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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헤어져야 하겠지 (23/24)

22. 헤어져야 하겠지

그즈음 용들의 나라 드라코니아 왕실에서도 어수선하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케레시아 왕후가 얼마 전 큰 병이 들어 요양 중인 게 이유였다. 게다가 아젤란 제국에 공녀로 가 있던 스킬라 공주까지 지병에 걸려 되돌아온 상태였다. 국왕인 퀴리오스 왕의 심려가 대단해 한동안 조회도 나가지 않고 국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퀴리오스 전하를 전혀 뵐 수 없단 말씀입니까?”

아젤란 제국에서 온 사절단이 드라코니아의 외교업무를 맡은 콜루베르 후작에게 물었다. 콜루베르 후작이 노련한 관료답게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응대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 전하의 마음을 헤아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한 나라를 책임지는 군주로서 마냥 적절한 행동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랏일은 저와 재상 각하께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이번에 방문하신 건 아젤란 제국의 국혼 때문이라고요?”

“그렇소이다. 폐하께서 내달 1일, 혼례식을 올리실 예정이십니다. 드라코니아에서도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축하사절이나 하례 선물 등을 신경 쓰라는 뜻이었다. 아젤란의 사절단 일행이 두루마리로 된 국서를 내밀었다. 콜루베르 후작이 즉시 흐뭇한 표정을 연출하며 정중하게 받아들었다.

“그러시군요. 정말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시일이 너무 촉박한 듯 하지만 퀴리오스 전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드로스 대륙 전체의 경사이니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소이다.”

“맡겨주십시오.”

그 후로도 콜루베르 후작은 콧대 높은 제국사절단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갖은 애를 쓰며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겨우 그 일을 마무리하고 해방되듯 접견실 밖으로 나왔다. 연신 밝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낯빛이 곧바로 어둡고 무뚝뚝하게 변했다. 잠시 멈춰 서서 멀리 위치한 어느 한 방향을 주시했다. 지금 드라코니아 왕실의 일원들이 있는 곳, ‘용의 계곡’ 쪽이었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 재미난 인간 노릇을 하는 것도 별로 오래 남지 않은 것 같은 예감이 밀려들었다.

“꽤 괜찮은 경험이었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자신의 일터로 발을 옮겼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우선은 그의 일에 최선을 다할 셈이었다.

***

“이대로 있을 수 없다.”

퀴리오스 왕, 아니 검은 언덕처럼 보이는 흑룡 모습의 퀴리오스가 말문을 열었다. 그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광활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동굴 안이었다. 그의 맞은편 한쪽 구석에 붉은 빛의 용 한 마리가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후욱, 훅······.

거칠게 가슴을 오르내리며 이어가는 숨소리가 그 큰 공간을 휘젓듯이 울려댔다. 그 바로 앞에 앉은 퀴리오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들이 있는 곳보다 조금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스킬라가 인간 모습을 유지한 채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어떡하긴. 당장 아벨라 여신께 가서 고발이라도 해야지. 정령왕이 내 아내를 이런 꼴로 만들었다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니냐?”

“하지만 아빠. 그렇게 되면 우리 용들이 벌인 일까지 다 밝혀야 하잖아요? 그럼 우리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퀴리오스가 커다란 황금빛 눈을 껌뻑이며 힘없이 누워있는 적룡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지난 전쟁 때 마물을 지휘하며 소동을 벌였던 용이 바로 케레시아 왕후였던 것이다. 히에무스의 ‘얼음 창’에 공격을 당한 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숨만 겨우 붙은 채 돌아왔다. 이후 계속 투병 중이었지만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을 받을 걸 각오해야 하겠지. 어쩔 수 없다. 네 엄마를 이리 방치해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

“그리고 너 또한 그렇게 망가진 몸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단 말이냐? 이대로는 다른 방법이 없어. 여신께 하소연하는 방법 외에는!”

“아빠…….”

스킬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악물었다. 사실 그녀도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비의 말대로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그녀가 계획했던 일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히에무스와 그 인간 여인을 갈라서게 하는 일도 달성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대자연 어머니에게 모든 중재를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최소한 그녀와 어미인 케레시아의 몸이라도 회복될 수 있을 테니. 또 운이 좋으면 히에무스와 그 인간 여인의 사랑도 끝나게 할지도.

“그렇게 하도록 해요. 아빠.”

“마음을 굳혔느냐?”

“예.”

스킬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퀴리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정을 내린 이상 더 꾸물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용들 중에서도 이름난 딸바보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애처가이기도 했다. 수천 년을 함께해온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기 힘들었다.

“함께 가도록 하자. 딸아.”

“예, 아빠.”

퀴리오스는 동굴 밖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용을 불러 케레시아를 돌봐달라는 말을 건넸다. 그 용들은 스킬라의 시녀로 있던 알리샤와 히에무스의 보좌일을 하던 렌투스, 두 남매 용이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했다. 용으로서는 그들의 왕이 아니라 동등한 동료의 입장이므로.

“뒷일을 부탁한다.”

인간 모습의 두 백룡이 왕을 대하는 예를 갖추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십시오.”

퀴리오스는 잠시 케레시아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다 이내 몸을 돌려 행동을 개시했다. 주문을 외어 밝게 빛나는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스킬라를 데리고 머나먼 빛의 궁전으로 향한 것이다. 쉬지 않고 마법을 써서 이동하면 꼬박 하루 정도가 걸릴 터이다.

푸른빛과 함께 두 흑룡이 사라지는 모습을 렌투스와 알리샤가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지막 빛의 잔상까지 사그라지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안드로스 대륙에 큰 파란이 일겠구나.”

정령과 용들의 세계에, 그리고 어쩌면 인간들 세계에도.

“그렇겠죠.”

렌투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모두와 친했던 그로서는 참 무겁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

“거기 잠깐!”

“그 자리에 멈추세요.”

“흑룡이 이곳까지 무슨 일이죠?”

무수한 빛의 정령들이 퀴리오스와 스킬라 앞에 다가와 막아섰다. 둘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용의 몸이었지만 여신이 거하는 빛의 궁전에 와본 적은 별로 없었다. 퀴리오스는 한두 번인가 경험이 있지만, 스킬라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온몸을 압도하는 신비로운 빛과 거룩한 분위기에 왠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자신들이 누구인지 밝혔다.

“저는 흑룡 퀴리오스이고, 이쪽은 제 딸인 스킬라입니다.”

나이 많은 용답게 침착한 태도로 용건을 꺼냈다.

“아벨라 여신을 만나 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전할까요?”

“겨울의 정령왕 히에무스에게 공격당해 제 아내와 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하여 그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

작은 빛의 정령들이 깜짝 놀랐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하는 말로 떠들었기에 조금 거친 바람 소리나 파도 소리 같은 음색이 떠도는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한 정령이 말을 건넸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 정령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더니 둘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따라오세요.”

무지갯빛을 쏟아내며 등불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정령을 따라 걸었다. 곧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난 나무숲을 지나 영롱한 빛의 차양이 하늘거리는 공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수많은 빛의 정령들이 나타나 빛의 차양을 양쪽으로 걷어내 길을 터주었다. 순간 안쪽에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밝은 광휘가 몰아치듯 새어 나왔다. 퀴리오스 부녀가 실눈을 뜬 채 바라보니 넓게 펼쳐진 잔잔하고 푸른 호수가 보였다. 이어 그 너머로 금빛 잎사귀를 단 거대한 은빛 나무와 그 위에 당당히 자리잡은 여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서 오너라. 흑룡 퀴리오스와 그 딸이여.”

광활한 공간을 뒤흔들 것처럼 힘찬 메아리가 울렸다. 이어 신록의 빛을 품은 듯한 선명한 초록빛 눈동자가 그 둘의 눈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동시에 퀴리오스와 스킬라는 등을 타고 흐르는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할 때의 무력감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그건 바로 절대적인 존재가 내뿜는 무한하고 신성한 힘의 파동이었다. 지상 최강의 종족인 용족이지만 그 앞에선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것. 이곳에선 어떤 술수나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퀴리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여신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스킬라 역시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아비를 따라 똑같은 인사말을 내보냈다.

