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버리지 못한 미련
3월이었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어느덧 봄이 되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도 어김없이 아젤란 제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아젤란 제국의 저력이 굳건했기에 빠른 시일 내에 거뜬히 감당하고 수습해냈다. 전쟁을 일으켰던 아칸 왕국은 그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황제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나머지 나라들은 어정쩡하게 방관했던 태세를 금방 전환했다. 자청해서 사라졌던 공녀 대신 다른 인질을 보내오며 충성 서약을 앞 다퉈 새로 해오고 있었다.
뎅그랑-뎅-데엥-뎅!
고즈넉한 아침. 아젤란의 황도 카르디아에 있는 열두 개의 신전에서 일제히 치는 종소리가 높이 메아리쳤다. 파란 하늘에 따스한 봄 공기와 힘찬 새들의 날갯짓, 사람들의 들뜬 설렘이 흥겨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듯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팔라틴 황궁의 첨탑이 눈부신 햇살에 반사돼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사방으로 발했다. 한껏 성장한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기쁨으로 번진 얼굴로 황제의 정궁인 라피스 궁의 중앙홀로 속속 모여들었다. 오늘 이곳에서 중대한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므로. 바로 지난 전쟁에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수훈 의식이 진행될 거였다. 공을 세운 이들이 참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크게 주목을 받는 사람은 단연 에일린이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에일린 님, 좀 서두르시는 게 좋겠어요. 공작님은 벌써 준비를 다 마치셨어요.”
제니와 샤샤가 에일린의 단장을 마무리하며 얼른 등을 떠밀었다.
“으응, 알았어.”
에일린은 수줍게 거울을 응시했다. 진주 빛과 핑크색이 어우러진, 섬세한 자수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평소보다 공들여 치장했지만 왠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잠시 옷매무새를 매만지다 세 정령과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순간 너무 눈이 부셔 가는 실눈을 떴다. 히에무스가 크림색과 자줏빛으로 된 귀족의 옷으로 성장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장면을 대하듯 놀라움이 피어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꾸민 탓에 그야말로 넋이 나갈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반대로 히에무스는 히에무스대로 에일린을 보자 눈에 짙은 찬탄과 애정의 빛을 담뿍 담았다. 두 뺨에 금방 수줍은 홍조가 떠올랐다.
“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에일린.”
“어, 고, 고마워요. 히에무스.”
붉게 열이 오른 얼굴로 서로를 눈에서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으려니 잔뜩 심술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제일 늦게 도착할 거라고요.”
유니콘인 루카스였다. 또 둘의 다정한 모습에 시샘이 나는 듯 뺨을 부루퉁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그런 루카스를 도끼눈으로 쏘아보는 히에무스를 재촉해 에일린은 얼른 성 밖으로 향했다.
흑룡인 디아누스 집사가 화려한 공작가의 마차를 준비해서 대기한 모습이 보였다. 가을의 정령왕인 브로미오스는 이미 다른 마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날 이후 백룡인 렌투스의 행방은 자취를 감췄다. 같은 용족인 디아누스 집사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드라코니아의 왕녀인 스킬라 공주 역시 신병을 핑계로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 터라 그들에게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하긴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갔다. 자신이 벌인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워 모종의 안식처로 가서 숨은 것이 분명했다. 디아누스 집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르시죠.”
일행은 하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신속히 길을 떠났다.
라피스 궁의 홀로 입장하니 지금껏 봤던 그 어떤 행사보다도 더 멋지고 호화로웠다. 모여든 이들의 행색과 표정도 화려하고 미려하기 그지없었다.
“와아! 정말 멋지다.”
세 정령과 루카스가 동시에 입을 모아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특히 높이 위치한 단상에 자리 잡은 황제 렉스는 대제국의 군주다운 고귀한 기품과 위상을 그대로 내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보관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에 절로 눈과 입이 벌어졌다. 그의 양쪽에 서 있는 케일론과 엘로드 역시 매우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이다.
빰빠라빰!
주의를 환기시키는 나팔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기쁨으로 들뜬 목소리들이 즉시 가라앉았다. 이어 황제 렉스의 진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두 이른 시각부터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걸음 해주어 감사하오. 지난겨울 있었던 전쟁 때 모든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분발한 끝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소. 제국은 여러분의 힘과 용기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소.”
렉스는 잠시 감격스러운 듯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누구보다도 크게 공을 세운 이들을 치하하고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소. 모두 함께 오늘의 영웅을 위해 아낌없이 축하하고 축복해주길 바라오.”
“와아!”
짝짝짝!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설렘 가득한 그날의 행사가 시작되었다. 궁정의정관이 묵직한 두루마리 문서를 손에 든 채 소리 높여 외쳤다.
“먼저, 드라코니아의 히에무스 칼릭스 클라인 레 라케르타 공작과 브로미오스 아델리오 레 파인스 백작은 앞으로 나오시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황제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렉스는 잠시 볼을 씰룩이며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다 곧 황제 본연의 위치를 깨닫고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위엄 있는 자세로 그들 앞에 우뚝 서며 말했다.
“두 사람이 뛰어난 마법 실력과 신속한 행동력을 발휘해 아젤란 군을 위협하던 용을 제거하는, 정말 혁혁한 공을 세웠소. 이후 마물들을 몰아내는 데도 누구보다도 많은 역할을 했고.”
히에무스가 적룡을 없앨 때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정령의 몸으로 움직였기에 인간들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적룡이 추락할 때 곧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 용을 마법으로 제압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브로미오스도 그 즈음 그곳에 나타나 함께 힘을 보탰다. 그래서 다들 두 사람이 용을 없앴다고 믿게 된 것이다.
“망극합니다.”
“그대들의 공을 높이 사 아젤란 귀족의 작위를 수여할 것이오. 라케르타 공작에겐 제국의 공작 작위를, 파인스 백작에게는 제국의 백작 작위를 내릴 것이오. 아울러 공작에겐 다섯 개의 성과 그에 딸린 영지를, 백작에게는 세 개의 성과 그 영지를 하사하도록 하겠소.”
“황공합니다! 폐하.”
