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3화
좀 이상했다. 태자는 원래 그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냉담하게 대했다. 왜 유독 전 선생을 각별히 대할까? 설마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는 건 아니겠지? 곤청락은 태자를 경계하다가 자연스럽게 백천범 옆에 앉았다. 태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태자는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방금 전 보였던 냉혹함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그는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며 절대 상대를 압박하지 않았다.
앉아서도 한가로이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 백천범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고, 남원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자는 매우 흥미로워하며 남원의 풍토에 관해 물었다. 백천범은 그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곤청락은 가장자리에 앉아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전범은 자신의 귀한 손님인데 태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 손님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곤청락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과연 태자는 이런 말을 꺼냈다.
“역시 전 선생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서 그런지 견문이 넓으시군. 그 과정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이 더 많이 있을 것 같네만, 아쉽게도 오늘은 선생께 일일이 말씀을 청할 수 없을 듯하네. 유감스럽게도 본궁은 깊은 궁중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선생처럼 자유롭지 못하다네. 선생께서 동궁에 며칠 머물면서…….”
곤청락이 얼른 태자의 말을 가로챘다.
“태자 전하, 전 선생은 구속되는 걸 싫어해 화양부에서 지내는 것도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동궁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백천범도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그녀는 몽달의 권세가에게 접근해서 소식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지, 자신을 가두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운 황궁 같은 곳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황궁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하물며 몽달의 황궁을 들어가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태자의 안색이 변했다.
“폐하께서 오셨네.”
곤청락은 반색하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전 선생, 내가 황제 폐하께 자네를 소개하겠네.”
태자가 말했다.
“이번에는 폐하를 뵙지 않는 게 좋겠네. 폐하께서 낯선 사람이 임소에 있는 것을 보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네.”
말을 마친 태자는 융단이 드리워진 입구로 다가가 문발을 젖혔다.
“전 선생, 어서 이리로 나가시게.”
그곳은 아랫사람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이었다. 백천범은 잠시 망설였다. 한아타 문 앞에 깔아 놓은 붉은 담요 위에 이미 한 무리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금 고민했지만, 역시 태자의 의견을 따라 작은 문으로 피했다.
작은 문밖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울타리 안과 밖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큰 활을 들고 어깨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호위대였고, 한아타 주변 울타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태자가 직접 백천범을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당연히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곤청락은 백천범을 따라나서다가 결국 남아서 황제를 맞이하기로 했다.
백천범은 먼발치에서 한아타로 들어가는 황제를 몰래 바라봤다. 몽달 황제는 비록 백발이었지만, 허리는 굽지 않았고 등도 반듯해서 아주 위엄 있어 보였다. 시선을 거둘 때, 그녀는 태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백천범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뵐 수 없으니 멀리서라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자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웃으며 멀리서 무리 지어 몰려오는 왕공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지금은 안 만나는 게 더 좋네.”
백천범은 태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사실 몽달 황제를 만나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소식을 좀 더 알아보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태자가 곁에 있는데도 그녀는 어찌 소식을 캐내야 할지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관람석에 도착했다. 태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가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이니, 선생은 여기 이 자리에 앉으시게. 대회가 끝나면 내가 데리러 오겠네.”
말을 마친 태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발길을 돌렸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영십삼에게 물었다.
“나는 그와 친하지도 않은데, 왜 나를 데리러 온다는 거죠?”
영십삼은 멀어지는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안심하십시오. 소인이 선생을 데려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 * *
양 잡기 대회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로, 입장 명첩이 있어야 직접 관전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명첩을 확인하면 그 위에 붉은색 도장을 찍어 주었다. 무기는 하나도 소지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기면 실격이었다.
관람석에는 긴 의자가 열을 맞춰 놓여 있었다. 가운데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네모난 구역마다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계급이 높고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가운데 앉았고, 멀어질수록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앉았다.
왕공 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을 했다. 높게는 조정 대신에서 낮게는 부유한 거상까지… 성안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왔다. 신분이 조금 모자란 사람들은 틈을 비집고서라도 어떻게든 입장 명첩을 하나 얻으려고 애썼다.
입장만 하면 몸값이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뿐이라 다들 그걸 큰 영광이라고 여겼다. 관람석이 모두 채워질 무렵,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다. 그건 또 다른 진풍경이었다.
