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6화 (16/86)

<16화>

종알거리는 준영의 말투에 범진은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입술을 비죽이던 준영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때리셨어?”

“나한테는 손 안 댔어. 다른 사람은 때렸겠지.”

그의 대꾸에 준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나라도 내 아들이 너면 안 때릴 것 같아.”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아버지 닮아서 그렇게 힘자랑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아니라고.”

“잠 많은 것도 아버지 닮은 거야? 아니, 잠이 많으셨으면 깡패 되기 힘드셨을 것 같은데.”

재미있다는 듯 준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뜬다. 그게 듣기 좋으면서도 이대로 두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짐짓 인상을 썼다.

“잠 많은 거 아니다.”

하, 하고 준영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다. 웅크리고 있던 꽃망울이 탁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릎을 치며 깔깔대던 그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요. 하루 24시간 중에 못해도 열여덟 시간은 주무시는 것 같던데요? 참고로 나는 다섯 시간도 겨우 자거든.”

저렇게 여과 없는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친구에게 장난치듯 짓궂은 표정이 귀엽다. 그 표정 변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범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공부하는 거랑 비슷해.”

“뭐가?”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도 귀찮게 안 하니까.”

놀리는 것처럼 웃고 있던 준영의 입술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자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맨날 엎드려 있으면서? 여기서도 맨날 침대에 누워 있었잖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준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 갑자기 한꺼번에 허기가 몰려온다. 탄탄한 배를 슥슥 쓸어내리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불이 떨어지고 그의 맨몸이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면서 준영이 물었다.

“왜? 어디 가는데?”

“라면 끓일 거야. 내려와서 너 좋아하는 공부나 하든가.”

“책이 있어야 하지. 달걀 풀지 마.”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던 범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준영이 그를 따라 주섬주섬 일어나고 있었다.

“넌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온 거냐? 밥도 안 먹었어?”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준영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마. 그 집에 마녀가 한 명 있는데 겨우 도망쳐 나온 거라고.”

어이없어하는 범진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는 당당하게 턱을 까닥였다.

“달걀 몇 개 넣을 건데? 난 두 개.”

좀처럼 맞을 일이 없는 눈높이가 딱 맞아 범진은 준영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깨끗한 빛의 눈동자가 주저함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걱정했지만 그녀는 멀어지지 않았다. 착각일까. 오히려 한 발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장이 이상한 박자를 따라 쿵쿵 뛴다. 그 소리를 따라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준영의 뺨에 들러붙어 있는 머리칼을 천천히 치웠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건 안 썼으니까 머리나 닦아. 감기 걸리겠다.”

그대로 몸을 돌려 범진은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손끝에 닿았던 물기 어린 준영의 뺨의 감촉이 그대로 피부 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열기가 온몸으로 다 번지고 있었다.

“벗고 있는 네가 할 소리니?”

뭐가 또 불만인지 비딱한 준영의 목소리가 뒤를 따른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통통거리며 연신 지붕을 두드렸다. 범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저 흘러가기만 하던 수많은 시간과 기억들 중 이 순간의 냄새, 분위기, 그 모든 것은 아마 오래도록 잊을 수 없으리라.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하늘이 맑다. 그리고 더워졌다.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어올리며 교실로 들어서던 준영은 아이들이 흘끔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승운의 집에 초대받은 걸 다들 알고 있으니 아마 오늘 하루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혜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의 시선이 가장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널찍한 등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준영은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고 지나쳐야 했다. 범진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지만 자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쟤가 얼마나 웃긴지를 애들이 알아야 하는데.

아니, 뭐,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책상 밖으로 툭 삐져나온 범진의 커다란 손에 스친 준영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권범진은 정말로 겉보기와 모든 것이 다르다. 세상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섬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젖어 있으면 옷도 벗어 주고, 멸시를 당한 것 같으면 화도 내 주고, 막무가내로 굴어도 한숨은 쉴지언정 다 받아 준다.

라면도 잘 끓여 주고 남의 약점을 보고도 이용하거나 협박하려 하지 않지. 그리고.

아파서 누워 있으면 난로도 갖다주고 창문도 가려 준다.

‘지금 누구 떠올렸어?’

승운의 말을 되새기며 자리에 앉은 준영은 입술을 질근거렸다.

범진이 왜 저에게 잘해 주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에게 있어서의 제 입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것.