이어 황제가 허리에 찬 긴 보검을 빼들어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내려치는 봉작 의식이 치러졌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도 충성서약을 하며 의식을 마무리했다. 궁정의정관이 덧붙여 여러 상에 대한 정보를 일러주었다. 영지의 위치와 영민의 수, 그 외 주어지는 특권과 보물, 재화 목록이 낭독되었다. 그 둘에 대한 봉작 의식이 끝난 후 이어 다른 이들에 대한 수훈이 줄을 이었다. 몇몇이 황제 앞으로 나아가 상을 받고 영광을 나눈 후 물러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궁정의정관이 다음 수훈자의 이름을 목청껏 호명했다.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 속히 앞으로 나오시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요란하게 소문 난 정령사의 차례였기에. 에일린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홀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황제를 향해 발을 옮겼다. 이어 궁정 서기관의 안내에 따라 무릎을 꿇었다. 렉스가 눈에 띄게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그녀의 공적을 열거했다.
“그대가 세운 공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요. 신관들을 대신해 부상자들의 치료를 맡아주고 아젤란 군의 사기를 높이는데도 그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해주었지. 거기 더해…….”
렉스는 흐뭇한 시선을 넘어 개인적인 애정과 뿌듯함까지 숨기지 않은 채 자못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령들을 움직여 마물들을 물리치는 일까지 직접 수행했소.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오. 아젤란의 황제로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소. 해서…….”
커다란 홀에 일순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동안 아젤란 사람들 사이에 황제가 평민 신분인 에일린에게 어떤 상을 내릴지에 대한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돼 있었다.
“그대를 아젤란 제국의 백작으로 봉할 것이오. 세 개의 성과 영지, 아울러 황도에 있는 저택 한 채를 내리겠소.”
“……!”
에일린이 제국의 귀족이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백작이었다. 에일린은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황제가 그녀에게 뭔가 상을 내릴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상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기사에 준하는 작위와 약간의 재물을 받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백작이라니! 얼떨떨한 기분에 잠깐 멍하니 있다 궁정의정관이 눈치를 줘서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황, 황공합니다. 폐하.”
“와아아!”
사람들의 함성과 찬탄이 터져 나와 그 커다란 공간이 들썩거렸다. 누군가는 자신들의 예상대로 됐다며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평민 여인에게 주어지는 상치고는 너무 과하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진정한 맘으로 환호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앞서 봉작을 받은 이들이 그러하듯 에일린도 황제가 보검으로 어깨를 내리치는 의식을 이어 수행했다.
“경하드립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모든 의식이 끝나자 다시 한번 박수 소리와 축하의 말들이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우와! 정말 잘됐어요, 에일린 님!”
아두스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날아와 기뻐했다. 옆에 있던 제퓌와 프리기도 덩달아 축하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축하드려요. 에일린 님.”
“근데 제국의 백작이 되면 뭐가 좋은 건가요?”
“멍청하긴, 그것도 몰라? 제국의 귀족이 되면 이제 평민이라며 무시하는 이들이 없어질 것 아냐? 우리 왕의 신분과도 좀 더 잘 어울리게 될 거고.”
“우리 왕께서는 원래 신분 같은 건 안 따지시잖아?”
“그건 그렇지만 인간 노릇을 하며 지내시니까 그렇지.”
“그런가?”
두 정령이 긴가민가 갸우뚱거리자 아두스가 열띤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알 수 있다고. 하급정령 신세보단 상급정령 신세가 더 나은 거 아니냐고?”
“으응, 그건 그렇지. 하급보단 상급의 힘이 훨씬 더 강하고 좋지. 부하도 부릴 수 있고.”
“인간들에겐 신분이 바로 그런 차이를 만든단 말이지.”
“그렇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날의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오늘 서훈을 받은 자들에 대한 축하 무도회가 그날 저녁부터 사흘 동안 황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에일린은 일단 히에무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황궁 밖으로 나섰다.
“축하한다, 정말 잘 됐구나, 에일린.”
“예, 고마워요. 히에무스.”
사실 히에무스는 에일린의 신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하급정령들 말대로 그녀가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려면 귀족 신분이 훨씬 유리하다는 건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흐뭇한 얼굴로 거듭 축하 말을 건네며 마차가 세워진 장소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막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루쿨루스 영애.”
리히트 시종장이었다. 이제 진짜 제국의 귀족이 된 그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격식을 엄격하게 지키려면 다르게 불러야 하겠지만 미혼 귀족 여성들은 ‘영애’ 정도로 호칭해도 무방했다.
“폐하께서 잠깐 만나 뵙고자 하십니다.”
***
황제의 집무실 앞 복도였다. 대마법사 케일론은 은빛 자수가 놓인 붉은 로브를 걸치고 한 손에 마법사 지팡이까지 쥔 채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서 있었다. 황제가 에일린을 집무실 안으로 불러들인 후 호위를 맡던 이는 물론 시종들까지 모두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마법을 이용해 몰래 엿듣고 싶은 맘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그런 욕망을 짓눌렀다. 조바심에 자꾸 집무실 문을 힐끔거리며 복도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리히트 시종장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흠, 흠.”
다른 대상으로 자신의 관심을 돌릴 셈으로 품속에 있던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라케르타 공작이 지내는 성에 갔을 때 몰래 가져왔던 마법약. 신비로운 붉은 열기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꿈틀거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약일까?’
손에 들어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맞은편에 있던 리히트 시종장이 심심한지 관심을 보였다.
“그건 무엇인지요? 케일론 님, 마법사들은 다들 지닌 것 같던데.”
다른 데서 이 약을 접했단 말인가?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요. 일전에 마법사인 라케르타 공작께서 한 방울 드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마나를 회복시켜주는 약인가요?”
케일론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빛과 목소리로 되물었다.
“라케르타 공작이 이걸 마셨다고요?”
“예. 워낙 특이하게 빛나는 붉은 색이라 기억에 남더군요. 그 약을 담은 병 모양도 똑같은 걸 보니 같은 약인 것 같은데요?”
“……!”
순간 케일론의 뇌리에 뭔가가 섬광처럼 떠올랐다.
“케일론 님?”
케일론은 자신의 손안에 든 마법약을 꽉 쥐며 노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고 시종장을 향해 말했다.
“나는 잠시 할 일이 생겨 마법청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대신 헬무트 경을 바로 보내도록 하지요.”
“어, 예. 알겠…….”
