.

황자가 피비를 직접 죽이는 건 아니었다. 피비를 죽이는 인물은 황자에게 미친놈인 공작이었다. 

치료제기 때문에 살이 닿아야 하는 황자와 피비 때문에 공의 이성은 날아갔고,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피비를 죽인다.

즉, 내 눈앞의 이놈 때문에 내가 죽게 될 것이란 소리다.

‘내 죽음의 원흉.’

그래놓고 황자는 피비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그 시간 공작과 붙어먹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때는 황자의 저주가 다 치료된 시점이었다. 뭐 그러니까 죽인 거다. 참고 참다가.

‘인정머리 없는 놈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속에서 치민 화가 몸을 타고 손까지 내려갔나 보다. 붕대를 잡은 내 손이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상처를 봉합하느라 꽤나 긴장했었는데, 이제야 몸에 나타나나 봐요.”

침대 헤드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그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내 손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며, 붕대를 잡아끌었다.

“이건 제가 감겠습니다.”

그의 손이 붕대를 가져가며 내 손에 닿았던 따듯한 온기도 멀어져 갔다.

눈앞의 그는 더이상 책 속의 종이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진짜 붉은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사람의 손이다.

그리고 내가 피비 셀린이 된 지금, 내 죽음도 더이상 책 속의 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피가 흐르는 혈관이 심장 박동에 맞춰 두근거리고 있었다.

‘죽는다.’

순간 소설에서 읽었던, 피비가 로건에게 죽임을 당하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공작의 집무실. 은발에 차갑게 푸르기만 한 눈동자를 가진 그가 피비의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던 그 장면이.

투명한 은발에 튄 끈적한 핏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공작은 피비를 내려다보며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상상만 했는데도 목 언저리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 나는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남은 거지… 죽지 않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가. 안에서 토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조용히 있을 테니 가서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그가 어느새 붕대를 다 감고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온전치 못한 불편한 몸으로 두른 붕대는, 그 모양이 비뚤고 헐렁했다.

휴식을 취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상처가 욱신거릴 텐데.

지금 막 바늘이 들어갔다 나갔다 한 몸으로 혼자 붕대를 둘렀으니 많이 아팠겠지.

그런 그가 날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와 내가 있는 작은 공간을 울렸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감사하다라. 그에게 감사 포인트를 하나둘 쌓아나가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피비는 악역이라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나는 얌전히 황자 곁에서 치료제 역할만 하면….

‘아니, 살 수 없어.’

공작이 피비를 죽인 건 피비가 나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다.

공작은 피비가 나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는 관심도 없었을걸?

피비가 죽은 건, 공작이 피비를 죽인 건… 피비가 황자 옆에 있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황자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지.’

황자에게 선행 포인트를 많이 쌓아 봤자 필요 없고, 지금은 치료제의 문양이 내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곧 나타날 것이다.

그럼 원치 않아도 강제로 황자 옆에 있어야겠지. 공작이 황자를 사랑하지 않게 만들 수도 없잖아?

어….

어…….

그런데 황자가 없으면……?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복부의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그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힘겹게 내게 말을 건네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표정을 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진심이 담긴 선하고 예쁜 미소였다.

‘당신이 없으면 공작이 날 질투해 죽일 일도 없겠지.’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당신이 지금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한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

*

‘아, 잠 안 온다.’

그렇다,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벽에 나 있는 작은 문을 바라보았다.

‘하녀가 이곳에 지낼 때는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전생에서도 남자와 밖에서나 만나봤지, 내 방에, 그것도 시꺼먼 밤에 남자가 있던 적은 없었으니까.

‘사내랑 한 방에 있는 게 되게 긴장되는 일이구나.’

정확히 따지자면 한 방은 아니었지만, 저 작은 방문은 진짜 얇아빠진 문이었다.

침대 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다 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다가 방구 나오면 어떡하지.

나는 배를 살살 문질렀다. 얌전히 있을 수 있지? 소리 내면 군고구마는 영원히 못 먹을 줄 알아라. 배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지, 잠이 안 오는 게 어디 그것 때문인가. 지금 방구 걱정이나 할 때냐고. 죽으면 영원히 방귀를 못 뀌게 되는데!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죽여야 할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확실한, 내가 살 방법이었다. 아예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것.

나는 원인이 잠들어 있을 작은 방의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죽인다, 죽인다. 내 생각은 계속 거기에 멈춰있었다. 그다음으로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살면서 소리 나지 않게 방귀 뀌는 법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있어도, 사람을 죽여야 하나, 어떤 방법으로 죽여야 하나,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떠오르는 것도 없고 머릿속이 새까맸다. 그래 죽일 거라고 결정했다고 쳐, 문제는.

‘사람을 죽인다니, 어떻게? 어떻게 죽일 건데?’

꽃을 죽이는 방법은 꺾어버리면 그만이고, 해충을 죽이려면 살충제를 뿌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이잖아.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지금처럼 세상모르고 잘 때, 가서 목을 조르면 어떨까.

나는 침대에 누워 팔을 앞으로 뻗었다. 정말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손 모양을 둥글게 말았다. 이렇게 목을 조르면.

‘꺼져가는 생명체의 느낌이 이 손에 남아 지워지지 않겠지.’

손안에서 버둥거리는 사람의 목을 계속 조를 수 있어? 너 그렇게 할 수 있어 진짜?

‘못해.’

못해.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전신으로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이 방법은 안 되겠다. 너무 끔찍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팔을 내린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몰라, 생각하기 힘들어, 일단 자자 오늘은.’

“휴우….”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을 때였다.

“안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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