아무 말이나 던지며 티격태격하고, 그러다 금방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자연스레 각자 할 일을 한다. 그곳에서 보내는 범진과의 시간은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아무 걱정 없이 모든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때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암울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

어느새 그 공간과 그곳에 있는 범진은 그만큼 중요해져 있었다.

책을 꺼내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이 순간 몸서리치듯 머리를 흔들었다. 쉼 없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며 그녀를 괴롭히는 장면이 있었다.

계단에서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 섰을 때 또렷하게 보이던 범진의 얼굴.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를 넘겨 주던 손길. 감기 걸리겠다는 말에 담겨 있는 희미한 걱정과 그때의 그 눈빛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눈 앞을 가리곤 했던 것이다.

그것들을 자꾸 떠올리느라 잠까지 설쳤다는 사실이 굴욕적이다. 표정을 빈틈없이 가다듬으며 준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너 지금 그런 거에 신경 쓸 때 아니야, 윤준영. 권범진이 네 앞에서 홀딱 벗고 굿거리장단에 맞춰 탈춤을 추고 있어도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준영아.”

순간 생각의 막을 뚫고 날아온 목소리에 준영은 퍼뜩 놀라 눈을 들었다. 승운이 부드럽게 웃으며 서 있었다. 어, 하고 어정쩡하게 대답하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날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올 줄 알았던 그녀가 서둘러 집을 떠나려 하자 승운은 당황해서 쫓아 나왔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는 우산을 가지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다시 그가 집으로 들어간 사이 준영은 그대로 달려 나온 것이었다.

영문을 모를 게 분명하다. 그 여자가 승운에게 저를 장학 재단에 넣고 싶다는 말을 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제안은 오로지 저와 그 여자 사이의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괜찮아? 혹시 감기 걸리지 않았니? 그날 왜 그렇게 급하게…….”

“괜찮아.”

시선을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모르는 건가. 나한테 말만 걸어도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경이 이쪽으로 쏠린다는 것을 말이다.

말을 자르며 대화를 끝내려 했지만 승운은 그녀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두고 간 거야.”

내가 뭘, 하고 안을 들여다본 준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날 입었던 블라우스가 좋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쇼핑백을 낚아채 아래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혹시.”

말꼬리를 얼른 붙잡은 승운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엄마가 무신경한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닌데 가끔 생각 없이 말을 세게 하실 때가 있거든.”

순간 웃음이 튀어나와 준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승운은 집에서도 왕자님 취급을 받는 게 분명하다. 그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가끔 ‘생각 없이’ 말을 세게 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이미 철저한 계산이 끝난 후일 테니까.

“그렇게 보호받는 건 어떤 기분이야?”

참으려고 했지만 저절로 입술이 움직인 후였다. 승운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

괜한 말을 내뱉은 제 입술에 벌을 주듯 콱 깨물며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승운은 지친 얼굴의 담임이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러났다.

미련이 남은 듯한 그의 시선과 호기심을 굳이 감추지 않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준영은 책을 펼쳤다. 발에 걸려 부스럭대는 쇼핑백을 냅다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자, 그래서 너희들이 해야 할 것은 두 명씩 조를 짜서 여기 제시된 주제 중 하나를 골라서 조사해 오는 것이다. 반장은 오늘 내로 조별 명단이랑 주제 정리해서 가져오고.”

나른한 오후 시간에도 성의껏 수업을 듣고 있던 준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애초에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다. 도대체 왜 꼭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단 말인가. 혼자서 하는 게 훨씬 능률도 좋고 잘해 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게 다 사회화에 대해 쓸데없이 긍정적인 환상을 품고 있는 멍청이들 때문이다. 허공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준영은 볼펜을 튕겼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같은 조를 하자고 다가올 친구 같은 것은 없다. 이대로 떨이로 팔고 팔아도 끝끝내 남아 있는 썩은 생선같이 있으면 어차피 똑같은 입장의 다른 썩은 생선과 자연스레 같은 조가 될…….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핑그르르 돌던 볼펜이 툭 떨어졌다.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완벽하게 저와 같은 입장의 한 명이 있지 않은가! 누구도 접근하지 않을 썩은 생선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이런 상황에서 범진과 제가 짝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도서관이나 밖에서 그와 같이 있어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권범진과 함께 있는 제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은근히 들뜨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준영은 제 책상을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준영아, 나랑 같이 할래?”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서 있는 것은 승운이었다. 준영의 입술이 막막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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