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뾰족하게 말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 뒷모습을 보던 상춘은 이내 허허 웃고 말았다. 그의 눈짓에 이쪽을 흘끔거리던 삼두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상춘은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만.”
“예. 하여튼 평범한 분은 아닙니다.”
삼두가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정확하게 와닿는 그의 표정에 상춘이 다시 피식 웃었다.
“뭐, 그놈이 맘 둘 데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겠지. 나승운 행적은?”
“20분 전 멜버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합니다.”
중호가 다가서서 조용히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상춘의 눈빛이 깊어졌다.
“범진이 뜻은 어떤가.”
이번엔 삼두가 나섰다.
“일단 놔두시려는 것 같습니다. 국내에 들어오지만 않는다면요.”
“하긴. 그럴 생각이니 보내 줬겠지.”
손이 엉망이긴 했지만 범진이 승운을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면 충분히 거기서 끝을 보았을 것이다. 상춘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저 녀석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게 해라. 하여튼 이참에 아무 생각 없이 쉬게 해. 안 그랬다가는 잔소리깨나 들을 것 같으니.”
화장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그의 행동에 삼두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상춘이 가고 나면 준영의 질문 폭격이 누구에게로 향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제가 그것을 버텨 낼 수 있을지 몹시 의문이었다.
* * *
2주간의 입원 권고를 받은 범진은 1주일 만에 멀쩡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지만 차마 퇴원 얘기는 꺼내지 못했다. 준영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의 범진과 생활을 같이하고 있었다. 첫날부터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것을 각오하고 있던 삼두는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상황에 오히려 말라 가는 중이었다.
선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뒤척이던 범진은 무언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스탠드의 옅은 조명이 그의 반대편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잇새로 낮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 왔어?”
“밤에.”
준영은 벽에 놓인 소파에 자리 잡고 반쯤 누운 자세로 책을 보고 있었다. 요즘 그녀가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묻는 대신 그녀는 침묵과 독서를 택했다. 그게 도리어 시위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루할 텐데 이렇게 매일 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의 말에 준영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몰랐어? 나 백수잖아. 집에서 혼자 지루한 것보다 여기서 지루한 게 낫지.”
말투는 담담했지만 여전히 가시가 박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헛웃음을 지은 범진이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각도는 달랐지만 어둑한 배경에 머리를 대충 하나로 틀어 묶은 채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예전이 떠올랐다.
그때는 준영을 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빨리 흘렀다. 그녀를 만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시간의 흐름은 확연히 달랐다.
특별한 걸 하지 않는데도, 그녀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만지다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보고, 또 펜으로 사각사각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아까울 정도로 빠르게 흐르곤 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그 모습을 감상하던 범진이 문득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윤준영 집중력 예전 같지 않네. 책장 하나가 왜 이렇게 안 넘어가?”
입술을 콱 깨문 준영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변태같이 뚫어져라 나만 보니까 그렇지.”
“몰랐냐. 그건 그때도 그랬는데.”
범진의 말에 준영이 혀를 차며 헛웃음을 흘렸다.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손을 까닥였다.
“어차피 집중 못 할 거면 책 말고 나나 봐.”
“뭐가 예뻐서?”
뾰족한 대꾸가 날아온다. 범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답지 않은데.”
“뭐가.”
“지금쯤 삼두든 나든 속을 탈탈 털어 대고도 남았을 텐데, 진도도 안 나가는 책만 붙잡고 있잖아.”
입술을 질근거리던 준영은 고집을 부리듯 꿋꿋하게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너네 회장님 무섭더라. 자기가 알아서 할 거라고 선을 딱 긋던데.”
“그 말에 이렇게 얌전히 있는다고? 천하의 윤준영이?”
“내가 나서면 뭐가 달라져? 말해 줄 것도 아니잖아.”
이제는 지나치게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던 범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너.”
그가 중얼거렸다.