“그래, 그대가 내 아들인 겨울의 왕을 고발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그, 그렇습니다.”

여신이 ‘내 아들’이라 지칭하지만 사실 거기에 큰 의미를 담지 않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에게 있어 모든 피조물은 그냥 동등하게 여겨질 뿐이니까. 그 단어에 특별히 주눅 들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하게 들렸다.

“무슨 일인지 소상히 말하도록 하라.”

“예, 그럼…….”

퀴리오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뜸을 들이며 머리를 굴렸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얘기해야 했기에.

“제게는 6000년을 함께 한 아내가 있습니다. 케레시아란 이름의 적룡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겨울의 왕이 휘두른 얼음의 창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중입니다. 벌써 한 달 넘게 지났는데 의식조차 되찾지 못하고 있습지요. 게다가 지금 제 옆에 있는 딸도 그의 마법 공격을 받아 큰 상해를 입은 상태입니다.”

여신의 예리한 초록색 눈이 스킬라를 훑었다.

“흠, 그렇군. 히에무스의 힘에 당한 게 틀림없군.”

“억울합니다, 아벨라 님! 당신께서 부여하신 정령왕의 힘을 그렇게 함부로 휘두르면 안 되지 않습니까? 부디 여신께서 그가 저지른 일을 응징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아내와 딸의 몸을 치료해주십시오.”

“겨울의 왕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겠지.”

“그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가 아는 사실을 하나도 남김없이 고하도록 하라.”

퀴리오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수밖에. 결과가 어찌 됐든 최소한 아내와 딸의 몸은 회복될 것이다. 퀴리오스는 찌푸린 얼굴로 그간에 있었던 일을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모든 이야기를 끝마치자 일대에 긴 침묵이 감돌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퀴리오스가 조금 얼굴을 들어 확인하니 아벨라 여신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포함해 용들이 벌인 낯 뜨거운 일에 대해서도 낱낱이 알린 탓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열심히 눈치를 살폈다. 옷자락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아 괜히 신경 쓰였다.

“내 아들의 말도 들어봐야 하겠다.”

“예?”

마침내 아벨라 여신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한쪽의 말만 듣고 판단 내릴 수는 없지. 겨울의 왕을 위시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불러내 조사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럼 재판을 여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재판을 열어 잘잘못을 가리는 게 옳겠지. 히에무스와 다른 정령들의 과실을 따질 것이다. 아울러 그대 용들의 죄도 물을 것이고.”

“……!”

“이의 있는가? 흑룡 퀴리오스와 스킬라.”

두 부녀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다.

“아뇨, 없습니다.”

“좋다. 바로 관련인들을 부르겠다.”

***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는 루카스를 데리고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알현을 청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많은 정령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눈의 여왕과 북풍, 세 명의 하급 정령까지. 모두 히에무스와 에일린의 행방을 찾기 위해 나선 길이다. 한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즈음 리히트 시종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알렸다.

“백작 각하,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기회가 닿지 않을 듯합니다. 폐하께서 워낙에 바쁘셔서요.”

“그렇소?”

“다음에 오시지요. 아니면 일단 댁에 가 계시면 알현 날짜와 일시가 정해지는 대로 속히 전해드리겠습니다.”

브로미오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명백히 황제가 피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지요.”

깊이 허리를 숙이는 시종장과 인사를 나눈 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조바심이 난 얼굴로 내내 뒤를 따라다니던 눈의 여왕이 따지듯 물었다.

“이대로 물러갈 겁니까? 인간 군주를 만나지 못한다면 저 시종에게 마법을 걸어서라도 뭔가 알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브로미오스가 모처럼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군. 말이 나온 김에 그대가 직접 시도해 보면 어떨까?”

그녀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후 곧장 몸을 돌려 리히트 시종장에게 다가가 마법을 걸었다. 이내 그가 모든 행동을 멈추더니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바로 질문을 시작했다.

“시중드는 인간! 너 우리 왕의 행방을 알고 있느냐?”

리히트 시종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정말 모르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때 멀찍이 지켜보던 아두스가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참지 못하고 휙 날아들었다.

“아이 참, 눈의 여왕님. 다짜고짜 그렇게 물으시면 황당하지 않겠어요?”

“그럼 어떡해야 한단 말이냐?”

눈의 여왕이 뺨을 씰룩거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아두스는 겁이 났지만 무시하고 리히트 시종장을 향해 다시 물었다.

“이것 봐, 리히트 시종장. 라케르타 공작 저하를 알고 있지? 요즘 통 보이지 않는데 행방을 알면 가르쳐다오.”

“저는 모릅니다.”

눈의 여왕이 아두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난감해진 아두스가 고개를 푹 숙이는데 리히트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황제 폐하와 케일론 님께서는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

용기를 되찾은 아두스가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음 말을 건넸다.

“그래? 그럼 에일린 님은? 그분은 어디 계시지?”

“이곳, 라피스 궁에 머물고 계십니다.”

***

브로미오스는 바로 케일론을 찾아갔다. 세 정령은 에일린의 행방을 찾으러 갔기에 루카스와 눈의 여왕, 북풍과 함께였다. 마침 제국의 휴일이기에 케일론은 자신의 성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황제와 달리 순순히 만나주었다.

“의외로군요. 파인스 백작께서 제 성을 방문해주시다니.”

그의 성에 있는 다른 방과는 구분되는, 제법 고급스럽고 공들여 꾸며진 접견실에서 맞이했다. 케일론은 앞서 건넨 말과는 다르게 이미 그가 찾아올 걸 예견이라도 한 듯 천연덕스러운 태도였다. 브로미오스는 그답지 않게 초조해져 곧바로 용건을 들먹였다.

“며칠째 라케르타 공작님의 행방이 묘연해서요. 대마법사께서 뭔가 아실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케일론은 브레이가 급히 내온 차를 직접 우리며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히에무스와 함께 지내던 다른 이들 역시 정령이거나 최소한 그와 관련된 이들일 거라 짐작했다. 조금 전 눈꺼풀에 마법약을 발랐기에 눈의 여왕과 북풍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줄곧 그들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경고를 해줘야 했으니까. 브로미오스가 눈썹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가둬놨습니다. 힘을 묶어서.”

“뭐라고?!”

브로미오스와 눈의 여왕이 소스라치게 놀라 동시에 외쳤다. 케일론이 적당히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라 앞으로 내밀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제힘으로 제압해서 속박해 뒀습니다. 의아한 얼굴이시군요, 파인스 백작. 아니, 사실 당신 역시 어떤 정령왕인가요?”

“……!”

“인간 귀족 노릇을 해 보니 어떻습니까? 만족할 만큼 재미있으신가요?”

브로미오스는 그가 건넨 당돌한 질문에 잠시 멍해졌지만 정령왕답게 곧 위엄 있는 자세를 되찾았다.

“믿을 수 없군. 그대 자신의 힘으로 정령왕을 제압했단 말인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물론 원래대로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정령왕의 진명을 누군가가 알려줬기에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누가 알려줬지?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브로미오스는 이맛살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를 대신해 옆에 있던 눈의 여왕이 앙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인간 여인이로군요! 그 괘씸한 여자가 기어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북풍도 거친 탄식을 토해냈다.

“이런, 결국…….”

브로미오스는 그들에게 힐끔 눈길을 준 후 다시 태연하기 짝이 없는 케일론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가…… 에일린이 자청해서, 스스로 가르쳐줬단 말인가?”

케일론은 바로 답하지 않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 댔다.

“물론입니다.”

별안간 브로미오스의 뒤에서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거짓말! 그럴 리 없어! 에일린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유니콘인 루카스였다. 붉어진 뺨에 두 손을 꽉 움켜쥐며 연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필시 네놈들이 나쁜 마법을 걸어서 강요한 게 틀림없어!”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어쨌든 그녀가 알려줬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 대가로 그녀는 이 아젤란 제국의 황후가 되실 거니까요.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실 겁니다.”

“뭐?”

“인간들은 눈앞의 이익에 약한 편이죠. 들어보니 그 정령왕의 사랑도 가짜였다면서요? 사랑의 묘약을 삼킨 덕분에 일어난 일이라던데.”

