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화 (1/113)

1화.

프롤로그

“해연 님. 일 끝났어요”

기획팀 소속 팀장 강기욱이 해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심코 습관적으로 팀장님이라고 말하려던 해연은 강기욱의 눈짓에 “기욱 님.” 하고 말을 바꿨다.

이 회사는 총괄 피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름 뒤에 ‘님’을 붙이며 직책을 숨겼다. 수평적인 회사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이제 익숙해질 법한데도 해연은 종종 실수하곤 했다. 그건 비단 해연뿐만이 아니었던 탓에 강기욱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근 한 달을 회사에서 지내고 있는 강기욱 기획팀장은 눈 밑이 검게 물든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겉모습만은 깔끔했다. 작업물을 한번 볼 수 있냐는 말에 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퇴근을 위해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켰다.

“조금 전에 메일로 보냈는데 못 보셨나 봐요.”

“막 회의 마치고 해연 님 자리부터 들렀거든요.”

부팅이 끝나고 모니터에 바탕화면이 떴다. 마우스를 움직여 완성된 작업물을 켜자 하품을 하던 강기욱이 고개를 모니터 쪽으로 당겼다. 해연은 그가 보기 편하도록 의자를 옆으로 뺐다.

“피디님께는 보여 드렸어요”

“네. 피디님은 좋다고 하셨는데, 오늘 기욱 님 바쁘셔서 월요일에 함께 회의하고 결정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요즘 자리에 잘 없죠”

“워낙 일이 많으시니까요.”

해연은 요즘 회사 T.F팀1)을 짜서 피디, 강기욱 기획팀장, 디자인 전반을 맡을 자신 이렇게 세 명이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회사에 복귀한 이후 처음으로 주도해서 맡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피디를 포함하여 총괄 기획을 맡은 강기욱의 반응까지 좋아야 1차 시안이 통과되는 것이었다. 시안이라기에는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완성도만으로 통과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해연은 꼼꼼히 작업물을 살피는 강기욱의 반응을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음, 일단 제 자리에 가서 한 번 더 볼게요. 수고하셨어요. 퇴근하려는데 제가 붙잡았죠 빨리 도망가세요.”

바로 좋다, 나쁘다는 말은 안 나왔지만, 해연의 작업물을 보는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해연은 조금 안도하며 다시 컴퓨터를 껐다. 그의 말대로 빨리 도망가야 한다. 이제껏 괜히 더 남아 있다가 타 팀에서 요청하는 도움을 거절하지 못해 계속해서 야근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찾아와서 안타까운 마음에 도와줬지만, 금요일인 오늘까지 야근할 수는 없었다.

“기욱 님은 오늘도 철야하세요”

“아니요, 저도 집에 가려고요. 이러다 비명횡사하겠어요.”

“되도록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진짜 큰일 나요.”

“아직은 버틸 만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기욱이 해연을 향해 웃고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어깨에 걸치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해연도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입사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회사는 아직 낯설었다. 한 팀에 삼백 명이 넘으니 얼굴만 간신히 익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물론 부서마다 분리되어 있고, 각자의 영역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니 부딪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지만, 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강기욱의 오랜 권유로 입사를 결정한 뒤에도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그녀가 겪었던 끔찍한 일과 관련이 있는 곳이었기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극복을 해야 한다면 이곳이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연이 직접적으로 자주 엮여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 대형 프로젝트다 보니 상대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연도 무던히 그 속에 파묻힐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정지해 문이 열렸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해연과 함께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해연은 회사 빌딩의 회전문 앞에 멈춰 섰다. 비가 왔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작스럽게 쏟아졌다. 심장이 와르르 떨렸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당황한 사람들은 빌딩에서 우산을 빌리거나 포기하고 뛰어가는 두 부류로 나뉘어 졌다. 하지만 해연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빌딩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예고 없이 쏟아진 비로 인해 끔찍했던 과거의 악몽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로부터 삼 년이나 지났는데도 해연은 비가 오는 날이 끔찍이 싫었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데 단단한 팔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해연의 얼굴이 위로 올라갔다.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하게 떨리던 심장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해연은 제 팔목을 잡은 남자의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부를 가르고 있는데도 남자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해연에게 잡힌 부위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해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을 남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이러지 마, 한해연. 말 더듬지도 말고 떨지도 마. 제발 이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 보이지 마.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 봐도 그의 앞에서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가 와서요. 당신은 비가 오면 힘들어하니까.”

“…….”

그 말에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마치 바로 직전에 겪은 것처럼.

챕터 1

그를, 괴물을 처음 만난 날은 검은 밤, 기분 나쁠 정도로 추적추적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 * *

‘택시를 탈걸.’

후회하기에는 이미 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들어선 뒤였다. 해연은 발걸음에 속도를 더 내며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두꺼운 코트를 바짝 여몄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막아 볼 요량이었다.

코트를 여미기 무섭게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우산을 쓴 것이 무색하게 비가 바람을 타고 몰아쳤다. 이미 코트 아래로 드러난 바지는 물기로 흥건했다. 축축한 옷에 한기가 드니 뼈가 아릴 지경이었다.

역에서 거리가 꽤 먼 집은 늘 해연을 불편하게 했는데, 오늘 같은 날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했다. 추적추적한 빗줄기가 안 그래도 어두운 골목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해연은 갑작스레 내리는 비로 인해 더 음울해 보이는 골목에 몸을 움츠렸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괜히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없었다. 아직도 오 분은 더 걸어야 집에 도착한다. 평소라면 그저 불평이나 조금 뱉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불평조차 나오지 않았다.

구두 역시 젖은 상태였기에 걸을 때마다 물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가 내는 소리였음에도 조용한 거리를 울리는 빗소리와 함께 맞물려 안 그래도 예민해진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일 분이라도 더 빨리 집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씻고 싶었다. 해연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코트 주머니 속 핫팩을 주무르며 더 빨리 걸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골목에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비쳤다. 순간 해연의 몸이 흠칫 튀었다.

겨울은 해가 빨리 지는 탓에 퇴근할 때쯤이면 이미 어둑어둑한 터라 사소한 것만 봐도 겁을 먹게 된다. 가로등의 조도가 낮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해연은 항상 이 골목길이 무서웠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떨어져 걸으며 조심스럽게 옆을 힐끔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바로 뛰어갈 준비를 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다행히 자세히 살피지 않더라도 사람이 아님이 명확했다. 검은 그림자는 건물의 담이 만들어 낸 그림자에 불과했다. 크기가 크다 보니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다. 날이 축축하고 기분 나빠 별것도 아닌 것에 괜히 겁을 먹었다. 해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골목은 집과 가까워질수록 더 좁고 어두워졌다. 그리고 불길한 무언가가 그녀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해연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이제 이삼 분만 걸으면 도착한다. 빨리, 더 빨리 가야 해. 누군가가 초조하게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해연이 거의 뛰듯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인적이 없어 해연의 걸음 소리만 들렸던 골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철퍽. 해연의 속도를 따라 작았던 발소리가 점점 크고 가까워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감각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소리를 피하라고 외쳐 댔다.

하지만 그녀의 속도보다 그녀를 따라붙은 발소리가 더 빨랐다. 해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 살려……!”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려던 입이 두껍고 축축한 손에 막혔다. 강한 악력이 입을 짓눌러 입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 으읍! 읍!”

“죽기 싫으면 조용히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인 남자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그녀의 등에 뾰족한 무언가가 눌려 있었다. 해연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칼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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