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러나 정결한 죽음 따위 없는 영항에서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우물가에 다다른 연주는 곧장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길어 빨래를 시작했다. 산처럼 쌓인 빨랫감은 해가 뜨기 전에 일을 시작해도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매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시간 감각이 둔해졌다. 이날도 삼경이 넘어 숙소로 돌아온 연주가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하암, 이 시간에 누구냐?”
하품하며 나오던 영항의 상궁이 연주를 발견하곤 안에서 낡은 담요를 하나 가지고 나와 던졌다.
“매일 이 시간에 부스럭거리며 숙소에 들어오는 게 네년이었구나? 너 때문에 잠을 설쳐서 살 수가 없다. 앞으로는 여기로 오지 말고 곡식 창고에서 자거라. 쥐새끼들이 또 곡식을 축내지 않게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네.”
연주는 순순히 대답하며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챙겨 돌아섰다. 밤새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느니, 낡고 허름한 곳에서라도 홀로 마음 편히 잠을 청하는 게 나았다.
연주는 익숙하게 노역장 근처의 창고로 가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
어디선가 낯익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환청 같은 목소리를 듣고 녹슨 손잡이를 내려놓은 연주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창고 귀서까래 밑에 고인 어둠을 응시하자, 그 속에 몸을 숨기듯 서 있던 정엽이 달빛이 비치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
차라리 저승사자면 좋을 것을.
시커멓고 거대한 것이 다가오기에 무심코 북망산으로 가는 소원이 이루어졌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연주가 고개를 떨궜다.
반면 저를 쳐다보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연주의 모습에 당황한 정엽은 무안함을 감추려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부황의 면전에서 대들던 결기는 어디 가고, 고작 상궁 나부랭이에겐 왜 아무 말도 못 해?”
“군주 지위를 박탈당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영항 상궁에게 대들겠어요?”
저 사람은 왜 여기까지 쫓아와 어깃장을 놓는 건지. 연주가 지친 얼굴로 되물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이 고스란히 비치곤 하던 맑은 눈동자는 고이다 못해 썩어 가는 웅덩이처럼 탁하기만 했다.
“꼭 패잔병처럼 구는군.”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처럼 맥없이 구는 연주의 태도가 거슬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정엽이 날 선 목소리로 응수했다.
“어디 있든 너는 평해왕의 하나뿐인 딸이야. 지위를 잃었다고 혈통까지 바뀌는 건 아니잖아?”
“동정은 됐으니 용건이나 말해요.”
정엽이 이 늦은 시간에, 흔한 자수 하나 없는 새카만 미복 차림으로 나타난 걸 보면 황제나 황후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따로 알려 줄 일이 있어 찾아온 걸 테고, 연주가 당장 알아야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부모 형제에 관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연주는 저 하나 때문에 걱정으로 마음 졸이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에 절로 목이 메었다.
하지만 연주의 생각과 달리, 정엽이 그녀에게 전하는 얘기는 실로 엉뚱한 것이었다.
“부황께 2년 전 죽은 아이가 사내아이였다고 고했어. 그러니 혹 부황께서 다시 예전 일을 물으시거든 아들을 낳았다고 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한 박자 늦게 정엽의 말을 이해한 연주의 가슴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물론 가장 선명한 감정을 꼽으라면 단연 실망과 분노였다.
감정이 좀 더 명확해지자 미려하게 굽어진 연주의 눈썹과, 생기 없이 말라붙은 입술이 떨리며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만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속 들불은 더 태울 마음이 없어 금세 잿더미 같은 체념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이를 잃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애끓는 나날을 보내 가슴이 거멓게 죽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오랑캐에게 악마의 화신으로 불리는 사람에게 나는 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이쯤 되면 연왕 소정엽이 문제가 아니라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문제였다.
“아직도 부황의 눈 밖에 나는 일이 두려운 모양이군요. 하기야 당신은 황자니까.”
탄식 끝에 다시 본 정엽의 옷차림은 그저 영항에서 자신을 만나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얕은꾀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혹여나 제가 황제 앞에서 딸을 낳았다느니, 반음양을 낳았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터였다.
‘그래, 그게 황가에서 태어난 소정엽이 살길이지. 생사가 달렸다는데 누군들 손가락질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황제의 적장자로 태어나 흉물 취급을 받는 정엽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행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는 새삼 그의 무정함에 속이 쓰렸다.
가시처럼 목에 걸린 서러움을 토하게 되지는 않을까. 가만히 어금니를 사리문 연주가 정엽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연주의 침묵을 일종의 저항으로 오해한 정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린애를 어르듯 잔소리를 이어 갔다.