“그건…….”

“에일린도 결국 그런 관계가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은 겁니다. 성가신 존재를 떨쳐내 버리고 좀 더 자신에게 이로운 길을 택한 것이죠.”

“음, 그랬단 말인가?”

브로미오스는 짧은 신음을 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들 에일린을 믿고 싶었지만 케일론의 저 말을 들으니 자신이 없어졌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더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할 테니까. 그녀가 히에무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저 막연히 추측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진심을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오랜 세월 살아오며 겪어봤던 인간들 대부분의 성향 역시 그녀를 완전히 믿는 걸 꺼리게 만들었다. 브로미오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얼른 다음 화제를 들먹였다. 지금으로선 더 중요한 다른 사항에 집중해야 했다.

“그를 묶어둬서 뭘 할 생각이지? 그대의 사역마로 만들어 부릴 셈인가?”

“그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단은 풀어줄 겁니다. 진명을 알고 있으면 언제든 속박하는 게 가능하니 굳이 계속 잡아둘 필요도 없으니까요.”

브로미오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명령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그럼 당장 풀어줘.”

“아직은 안 됩니다. 에일린이 두려워할 테니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그가 욱해서 해코지를 가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적어도 황후가 되신 후에 풀어줄 생각입니다. 황후가 되시면…… 정령들도 손대지 못할 테니까요.”

부부가 되면 동격, 한 나라의 군주와 똑같은 취급일 테니까.

“훗, 그런 것도 알고 있었나?”

브로미오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잠시 교활한 케일론의 보랏빛 눈동자를 죽일 듯이 쏘아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재로선 그저 물러나는 수밖에. 정령의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이름을 인간에게 가르쳐 준 히에무스가 어리석었다. 물론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 때문이겠지만…… 그 사랑이 히에무스 혼자 한 일방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니.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 대책을 논의해야 했다. 브로미오스는 여유롭게 찻물을 홀짝이는 케일론을 다시 한번 노려보다 그대로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다 알려진 마당에 굳이 인간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함께 왔던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속히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케일론은 텅 빈 접견실에 남아 기계적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승리한 자의 얼굴이어야 할 텐데 왠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화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게 옳은 거야.”

그녀가 진정 행복해지려면. 잠깐은 힘들고 괴롭겠지. 하지만 마지막엔 그녀도 깨달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걸. 다른 종족과 엮이면 절대 함께할 수가 없다. 결국엔 이별하는 것 외엔 답이 없지 않은가? 그도 어릴 때 하프 엘프인 어머니와 헤어져야만 했었다. 혈육인데도 함께할 수가 없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이였기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최면이라도 걸듯 낮게 여러 번 같은 말을 읊조렸다.

“이게 옳다고.”

점점 더 탁하게 쉰,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옳아.”

***

한편 세 하급 정령은 라피스 궁에 남아 에일린의 행방을 찾는 중이었다. 아까 리히트 시종장을 통해 대충 위치를 전해 들었지만, 막상 돌아 다녀보니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꽤 오랜 시간 이리저리 헤맨 끝에 마침내 의심이 가는 어떤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곳인가 봐!”

라피스 궁에 있는 네 개의 첨탑 중 남쪽에 위치한 한 곳이었다. 이중삼중으로 결계가 펼쳐져 있고 입구를 지키는 마법사 두 명의 모습도 보였다. 세 정령은 어지간한 결계는 쉽게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를 머리에 착용했기에 바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바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으, 쉽지 않겠어.”

아두스가 당황한 듯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강력한 결계였다. 아마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계 중 가장 강한, 최고 수준에 속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프리기가 수심이 가득한 눈으로 두 동료의 망연해진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두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꼈다. 잠시 생각에 잠기다 곧 두 정령에게 말했다.

“우리 세 명이 끼고 있는 마도구를 한 명에게 몰아서 쓰게 하면 어떨까?”

눈치 빠른 제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우리 셋이 한꺼번에 통과하지는 못하겠지만 한 명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누가 들어갈까?”

셋은 서로 분위기를 살피다 제퓌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아두스가 냉큼 머리에 쓴 써클릿을 벗어서 제퓌에게 내밀었다. 프리기 역시 따라 했다.

“네가 가보도록 해. 에일린 님이 널 제일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예전에도 네 이름을 가장 먼저 불러주셨잖아.”

제퓌는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었다.

“으응? 그, 그럴게.”

제퓌는 자신이 머리에 쓰고 있는 써클릿 외에 다른 하나는 목에 걸고 이어 손에도 하나 든 채 첨탑 입구를 향해 날아들었다. 예상대로 별다른 방해 없이 결계를 지나칠 수 있었다.

제퓌는 그대로 첨탑 안으로 도달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널찍하고 아늑해 보였다. 남쪽에 위치한 덕분인지 밝고 따스한 봄 햇살도 들이치는 데다 사방이 품격있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제퓌는 두리번거리며 에일린을 찾았다. 하얀색 휘장 너머 커다란 침대 위에 누군가가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재빨리 다가가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일린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유난히 창백한 얼굴에 다소 야윈 듯한 모습이었다. 주변에 다른 이들은 없는 것 같아 제퓌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에일린 님!”

“응…….”

그녀가 잠시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생기를 잃은 연초록 눈동자가 제퓌를 보자 크게 휘둥그레졌다.

“제퓌?”

***

“이런, 역시 그 사악한 마법사가 나쁜 마법을 써서 왕의 진명을 발설케 한 거로군요!”

그간 에일린이 겪었던 일을 설명하자 제퓌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에일린이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히에무스가 괜찮을지 걱정돼요. 나 때문에 지금 무슨 험한 일을 당하고 있을지…….”

에일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대로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으며 괴로워하자 제퓌가 훌쩍 날아올라 앙증맞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게 왜 에일린 님 탓이에요? 그런 일을 저지른 사악한 마법사와 인간 우두머리 잘못이지.”

“모르겠어요, 제퓌. 그냥 히에무스에게 너무나 미안해져서 모든 게 내 탓인 것처럼 느껴져요. 어찌 되었건 제가 발설했기에 그가 그들 손에 잡히게 됐으니까.”

“에일린 님…….”

“어쩌면 좋죠? 제퓌. 그가 많이 힘들 텐데.”

제퓌는 눈썹을 늘어뜨린 채 계속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사실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기막혀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자신들의 왕이 인간들 손아귀에 붙잡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두려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태어난 이래 지금이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자신의 감정보다 에일린이 입었을 상처가 염려돼 조금이라도 더 위로해주기 위해 애썼다. 아마 왕께서도 이렇게 행동하길 원하셨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일린 님. 다른 정령왕들께서 히에무스 님의 행방을 열심히 찾고 계시니 곧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실 거예요.”

“그럴……까요? 정말…… 뭔가 수가 있을까요?”

에일린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고말고요! 요즘 우리 왕께서 친해진 정령왕들이 많으시잖아요? 그분들이 힘을 모으시면 해결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어요?”

“…….”

그녀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작은 정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퓌는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요?”

“예! 왜 에일린 님을 원망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괴로우실 텐데.”

제퓌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확신에 차 말했다.

“자책감 같은 건 가지지 말고 몸이나 돌보며 기다리세요.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며칠 사이에 안색이 많이 상하셨네요.”

“난 괜찮아요, 고마워요. 제퓌, 그렇게 말해줘서.”

에일린이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손바닥만큼 작은 정령의 격려가 거대한 바위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계속 함께 있고 싶었지만 히에무스가 걱정돼 속히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제퓌, 일단 여길 나가서 히에무스가 어떻게 됐는지 좀 알아봐 줄래요? 다른 정령왕들에게 가서 그분들 의견도 들어보고요.”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에일린이 대답 대신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인다면.

“그럼 얼른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다시 돌아올게요, 그동안 식사 잘하시고 잠도 푹 주무시면서 지내셔야 해요.”

“그럴게요.”

