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24화 (24/161)

24화.

좀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하던 양해는 정엽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지만 정엽은 태감들에게 둘러싸여 옷을 갈아입느라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사옵니다.”

“흠, 그래?”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인가. 자꾸만 예상에서 벗어나는 연주의 행동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정엽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전에서는?”

“어전에서도 들려온 바가 없사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연주는 분명 그의 말대로 황제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사흘. 벌써 황제가 연주를 풀어 주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환복을 마친 정엽은 문득 갑갑하게 느껴지는 목깃을 느슨히 헤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정엽과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그에 대해 남들보다 잘 아는 양해가 주변을 물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이제 정식으로 친왕이 되셨으니 왕비마마께서 영항에서 나오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바로 사흘 전에 상황이 일단락될 수 있도록 영항까지 찾아가 도움을 주었건만. 여기서 뭘 더 하라고? 정엽이 삐딱한 시선으로 양해를 노려보자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소인이 알아보니 왕비마마께서 영항에 끌려가신 뒤 지금까지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노역에 시달리신다고 하옵니다.”

“노역?”

“예, 아무래도 영항령의 횡포가 심한 것 같아 황후궁의 허 상궁과 함께 영항에 몰래 음식을 넣어 드렸습니다만, 왕비께서 아예 음식을 거부하신다고 하니 이제 어찌해야 할지…….”

“그게 무슨 말이냐.”

뜻밖의 이야기에 정엽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변했다. 연주가 영항에 갇힌 지도 벌써 여러 날. 그 험한 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노역을 감당하는 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다급한 나머지 전하께서 시키시지 않은 일을 했사옵니다.”

정엽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양해가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왕비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양해로서도 더는 진상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소인은 그저 한때나마 이 연왕부의 안주인이셨던 분께서 모진 고초를 겪으신다고 하니 참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게다가 지금 영항을 관리하는 영항령이란 자는…….”

이를 어쩌나. 이것까지 말씀 올리면 난리가 날 텐데. 뒷감당이 두려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양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그자는 예부터 사내고 여인이고 가리지 않고 욕보이는 터라 그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그런 미치광이 소굴에서 왕비마마께서 어찌 무사하실 수 있겠사옵니까!”

채연주는 평해왕의 적녀이자 한때는 연왕비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감히 누가 욕보일 수 있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백안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대놓고 사람을 욕보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성격이 물러 영항 상궁 따위가 무례하게 굴어도 어쩌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

연주와 영항에서 만난 날 밤, 연주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뒤늦게 깨달은 정엽이 소매 속으로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하, 부디 왕비마마를 구해 주시옵소서. 황후마마께서도 백방으로 애를 쓰고 계시지만 후궁에선 곽 귀비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 지 오래라 어려움이 많으신 줄 아옵니다.”

여기나 저기나 전부 왜 이렇게 난리인가.

양해의 읍소에 심란해진 정엽은 무슨 수로 연주를 영항에서 꺼낼지 고민하다가 우선은 뭐라도 먹이는 게 우선이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주방으로 가 왕비가 즐겨 먹던 것들을 준비해라. 그리고…….”

“전하!”

정엽이 지금 당장 영항으로 가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부관이 다급히 처소 안으로 뛰어 들어와 무릎을 굽혔다. 잔뜩 성이 난 정엽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헌왕 전하께서 귀공자들을 이끌고 연왕부로 찾아오셨습니다!”

헌왕이라고?

정엽은 평소 형제들과 우애를 쌓을 틈도 없이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제 와 황후를 위협하는 곽 귀비의 소생인 헌왕과 마주 앉을 이유가 없었다. 뭣보다 사람이 죽어 가는 마당에 한가하게 손님맞이를 할 정신이 어디 있나.

“돌려보내라.”

“하오나 전하, 헌왕은 황실에서 몇 안 되는 왕작을 받은 황자이고, 헌왕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귀족 역시 많습니다. 신중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본 왕이 고작 무희가 낳은 서자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냐?”

“오늘은 전하께서 친왕 책봉을 받으신 아주 좋은 날입니다. 이런 날 축하객을 문전 박대 했다는 구설에 휘말리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연이은 설득에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정엽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로군. 어미란 자는 황제를 홀려서 귀비 자리까지 오르더니 아들은 메뚜기처럼 사람을 몰고 다닌다고?’

한숨을 푹푹 쉬며 못마땅한 티를 내는 정엽 때문에 부관은 시종 불안한 얼굴로 손끝을 매만졌다.

“전하, 헌왕의 모친인 곽 씨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황제 폐하의 유일무이한 귀비이자 총비이고, 헌왕 역시 폐하의 아드님입니다.”

“…….”

“뭣보다 수도 내 헌왕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요. 동행한 귀공자들도 모두 명문세가의 자제들이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귀찮게 됐군.”

헌왕 따위가 다 뭔가. 메뚜기도 한철이듯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 역시 잠시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무리 저들이 자신을 물어뜯어도 성국부의 위세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소인배에 불과한 것을.