케일론은 재빨리 순간이동 마법 주문을 외워 푸른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다. 어지간히 급하지 않고선 황궁 안에서 이동할 때 잘 쓰지 않던 술법이었다. 심지어 시종장이 느릿하게 대답하는 소리조차 끝까지 듣지 않고 사라질 정도였다.
***
에일린은 황제의 집무실에 렉스와 단둘이 마주 앉아 그가 친히 따라주는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저 가벼운 말만 몇 마디 꺼낼 뿐이었다. 아까 진행된 봉작식에서 건넸던 이야기를 되풀이하거나 거듭된 축하 말을 꺼내거나. 벌써 차 한 잔을 다 비웠는데도 이렇다 할 용건을 풀어내지 않았다.
쪼로록.
차를 따를 때 나는 청아한 소리가 잠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을 덮어주었다. 렉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단순히 축하 인사를 다시 해줄 셈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닌 건 같은데. 에일린은 왠지 긴장돼 연거푸 차만 들이켰다. 담담한 듯 조금 들뜬 눈빛으로 그런 에일린의 모습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렉스가 들고 있던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에일린.”
“예, 폐하.”
에일린도 덩달아 찻잔을 탁자 위로 가져갔다.
“드디어 그대가 귀족이 되었구나. 아젤란의 정식 귀족 말이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다니 정말 대견하고 놀랍구나.”
“다른 많은 이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에일린은 단순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대답했다. 오늘 이런 영광을 입게 됐지만 순수하게 그녀 자신이 가진 능력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령들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고 그녀를 믿고 따라와 준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어찌 됐든 그대 자신이 이룩한 쾌거인 거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확고한 업적을 달성한 것 아니냐? 너무 겸손해 할 필요 없어.”
“……예.”
렉스는 야릇하고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그윽한 시선으로 다시 에일린을 응시했다.
“에일린. 그대가 진정 이 아젤란 제국의 명실상부한 귀족이 된 거야.”
“…….”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는 널 짐의 황후로 삼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대를 내 유일한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됐다고.”
“옛?!”
렉스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이끌어 일어서게 했다.
“저, 폐하. 저는…….”
얼떨떨한 얼굴로 에일린은 엉거주춤 그가 이끄는 대로 소파 옆으로 가서 섰다. 렉스가 아직도 자신에 대한 미련을 접지 않은 것인가? 지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앗! 폐하!”
에일린은 이어지는 렉스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 외쳤다.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렉스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것이다. 기사들이 영원한 충성이나 사랑을 맹세할 때나 취하는 행동 말이다. 그가 목이 마른 듯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 에일린. 이 아젤란 제국의 황제인 내가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일평생 그대 외의 다른 여인은 결코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내겐 오직 그대뿐이야.”
“폐하…….”
“그러니 부디 나와 혼인해다오, 에일린. 내 유일한 아내가 되어다오. 나아가 이 대제국의 황후가 되어다오.”
“……!”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 그렇게나 확고하게 밝혔는데도 아직도 자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정말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줄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주는 수밖에.
“황공합니다. 폐하.”
다시는 혼동하지 않도록, 되도록 또박또박 또렷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정말 송구합니다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라케르타 공작님을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습니다.”
렉스가 에일린의 한쪽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기에 그 손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에일린은 거침없이 자신의 마음을 알렸다.
“폐하께는 신하로서의 신뢰와 충성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무거운 제안은 거둬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에일린.”
낮고 쉰, 납처럼 둔중한 음성이 바닥에 깔렸다. 올려다보는 눈빛도 어둡고 스산한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망망대해처럼.
“나는 지금 후궁이 아니라 황후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네가 늘 원하고 얘기하던 유일한 아내. 그런데도 싫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그자가…… 그리도 좋으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게 식은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만 제 손을 놔 주십시오. 폐하.”
렉스의 뺨이 꿈틀거렸다. 잠시 더 에일린의 손을 쥐고 있다 뻣뻣한 움직임으로 놓아주었다. 마치 그 손짓에서 끼익거리는 기계음이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미동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가만히 굳어 있었다. 에일린이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작별인사를 할 때까지.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에일린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더는 그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홀로 집무실에 남겨진 렉스는 좀 전까지 그녀를 잡았던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으, 에일린. 진정 이럴 것이냐?”
이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그의 마음이, 그의 심장이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에일린, 진정…….”
자신은 황제다. 이 아젤란 제국, 아니 이 광활한 안드로스 대륙을 모두 다 가진 황제.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자 가장 강한 존재! 그런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왜 가질 수 없단 말인가? 둘도 아니다. 오직 그녀 하나뿐이다.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탐낼 수 없단 말인가? 아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 잘못된 게 틀림없어!
“우…….”
쾅쾅 울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몸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장이 저려와 숨이 꽉 막혀왔다. 잔뜩 경직돼 있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에서 뜨거운 뭔가가 울컥 새어 나와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씁쓸하고 짭짤한 눈물이 자꾸만 넘쳐흘렀다.
“우욱.”
“폐, 폐하!”
지엄한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바로 들어온 리히트 시종장이 오열하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단 한 번도, 진정 그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제의 모습이었다. 제위에 오른 그날부터, 아니, 황태자 시절부터 줄곧 모셔왔지만 이렇게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제가 붕어한 날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는데……. 그런 그가 울고 있었다. 너무나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폐하…….”
충직한 시종장이 속히 다가가려 하자 렉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오지 마!”
대신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케일론, 대마법사를 불러 줘. 그가, 그가…… 필요해.”
“예, 옛!”
리히트 시종장은 사색으로 변한 얼굴로 재빨리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집무실 문밖에 대기한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을 발견하곤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케일론 님을, 대마법사님을 불러 주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덩달아 당황한 헬무트 경이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해 가까이 위치한 마법청 건물로 득달같이 이동했다.
***
그즈음 케일론은 마법청 건물 안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 와 있었다. 한 가지 마법 실험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먼저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 심호흡을 한차례 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 주문을 외웠다. 워낙 마나 소모가 큰 마법이기에 여간해선 잘 시도하지 않지만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다. 낮고 음산한 주문을 모두 외우자 지팡이 끝에서 둥글고 하얀 공 모양의 빛이 생겨났다. 이내 크기를 점점 키워나가더니 어느새 그의 분신이 만들어져 그의 앞에 우뚝 섰다. 케일론과 똑같았지만 유리알 같은 매끈한 두 눈에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무심한 표정. 그의 분신이지만 언제 봐도 별로 정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해 밀랍인형, 나쁘게 말해 시체 같은 느낌이랄까. 케일론은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다 품속에서 빨간 마법약을 꺼내들었다.