에일린이 헤어지기 전 제퓌를 손에 태워 뺨 가까이 끌어당겼다. 제퓌는 어색하긴 했지만 그리 낯설지도 않은 행동을 취했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살짝 비빈 것이다. 왠지 서로의 기분이 좀 더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밀려들었다. 이내 제퓌는 아쉬운 표정을 뒤로 한 채 에일린 곁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아두스와 프리기가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퓌는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 왕의 행방도 수소문해 보고 다른 정령왕들의 분위기도 살펴볼 작정이었다. 아두스와 프리기는 황궁에서 왕을 찾아보기로 하고 제퓌는 루쿨루스 숲으로 향하기로 했다. 서둘러 각자 길을 떠났다.

***

제퓌는 루쿨루스 숲으로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도착했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 우선 가을의 궁전으로 방향을 정했다. 짐작대로 커다란 물푸레나무 밑에 여러 정령이 모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와 대지의 왕 텔루스, 눈의 여왕과 북풍 등이었다. 가을의 궁전 주인인 브로미오스가 제퓌를 발견하곤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포르르 날아가 커다란 그들 사이에 끼어 얌전히 자리를 잡자 브로미오스가 물었다.

“그래, 에일린을 찾은 것이냐?”

“예. 라피스 궁 남쪽 탑에 갇혀 계셨어요.”

제퓌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에일린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전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굳었던 표정을 풀며 한결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그랬군. 인간 마법사의 마법에 당해서 그런 짓을 하게 된 거였어.”

눈의 여왕이 마뜩찮은 기색으로 차갑게 내뱉었다.

“정령이 찾아오니 할 수 없이 꾸며내 변명한 말이겠지요.”

제퓌가 발끈해서 되받아쳤다.

“그렇지 않아요! 에일린 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세요.”

눈의 여왕이 매서운 시선으로 쏘아보자 제퓌는 금방 주눅 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아닌데…….”

“그런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그 인간 여인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란 건 바뀌지 않으니까. 이제 도대체 어쩌면 좋겠습니까?”

눈의 여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북풍이 의견을 내놓았다.

“밤에 인간 마법사들에게 잠입해 기억을 몽땅 지워버리면 어떨까요?”

대지의 왕 텔루스가 팔짱을 낀 채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다. 인간 황제도 알고 있을 텐데 황제에게 손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마법사들이 미리 대비해 놨을 거야.”

“…….”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방법 외에는. 눈의 여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행을 돌아봤다.

“대자연 어머니께 모든 걸 밝히고 사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누군가가 모든 결과를 다 감수하고 인간 황제에게 손을 쓰든지.”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리 겨울의 왕을 위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선뜻 나서 행할 자는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벌을 받게 될 테니까. 그건 바로 ‘소멸.’ 정령이 받게 되는 벌 중에서 가장 크고 가혹한 벌이었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군주를 해치는 일을 시도하는 정령은 아무도 없었다. 겨울의 권속이라 해도 그것만큼은 감수하지 못했다. 아무리 오래 세월을 살았다 해도 소멸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자연 어머니께 해결을 부탁하는 수밖엔 없겠군……. 할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브로미오스와 에스타스도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경우라면 몰라도 진명이 알려진 마당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들의 경험을 곱씹어 봐도 다른 해결책이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히에무스와 에일린 사이의 비밀도 밝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히에무스는…….

‘해독약을 먹어야 하겠지.’

에스타스는 찌푸린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른 정령왕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미적대기만 하는 그들이 답답한지 눈의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지요. 바로 빛의 궁전으로 가겠습니다.”

“하아.”

한숨을 쉬며 다른 정령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별안간 가을의 궁전에서 문지기를 맡은 중급 정령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왕이시여! 빛의 궁전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뭐?”

다들 의아한 눈빛이었다. 빛의 궁전으로 가려던 순간에 그곳에서 사자가 나오다니. 벌써 모든 사실이 알려진 것일까? 브로미오스가 얼른 대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네 명의 작은 빛의 정령이 유난히 환한 빛을 내뿜으며 등장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궁전당 빛의 정령이 하나씩 배정된 모양이다. 세 명의 정령왕이 이곳에 있으니 모두 여기 나타난 것이다. 나머지 한 정령은 당연히 겨울의 궁전에 파견될 예정이었지만 정령왕을 찾지 못하니 겨울의 궁전 2인자인 눈의 여왕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인사드립니다. 정령왕들이시여.”

“그래, 환영한다.”

한 정령이 대표로 인사말을 전하자 브로미오스가 일단 나서서 응답했다.

“무슨 일이지?”

“대자연 어머니께서 여기 계신 정령왕들을 부르셨습니다. 겨울의 왕도 함께요.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와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에게도 소식을 전할 겁니다. 관련된 이들은 모두 빠짐없이 내일 아침까지 빛의 궁전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내일 정오에 빛의 궁전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에요.”

“재판이라니?”

대표로 나선 빛의 정령이 바로 대답했다.

“흑룡 퀴리오스와 그 딸이 겨울의 왕 히에무스를 고발했습니다. 적룡 케레시아를 공격한 일에 대한 죄를 묻는다고 하더군요.”

“뭐?”

“대자연 어머니께서 관련자들을 모두 모아 얘기를 들어보시고 잘잘못을 판단하실 예정이세요. 하니 모두 늦지 않게 빛의 궁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

“쯧.”

대지의 왕 텔루스가 혀를 찼다. 일이 더 복잡해졌다. 다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다 체념한 듯 받아들였다.

“알겠다.”

하나같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

빛의 궁전으로 떠나는 정령들을 배웅하고 난 후 제퓌는 에일린이 걱정돼 다시 황궁으로 날아갔다. 가지고 있던 마도구를 넘겨줬기에 도착 즉시 아두스와 프리기를 찾았다. 마침 그들은 남쪽 첨탑 주변에 모여 있었다.

제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히에무스 님은 찾았어?”

돌로 된 창틀에 앉아 있던 아두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찾지 못했어. 우리 힘으론 무리야. 마법청 지하에도 가봤지만, 온통 단단한 결계가 펼쳐있어 어렵더라고. 마도구 세 개를 합쳐도 통과할 수 없는 곳투성이었어.”

“마도구 세 개를 해도 안 된다고?”

“마법청엔 고대부터 내려온 결계가 펼쳐진 곳도 존재한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어. 아마 그런 곳이겠지.”

“……그랬구나.”

“네가 갔던 곳에선 어땠어? 정령왕들께서 쓸 만한 방법을 생각해 내신 거야?”

제퓌 역시 옆으로 고개를 흔들며 좀 전에 가을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두스가 유심히 듣더니 턱을 가만히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뭐,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지만 대자연 어머니께서 나서신다니 곧 해결되겠네.”

“히에무스 님이야 그렇겠지만 그리되면 두 분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두스 옆에 걸터앉아 말없이 다리를 달랑거리던 프리기가 불쑥 질문했다.

“두 분이라니?”

“히에무스 님과 에일린 님 말이야. 대자연 어머니께서 모든 상황을 알게 되실 거잖아. 사랑의 묘약을 왕께서 삼키신 일부터 아시게 되겠지. 그럼 두 분은…….”

“헤어져야 하겠지.”

아두스의 입에서 거침없는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뭐?”

제퓌가 인상을 쓰며 아두스를 쏘아보았다. 아두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방법이 없잖아? 사실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졌던 거라고. 인간과 정령이 함께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 그렇지 않아.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방법?”

“모, 몰라! 하지만 있을 거라고! 두 분이 헤어진다니, 말도 안 돼!”

제퓌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두 동료가 당황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응시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시는데 헤어진다니 말도 안 돼! 그럼, 안 되고말고. 두 분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실 거라고! 그렇지 않아? 프리기!”

프리기가 화들짝 놀라 맞장구쳤다.

“으응? 그, 그래. 그럴 거야.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퓌가 얼른 다가가 프리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가 도와드리면 잘 될 거야. 지금처럼 계속 노력하면…….”

노력하면……. 제퓌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콧잔등을 잔뜩 찡그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우…….”

속에서 잔뜩 뭉개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힘없이 프리기의 손을 놓아주며 옆으로 뚫린 창을 지나 허공으로 박차서 날아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음속에 차가운 겨울 폭풍이 쌩쌩 몰아치는 것 같았다.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가 전속력으로 처박히듯 내려가며 이리저리 휙휙 몸을 날렸다.

