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시간을 돌아
2017.07.06.
어떻게 된 일일까.
나루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있다. 민지후가 내 눈앞에 있다.
두 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두 번 다시는 못 들을 줄 알았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너, 숨 좀 쉬어야 하지 않겠냐?”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대신, 지후는 말했다.
그제야 나루는 헐떡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기…… 괜찮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숨을 헐떡이는 나루가 걱정스러운 듯, 재경이 손을 뻗어 왔다.
파앗―!
나루는 그것을 거세게 뿌리치고 휙 돌아서서 달렸다.
달려서 들어간 곳은, 방금 전 도망치려고 했던 그 원룸이었다.
쾅―!
거세게 문을 닫고.
철컥―
문을 잠갔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커피 얼룩이 묻어 있는 삼선 슬리퍼. 뒤축이 구겨진 분홍색 운동화.
아까는 몰랐지만 이제는 기억이 난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나루는 방 안을 둘러봤다.
이 방도, 이제는 기억이 난다.
어째서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알겠다.
나루가 살았던 방이다. 대학교 1학년 입학 당시부터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원룸.
나루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꿈……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꿈일까.
민지후와 사랑을 하고 민지후의 죽음을 보았던 그것이 꿈일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일까.
얼굴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아파.”
주르륵―
나루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아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원룸에서 나는 군내도, 볼의 아픔도, 그리고 재경과 지후의 모습도.
‘그럼 그게 다 꿈인 거야? 지후가 죽은 그 일이, 전부 꿈이었던 거야?’
그것이 꿈이었다면 무서울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나루는 눈을 감았다.
‘꿈일 리 없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후와 나누었던 그 시간이, 추억이, 체온이, 꿈인 것은 싫다.
그런 한편, 꿈이었으면 좋겠다.
지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마지막 속삭임이, 죽음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혼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연나루. 네가 잘하는 거잖아. 차근차근 생각하는 거.’
나루는 손바닥으로 볼을 탁탁 두드렸다.
‘나는 분명 지후의 장례식장에 갔었어. 윤영이를 만났고, 집에 와서 지후에게 받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쓰다듬다가 울었어. 그래, 내가 생각나는 건 거기까지야. 나는 잠든 적 없어. 눈을 떴더니, 여기였어.’
나루는 천천히 일어났다.
좁은 원룸 안에 채워진 것을, 손바닥으로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전부 실재하고 있었다.
‘그래, 여긴 꿈이 아냐. 하지만 그 전에 그것도 꿈이 아니야. 만약 그게 꿈이라면, 난 지후를 이전에 만난 적이 있어야 돼. 하지만 난 오늘 지후를 처음 만난 거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지?’
나루는 침대 위에 있던 폴더폰을 집어 들었다.
64화음 폴더폰.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최신형 휴대폰이었다.
20XX년 2월 26일.
휴대폰 액정에 뜬 날짜를 확인했다.
“그래, 내가 원룸으로 이사를 한 다음 날이야. 그리고…… 재경이와 지후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만나지는 않았다.
그때는 잠옷이 아닌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후였고, 근처를 둘러보기 위해 나가다가 둘을 마주쳤다.
“아무튼 난 이전에 지후를 만난 적이 없어. 그렇다는 건,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씹으면서도 아프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고민을 할 때의 버릇이었다.
―연나루.
이렇게 아랫입술을 씹을 때면, 지후가 검지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러면 나루는 배시시 웃으며, “아, 내가 또 그랬어?”라고 말했다.
문득 그 사소하지만 사랑스러웠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졌다.
‘그래, 그런 게 꿈일 리 없어. 꿈이라면 이렇게 세세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이건…… 시간 여행이라는 건가?’
나루는 거울 앞에 가서 섰다.
거울 속에 비친 나루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신입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른스러운 척 파마를 한 머리카락과 주름살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다듬지 않은 눈썹과 정리하지 않아 각질이 일어난 입술.
‘시간 여행이 아냐. 시간 여행이라면 난 30대의 모습 그대로였을 테니까. 그럼 설마 되돌아온 건가? 이 시기로?’
내가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더라.
―만약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있는 힘껏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시간을 돌린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체 왜? 어떻게? 시간을 돌리는 게 가능해? 정말?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루는 손을 쫙 펼치고 내려다봤다.
손은 매끈매끈했다.
왼쪽 약지에 끼고 있던 커플링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랫동안 끼어 온 커플링의 자국 또한 없었다.
아무 자국도 없는 매끈한 약지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반지를 빼도 마치 반지를 낀 것처럼 자국이 있었는데.