“이걸 삼키도록 해.”
“알았다. 나는 너이니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그렇겠지.”
케일론은 조심스럽게 병뚜껑을 열고 분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방울 툭 털어 넣었다. 분신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마법약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의 분신이 두 눈을 반짝, 있는 대로 치켜떴다.
“헉!”
그가 내지르는 짧은 비명에 케일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지?”
“몸이…….”
“응?”
“몸이 따뜻해.”
케일론의 분신이 붉게 열이 오른 두 뺨을 내보이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향했다. 진정 놀랍고 설레는 듯한 낯빛이었다.
“……!”
쾅! 쾅! 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대마법사 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숨넘어갈 듯한 헬무트 경의 목소리였다.
***
“여기가 아프다, 케일론.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파.”
케일론이 황급히 황제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살폈다. 렉스는 그가 당도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꺽꺽 흐느끼며 하소연했다. 여전히 집무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우우욱……, 정말 아프구나.”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아니, 아예 심장 한쪽이라도 없어진 사람처럼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울부짖었다.
“폐하…….”
“나를, 나를 좀 구해다오, 케일론. 우욱……, 이대로는 죽을 것만 같구나.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다고.”
케일론이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고통을 줄여주려 애를 썼지만, 도무지 황제의 오열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옥체에도 결국 무리를 줄 터, 억지로라도 잠에 빠져들게 하는 편이 나을 듯 했다.
“폐하, 과도한 감정표현은 좋지 않습니다. 신이 마법으로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냐, 케일론.”
“예?”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무엇을?”
순간 렉스가 케일론의 두 팔을 무서울 정도로 강한 힘으로 꽉 붙들었다.
“윽!”
케일론이 작은 신음을 낼 정도로 아린 감각이 달라붙었다. 잔뜩 젖은 푸른 눈동자가, 절망에 빠진 허망한 두 눈동자가 유일한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요하게 케일론의 시선 끝에 매달렸다.
“그녀를 갖게 해다오. 대마법사의 능력으로.”
“……!”
“부탁이다! 케일론. 나는 에일린이 아니면 안 돼. 그 여자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폐하, 고정하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이다. 대마법사, 나를 좀 살려다오. 어렸을 때 죽어가던 나를 살려줬던 것처럼, 그때처럼 또다시 나를 구해다오. 그녀를, 에일린을 내게 줘! 그 잘난 남자에게서 빼앗아서 내게 달라고!”
케일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광기가 어린 것 같은 집착욕을 보이는 황제의 행동이 거슬려서가 아니었다. 그 ‘잘난 남자’ 때문이었다. 방금 전 행한 마법 실험에서 그 남자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했으니까. 그 정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겨울의 정령왕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는 영원히 에일린을 잃을 거야. 그 라케르타 공작이 에일린을 차지하고 말 거라고.”
그래. 그렇게 돼버리겠지.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인간도 아닌 자의 손에 에일린이 넘어갈 것이다. 케일론의 미간이 더욱 심하게 구겨졌다. 그건 안 돼!
“방법이 없겠느냐? 케일론. 그자를 없애버리고 에일린을 내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이?”
“…….”
“부탁이다. 뭔가 수를 생각해 봐라.”
“그녀를 갖게 되면…… 후궁으로 삼을 작정이십니까?”
렉스는 허겁지겁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황후로 맞이할 것이다. 방금 그녀에게 청혼도 했었어.”
“정말이십니까?”
“그래. 내 유일한 아내로 삼을 생각이다. 내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케일론은 눈을 질끈 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꼭 황제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에일린을 위해서였다. 라케르타 공작이 인간이 아니란 건 최소한의 조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란 말이다. 적어도 같은 인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에일린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자를 제거할 방법을 시도해 봐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케일론의 두 팔을 움켜잡았던 렉스의 두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뭐지?”
“하지만…… 큰맘을 먹으셔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하면 에일린을 얻을 수 있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아마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케일론은 신중하게 널어놓던 말을 잠시 접었다. 그리고 렉스의 어둡게 물든 푸른 두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폐하와 저, 나아가 아젤란 제국까지 모두가 파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박이란 말인가?”
케일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박이었다. 실패한다면 정령들, 나아가 여신의 분노까지 사게 될지도 모르니까. 감히 손대면 안 되는 영역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폐하.”
“해 보겠다.”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저녁이 되었다. 오전에 진행된 수훈식에서 각종 봉작과 상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라피스 궁에서 축하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에일린은 멋들어진 차림으로 라케르타 공작 노릇을 하는 히에무스와 함께 참석 중이었다. 단순한 무도회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전을 기념하는 자리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흥겹고 열띤 분위기가 가득 넘쳐흘렀다.
“이야, 좋다. 좋아.”
“역시 구경거리로는 무도회만 한 게 없다니까.”
“우중충한 전쟁터에 오래 있다 와서 그런지 훨씬 더 근사해 보이는 것 같아.”
세 정령이 흐뭇한 표정으로 모처럼 참석한 황궁 무도회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겨울의 왕께서 에일린 곁에 줄곧 붙어 있는 터라 그들도 에일린의 호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에일린도 오랜만에 참석한 무도회인지라 무척 기분이 설렜다.
“에일린, 한 곡 더 추겠느냐?”
벌써 여러 곡이나 함께 춤을 췄는데 조금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히에무스가 제안했다. 에일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근데 이번에 추고 나면 좀 쉬도록 해요.”
“그래.”
둘은 다시 넓은 홀로 걸어 나갔다. 조금 빠른 곡조에 몸을 내맡긴 채 둘이 호흡을 맞추었다. 오늘따라 빠른 춤곡이 유난히 많이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무거운 드레스를 착용한 여자들이 일찍 지칠 수밖에 없었다. 몇 곡 추지도 않았는데 휴식을 취하러 가는 여인들이 많이 보였다. 에일린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히에무스에게 말했다.