푸확!

그 바람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이른 봄의 꽃잎이 낱낱이 떨어져 사방에 흩뿌려졌다. 제퓌가 만들어낸 눈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가 흘린 눈물 같기도 했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큰소리를 내며 울었을 테니까. 아주 크게, 하늘이라도 떠나갈 듯이.

***

“이제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빛의 궁전이 위치한 험준한 산을 우러러보며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쓸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곁에 있던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와 대지의 왕 텔루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히에무스가 사랑의 묘약을 마신 탓이라고 몰아붙이자는 거지?”

에스타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동시에 입술을 실룩거렸다. 정말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래. 우린 벌을 받더라도 염려할만한 수준은 아닐 거야. 하지만 히에무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벌을 받게 될 수밖에 없어. 에일린에겐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대지의 왕 텔루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런 결말인가?”

보기 드문 정령의 사랑 이야기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를 넘어서서 그 둘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현실은 역시 냉정하고 가혹했다.

“하아.”

연달아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들 빛의 궁전의 입구까지 다 와서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안에 있던 빛의 정령들이 나와 재촉할 때까지. 살면서 지금처럼 이 안으로 들어가기 싫은 때가 없었으리라. 모두 구겨진 낯빛을 한 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겼다.

대자연 어머니가 계시는 빛의 호수에 다다르자 제법 많은 이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저번 봄의 여왕의 재판 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은빛 나무를 중심으로 양 진영으로 자리가 배치된 건 똑같았지만 구성하는 인물들의 양상이 달랐다. 여러 정령이 자리한 맞은편에 흑룡 퀴리오스와 그 딸인 스킬라, 단둘이 그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 일행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힐끔거리다 속히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흠, 흠. 여기가 내 자린가?”

텔루스가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호수 밑바닥에서 솟아 나있는 은빛 덩굴 의자 위에 착석했다. 모인 정령들은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와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 대지의 왕 텔루스, 그리고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와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였다. 오랜만에 보는 두 정령이 브로미오스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오셨습니까?”

“음.”

제일 앞에 있는 한 자리는 비워둔 상태였다. 히에무스가 앉을 자리였다. 아직 죄인의 신분으로 확정된 건 아니기에 같은 쪽에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눈의 여왕과 북풍 역시 와 있었지만 의자에 앉지는 않은 채 멀찍이 호수 밖에 대기한 모습이었다. 그들 외에도 구경꾼이 몇 명 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갑자기 열린 재판이어서 그런지 별로 많진 않았다. 영롱한 빛의 나무를 등지고 자리한 대자연 어머니가 모여든 이들을 찬찬히 훑으며 이지적인 초록빛 눈을 빛냈다. 이어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한 신비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겨울의 왕은 왜 참석하지 않았느냐?”

모두의 시선이 비어 있는 첫 번째 좌석으로 향했다. 브로미오스가 잠시 눈치를 보다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자력으로 이곳에 참석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머니시여.”

“무슨 말이지?”

참 답하기 곤란했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했다.

“인간들에게 진명을 들켜서 속박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세찬 칼바람이 한차례 휙 이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나갔다. 브로미오스는 정령왕의 몸인데도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와 의논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꼭 이 재판이 아니더라도.”

즉시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왔다. 용들도 놀라웠는지 스킬라가 새된 음성으로 외쳐 물었다.

“진명을 노출하다니!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에스타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딴 사람은 몰라도 저 흑룡은 히에무스의 행동에 대해 비난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뾰족한 어투로 쏘아붙였다.

“흑룡 따위가 감히 정령왕의 행동에 대해 품평을 내놓는가? 무엄하구나.”

“…….”

대자연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보다 오른손에 쥔 황금빛 왕홀을 치켜들었다.

“할 수 없군. 그가 없다면 이 자리를 마련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번엔 내가 직접 불러내는 수밖에 없겠군.”

이내 입술을 달싹이며 잇새에 신비로운 화음을 자아냈다. 그 음이 멈추는 순간 비어 있던 은빛 덩굴 의자가 찬란한 황금빛 광채로 휩싸였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었다. 맞은편에 있던 퀴리오스와 스킬라가 눈을 감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들어서 가려야 했을 정도로. 마침내 빛이 잦아들자 스킬라는 잔뜩 추어올렸던 팔을 내리며 앞을 주시했다.

“……!”

앞좌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대리석처럼 맑고 반듯한 얼굴, 시린 새벽 달빛처럼 흘러내리는 긴 은빛 머리카락을 지닌 한 남자가! 바로 겨울의 정령왕 히에무스였다.

***

“어떤 것이 더 나은가? 여기 이 황금빛 망토가 좋을까? 아니면 저기, 보랏빛 망토가 더 잘 어울릴까?”

라피스 궁에 있는 황제의 의상실이었다. 마법청에 있던 케일론은 황제가 급히 부른다는 명을 받고 식사도 거른 채 득달같이 달려왔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내내 가슴 졸였는데 정작 와서 보니 결혼식에 착용할 망토를 골라 달라는 부탁이었다. 케일론은 맥이 탁 풀렸다. 좀 짜증이 나기도 하고.

“글쎄요. 둘 다 멋지고 근사하니 그중 아무거나 입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렉스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거나 걸치라니, 안 될 말이지.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혼례식이 될 텐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지 않겠나?”

“그야 그렇지요.”

“아아, 국혼을 너무 서두른 탓에 뭘 제대로 준비할 여유가 없군. 좀 더 시일을 늦출 걸 그랬나? 에일린도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말이야. 시간이 부족하다며 날 원망하는 건 아니겠지?”

이어진 황제의 혼잣말을 들으니 더 부아가 치밀었다.

“흠, 허구한 날 로브나 입고 다니는 마법사에게 물어본 게 잘못이군. 마법사라고 모든 걸 다 잘 알 수는 없는 노릇인데 말이야. 엘로드를 불러서 다시 물어봐야 하겠군.”

케일론은 속으로 투덜대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쥐고 있던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

파앗!

갑자기 그의 지팡이가 훅 달아오르며 찬란한 황금빛 광채를 내뿜었다.

“……!”

케일론은 금방이라도 지팡이가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운 감각에 놀라 황급히 손을 뗐다. 그러자 지팡이가 저 혼자 살아있는 듯 공중으로 휙 치솟아 떠오르더니 옆으로 누운 채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황금빛의 소용돌이가 생겨나며 낯선 열기와 빛이 온 방에 퍼져 나갔다.

“헉!”

렉스와 케일론은 그 강렬한 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뒤틀었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지팡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며 붕붕거리는 회전음이 커지더니 어느 순간 딱 멈췄다. 폭발하듯 발산하던 빛도 줄어든 것 같아 두 사람은 겨우 눈을 깜빡거렸다. 천천히 몸을 돌리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긴 나뭇가지 모양의 지팡이가 어느새 희미해진 금빛을 머금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다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그대로 양탄자가 깔린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욱!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멍해진 눈으로 지팡이를 응시했다.

“뭐, 뭔가? 무슨 현상이지?”

렉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케일론 역시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흠칫거리며 렉스를 한 번 바라보았다. 다시 망연히 서 있다 천천히 다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지팡이는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황제의 질문에 답했다.

“아마도…… 여신께서 정령왕을 소환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케일론이 지팡이를 눈 가까이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저를 제외하고 지팡이에 가둬둔 뭔가를 꺼내 갈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의 근원, 바로 아벨라 여신 말입니다.”

“여신이…… 불렀다고?”

케일론이 잔뜩 흐려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닙니다. 좀 당황스럽긴 해도 그리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신께선 인간이 행한 일들에 기본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무슨 뜻인지 더 소상히 말해주시오.”

“예. 여신께서 견지하시는 원칙이라 들었습니다. 즉,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사악한 사건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인간이 일으킨 일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더군요.”

“그럼?”

“정령왕을 구속했다 해도 그로 인해 우리에게 특별히 불이익을 가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확실한가?”

“원칙상으론 그렇습니다.”