“알고 있구나. 누군지.”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책에 골몰하는 척할 뿐이다. 범진은 헛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즉 눈치챘어야 했다. 윤준영이 저렇게 얌전히 있는 이유를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쓸데없는 생각이 뭔데? 네가 죽을 뻔한 게 나 때문이구나, 뭐 그런 거?”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책장을 탁, 하고 덮은 준영이 그를 돌아본다. 범진은 날렵하게 뻗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대꾸했다.
“그래. 정확히 그거.”
“물론 내 잘못은 아니지.”
준영이 어깨를 으쓱인다. 하지만 서늘해 보이는 눈가에는 여전히 그늘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범진은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응시했다. 이래서 그녀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저를 찌른 게 나승운이라는 것을 알면 필연적으로 준영은 죄책감을 느낄 테니까.
하지만 스스로의 추측마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준영처럼 눈치가 빠른 경우에는 더더욱.
“그래서.”
침대에서 벗어나 천천히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며 범진이 물었다.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는 거야?”
“그런 마음도 조금 있고. 이 정도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더 했으면 어땠을까 무섭기도 하고. 모르겠어. 내가 뭘 하고 있어야 하는지.”
힘없이 말을 이어 가던 준영은 냉장고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서 다시 제게 다가오는 범진을 바라보았다.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뻔하지.”
그는 준영의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손질하지 않은 앞머리가 부스스 내려와 이마를 가린 모습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범진은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불안이든 죄책감이든 다 끌어안고 내 옆에 있어. 나도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그럴 거니까.”
나직한 말에 준영의 입술이 피식 기울어졌다. 그녀는 붕대가 감긴 범진의 손끝을 천천히 잡았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그녀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있었다.
“너야 당연하지. 온 마음 다 바쳐서 나한테 잘해 주기로 했잖아.”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대꾸하자 범진의 입가에도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여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부딪쳤다.
“그래. 그러니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뭐든 말해. 그래야 나도 잘해 줄 방법을 찾지.”
“자기는 맨날 입 다무는 게 주특기면서 말은 잘해요.”
불퉁거린 준영은 그가 들고 온 박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건 뭔데?”
눈썹을 까닥이며 범진이 뚜껑을 열었다. 달콤하면서도 유혹적인 향이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단거 먹고 성질 좀 죽이라고. 르 블랑이라고, 이걸로 유명한 곳이래. 쇼콜라 봉봉. 먹어 봐.”
하나를 집어 든 범진이 그녀의 입가에 밀어 넣어 준다. 짐짓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미 입 안에는 기분 좋은 달콤함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가 왜 이걸 사다 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달콤한 것을 사다 달라고 했던 제 말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나 더.”
그녀의 말에 범진이 낮게 웃었다. 부드럽게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을 혀로 핥으며 준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트려는지 어둡기만 하던 하늘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한경은 순식간에 개편이 되었다. 미향과 승운의 빈자리는 금세 채워졌고, 회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다.
김 실장의 소식은 알려진 바 없었다. 미향의 일가가 출국하던 날에도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미향을 끌어내린 것이 다름 아닌 김 실장의 배신이라는 소문만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돈이 부족하진 않을 테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잠적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미향이 손에 넣으려던 것은 그렇게나 허무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도, 피를 나눈 가족도, 그리고 회사도,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손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무엇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가.
한때는 미향과 같은 삶을 꿈꾼 적도 있었고, 그녀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이미 붙잡았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당하리라. 다시는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달콤한 것을 입 안에 넣어 주는 손가락을 혀로 할짝이자 범진의 몸이 움찔한다. 그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그녀를 불렀다.
“윤준영.”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입술을 핥으며 새치름한 눈으로 말하자 범진이 인내심을 끌어 올리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쉰다. 웃음을 터뜨리며 준영은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어머님 뵈러 갈까.”
“그래. 그러자.”
작게 대답하자 범진이 든든하게 그녀의 머리를 받쳐 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바라는 건 이런 소소한 순간뿐이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
금방이라도 동이 틀 것처럼 저 멀리에서부터 하늘이 희미하게 빛난다. 삶을 밝히는 빛은 저 희끄무레한 빛에서 시작된다.
아직 사위는 어두웠지만 결국 밝아지리라.
지금은 그저 여명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