“저도 휴게실에 좀 다녀올게요.”
“그래. 나도 같이 갈까?”
에일린은 쿡쿡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여성 전용 휴게실인걸요.”
“그럼 세 정령을 딸려보내마.”
“괜찮아요. 모처럼 이런 데 와서 잘 놀고 있을 텐데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금방 갔다 올 텐데요.”
곧장 자신에게 배정된 휴게실을 찾아 들어갔다. 낮에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한 탓인지 휴게실 위치가 좀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예전처럼 그녀 전용 휴게실도 아니지만 뭐, 그런 사소한 건 상관없는 일이다. 오히려 별 이유 없이 자질구레한 특권을 누리는 게 늘 부담스럽고 어색하지 않았던가? 격렬한 춤동작을 소화하느라 땀이 좀 난 것 같았다. 물도 마시고, 옷차림새와 얼굴 화장도 고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하레나 성에서 함께 온 제니와 샤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끼익.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 다들 어디 갔지?”
잠깐 바람을 쐬러 간 걸까? 무도회 구경을 하려고 몰래 빠져나간 걸지도.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짐이 놓여 있는 휴게 공간으로 다가갔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별안간 뒤쪽에서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에일린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
검은 안개로 싸인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눈을 덮었다. 새까만 연기 같은 기운이 온몸을 빠르게 휘감았다. 이내 눈을 가렸던 손이 떨어졌다. 보석처럼 맑게 빛나던 에일린의 연녹색 눈동자가 그 빛을 잃은 채 멍한 상태로 변했다. 마치 혼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은신 마법으로 몸을 숨겼던 마법사가 비로소 그녀 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군요.”
떨리며 새어 나오는 나직한 쉰 목소리, 케일론이었다.
“하지만 그대를 위해 이러는 겁니다.”
그래. 딴에는 황제도, 그 누구도 아닌 그녀를 위해 이러는 거였다. 정령 따위에게 마음을 주어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 잠시 무료함을 풀어주다 결국엔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인간과 정령은 도저히 함께할 수가 없는 존재니까.
“예.”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에일린이 짧게 대답했다. 그 반응에 케일론은 이마를 찡그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에게 자백을 시키기 위한 흑마법을 걸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큼은 평생 걸고 싶지 않은 마법이었는데.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 아젤란 제국의 황후가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에일린이 행복해지는 거였다. 어느 순간 그 자신의 행복보다도 더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일이 됐다.
“그대의 이름이 뭡니까?”
자백을 시킬 때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이었다.
“전세의 이름말입니까? 아니면 현세의 이름말입니까?”
“……!”
이건 또 뭔가? 케일론은 몹시 황당한 표정을 짓다 곧 평정을 되찾았다. 흔치 않긴 하지만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색이 이 안드로스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아닌가. 예전에 에일린이 꿈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닮은 여자를 본다는 말을 한 적도 있으니 그다지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현세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에일린.”
“그렇군요, 에일린.”
“당신이 히에무스라고 부르는, 정령왕을 알고 있지요?”
“예.”
“그의 진짜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두 개로 된 정령의 진명을.”
여전히 아무런 느낌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어투로 에일린이 입을 열었다.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초점 없이 흐릿하게 응시하는 연초록 눈이 왠지 젖어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분명 그녀의 몸은 마법의 힘에 완전히 굴복당해 버렸을 텐데.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온 그녀의 영혼 중 한 부분이 이곳 마법에 걸리지 않은 채 여전히 깨어있던 것인지도. 케일론은 왠지 안타까워져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종국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케일론은 다른 모든 이들이 불행해지더라도 이 여인만큼은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 일로 그 자신은 평생 그녀의 원망이나 듣게 되겠지만.
“대제국의 황후가 되면…… 행복해질 겁니다, 에일린.”
대마법사는 두 눈을 꽉 감으며 다음 질문을 계속했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휴게실로 간 에일린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히에무스는 조금 걱정이 돼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가 무도회장을 벗어나려하자 금방 수많은 귀족 여인들이 모여들며 아쉬움을 표했다.
“어디 가세요? 공작님. 좀 더 저희와 얘기 나누시지 않고.”
“그래요. 아니면 춤이라도 한 곡 추시면 어떠세요?”
“산책은요?”
히에무스는 딱딱한 표정으로 간단한 묵례를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별로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항상 자신 주변에 접근하는 게 신기했다. 휴게실이 늘어선 복도로 나오니 무척 한산한 모습이어서 좀 의아하게 느껴졌다. 여인들이 들락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다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히에무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일린의 마나를 찾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붉은 마법약을 마신 상태기에 순수 정령일 때에 비해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약했지만 그래도 보통 인간들보단 휠씬 월등한 실력이었다.
“저곳이군.”
구석진 맨 끝 방에서 그녀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렬한 황금빛 광채가 그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를 소환할 때 발생하는 현상과 비슷했다. 에일린일까? 그녀가 급히 자신을 부르고 있는 건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것과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았다. 그 눈부신 황금빛 속박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은빛의 올가미가 자신의 목에 씌워진 것이다.
“……!”
***
히에무스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몸을 내맡긴 채 무서운 속도로 이동했다. 온몸을 속박하던 황금빛 결박이 돌연 잦아들며 멈춘 곳은 그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생소한 공간이었다. 검은 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어둡고 눅눅한 장소. 진명으로 소환당할 때 붉은 마법약의 효과는 이미 사라졌다.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별 영향 없이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지하에 위치한 감옥처럼 보였다.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황금빛으로 그려진 커다란 마법진이 그의 발목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거기에 여전히 목에 걸린 은빛 올가미가 움직일 때마다 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컥!”
히에무스는 몇 번 몸을 움직이다 포기하고 은빛 올가미가 길게 연결된 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
화르륵!
별안간 사방 벽에 붙어있던 횃불에 불이 붙으며 주변이 환해졌다. 그를 가둔 금빛 마법진 주위로 수 십 명의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내민 채 마법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다소 멀찍이 떨어진 암흑공간을 뚫고 새카만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자다. 정령들 사이에 사악한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아젤란 제국의 대마법사 케일론!
“마침내 사로잡았군요.”