물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케일론 역시 이런 일을 겪은 건 처음이니까. 그저, 어릴 때 하프 엘프였던 그의 어머니가 알려주시거나 오래된 마법서 등에서 얻은 지식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일을 할 때 도박이라고 한 것이다. 렉스는 굳은 얼굴로 케일론을 주시하다 뒷짐을 졌다. 그대로 방 안을 몇 걸음 거닐며 생각에 잠기더니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여신께선 그런 입장이라 해도 인간에겐 그의 부재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겠지.”

“그 말씀은…….”

“에일린 말이오. 그녀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다고 여기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케일론 또한 같은 생각인지 바로 동의했다.

“그게 낫겠지요. 하지만 너무 신경 쓰실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언제든 큰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요.”

“그런가?”

“그 정령이 여신의 손아귀에 있을 땐 누구도 손댈 수 없지만 그걸 벗어나는 순간 여전히 우리가 알아낸 진명으로 속박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게 무서워서라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 국혼이 바로 코앞이니 그때만 넘기면, 완전히 폐하의 여인이 된 후라면 그녀도 더는 방황하지 않을 테지요.”

그럴 것이다. 제발 그러길 바랐다. 케일론이 원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행복해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니까. 정령왕의 힘을 가지는 것도, 황제의 총애나 재물을 더 얻는 것 따위도 관심 밖이었다.

“국혼을 서두르길 잘했군.”

“……예.”

힘없이 답하는 대마법사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텅 빈 마음속이 아릿한 통증으로 푹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매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케일론은 더욱 이맛살을 찡그렸다. 평생, 그 어떤 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통증이므로.

***

“히에무스.”

마른 관목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스산한 음성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알겠느냐?”

대자연 어머니의 물음에 히에무스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맞은편에 퀴리오스 부녀가 와 있고 전쟁에 참여해 도움을 줬던 정령들이 쭉 의자에 앉아있는 걸 보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됐다.

“알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네 진명이 인간에게 알려져 그동안 그들에게 구속된 상태였다고 들었다. 그건 이따 따로 얘기하도록 하지. 지금은 네가 적룡인 케레시아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건에 대한 경위를 따질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대자연 어머니가 잠시 고요하고 잔잔한 초록빛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불쑥 질문했다.

“왜 적룡을 공격했느냐?”

“미쳐…… 날뛰었으니까요. 저 흑룡 여자와 작당해 끊임없이 역겨운 짓을 벌여대는 걸 중단시키고 싶었습니다.”

듣고 있던 스킬라가 발끈해서 외쳤다.

“히에무스 님!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시는 거죠?!”

히에무스가 사방을 얼려버릴 것 같은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대답했다.

“에일린을 해치지 못해 안달하지 않았느냐?”

“전 그런 적 없어요. 그 여자의 손끝 하나 건드린 적 없다고요!”

뻔뻔한 흑룡의 대답에 히에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뭐라고?”

***

“믿어주십시오! 대자연 어머니. 전 그 에일린이라는 인간 여자에게 직접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스킬라가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잔뜩 늘어뜨린 채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여신께서 가진 혜안으로 살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전 그녀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히에무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신의 손을 직접 쓰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네 아비와 어미, 백룡 렌투스 등을 휘둘러서 그녀를 괴롭힌 걸 모를 줄 알았더냐? 뜬금없는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두 그녀를 해치기 위해서였겠지!”

“억측이시네요. 전쟁을 일으킨 것도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전 그저 제 소중한 친구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어서, 그저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의 힘을 조금 빌린 것뿐입니다.”

스킬라는 내민 두 손을 한 손에 모아 쥐며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억울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듯.

“한데, 제 부모님의 열의가 지나친 탓에 생각보다 전쟁의 규모가 커졌을 뿐이지요. 절대 히에무스 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악한 의도는 없었어요.”

“맹세할 수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저 히에무스 님이 확대해석하신 거예요.”

스킬라의 옆에 앉아있던 퀴리오스도 때를 놓치지 않고 딸의 의견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건 저희 내외의 욕심이 과해 전쟁을 크게 벌이게 된 것일 뿐 딸의 주장이 맞습니다.”

참다못한 히에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가증스럽군! 그럼 내 보좌였던 렌투스를 보내 에일린을 사지로 유인한 것은 뭐라고 설명할 것이냐?”

“그것 역시 저는 에일린이라는 인간 여자와 화해하기 위해서였어요. 전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로 전 그 인간 여자를 만나 친해지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는데 중간에 다른 인간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일이 어긋났을 뿐이지요.”

스킬라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술술 그때 상황을 묘사했다.

“의심스러우시면 렌투스와 제 친구인 인간을 불러 물어보시면 될 터. 엘시아라는, 아칸 왕국의 공주입니다. 그녀를 불러 물어보시면…….”

“그 여인은 이미 죽었으니 그건 불가능하겠군. 저승에 가 있는 혼까지 불러오고 싶지는 않으니.”

“……!”

여신의 대답에 스킬라는 아주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춰야 했기에.

“저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엘시아의 시신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사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렇게 돼서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죄목 하나를 줄일 수 있을 테니. 대자연 어머니가 기묘한 얼굴로 스킬라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표정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아주 엷고 야릇한 기색이었다.

“그렇군. 그럼 결론은 모두 히에무스의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건가?”

대자연 어머니의 담담하고 무심한 어조에 히에무스는 잘게 뺨을 실룩거렸다. 억울하고 기가 막혔으나 사실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었다. 저렇게 일관되게 주장하면 뭐라 반박할만한 기회를 찾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사실을 증명할 인간이 죽고 말았으니. 스킬라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마저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렇습니다. 저도 정말 안타까워요. 히에무스 님은 제가 진정으로 흠모하는 분이신데 이런 오해가 쌓이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제 어미를 공격한 건 정말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스킬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어질 말은 그녀 역시 별로 원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히에무스 님에게 정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용을 별 이유 없이 공격하는 건 금지사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 아무 이유가 없다고? 물론 가장 큰 목적은 에일린을 괴롭히는 너희들의 수법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지. 하나 수많은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를 그만두게 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히에무스가 날카롭게 지적하자 스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건…….”

퀴리오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건 따로 상응하는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겨울의 정령왕이 제 아내를 공격한 일을 벌하십시오!”

대자연 어머니가 가늘게 눈을 뜨고 고개를 약간 치켜들었다.

“좋다. 일단 그 처벌을 하는 게 좋겠구나. 히에무스, 너는 네가 한 짓을 모두 인정하느냐?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적룡 케레시아를 정령왕의 힘을 사용해 공격한 행동 말이다.”

“……인정합니다.”

“그렇군. 그 죄를 물어 앞으로 100년간 겨울의 정령왕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벌을 내리겠다. 그동안 눈의 여왕이 그 임무를 대행하도록. 이의 있느냐?”

“없습니다.”

히에무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맞은편에 있던 퀴리오스가 발끈해 소리쳤다.

“그건 너무 가벼운 벌입니다! 아벨라 여신님! 정령왕이 임의로 용을 해쳤는데 겨우 그 정도 벌이라니요?”

대자연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퀴리오스에게 짐짓 꿈결처럼 상냥해 보이는 시선을 보냈다.

“죽인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적절하지 않은가?”

일견 부드러워 보이지만 칼날처럼 휘두르는 단호한 대답에 퀴리오스는 금방 기세가 꺾였다. 여신의 위엄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순간 오금이 저릴 정도니. 떨어지지 않는 둔한 입을 우물거리며 겨우 다음 청을 내밀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냥 저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제 아내와 딸아이의 몸을 치유해 주십시오.”

“그건 안 되겠군.”

“!”

퀴리오스와 스킬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자연 어머니가 더욱 나긋나긋해 보이는 미소를 한껏 흘리며 두 흑룡에게 설명했다.

“그대들 역시 별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나? 그대들에게 주어진 힘을 고민 없이 남용한 것이지. 그러니 그에 대한 벌로 둘의 몸을 회복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런……. 안 됩니다! 여신이시여, 부탁입니다. 제발 제 아내와 딸의 몸을 낫게 해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 제발!”

발밑이 호수였기에 퀴리오스는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상체를 꿈틀거리며 간청했다.

