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숨이 꽉 막혔다. 자신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강간 살해 제발 돈만 뺏어가는 정도였으면 좋겠지만 무기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가볍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공포로 사색이 된 그녀가 빠르게 골목 안쪽을 훑어 도와줄 존재를 찾았지만,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은 누군가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도와줘. 제발, 누가 좀. 누가 나 좀 살려 줘.
소리조차 되지 않는 비명이 잔뜩 오그라든 목구멍에 막혀 사그라졌다. 축축한 남자의 숨소리가 무서웠다. 남자는 해연의 몸을 골목에서 갈라진 샛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꿉꿉한 담배 냄새가 나는 남자의 팔에 몸이 결박된 해연의 시선이 어두운 가로등 빛 저편 어둠 속에서 어떤 두 개의 작은 빛과 마주친 듯했다.
하지만 찰나였다. 털이 수북한 두꺼운 손에 입이 막힌 채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다. 사방이 담처럼 보였고 등 뒤에 바짝 눌려 있는 칼의 느낌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길이 좁고 깊은 탓에 도움을 구할 외부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발에 힘을 주었지만, 등에 닿은 칼이 그 뾰족한 날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더 바짝 붙어 어쩔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우산대를 틀어쥐었다. 이걸로 공격할 수 있을까. 내가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까 섣불리 공격하다가 오히려 바로 칼에 찔리는 것은 아닐까 해연의 머리가 혼란스럽게 돌아갈 때였다.
쇳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해연의 머리를 내리쳤다. 우산대를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바닥에 쓰러지는 해연을 따라 우산 역시 빗물로 가득한 바닥에 축축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 * *
춥다. 정신이 들어 보니 입고 있는 옷이 없었다. 속옷조차 없는 알몸으로 입과 손, 발에 무언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영화나 뉴스로만 들었던 일이었다. 이런 범죄의 희생자가 자신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다. 아니, 막연히 생각은 해 보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살 수 있을까.
살고 싶다는 본능이 물은 질문에 저도 모르게 ‘아니.’라는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그녀가 갇힌 작고 더러운 방엔 검붉은 피가 튄 흔적이 가득했다. 피가 썩어 나오는 비릿한 냄새가 죽음의 기운을 동반했다. 음습하고 축축한 습기마저 돌아 더 불길했다. 죽는구나. 비통한 예고가 해연의 온몸을 짓눌렀다. 이게 현실일까.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숨이 헐떡이며 토해졌다.
공포로 이지를 잊은 눈이 맞은편에 있는 철문을 멍하게 바라봤다. 철컥, 녹슨 쇠가 움직이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를 이곳에 납치해 온 범인이 해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어”
듣기 거북할 정도로 목을 긁으며 나오는 낮은 목소리가 상황과 맞지 않은 다정함을 가장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별것도 아니라는 듯한 일상적인 말투가 이런 일이 익숙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남자는 흡사 짐승처럼 온몸에 털이 수북했다. 바지만 입고 있는 남자의 드러난 몸엔 사람의 피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야생의 짐승 같은 몸이었다. 톱과 길고 큰 칼을 들고 있는 손엔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나 있었다. 괴물. 그래, 앞에 서서 저를 위협하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괴물 같았다. 혹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현실에 저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이 모든 상황이 악몽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공기와, 쿱쿱한 피비린내, 제 몸을 억압한 줄과 테잎의 감각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꿈이라는 희망조차 꾸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멍하니 괴물을 보고 있을 때, 성큼 다가온 괴물이 해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기겁한 해연이 뒤로 물러서려고 몸을 꿈틀거렸지만, 꽉 묶은 줄은 조금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았다. 괴물의 정체가 뭔지, 이게 꿈이 아닌지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은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크게 벌어진 괴물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이라도 놓인 것처럼. 무기를 든 손이 들썩들썩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시멘트 바닥에 날붙이가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걸로 죽이려는 건가. 살아날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연의 눈에서 희망이 죽어 갔다.
“다른 놈들은 야만인처럼 뜯어먹는데 난 식사예절이 좋아서 나이프로 잘라 먹거든.”
“…….”
“너처럼 예쁜 애에게는 더 매너를 갖춰야지.”
역시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겠지 괴물이 히죽 웃었다. 길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빨이 섬뜩했다.
날카로운 이빨을 타고 걸쭉한 침이 해연의 가슴으로 뚝뚝 떨어졌다. 단순히 털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선 육식동물의 이빨이었다. 커다랗고 더러운 손이 몸에 닿았다. 볼을 지나 목, 가슴, 배와 허벅지까지 천천히 쓸고 내려가는 손길이 소름 끼쳤다.