‘이게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시간을 되돌리는 일 따위가 생길 리 없어. 나는 지금…… 망상을 하는 거야. 지후를 살리고 싶어서, 멍청한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정말로 망상일까?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래, 난 미쳤을지도 몰라. 슬픔 때문에 미쳐서 망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나루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닐지도 몰라. 이게 정말 현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진짜로 시간을 돌려 이곳에 온 거라면.’
기적이다. 그리고 기회다.
지후를 살릴 수 있는 기회.
지후가 32살 이후의 삶을 살아가도록 할 수 있는 기회.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건, 나루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난 여기에 있어. 민지후와 사랑을 했던 그게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어. 그리고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중요하지 않아. 일단 답이 없다면, 그 두 개가 전부 현실이라고 가정을 해야 돼.’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오늘은 20XX년 2월 26일. 나는 대학교 입학을 앞둔 신입생 연나루.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곧…….’
딩동―
예상대로 초인종이 울렸다.
전에는 재경과 지후가 친해지자면서 술을 들고 찾아왔었다.
자,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이유로 찾아왔을까?
나루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역시 재경과 지후였다.
“왜?”
차갑게 물었다.
“이 녀석이 네가 걱정된다고 해서.”
재경이 엄지로 뒤에 서 있는 지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남자였다, 민지후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차갑게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였다.
재경보다 10센티는 더 큰 지후는 그 뒤에 서서 묵묵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확인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루는 고개를 들고 지후를 빤히 응시했다.
내가 참으로 사랑했던, 그래서 하루라도 안 보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 나이 20살.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
나는 이제부터 온 힘을 다해, 이 남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 * *
민지후와 성재경을 내 인생에서 밀어내야 한다.
나루는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둘을 응시했다.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것 같던데.”
나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은 그냥 문을 열어 주지 말걸.
하지만 사람을 밀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울리기 싫은 인종이 되면 그만이다.
나루는 결심을 굳히고 재경을 노려봤다.
“신경 꺼.”
“어?”
“신경 끄라고.”
차갑게 뱉어 내는 말에 재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지후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날씨가 춥다.”
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기 걸린 거 아냐?”
나루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신경 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나 본데. 귀찮게 하지 마. 친한 척도 하지 말고.”
쾅―!
그리고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겠어. 마음을 다잡아야 돼.’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미련한 마음은 아직도 그때 그대로인지라, 지후의 얼굴과 음성에 멋대로 반응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어.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이 딱 잘리는 게 아니니까.’
눈물이 나왔다.
두 손으로 눈을 꽉 눌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지후를 사랑한다. 재경 역시 좋은 친구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오늘부터 정리해야만 한다. 이 인생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랑 관계하게 되면, 지후는 죽을 거야. 지후가 죽는 건, 내 인생에 지후가 없는 것보다 더 끔찍해.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다른 여자를 만나도 되니까.’
지끈―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좋으니까.’
욱신―
‘그러니까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오열이 나올 것만 같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지후는 그럴 자격이 있어.’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지후와 함께 봤던 기억이 있다.
비행기를 타기로 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비행기를 못 타게 되고, 그들이 타기로 한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해 탑승객 전부가 죽는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도하지만,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찾아가 결국은 죽였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되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후의 비행기다.
지후가 처음부터 날 만나지 않았다면,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과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후가 죽은 이유였던 그 사건만 피하는 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루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지후를 사랑하는 내 욕심 때문에, 죽음이 지후에게 눈길을 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후는 죽음의 비행기에 타서는 안 된다.
* * *
“지후야.”
그의 앞에서는 부를 수 없었던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민지후. 자기야.”
처음에 자기라고 불렀을 때, 괜히 목덜미가 간질간질했던 기억이 났다.
지후도 얼굴을 붉혔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있잖아. 나 널 아주 많이 사랑해. 알지?”
사랑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서도 이 사랑을 평생 품고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을 거야, 지후야. 내가 널 사랑하면, 너도 날 사랑할 테니까. 사실 나는 괜찮아. 평생 널 짝사랑하면서 살아도 괜찮아. 그런데 넌 안 돼. 너는 날 사랑해서는 안 돼. 너랑 내 사랑의 끝은 죽음이거든. 너의 죽음.”
나루는 눈을 감았다.
“너를 사랑하는 나는 예쁘대. 너를 보는 내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난대. 널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대.”
그렇기에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눈치채게 될 테니까.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리고 민지후가.
이 사랑을 눈치챈 지후가 내게 관심을 갖고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서로 사랑하게 되고, 연애를 하고, 그러다가 또다시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지후야. 나는 이제부터 있는 힘껏 널 사랑하는 마음을 접을 거야.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만 해낼 거야. 나는 보고 싶거든. 33살의 너를. 40살의 너를. 50살의 너를.”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떨어진 눈물이 머리카락을, 베개를 적셨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루는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으…… 흐으…… 윽…… 우욱…….”