“아니, 그대들 역시 순응하고 이대로 벌을 받도록 해라.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 때는 결과를 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아울러 그대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천 년 동안 용의 계곡에 연금하는 벌을 내린다.”

“천 년이라고요?!”

“그래, 하니 그대가 세운 나라 드라코니아의 왕 노릇도 그만해야겠지. 적절한 절차를 밟아 인간들에게 넘겨주도록. 용이라면 용답게 사는 게 좋겠지.”

“으…….”

퀴리오스와 스킬라는 난감해진 얼굴로 신음을 토해냈다. 덩굴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잡은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한한 힘의 주인인 여신의 결정에 어떻게 토를 달겠는가? 여신은 다시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흑룡 부녀를 향해 왕홀을 쥔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둘은 그만 가보도록. 자비를 베풀어 그대의 아픈 아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도록 하겠다.”

스킬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신과 히에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다란 말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야에 어떤 온기도, 어떤 연민도 실리지 않은 히에무스의 차가운 눈빛이 날 선 비수처럼 깊이 박혀 들었다. 더러운 무엇을 보듯 그저 혐오만 담은 시리고도 시린 은푸른 빛이.

“히에무스 님…….”

스킬라는 본능처럼 예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그녀의 남은 인생은, 영원처럼 길고 긴 그녀의 청춘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차가운 겨울만이 존재하리라는 걸. 아아, 다른 방법을 써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인내심을 발휘해 그 인간 여인이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는데. 불 꺼진 아궁이처럼 잦아든 오렌지빛 두 눈에 뒤늦은 후회의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앗!”

더는 생각할 겨를도, 회한에 잠길 틈도 없이 곧 여신의 금빛 왕홀이 내뿜는 빛에 온몸이 휩싸였다. 찰나의 순간 두 흑룡은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워낙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남은 정령들마저 다소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흑룡이 사라지고 나서도 잠시 대자연 어머니는 내민 팔을 거두지 않고 있다 서서히 히에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아, 이제 다른 일에 대해 추궁할 시간이구나.”

히에무스는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네가 어찌해서 인간에게 진명을 들키게 됐는지 따져봐야 하겠구나.”

히에무스는 한 번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그다지 두려운 기색은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릴낄 일이 없었다. 에일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기에 어떤 순간이 오든 떳떳하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어떤 결과든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건 모두 제가 부족한 탓, 모두 제가 현명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일입니다.”

그래. 자신이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해 생긴 일, 에일린 잘못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했고 늘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 주의하지 않았던가? 결국은 그런 그녀를 좀 더 세심하게 보호하고 돌보지 못한 스스로의 잘못이었다.

“너 자신이 어리석었던 탓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때 호수 끝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게 아닙니다! 어머니시여!”

모두의 시선이 그 울림의 진원지를 찾았다. 멀리 호수 가장자리에 서 있던 눈의 여왕이 내지른 목소리였다. 대자연 어머니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뜻이냐?”

“우리 왕의 잘못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모두 사랑의 묘약 탓에 생긴 일이니까요!”

“뭐?”

***

“자세히 말해 보라.”

대자연 어머니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촉하자 순간 히에무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의 여왕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닥쳐라! 무슨 말을 떠들 생각인가?”

주군의 힐책에 눈의 여왕은 잠깐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그 옆을 지키던 북풍이 그녀를 대신해 말문을 열었다.

“눈의 여왕의 주장이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 왕께서 사랑의 여왕과 봄의 여왕이 벌인 장난에 속아서 묘약을 삼킨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

순식간에 화톳불이라도 삶아 먹은 것처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거기 모인 정령들의 숫자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작은 빛의 정령들까지 웅성거리는 바람에 자잘하고 큼직한 소음들로 울렁거렸다.

“그만두지 못해!”

히에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호수 끝 쪽으로 휘익 날아올랐다. 막 눈의 여왕과 북풍의 앞에 내려서려는 찰나, 저항할 수 없는 금빛 힘이 그를 둥글게 둘러쌌다.

“멈춰라! 히에무스.”

결국, 황금빛 구에 사로잡힌 채 허공에 떠 있는 어정쩡한 신세가 되었다. 혀까지 묶였는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어 어느 여름 불어오는 거센 폭풍처럼 노여움이 묻어나는 한마디가 울렸다.

“눈의 여왕과 북풍은 계속 말하도록 하라.”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굳어있던 두 상급 겨울 정령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바로 세웠다. 원망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는 히에무스와 시선이 마주쳤으나 곧 무시하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사실을 고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의 왕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은 모두 너무나 어리석고도 황당한 짓이나 저지르고 다니는 한심한 존재로 여겨지게 될 테니. 거기 더해 아까 받은 벌 외에 다른 무거운 벌까지 추가로 받게 될 게 분명했다. 겨울의 정령왕으로서의 의무는 내팽개치고 인간 노릇이나 해댔으니 말이다.

“겨울이 시작되던 첫날이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침착하고 딱딱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에일린이라는 인간 여자가 죽을병에 걸린 채 루쿨루스 숲 입구에 버려지는 일이 발생했지요. 모든 건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황금빛 덩굴 의자에 앉아 있던 정령들이 이야기를 다 듣고서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내 모든 정황이 탄로 나 버렸다. 더 이상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히에무스와 에일린. 그들의 사랑은 이제, 끝날 것이다.

***

“영애, 조금만 더 드세요.”

애플턴 자작부인이 에일린에게 간청하듯 식사를 권했다. 라피스 궁의 남쪽 탑에 갇혀 지내게 된 후 그녀가 다시 에일린의 시중을 들게 된 거였다.

“죄송해요. 더는 못 먹겠어요. 입맛이 없네요.”

“영애…….”

애플턴 부인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탑에 갇히게 된 에일린이 눈에 띄게 생기를 잃고 수척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무척 괴로웠다. 황제의 수족으로서 그녀를 감시하고 설득하는 임무를 떠맡았으나 개인적인 친분과 연민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에일린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지만 지금은 다른 걸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이만 나가주시겠어요? 부인.”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럴게요.”

에일린은 애플턴 부인이 간식거리를 챙겨준 후 방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넋이 나간 듯 그대로 굳어있었다.

정령들에게서 며칠째 어떤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제퓌마저도 무슨 이유인지 나타나지 않아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만 커져갔다. 높게 달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황혼의 빛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빛의 끝자락이 모두 잦아들어 까만 암흑으로 변할 때까지도 그냥 그 자세로 우두커니 앉아있기만 했다.

미동 하나 없었기에 방 안의 움직임을 감지해 점등되는 마법석도 켜지지 않은 채였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느릿하게 침대에 몸을 누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왠지 세상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둥글게 몸을 만 채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무거운 적막과 싸늘한 어둠의 기운만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신세가 염려되지는 않았다. 그저 한 존재의 안위만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걱정될 뿐.

“히에무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새어 나오는 눈물이 어김없이 머리맡을 흥건히 적셨다. 어찌 되었을까? 큰 고초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에일린 님.”

“……!”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은백색 광휘를 몸에 두른 정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퓌!”

반가운 외침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켜 손을 급히 내밀었다. 제퓌가 꾸벅 머리를 한 번 숙이며 바로 에일린의 손바닥 위로 내려섰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제퓌의 눈썹이 밑으로 축 늘어졌다. 에일린의 심장도 아래로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죠?”

“에일린 님…….”

작은 정령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일린은 조바심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말해주세요. 제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히에무스는 어떻게 됐어요? 무사한가요?”

제퓌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몸은 무사하세요. 인간들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하셨으니까.”

“그래요? 그럼 왜?”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이죠? 에일린은 잠시 희망에 찬 미소를 머금다 급히 거둬들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에일린 님…….”

제퓌가 거듭 이름을 부르며 난처한 눈으로 바라봤다.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재촉했다.

“말해주세요. 제퓌.”

“히에무스 님은 지금 빛의 궁전에 갇혀 계세요.”

“갇혀있다고요?”

“예.”

“어째서요?”

“그곳에서 재판이 열렸어요.”