괴물은 창백하게 질린 해연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허벅지를 쓸던 손을 들어 해연의 뺨을 내리쳤다.
“으읍!”
반대쪽으로 돌아간 머리가 징― 하고 울렸다. 사람의 손에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쇠몽둥이로 맞은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시야가 검어졌다가 하얗게 일그러졌다. 뇌가 곤죽이 된 것처럼 어지러웠다. 테이프로 막힌 입안은 울컥 올라온 피와 위액으로 가득 찼다.
한 번 더 뺨을 내리치려던 괴물이 해연의 피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거렸다.
“인간 피가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리 없는데…….”
자신이 낸 상처로 피범벅이 된 해연을 괴물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제 손에 묻은 붉은 피를 혀로 핥았다. 혀에 닿은 피가 입안을 가득 메우고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괴물의 눈이 몽롱하게 흐려졌다. 뭐지 이건 이런 건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향긋하고 맛있는 건.
여자의 피가 아주 빠른 속도로 전신에 퍼졌다. 온몸이 녹아 흐르는 것 같다. 괴물이 헤벌쭉 웃었다.
내가 오늘 아주 귀한 것을 잡아 왔구나.
괴물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맛있는 거. 맛있는 거. 아주 귀하고 좋은 거다. 괴물이 희열과 기묘한 쾌락에 취해 즐겁게 웃었다.
“으으으!”
머리 가죽이 뽑히는 고통에 감았던 해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로 겁을 집어먹은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바짝 다가온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괴물은 꼭 약에 취한 것 같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게 찢어진 입술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는 꼴이 소름 끼치게 섬뜩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괴물이 해연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목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머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비명도 울음도 제대로 토해 낼 수가 없었다. 해연의 정신은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재미없네.”
괴물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칼을 들어 해연의 허벅지를 주욱 그었다. 별로 힘도 들이지 않았는데 벌건 살이 드러나 피를 분수처럼 뿜었다.
“으으읍!”
넋이 나갔던 해연의 눈이 위로 뒤집혔다. 날카로운 고통이 전신을 뒤틀리게 했다. 숨을 헐떡헐떡 쉬며 경련하는 해연을 보고서야 괴물이 만족스러워했다. 역시 먹이는 싱싱하게 날뛰어야 제대로 된 맛을 즐길 수 있다. 괴물은 긴 혀를 내밀어 입술에 튄 피를 핥아 가며 다시 해연의 가슴에 칼을 휘둘렀다.
살점이 터지자 피가 방 안을 난자하듯 여기저기로 흩뿌려졌다. 해연의 몸은 난도질되어 피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쇼크가 여러 번 반복되자 이제는 고통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해연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한번 칼을 휘두르려는 남자를 멍하게 바라봤다. 이미 배가 깊이 찔려 피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야가 가물가물하고 몸에 오한이 일었다.
괴물은 상처 난 다리에 흐르는 신선한 피를 혀로 열심히 핥았다. 더 나오지 않자 벌어진 상처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파헤쳤다. 그러자 멈췄던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역시 끝내준다. 해연의 피를 한껏 들이킨 괴물의 눈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풀렸다. 고작 인간의 피를 먹었을 뿐인데, 전신에 힘이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다. 거대한 힘이 온몸을 휩쓸자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한껏 풀어진 괴물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크르릉. 전신에 퍼져 있는 수북한 털들이 순식간에 길어지고 인간의 모양새라도 냈던 괴물의 얼굴이 점점 짐승으로 변해 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벌건 눈동자는 오로지 해연의 몸에 꽂혀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없다. 하지만 오랜만의 사냥을 너무 빨리 끝내기에는 아쉽다. 식욕과 유희 사이에서 갈등하던 괴물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충격으로 더러운 벽에 늘어져 있던 몸이 위로 한 번 튕겨 올랐다 내려갔다.
“으으으으읍!”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전보다는 더욱 깊게 부드러운 살덩어리에 선을 그었다. 벌어진 피부 사이로 뼈가 드러날 정도였으나 정밀한 조절로 뼈는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다. 뼈를 자르는 것은 마지막 유희였다. 어차피 내 것이다. 이런 후미진 곳을 들어와 저걸 훔쳐갈 수 있는 동족은 없을 테니 좀 더 가지고 놀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괴물은 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모조리 핥아 내고 아래로 떨어진 해연의 턱을 위로 들었다. 초점이 나간 검은 눈동자가 입맛을 돋운다. 저것만 입가심으로 먼저 먹을까 입안에 이리저리 굴렸다가 툭 터트리면 달콤한 육즙이 가득 메우겠지. 눈알을 도려내는 정도로 빨리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맛이 상상이 가 침이 가득 고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