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2017.07.03.
# 오늘의 슬픔 가운데 가장 비참한 것은 어제의 기쁨에 관한 추억이다. ―칼릴 지브란― #
그와의 이별.
그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헤어진다면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우든가, 마음이 식든가, 성격 차이로 다툼이 심해진다든가, 결혼 준비 과정 중에 트러블이 생긴다든가…….
그런 평범한 이별의 이유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칼에 찔려 사망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것도 나를 지키기 위해.
당연한 일이다.
사건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먼 세상의 이야기일 뿐.
그것이 나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나루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이 피에 흥건히 젖어 죽어 가는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쉿.”
이라고, 그는 속삭였다.
나루를 지키기 위해 꽉 끌어안고, 날카로운 쇠붙이를 등으로 받아들이며.
“쉿.”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행복해져야 해.”
“네 탓이 아냐.”
“널 사랑해.”
“미안. 먼저 가서 미안해. 거기서 기다릴게.”
같은 마지막 속삭임 따위는 없었다.
“쉿.”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앵왜앵―
사이렌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여기예요, 여기!”
여자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생존자가 있습니다!”
남자의 외침이 들린 것도 같았다.
무언가에 태워져 옮겨졌고, 어딘가에 누워서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화학 약품 냄새가 났고, 낯선 목소리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루는 그의 장례식장에 서 있었다.
“너 때문이야!”
라고, 그의 누나인 지연은 외쳤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네가 우리 지후를 죽인 거야! 네가 내 동생을 죽였다고!”
지연이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그것을 뿌리칠 힘이 나루에게는 없었다.
그녀가 흔드는 대로 흔들, 흔들, 흔들. 그렇게 흔들리는 시야에, 지후의 영정 사진이 들어왔다.
2년 전 함께 간 파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저런 용도로 사용될 줄이야.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루의 어깨를 감싸며 지연을 떼어 냈다.
“언니, 진정하세요. 나루도 피해자예요.”
나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영이었다.
윤영의 손에 이끌려 장례식장에서 빠져나왔다.
Y대 대학 병원 장례식장 앞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황량하게 느껴졌다.
“나루야.”
윤영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너 때문이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라고 묻고 싶지만,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다. 입안에서 단내가 날 만큼, 나루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벌어질 일이었던 거야. 네 탓이 아냐. 그놈들이 나쁜 거지.”
벌어질 일.
정말 그럴까?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정말로 벌어져야만 할 일이었던 걸까?
내가 위험을 깨달았다는 걸 지후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내가 그 연구를 완성시키지 못했다면.
내가 그걸 발견했을 때 무시했더라면.
내가 애초에 그 유전자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KOB 미래 생명 연구소에 취직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나루는 눈을 감았다.
내가 지후를 사랑하지 않고, 또 지후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집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갈래.”
목소리가 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형편없이 쉰 목소리지만 가다듬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이 목소리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루야.”
윤영이 걱정스럽게 불렀지만 나루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걱정을 받을 자격이, 내게는 없으니까.
나는 내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죽게 만든, 최악의 여자이니까.
그의 인생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부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내게는 동정도, 걱정도 받을 자격이 없다.
집 안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의 온기와 향기가 여전히 집 안에 감돌아,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와 꼭 끌어안고 입맞춤을 해 줄 것만 같았다.
방 안을 천천히 거닐며 그의 흔적 위를 더듬었다.
거실에는 그가 여행을 갈 때마다 사 온 선물들이, 두서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의 취향은 참으로 특이해서, 도무지 남에게 자랑할 수 없는 것들만 잔뜩 있었다.
그러다가 고급스러운 은촛대 앞에서, 나루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웬일로 이렇게 그럴싸한 걸 다 사 오셨대?
―결혼식 올리고 첫날밤에 여기에 초를 켜 놓으면 근사할 것 같아서.
―뭐야, 지금 그거. 은근슬쩍 프러포즈 하는 거야?
―그럼 좀 더 격하게 해 줄까?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그것이 일상이었고, 그것을 잃게 되리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은 당연했고, 그가 숨을 쉬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 당연한 것을 깨부순 것은, 바로 나다. 내가 그를 죽였다.
나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심장을 떼어 내 멀리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테니까.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 때문에 전신이 아파지는, 이런 고통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드러누웠다.
항상 그와 함께 보았던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루는 생각했다.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넌 아직 살아 있을 텐데.’
만약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있는 힘껏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 * *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잠에서 깨어난 나루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꼬르륵―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니. 난 정말 최악이야.’
내 목숨을 내어 줘도 아깝지 않은 남자가 죽었다. 그런데도 나는 잠을 자고 허기를 느낀다.
‘싫다, 정말.’
죽고 싶다고, 나루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 날 같이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이런 기분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목숨은 그가 구해 준 것이기에, 함부로 죽을 수도 없었다.
내 목숨에는 그가 갖지 못한 삶이 담겨 있다. 멋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그래, 일단 먹자. 이러라고 살려 준 게 아닐 테니까, 일단 먹고 나서 기운차게 자책하고 경멸하자.’
그런 생각이 들어, 나루는 이불을 걷어 내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여긴…… 어디지……?’
내 방이 아니다.
그러나 낯설지도 않다.
‘윤영이네 집……도 아니고, 본가도 아니고…… 어디야, 여긴?’
나루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부엌이 딸린 좁은 원룸이었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침대에 누워서도 보안이 형편없는 현관문이 보일 만큼 좁았다.
이사를 하려는 건지, 들어온 건지, 짐 상자가 쌓여 있었고,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이 폴더폰이었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64화음 폴더폰.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었다.