그 음침한 공간에 딱 어울리는 음산한 쉰 목소리가 허공으로 기어 나와 부서졌다. 경직된 하얀 얼굴과 차가운 자줏빛 눈동자에 기묘한 만족감이 서린 듯했다. 그야말로 냉정하고 사악한 표정이라 할 만했다.
“너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겨울의 정령왕. 늘 깔보던 인간 마법사의 손에 잡힌 기분이.”
“네놈! 네가 어떻게 날!”
“물론 순수한 제힘만으론 잡긴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약점을 알려줬기에 가능했지요.”
케일론은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부러 허세를 부렸으나 그도 정령왕을 잡아서 상대하는 건 처음이기에 바짝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약점을 알려줬다고? 도대체 누가?”
“누구겠습니까? 당신의 진명을 알고 있는 이가.”
“……!”
히에무스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 에일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했지?”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이 잘 있습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말이죠. 당신이 없어진다면 앞으로 더욱 잘 지낼 겁니다.”
“무슨 소리냐?”
“이렇게 큰 힘을 가진 정령왕을 붙잡게 해주었으니 아마 아젤란의 일등 공신을 넘어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겠죠.”
“풋!”
히에무스는 피식 웃음소리를 뿜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 이 상황에서도 비웃음이 나왔다.
“분명 네놈들이 에일린을 협박해서 알아낸 거겠지.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알려줬을 리가 없다.”
“안됐지만 그녀가 자청해서 알려준 겁니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정령왕의 두 눈이 케일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어!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마음을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하신단 말입니까? 인간이란 존재를 너무 신뢰하시는군요.”
“무슨 소리냐?”
“그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눈앞의 이익에 약하지요. 설마 인간인 그녀가 정령인 당신을 진짜로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정령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잠시 홀렸던 것일 뿐. 이제야 현실에 눈을 뜬 거겠죠. 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신을 배신한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그만 포기하십시오.”
히에무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헛소리!”
이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에일린을 불러줘! 네놈들 말은 믿지 않겠다. 그녀를 직접 만나 들어야겠어!”
“안 됩니다. 그녀는 그다지 한가하지 않으니까. 국혼 준비를 해야 하니 많이 바쁘실 테죠. 당신의 이름을 알려준 대가로 아젤란 제국의 황후가 되시기로 했으니까.”
“뭐라고? 이……!”
히에무스는 순간 자신이 이중 삼중으로 제압당해 있다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케일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마법진을 이루던 빛이 격렬한 방전을 일으키듯 불규칙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둘러싸고 있던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며 마법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발산했다. 강화된 마법진이 한층 거센 기세로 달려들어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목에 걸린 은빛 올가미 역시 짧게 점멸하며 더 세차게 목을 조여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며 정령왕의 힘을 쏟아내 한데 그러모았다. 조금 작긴 했으나 찬란한 은청색 얼음으로 된 날카로운 마법창이 그의 손에 형성됐다. 지체하지 않고 케일론을 향해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멈춰라!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파사사!
히에무스는 순식간에 손에 쥐고 있던 얼음 창을 사라지게 했다. 동시에 그 자리에 굳은 듯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현상. 그저 그의 진명을 알고 있는 자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처럼 반듯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앞에 서 있는 마법사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으…….”
심연의 저편에서 울리는 듯한 낮고 차가운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케일론은 속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남은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를 좀 더 확실하게 묶어두는 마법이었다. 지팡이에서 은빛 밧줄이 몇 가닥 새어 나와 히에무스를 향해 날아가 덮쳤다. 이내 목 부위뿐만 아니라 온몸이 꽁꽁 묶였다. 히에무스는 몸을 들썩거려 봤지만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만 무릎을 꿇고 내게 굴복하라!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으아아!”
히에무스는 외마디 절규를 내지르며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 일련의 행동을 치르는 동안 케일론의 상태 또한 엉망으로 변했다. 땀에 흠뻑 젖은 몸과 산발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 씨근대며 내뿜는 가쁜 호흡. 한꺼번에 많은 마나를 소모한 탓에 안색 또한 파리해져 있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번들거리는 이마를 씻으며 마침내 제압한 정령왕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원망과 분노에 휩싸인, 은빛 칼날처럼 파고드는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쳤다.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냉혹한 시선에 부르르 떨며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수치심으로 안면이 홧홧거렸지만 이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계획했던 1단계는 완수했다. 더 껄끄러운 다음 단계가 남았지만.
***
“헉!”
깊은 잠에 빠졌던 에일린은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끊임없이 흘러내린 눈물로 인해 머리카락과 베개가 흠뻑 젖은 상태였다. 납덩이에 짓눌린 듯 머리가 무거웠다. 방금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너무나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꽤 오랜 시간 잠들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주변이 어두운 걸 보니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았다. 값비싼 마법석이 무수히 꽂힌 사치스러운 샹들리에가 여기저기 빛나며 낯선 풍경을 비춰주었다.
“여긴…….”
호화롭게 꾸며진 방 안. 처음 보는 곳이지만 장식과 분위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주로 머무는 라피스 궁에 있는 공간이 틀림없을 것이다.
“정신이 드느냐? 에일린.”
갑자기 들려온 중저음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탁자 앞 소파에 황제인 렉스가 자리한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바로 뒤쪽, 의자 너머로 지팡이를 든 채 서 있는 마법사 케일론도.
“폐하? 여긴…….”
“라피스 궁에 있는 객실이다.”
에일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좀 전에 꾼 꿈이 설마 진짜 일어난 일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그건 그냥 꿈이어야 해! 입술을 악물며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버텼다. 맨발에 닿은 냉기가 선득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바람에 전신이 들썩거렸다. 발 끝에 힘을 준 채 케일론에게 곧장 다가가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며 물었다.
“케일론 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뭉개져 흩어질 것처럼 심하게 떨려왔다.
“아까 혹시…… 제게 자백마법을 거셨나요?”
“그렇습니다.”
“이…….”
“죄송합니다.”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풀썩 물결치더니 케일론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에일린이 그의 뺨을 휘갈긴 것이다. 하얀 뺨이 금세 발갛게 부풀어 올랐으나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에일린이 가늘게 흔들리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비겁한 짓을 저지른 거죠? 어째서!”
“…….”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거냐고요? 왜요!”
마법사는 계속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바라보는 눈빛마저 외면한 채로.