입장 명첩을 받지 못해도 주눅 들 필요 없었다. 관람대 외곽에 울타리가 또 하나 쳐져 있어 백성들이 밖에서 마음에 드는 선수들을 응원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너무 늦게 줄을 서면 앞사람 뒤통수밖에 보지 못한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구경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울타리를 따라 쭉 이어진 인간의 장막은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묵용감이 입장할 때, 맞은편 한아타 입구에 또 다른 천막을 하나 치고 있었다. 융단이 드리워진 문이 너무 작아서 관람을 제대로 할 수 없어 황제의 흥취에 지장을 주었다. 시종들은 부랴부랴 새로운 장막을 쳤다. 황제가 장막 아래에 편히 앉아 관전하니 맞은편 사람들은 황제의 진안真容을 볼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묵용감과 영십일 그리고 영십구 모두 몽달인이 분장을 했고, 명첩을 검사할 때 그들의 신분이 상인임을 확인했다. 장사꾼은 신분이 높지 않아 한쪽 구석에 있는 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그의 양쪽에 앉아서 사방을 경계했다.
묵용감은 맞은편에 있는 한아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융단이 드리워진 입구는 굳게 닫혀서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십 대이던 시절. 북쪽 국경의 군영에서 훈련할 때, 몽달 황제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말에 올라타 있었고, 몽달 황제는 성문에 서 있어 서로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매우 크고 건장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삼십여 년이 흘렀고, 몽달 황제의 모습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흐려져 있었다.
몇몇 가무 공연을 시작으로 양 잡기 대회의 막이 올랐다. 우렁찬 장조로 이루어진 곡조는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며 많은 이들이 따라서 흥얼거렸다. 무희가 등장하자마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무희의 아리따운 용모와 아름다운 치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치맛자락이 날듯이 휘날리니 꽃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했다. 손에 든 오색 허리띠는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높이 치솟은 허리띠는 뱀의 공격 같기도 하고, 날아가는 단단한 밧줄 같기도 했다. 또는 허공에 걸린 무지개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백천범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모든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원 사람들만 춤을 잘 추는 줄 알았건만. 몽달 사람들의 춤도 훌륭했다! 남원 사람들의 춤은 날렵하고 수려한 것에 비해 몽달 사람들의 춤은 웅장함에 기개가 느껴져서 절로 감동을 일으켰다.
가무 후에는 버흐(Бѳх, 몽골의 씨름) 공연이 펼쳐졌다. 듣자 하니, 동월의 포고도 버흐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건장한 사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을 지르더니, 상대의 허리띠를 잡고 상대 선수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하지만 정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동작을 춤에 융합한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리 격렬하지는 않으면서도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아직 어린 종실 자제들이 등장했다. 어린 아이들이 조끼를 입고 배를 드러낸 채 사냥터 한가운데에 서서 뺨을 불룩 내밀고 상대방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서로 때리기도 전에 구경꾼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황제도 흥취가 돋우면 금빛 장막 아래로 가서 구경했다. 폐하가 관전하는 것을 보니, 아이들은 더욱더 방심하지 않고 노련한 동작을 선보였다. 어느 정도 큰 아이들이기에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막상 서로 맞부딪히면 좋든 나쁘든 금방 우열을 가릴 수 있었다.
어떤 아이 하나는 패배한 뒤, 이를 악물고 일어나는데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황제 앞에서 창피를 당해 부끄러워하면서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는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절하더니 뭐라고 말을 전했다.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 판 더 겨룰 기회를 주었다.
상대는 저보다 훨씬 더 커서 이길 가망이 없었지만, 그 아이는 용감했다. 상대에게 몸을 눌렸을 때도 목을 꼿꼿이 쳐들고 어깨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버텼다. 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얼굴을 보며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결국 그 아이는 기력이 떨어져 쓰러졌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그 아이가 묵묵히 뒤로 걸어가려 할 때, 황제는 그 아이를 불렀다. 황제는 직접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며 활짝 웃었다.
“괜찮다. 시합에서 지는 건 괜찮단다. 하지만 너는 기개에서는 지지 않았다. 역시 우리 곤씨 가문의 좋은 파도巴圖다!”
몽달에서 파도는 용사라는 뜻이었다. 백천범은 저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묵용청양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녀석도 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영안과 비교했고 사내아이보다 더 제멋대로 굴기를 좋아했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를 손안의 명주처럼 여겨서 성격을 더 망쳐 놓았다. 그녀는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앞에 있을 때는 청양이 떠드는 게 시끄럽고 싫었지만, 막상 곁에 없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녀가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어느 집 자제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정의 관리였다. 그들은 방금 태자가 직접 데리고 온 손님임을 알았기에 백천범을 홀대하지 않았다.
“저분은 폐하의 장황손長皇孫으로 태자 전하의 장남이오. 올해 네 살이 채 안 되었소.”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태자의 아들로 장차 대통을 이어받아야 할 아이였다. 어쩐지 남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