차라리 심장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가슴에 이는 이 무서운 통증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울음이 가득 찬 좁은 집이 숨 막혔다. 신선한 공기가, 트인 공간이 필요했다.
침대를 내려와 비척거리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부딪쳤다.
그리고.
‘민지후?’
지후가 보였다.
긴 복도 끝에 그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 그림자만 보일 뿐인데도 지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가 이쪽을 향해 있는 건 알 수 있는데, 뭘 보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날 보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말을 걸고 싶었다.
지후야. 나야. 나루야. 너의 연인, 너의 약혼녀, 너의 사랑.
나 지금 여기에 있어.
그에게 말을 걸고 그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그에게 달려가 안겨, 그의 단단하고 따스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문고리를 꽉 잡은 채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지후는 여전히 그곳에 그렇게 서 있었다.
어둠에 감싸여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나루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 * *
그 이후로 나루는 내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기억하기로, 재경과 지후의 방은 같은 층에 있었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 두 사람을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루는 방에 틀어박혀 생각과 감정을 정리했다. 다시 지후를 마주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입학식에는 가지 않았다.
입학식 때, 재경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서 얼떨결에 재경과 지후, 그리고 셋의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끼리 친해지는 건 안 된다.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나루는 감기가 너무 심해서 입학식은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해 두었다.
그리고 수업 첫날이 오고야 말했다.
“할 수 있어, 연나루.”
나루는 거울을 보며 말했다.
“할 수 없어도 해내야 돼.”
원래 첫 수업 때에 서투르나마 화장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오늘 나루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못나게 보여야 한다. 접근하기 싫을 만큼 못나고 후줄근하게.
‘잠옷을 입고 가는 건 좀 너무하겠지?’
습관적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후회했다.
머리를 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빗지도 않고 매일 입고 있었던 추리닝을 입었다. 신발은 삼선 슬리퍼를 신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추운 3월 초.
이런 차림으로 나가면 다들 우습게 여기겠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내 대학 시절은 성재경과 민지후를 피하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수업 시간보다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왔다.
강의실에 도착했을 땐, 미적분학 교수가 강의 계획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었지만 드르륵, 소리가 울렸다.
대망의 대학 첫 수업 시간이라 긴장하고 있던 학생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꿀꺽―
나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고는 슬며시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가방에서 전공책을 꺼내 펼쳤을 때였다.
“연나루.”
작고 낮은 음성이 들려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힉!”
덕분에 이상한 소리를 냈고, 또 주목을 받았다.
교수의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옆자리에 지후가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지후의 옆자리라니.
나루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망가질 용기가 없기에 참았다.
“입술에 피 나겠다.”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지후가 중얼거렸다.
울컥―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 나루는 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마터면 습관적으로, “아아. 내가 또 그랬어?”라고 대꾸할 뻔했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며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민지후는,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민지후가 아니다. 그저 같은 과 동기인 민지후일 뿐이다.
그가 하는 말, 그의 행동, 그의 눈빛 전부,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천천히 호흡하며 술렁이는 가슴을 갈무리했다.
‘매번 이래서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수업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미적분학 교수가 나간 후, 나루는 황급히 책을 덮어 가방에 밀어 넣었다.
“나루야. 오랜만이다, 야.”
벌떡 일어선 나루의 앞을, 재경이 가로막았다.
나루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재경을 노려봤다.
“뭐야, 또?”
“입학식은 왜 안 왔어? 같이 사진 찍으려고 기다렸는데.”
“신경 꺼.”
“내가 신경이 좀 예민해. 원래 신경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었거든. 수능을 망쳐서 의대에 못 갔지만.”
“뭐라는 거야, 진짜.”
재경의 두서없는 개그 코드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비켜.”
“아침 안 먹었지? 같이 밥 먹자. 괜찮지, 지후?”
재경이 나루의 어깨너머로 지후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끄덕, 고개를 움직였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이렇게 지끈지끈 아픈데, 같이 밥을 먹자니. 절대로 무리다.
재경을 떨어뜨리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난 아침 먹었고, 굉장히 배가 불러. 같이 밥 먹기 싫어.”
이제 재경은, ‘그럼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며 비켜 줄 것이다.
“그래? 그럼…….”
재경의 붉은 입술 사이로 원하는 대답이 나오려는 그때였다.
꼬르르륵―!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이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는 조용한 강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재경이 검지로 자기 귀를 톡톡 두드리더니 씩 웃었다.
“네 위장은 같이 밥 먹고 싶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