“그를 어떻게 했죠? 그렇게 이름을 알아내서 뭘 어쩔 셈이냐고요?!”
소파에 앉아 고개 하나 돌리지 않던 렉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케일론은 아무 잘못 없어. 짐이 시킨 일이니까.”
“예?”
“짐이, 이 아젤란 제국의 황제가 명령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
“짐도 때릴 거냐?”
그제야 렉스의 시선이 에일린을 향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거침없이 다가와 가시처럼 찔러왔다.
“어째서냐고 물었더냐?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인간도 아닌 자가 귀족 행세를 하며 그대를 희롱하고 짐을 농락해 왔는데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았더냐? 어림없지. 가차 없이 처단하는 게 마땅하다.”
“처단……한다고요?”
“그래.”
“왜요? 왜 그런 짓을 하시려는 거죠? 정령이지만 당신께 여느 인간 못지않게 충성을 보였는데? 이번 전쟁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도 세웠어요. 그런데 어째서…….”
“꽤 쓸 만하긴 했지만 줄곧 맘에 들지 않았어. 계속 내 속을 긁어댔지. 정령이기에 당연히 지니게 된 능력으로 내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으스댔지. 하! 생각할수록 열 받는군.”
“뭐라고요?”
에일린은 너무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여태 자신이 알던 황제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토록 편협하고 이렇게나 삐뚤어진 자였다니?
“그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정령의 진명을 알게 되면 형편없는 마법사라 해도 사역이 가능하다더구나. 한데 짐에겐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제국의 대마법사가 존재하니 무리 없이 가둬서 부릴 수 있겠지.”
“……!”
“걸핏하면 자랑하던 그 힘을 내 손아귀에 넣어두고 휘두를 셈이다. 그럼 내게 반역하는 무리가 생겨도 아주 손쉽게 혼내고 제압할 수 있겠지. 그런 놈이 다스리는 지역에 겨울이 오게 만들면 될 테니까.”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에일린은 렉스가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가 몸을 낮췄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폐하. 제발 부탁이에요. 그를 그냥 풀어주세요!”
렉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제국의 황제답게 조금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였던 적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공정하고 현명한 사람이지 않았던가? 한 군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글쎄, 뭐. 그대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냥 풀어줄 수도 있겠지.”
렉스가 앉은 채로 몸을 곧추세우며 턱을 추어올렸다.
“정말……이세요?”
“그래. 모든 건 네게 달렸다. 에일린.”
“무슨 말씀이시죠?”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 걸음 걸어 나와 에일린 앞에 멈춰 섰다. 이내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에 했던 제안을 받아다오, 에일린.”
“예?”
“나와 혼인해 달라는 제안 말이다. 아젤란의 황후가 돼줘. 그리해 준다면 그 정령왕을 풀어주마.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
“제가 거절하면…… 정말 그를 해치실 건가요?”
“그래. 그럴 생각이다. 영원히 내 손안에 잡아둔 채 집요하게 써먹고 괴롭혀 줄 작정이지.”
에일린은 숨이 턱 막혔다.
“너무하세요, 폐하. 도대체 왜 이러시죠? 당신은 이런 분이 아니셨잖아요?”
바싹 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아릿한 통증과 함께 입안에 비릿한 향이 퍼졌다.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조금의 망설임도, 온기도 없이 이어졌다.
“아니, 그대가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거다. 얌전히 내 사랑을 받아들였으면 평생 이런 지질한 모습 따윈 보여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 않았느냐? 감히 대제국의 황제인 나를.”
“폐하…….”
“그러니 그대의 잘못이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그녀를 응시하는 새파란 눈에 시린 원망이 서려 있었다. 에일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된다.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른다는 것일까?
“궤변이세요, 폐하.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거절한 것뿐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강요하실 수는 없는 일이에요!”
“왜 안 된단 말이냐? 그대야말로 착각하고 있군. 내가 직접 겪어 보니 사랑이란 것도 나라 간의 전쟁이랑 똑같던데.”
“네?”
렉스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지듯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여도 다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 존재하기 마련이야. 상대의 약점을 잘만 파악해서 공략하면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지. 암, 그렇고말고.”
스스로의 주장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때론 온갖 간계를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지만.”
“간계를 동원한다고요?”
무슨 말이지? 그럼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계획된 거란 말인가?
“그래. 처음엔 달콤한 회유책을 써서 달래 보는 거다. 하지만 그게 듣지 않으면 강경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거기 더해…….”
귀에 걸린 서늘한 미소가 좀 더 짙게 떠올랐다. 비겁해 보이는 웃음이다. 아니, 야비해 보이는 미소일까?
“볼모를 내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수를 쓸 수도 있겠지. 바로 지금처럼.”
“뭐라고요?”
“자, 에일린. 어떡할 거냐? 가엾은 볼모의 운명은 이제 네 손에 달렸는데?”
렉스가 확신에 찬 얼굴로, 오만하게 턱을 한층 높이 치켜들며 물었다.
“욱!”
에일린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구토가 올라왔기에. 예전에 엘시아 왕녀와 로드미오 대신관의 최후를 목격했던 그날처럼, 못 볼 걸 본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실제 뭔가를 토해내진 않았지만,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 방망이질 치듯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진정시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갈 곳 잃은 눈물방울이 투둑거리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미 한 번 그가 저지른 비열한 짓을 겪어 보지 않았던가? 그저 실수일 뿐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사람은, 인간이란 존재는 바뀌지 않는 법인데. 두 번의 생을 경험하면서도 또다시 간과하고 말았던 걸까? 결국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때 렉스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던 자신이.
‘히에무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왔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뒤늦은 후회와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어찌할 것이냐? 에일린.”
렉스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할 것이냐? 인간 여인이여.’
아벨라 여신의 목소리가 텅 빈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 울리는 것 같았다. 일전에 빛의 궁전에서 들었던 그 위엄 서린 음성이.
‘어떻게 책임질 것이지?’
어떻게? 그때 여신과 약속했었다. 자신의 존재가 히에무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가차 없이 그의 곁을 떠나겠다고.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애초에 다른 선택지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갈라져 피가 밴 입술을 더욱 꽉 악물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그저…… 제 몸만 갖게 되실 뿐일 거예요.”