“전하.”

“시끄럽다.”

그러나 부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생의 절반을 전장에서 보내다 겨우 수도로 돌아온 주군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시 북방으로 내쫓기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황제 폐하를 생각하시옵소서. 형제간의 우애 역시 효의 중요한 덕목 아니옵니까.”

부관의 의도가 무엇이든 정엽은 ‘효’라는 단어에서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의 적장자라는 자긍심이 강한 정엽이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난 탓에 친이모인 황후 역시 친모 못지않게 속앓이해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았으니 밖에 나가서 헌왕이나 데려와라. 그리고 양해 너는…….”

“예, 전하.”

“청방(廳房)으로 주안상을 들여라.”

“하오면 전하께서 준비하라 분부하신 음식은 어찌…….”

“남이 억지로 굶기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굶는 건 다 살 만하니 그런 것이다. 영항에는 내일 가도 늦지 않아.”

만사 귀찮다는 듯 대꾸한 정엽은 부관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러 청방으로 나섰다. 홀로 방에 남아 정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해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이 끊어지는 건 한순간인데…….”

그래도 어쩌나. 상전이 하라면 하는 것이고, 말라면 마는 것이지. 종종걸음 쳐 주방으로 향하는 양해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 * *

잠시 후, 연왕부 청방.

“형님 전하의 친왕 책봉을 경하드리옵니다.”

헌왕 소기가 공수하듯 술잔을 감싸 쥐고 상석에 앉은 정엽을 향해 하례 인사를 올렸다. 헌왕의 선창에 그와 함께 온 귀공자 셋 또한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연친왕 전하, 감축드리옵니다.”

“고맙네.”

마음에도 없는 하례를 덤덤하게 받은 정엽이 술잔을 비웠다. 정엽이 술잔을 비우자 헌왕과 공자들이 차례로 술을 마신 뒤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안주를 맛보거나, 정갈하게 단장된 청방을 둘러보며 제각각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소문대로 연왕부 요리사의 솜씨가 일품이옵니다. 염소 고기는 잘못 요리하면 질기고 누린내가 심한 법인데, 잡내 없이 부드럽고 고소하군요. 지금껏 제가 먹어 본 염소 요리 중 최고입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미식가로 소문난 백 공자였다.

“청방의 실내 장식 역시 독특하고 훌륭하옵니다. 어떤 세도가에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에요.”

음식이 옷에 튀지는 않을까, 연신 소맷부리를 단속하며 정신 사납게 굴던 진 공자가 한마디 보탰다.

“아, 요즘 수도에서는 설경이 담긴 그림을 걸고 알록달록한 오채자기(五彩瓷器)나 보석으로 만든 분재를 들이는 게 유행이라죠?”

“맞습니다. 한데 연왕부에는 여름 정취가 묻어나는 파초도에, 희고 붉은 유리홍 자기, 또 사철 푸른 향나무 분재가 어우러져 있다니, 아주 신선하고 우아합니다. 연친왕 전하께서는 해광성과 연이 깊으신 만큼 심미안도 남다르신 듯하옵니다.”

진 공자와 백 공자는 서로 경쟁하듯 아부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정엽은 그들의 말을 단순히 아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조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해광성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선상 무역이 활발하고 외국 문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는 곳이었다. 그 덕에 해광성은 황성이 있는 수도 조양과 더불어 생활 양식과 문화가 독특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광성은 과거 연왕비였던 연주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러니 정엽이 해광성과 연이 깊다는 진 공자의 말은 자칫 이혼한 정엽에 대한 조롱이 될 수도 있었다.

“진 공자의 심미안이 남다르군. 하나 진 공자는 아무래도 때를 잘못 맞춘 듯싶네.”

“예? 그게 무슨…….”

“아쉽지만 이 청방을 꾸민 건 본 왕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공자들을 무안하게 만든 정엽이 진 공자를 빤히 보았다. 진 공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하지만 정작 공자들을 데려온 헌왕은 허허실실하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들 어찌 이리 생각이 짧은가? 우리 중에 연친왕 전하께서 그간 변방을 안정시키느라 바쁘셨다는 걸 모르는 이가 있는가?”

“뭐, 그야…….”

“식도락이니 심미안이니 그런 건 전쟁터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일세. 게다가 백 공자, 평소 염소 고기를 제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웬 거짓말이 오늘따라 청산유수인지 원!”

이건 또 무슨 헛짓거리인지.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오가는 대화만 듣고 있던 상 공자가 백 공자와 진 공자를 나무랐다.

“거 자네 말이 심하군.”

“내 말 마저 듣게. 연친왕 전하께서 평해왕의 여식과 절연하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계집의 흔적을 남겨 두셨겠는가?”

입 밖으로 나오면 다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좀 전까지 연주를 구명하는 일로 머리가 아팠던 터. 연주를 향한 상 공자의 불손한 말씨가 정엽의 심기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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