나루는 진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폴더폰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살펴봤다.
‘여기, 진짜 뭐지? 누구네 집이지?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 여길 온 거지? 어젯밤에 울다가 드러누웠고, 그대로 잠든 것 같은데……. 아닌가? 충격 때문에 몽유병 같은 게 생긴 건가? 나도 모르는 새에 남의 집에 기어들어 온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주인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폴더폰을 내려놓고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나저나 이 집 주인은 어딜 간 걸까? 설마 욕실에 있는 건 아니겠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집 안에 인기척이라고는 나루의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잘된 일이다.
주인이 오기 전에 나가면 이 해프닝은 아무 문제없이 끝날 것이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던 나루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잠옷은 또 뭐야?”
나루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입을 것 같은, 토끼 얼굴이 잔뜩 그려진 잠옷.
‘뭐야, 나. 남의 집에 들어와서 잠옷까지 챙겨 입고 잔 거야?’
몽유병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면, 참으로 치밀한 몽유병이다.
‘이걸 입고 나가기는 좀 그런데. 어쩌지?’
방 안을 둘러봤지만 갈아입을 만한 옷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 뜯지 않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남의 집에 신세를 진 주제에, 상자를 뜯어서 옷을 훔쳐 입을 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잠옷은 빌리고, 신발은…….’
현관문 앞을 살펴봤다.
나루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은 없었다.
삼선 슬리퍼 하나와 구겨진 운동화 하나뿐.
‘슬리퍼를 빌리자.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가서 돈 가지고 내려와서 지불하면 되겠지. 옷 갈아입고 여기 와서 우편함에 잠옷이랑 슬리퍼 빌린 값을 넣어두면 될 거고.’
계획을 세운 나루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남의 집에서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은 없으니까.
슬리퍼를 신은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 복도가 있었다.
복도식 원룸 빌라인 모양이다.
‘달리자.’
라고, 나루는 생각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후다닥 달리던 나루는.
퍼억―!
“우왓! 깜짝이야.”
누군가와 부딪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친 엉덩이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나루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재경…….”
왜인지 낯설지 않은 원룸 빌라 복도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대충 빗어 넘긴 연갈색 고수머리, 다정한 장난기가 가득한 큰 눈, 남자치고는 붉은 입술을 가진, 상큼한 미남.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재경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뭐지?’
재경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어디가 다른 걸까?
재경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나루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그래, 귀걸이.’
재경은 취직을 한 후, 요란스럽게 하고 다녔던 피어싱을 다 빼 버렸었다.
그랬는데 지금 재경의 귀에는, 대학 때처럼 여러 개의 피어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괜찮아?”
재경이 물었다.
“어…… 어어, 어. 괜찮아.”
“날 어떻게 알아? 우리 과인가? OT 때 못 본 것 같은데. 넌 이름이 뭐야?”
“어?”
날 놀리는 걸까?
“이름. 우리 학교인 거 맞지? Y대.”
“어?”
물론 Y대를 졸업하기는 했다.
“무슨 과야? 우리 과? 어, 그러니까 생명공학?”
재경은 언제나 그렇듯 짜증내는 기색 없이 다정하게 물었다.
“어, 어. 생명공학을 전공하긴 했는데……. 저기, 재경아. 나 지금 이거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거든? 이거, 네가 꾸민 일이야?”
그제야 이 모든 일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윤영이 재경에게 연락해서 걱정스럽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재경이 나루의 기운을 차리게 해 주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재경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됐어, 모르는 척하지 마. 다 들켰어, 성재경.”
“응?”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런데 나, 이런 짓 할 기분 아니야. 걱정 마. 자살은 안 해. 일단 혼자 고민 좀 하고, 생각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저기, 있잖아.”
재경이 나루의 손목을 잡았다.
“나, 진짜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네 이름 좀 알려 줄래? 나도 같이 좀 생각하자.”
“하아. 나루잖아, 연나루. 이런 장난 싫다니까.”
“아, 연나루. 우리 과 수석 입학! 전액 장학금! 맞지?”
“재경아……. 나, 진짜로.”
“와, 너였구나. 천재들은 범상치 않다더니. 역시…… 너, 진짜 범상치 않다. 어떤 앤지 되게 궁금했는데, 이건 또 신선하네.”
불현듯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재경에게도 소중한 친구였다. 둘은 형제처럼 친했다.
그런 그가 죽었는데, 재경이 이런 장난을 치며, 이렇게 웃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제야 나루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재경의 모습을 뜯어봤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재경이 너무 젊었다.
아니, 젊다기보다는 어린 느낌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설마……!’
나루는 고개를 휙 돌렸다.
복도 벽 너머로 눈에 익은 정경이 보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거리. 항상 추억 속에 묻혀 있다가 슬쩍 떠올라 그리움을 자아내는 거리.
‘설마…….’
숨이 가빠졌다.
나루는 다시 원룸 쪽 벽을 돌아봤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건물.
‘설마…….’
눈물이 차올랐다.
‘설마 여긴…… 내가 대학 때 자취하던…… 원룸? 그렇다면…… 이건…….’
“안 들어가고 뭐 하냐?”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루는 오열할 뻔했다.
하지만 꾹 참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재경의 뒤에,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와 기름한 눈,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눈빛, 살짝 찡그린 미간.
“오, 지후. 콜라는 사 왔어? 아, 인사해. 얘가 우리 과 수석 입학 연나루래. 나루, 인사해. 얜 내 친구…….”
“민……지후…….”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리고 날 위해 목숨을 잃은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