“……!”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렉스의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앞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일 따윈 결코 없을 거라고요!”
그의 눈썹이 두어 차례 씰룩거렸다. 잠시 미간을 일그러트렸으나 곧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관없어.”
이제는 에일린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몸을 가지면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땅을 가지면 한 나라를 온전히 가지게 되는 것처럼.”
그 말을 듣는 순간 에일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경멸의 시선 말이다. 그걸 읽은 렉스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으나 거침없이 에일린에게 바짝 다가갔다. 싱긋 웃으면서.
“잘 생각했다, 에일린.”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에일린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굳혔다. 가까이 접근한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려 하자 가차 없이 휙 뿌리쳤다.
“무슨 뜻이지? 방금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의 몸은 이제 내 거라고.”
“제안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으니까요. 황후가 되기 전까진 이행된 게 아니잖아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날카롭고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향한 경멸감 역시 농도가 더해진 채로. 그가 피식, 짧은 웃음소리를 내뿜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렇군. 그 정도는 존중하고 기다려주지.”
“…….”
“국혼을 최대한 서둘러야 하겠군.”
중얼거리며 방문 밖으로 향하는 렉스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 전에 먼저 히에무스를 풀어주세요!”
그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물론, 때가 되면 풀어줄 거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그대 역시 이제부터 내 곁에 머물러야 한다. 이곳 라피스 궁에. 다시는 그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부탁이에요! 한 번은 보게 해주세요.”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적어도 한번은 만나 이야기해야 했다. 그를 배신한 게 아니라고. 그저 자백마법에 걸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히에무스와 헤어질 순 없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렉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 돼. 적어도 국혼이 끝날 때까진. 초야를 치른 후 완전히 내 여자가 된 후에 만나게 해주지. 그를 풀어주는 것도 그때 이후다.”
“렉스! 당신 정말!”
에일린은 그의 이름을 버럭 소리쳐 불렀다. 실망스러움을 넘어 한심스러움까지 밀려들었다. 렉스는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야릇한 표정을 짓고는 마법사를 향해 일렀다.
“케일론, 황궁 내 모든 마법사를 동원해 가장 강한 결계를 쳐서 에일린을 보호하도록. 어떤 정령도 접근할 수 없도록 말이지.”
“……알겠습니다.”
케일론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응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저희가 정령왕의 진명을 알고 있으니 정령들 또한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잘됐군.”
냉정한 한마디를 던진 후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렉스와 마법사가 그 방에서 멀어져갔다. 순간 에일린의 모든 희망 또한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드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립고 안타까운 한 존재의 이름만 계속 되뇌며.
“히에무스, 히에무스…….”
***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하레나 성에 수많은 이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어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대부분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 그리고 에일린의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귀족들과 지인들이었지만, 그 중엔 인간이 아닌 자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성주인 히에무스 대신 브로미오스가 그들을 맞이했지만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며칠째 히에무스와 에일린의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겨울의 궁전에서 나온 눈의 여왕과 북풍까지 왕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우리 왕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기별 없이 궁을 비우신 건 처음입니다.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가을의 왕이시여.”
눈의 여왕이 평소의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잠시 잊은 듯 다소 흥분한 낯빛을 감추지 않은 채 다그쳤다. 난처해진 브로미오스가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모른다네. 눈의 여왕. 나 역시 그를 며칠 전부터 찾고 있지만, 도무지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에일린까지 사라진 탓에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름의 여왕과 대지의 왕까지 불러와 상의하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눈의 여왕과 북풍까지 끼어들어 따지는 통에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함께 인간 노릇을 하던 중인 걸 다 아는데 어찌 모른다고 하십니까? 설마 저희를 따돌리고 다른 일을 계획 중이신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도 여기저기 수소문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라.”
한쪽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나서서 말했다.
“그래, 눈의 여왕. 조금만 더 느긋하게 기다려 보도록 하지. 이제 겨울도 끝났지 않은가? 많이 바쁜 시기는 지났으니까.”
“봄이 시작됐다곤 하지만 여전히 겨울의 왕의 역할이 끝난 게 아닙니다. 한동안은 하실 일이 남아 있단 말입니다. 여기 계신 정령왕들께서 소환을 좀 해 주십시오.”
보통 정령들 세계에서 하위 정령이 상위 정령을 소환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동등하거나 더 높은 위계에서나 행하는 일이었다. 브로미오스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그건 당연히 시도해 보았지.”
“그런데요?”
“나타나지 않았다.”
“뭐라고요?!”
눈의 여왕과 북풍이 동시에 날카롭게 소리쳤다. 브로미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소환까지 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건 누군가에게 묶여 있다는 뜻 아닙니까?”
북풍이 불안한 듯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묻자 브로미오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높겠지. 그래서 지금 몇몇 정령왕들을 모아 상의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눈의 여왕이 짧게 외쳤다. 순간 그 두 겨울의 정령이 내뿜는 기세에 넓은 접견실 안이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찼다. 금방이라도 그 방 안에 매서운 눈 폭풍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에스타스와 함께 조용히 서 있던 대지의 왕 텔루스가 얼른 주의를 주며 입을 열었다.
“진정하도록 하라. 겨울의 권속들이여. 이런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왕께서 누군가의 불온한 세력에 속박당해 있다는데? 당장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의 여왕이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 따졌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 인간 여인을 찾아 다그쳐보면 될 것입니다. 그 여인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그 여인이라면 에일린 말인가?”
눈의 여왕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가 겨울의 왕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다른 이에게 발설했다면…….”
“……!”
브로미오스와 텔루스, 에스타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명을 가르쳐 주다니, 히에무스……. 너무 경솔한 짓을 했군.”
에스타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몰염치한 짓을 저지를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북풍이 딱딱한 말투로 되받아쳤다.
“인간이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변덕이란 그들의 종특이지 않습니까?”
“좀 더 알아보면 확실해지겠지.”
잠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접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유니콘인 루카스가 나타났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손에 든 두루마리 편지를 호들갑스럽게 흔들었다.
“큰일 났어요! 큰일!”
브로미오스가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지?”
“황궁에서 편지가 왔어요! 보름 후 국혼이 열린다고요!”
“국혼이라니? 아젤란 황제가 혼인을 한단 말인가? 누구랑?”
“그게, 에일린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