“더는 잃을 게 없는 나조차 감히 꺼내지 못하는 얘기를 뭣 하려 했어.”
“…….”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네 아버지 평해왕이 폐하께 문안 상소를 올렸으니까.”
문안 상소라고?
내내 정엽을 외면하던 연주가 듣지 못할 얘길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구기며 정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가 난 듯한 연주의 반응을 지켜보던 정엽은 그녀가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네 막냇동생이 폐하께 바칠 선물을 가지고 수도로 올라온다고 하더군. 이쯤 되면 폐하의 노여움도 사그라들었을 거야. 그러니 기회가 되면 네가 직접 부황께 용서를 구하도록 해.”
황제에게 머릴 조아리면, 그다음엔?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재혼해 또 겉만 번지르르한 대저택 어딘가에 갇혀 살면 되는 건가?
연주는 지금까지 홀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왔다. 그게 남들이 보기에 천벌이면 어떻고 또 상이면 어떤가. 그저 먼저 간 아이가 보기에 흡족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더는 이 처절한 인내를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실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하아…….”
그간 영항에서 겪은 치욕을 차례차례 되새겨 보던 연주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불현듯 세상이 너를 잊을 즈음 주지육림을 만들어 주겠다던 영항령의 음침한 얼굴이 떠올랐다.
더는 물러날 자리도, 버틸 힘도 없었다.
고통은 삶의 증거. 오늘의 치욕도, 내일의 치욕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저승으로 도망이라도 치는 게 나았다.
‘먼저 간 아이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하기야, 나의 죽음은 곧 우리의 만남이니까. 그렇담 내 아이는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걸 깨닫고 나자 물 끓듯 소란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간 저를 위해 애써 준 모두를 위해서라도 못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은 선택지가 정말 이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죽음.
“채연주.”
연주가 끓어올랐다가, 차분해졌다가, 희망을 버리며 완전히 단념하는 사이,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정엽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전장을 전전하는 동안 정엽은 출정하는 병사들에게서 몇 번이고 이런 표정을 봤다. 물러설 데도 없이 극한으로 내몰린 자들의 표정. 그건 생사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들의 절규였다.
‘위험하다.’
연주가 정확히 뭘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너…….”
정엽은 다급히 연주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엽의 손끝이 채 닿기도 전에 연주의 차분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사흘 후가 친왕 책봉식이라고 들었어요. 미리 축하해요.”
“……뭐?”
“하지만 곽 귀비는 지금도 당신의 친왕 책봉을 망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말고 돌아가요.”
말을 마친 연주는 곧장 창고로 들어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정엽이 열린 문을 한 손으로 눌러 닫으며 앞을 막아섰다.
“왜죠? 불만이 많아 보이네요.”
연주는 물끄러미 정엽을 올려다보았다. 정엽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래요. 죽은 아이는 아들이었다고 할게요.”
그 말을 황제 앞에서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뜻대로 해 줄 테니 이만 돌아가요.”
정엽은 담담한 연주의 확답에 문을 짓누른 손에서 마지못해 힘을 풀었다. 이제 연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엽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달그락.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꼭 둘의 단절을 의미하는 듯해, 정엽은 말없이 오랫동안 문 앞을 지키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지만 이쯤 해 두면 그나 연주나 더는 죽은 아이 때문에 고통받을 일은 없을 터였다.
* * *
사흘 후, 드디어 책봉 의식을 마치고 친왕이 된 정엽이 왕부로 돌아와 흑표 가죽이 깔린 안락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온종일 황궁에서 무수한 축하객을 상대하다 보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와 이대로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하, 양해이옵니다.”
“들어와라.”
문밖에서 기웃거리며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던 양해가 몇 명의 태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친왕이 되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선황후마마께서도 하늘에서 아주 기뻐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돌아가신 분 얘기는 됐다.”
“예, 소인이 경망스러웠습니다. 평복으로 갈아입혀 드리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연와탕이오니 이따가 한술 뜨시지요.”
뻣뻣한 목을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던 정엽이 알았다는 듯 손끝을 까딱였다. 태감들은 일사불란하게 그의 예복을 벗기고 평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음식이 담긴 그릇이 정엽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게 뭐라고?”
“연와탕이옵니다. 아주 좋은 보양식이오니 드시고 푹 쉬시옵소서.”
연와탕이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와탕을 바라보던 정엽은 문득 혼인 후 고향 해광성을 떠나 수도에 온 연주가 다른 음식은 가려도 연와탕만은 말끔히 비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영항에서 온 소식은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