제퓌는 빠르게 빛의 궁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렸다. 흑룡이 고발한 일이며 히에무스와 그들이 그로 인해 벌을 받은 일 등을. 그리고 이후에 인간들에게 진명을 노출 시킨 죄를 추궁받게 된 상황까지.

“진명을 알린 것은 정말 큰 잘못에 해당하거든요. 저처럼 미미한 하급정령조차 감히 시도하지 않는 일이에요. 그걸 정령왕의 몸으로 행하셨으니 큰 문책을 피하지 못할 수밖에요.”

“아…….”

“영원히 정령왕의 지위를 잃게 될지도 모를 정도로 엄중한 잘못에 해당해요.”

“그렇군요.”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중요한 이름을 알려줬다니. 그만큼……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큰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히에무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여리고 가는 제퓌의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다.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해 눈의 여왕이 사실을 폭로해 버렸어요.”

“뭘 말이죠?”

“히에무스 님의 사랑이 묘약을 삼킨 탓에 생긴 일이라는 걸요.”

“……!”

“모든 건 사랑의 묘약을 마신 탓에 발생한 일이니 왕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죠. 오히려 사랑의 여왕과 봄의 여왕을 벌해야 한다는 의견을 펼치셨어요.”

“아…….”

아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더 크게 쿵쿵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사실이 있었지. 이제는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아니 부러 자각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아벨라 여신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셨나요?”

“대자연 어머니께선 눈의 여왕의 주청을 받아들이셨어요. 모든 건 사랑의 묘약을 마신 탓에 벌어진 일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사랑의 정령왕과 봄의 여왕이라고 판결 내리셨어요.”

에일린은 가슴이 조금 찌릿하며 아파 왔으나 환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랬군요.”

그래,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럼 히에무스는 무사할 테니까. 하지만 제퓌의 표정이 여전히 그늘져 있었다. 그가 눈을 흘깃거리며 에일린의 반응을 살피더니 마저 이야기했다.

“어머니께선 우리 왕의 잘못을 묻지는 않으신다고 하셨죠. 다만 사랑의 묘약을 해독시키는 약을 삼킨다면요.”

“아…….”

“한데 왕께서 거절하셨어요.”

“예?!”

“거절하셨다고요. 절대로 해독약을 먹지 않고 그냥 주어진 벌을 받을 거라며 고집을 부리셨대요.”

“……!”

에일린의 심장이 덜컹 곤두박질쳤다.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퓌를 쳐다보았다. 그가 절망과 슬픔이 가득 번진 눈빛을 되돌려주며 힘없이 말했다.

“그럼 영원히 정령왕의 지위를 잃게 되실 거예요. 거기 더해서 천 년 동안은 빛의 궁전에 있는 옥사에 갇히는 벌을 받게 되신다고.”

“그런…….”

“이레 후 최종 판결을 내리신다고 해요.”

“이레…… 후?”

“예.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 왕께서 결심을 바꿀 시간을 주신 거죠.”

에일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이 꽉 멨지만 억지로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래선 안 돼요.”

안 되고말고. 그가, 히에무스가 그런 벌을 받게 놔둬서는 안 된다.

“막아야 해요.”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의 결심을 되돌리고 그런 부당하고 가혹한 벌을 받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눈의 여왕과 북풍 님, 그리고 다른 정령왕들께서 모두 설득하려고 노력하셨대요. 하지만 요지부동이시래요.”

제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정령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이 들어 그도 꽤 지친 얼굴이었다.

“어째서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해독약을 먹어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왜 고집을 부리는 거죠?”

알고 있었다. 당연히 에일린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랑이 끝나는 걸 원치 않으신댔어요. 에일린 님을 사랑했던 마음을 영영 잊게 되실 거니까요.”

“잊게 된다고요?”

“예. 해독약을 먹으면…… 그렇게 된대요. 가짜 사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된대요. 에일린 님 자체는 기억하시겠지만 사랑했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게 된대요. 히에무스 님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사랑했던 마음을 잃느니 차라리 천 년 동안 옥에 갇히는 벌을 받겠다며…….”

“욱…….”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에일린은 제퓌를 태우고 있던 손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해 아래로 툭 늘어뜨렸다. 작은 정령이 흠칫 놀라 황급히 날아올랐다.

“으흑…….”

그랬다. 그럴 줄 알았다. 히에무스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에일린이 두 손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득해야 해요. 그런 벌을 받게 할 순 없잖아요.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렇다 해도 해야 해.”

그래,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설득할게요, 제퓌. 내가 가서 그를 타일러 볼게요.”

“에일린 님께서 우리 왕을 설득하실 거라고요?”

에일린은 떨궜던 고개를 주억거리자 방울방울 맺혔던 눈물방울이 흩어졌다.

“내가 해야 해요. 할 수 있어요!”

***

애플턴 부인은 탑을 지키던 마법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걸음을 서둘렀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며칠 동안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에일린이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식사를 청한 것이다. 정말 반가운 마음에 흥이 나서 에일린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신속하게 준비해서 가져가는 중이었다.

“영애! 식사를 들여갈게요.”

“예.”

애플턴 부인이 경쾌한 목소리로 알리며 방문을 열었다. 탑에 갇힌 후부터 언제나 침대에 쓰러지듯 축 늘어져 있던 에일린이 반듯한 자세로 소파 위에 앉은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맘을 고쳐먹기로 한 것일까? 애플턴 부인이 환하게 웃었다.

“많이 시장하시죠? 루쿨루스 영애. 제 딴에는 최대한 빨리 준비한다고 했는데 너무 지체한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이리 가져다주세요.”

에일린이 바로 앞에 놓인 탁자를 가리켰다. 애플턴 부인은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함께 온 하녀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능숙한 솜씨로 식탁을 차려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에일린이 애플턴 부인을 올려다보며 일렀다.

“부인, 조용하게 먹고 싶으니 하녀들은 잠시 밖에 물려주세요. 부인께선 제 앞에 앉으셔서 말벗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그래. 늦은 밤 넓은 방 안에서 혼자 식사하기 적적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용인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도 부담스러울 테지.

“호호, 그러죠. 영애. 든든히 요기하시고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금방 예전처럼 기운을 되찾으실 거예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일린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긍정적인 말을 연달아 해주니 한결 안심되었다. 애플턴 부인은 서둘러 하녀들을 내보내고 에일린 앞으로 가서 무릎을 한번 굽힌 후 자리 잡았다. 이제 머지않아 제국의 황후가 될 고귀한 여인이었기에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하게,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형식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친근함을 잃지 않도록 딴에는 여러모로 신경을 기울였다.

에일린이 모처럼 엷은 미소를 머금더니 말했다.

“부인도 함께 식사하시겠어요? 아니면 차라도 한 잔 드시는 건요?”

“차를 마시도록 하죠.”

“예.”

맞은편에 앉은 에일린이 직접 따라 건네준 차를 한번 홀짝였다. 찻잔을 내려놓고 에일린에게 가벼운 대화라도 건넬 요량으로 마주보는데 갑자기 나른해지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더는 눈꺼풀을 들고 있기 힘들었다.

“으응…….”

편안한 소파에 앉은 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앞에 앉아 내내 힐끔거리던 에일린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비됐어요? 제퓌.”

“예, 물론이죠. 에일린 님.”

둘은 서둘러 애플턴 부인의 옷을 속옷만 남기고 벗긴 후 낑낑대며 침대로 옮겼다. 힘들긴 했지만 제퓌가 마법으로 힘을 보탰기에 할만 했다. 이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씌우고 침대 휘장까지 죄다 내렸다.

곧바로 에일린은 애플턴 부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미망인인 그녀가 늘 착용하고 다니는 긴 베일까지 머리에 푹 눌러썼다. 제퓌가 긴장한 에일린을 안심시키려는 듯 한마디 꺼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일린 님. 제 마법으로 잠시 에일린 님을 애플턴 부인으로 여겨지게끔 암시를 걸 수 있어요. 일단 문밖으로 나가면 아두스와 프리기도 가세할 거고요. 빠르게 행동한다면 눈치 못 챌 거예요.”

에일린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거린 후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시작하죠, 제퓌!”

“예! 에일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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