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그들
"잠깐, 여기 세워 봐요. 저 집 망고무스케이크 먹고 싶어요."
"이런 공원에 노천카페가 있네."
"몰랐어요? 저 집 케이크 되게 유명한데."
"그래? 어디 맛 좀 볼까? 주차장이 어디 있나."
느리게 가는 차안에서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화란은 미간을 모으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얀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면바지에 검정 폴로셔츠를 입은 남자는 분명히 석지환이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테이블에는 커피 잔과 노트북이 있었다. 예전 뉴욕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안내려?"
"아, 난 안 내릴래요. 포장해서 집에 가 먹어요."
"그럴까? 망고무스케이크?"
"네. 그리고 치즈케이크도 하나."
"오케이."
한 달 전부터 같이 살고 있는 남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피폐한 화란을 보살펴 준 야다의 사장 배재인이었다. 화란은 멀어져가는 재인에게서 시선을 떼 지환을 보았다.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보였다. 깔끔한 양복 차림이 아니어서 그런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거기에 이따금씩 어딘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웃으려고 노력해 웃는 게 아니라 저절로 표현되는 그런 웃음은 석지환이란 남자에게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화란은 지환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한 여자와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짐작한 대로 여자는 오수연. 긴 머리를 높게 묶고서 청바지에 진홍색 셔츠를 입은 모습은 예전처럼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발에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모습이 풋풋한 여대생 같았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분명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아이는 멀리서 보기에도 건강하고 잘생겨 보였고 지환을 닮은 것 같았다. 생생하게 웃는 모습으로 오수연의 손을 붙잡고 느리게 걸음을 떼며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차문이 열리고 재인이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봤어?"
"봤어요?"
"눈에 확 띄더라구. 좋아 보이네."
"그러네요."
케이크 상자를 받아 무릎에 올려놓으며 지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와 아이가 시야로 들어왔다. 지환은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혀놓고는 헬멧을 벗겨주었다. 스케이트의 끈을 풀어주고 운동화를 신겨주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화를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해 보였다. 샘이 날 정도로…….
"되게 가정적인 아빠처럼 보이네. 오수연 씨는 더 예뻐졌어. 나이를 어디로 먹나 몰라."
"애가 참 귀엽죠?"
"그렇더군. 똘똘하게 생겼어. 제 아빠 닮았으면 한 인물 하겠지."
"저 사람, 더 멋있어졌어요."
"얼마 전에 타임지에서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을 선정했는데 10위 안에 들었더군. 창업하고 더 잘나가는 모양이야."
화란은 지환이 콜라를 마시는 오수연의 땀을 닦아주고 팔꿈치의 보호대를 풀어주는 걸 지켜보았다.
"예전엔 저렇게 따뜻하게 안 웃었는데……."
"다복해 보여. 부럽군."
화란은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재인을 보았다.
"질투 나는 게 아니라 부럽다구요?"
"질투? 질투가 왜 나?"
"배재인 씨, 나 아직 허락 안 했어요. 너무 마음 놓고 있지 말아요."
"허락 안 하면 화란이 손해야. 내가 이쪽 바닥에 우리 같이 사는 거 다 말했거든. 국내에선 나 말고 받아줄 남자 없을걸."
"남자가 뭐 대단해요? 난 혼자도 살 수 있는 여자예요."
"그 얘기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 혼자 살 수 없어서 합친 거 아니잖아. 둘이 같이 있는 게 더 좋으니까 합친 거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
화란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차가 출발한 뒤에도 사이드미러로 지환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저 모습이 아마도 석지환이 그토록 애타게 원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12년 동안 자신의 심장을 내놓고 악착같이 버틴 이유가 그 모습에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는 행복한 미소가 있었지만 거기엔 기쁨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지난날의 고통이 함께 스며 있어 보였다. 그래서 저 미소가 더 찬란해 보이는 모양이다. 진정한 동반자의 미소이기 때문에…….
작가후기
글은, 쓰는 사람이 즐겨 쓴 글이 아니면 읽는 사람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또,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작업인데 본인이 즐겼으면 그걸로 만족하라는 얘기도 듣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업은 산고나 각고에 비교되고 있을 만큼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고통에 비하는 작업을 즐길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 봅니다.
후기는 아무리 잘 써도 사족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문 속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고서, 후기 속에서 다시 본문의 얘기를 하는 건 변명 같아 늘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도 또 사족을 달게 되는 건 자식 내놓고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의 마음 같아서인가 봅니다.
<국향 가득한 집>은 어느 순간 일제히 떠오른 이미지를 하나하나 엮어 만든 이야기입니다. 국화 향기, 폭풍 치는 밤, 어머니의 눈물, 소녀의 미소, 소년의 떨림……. 엮으니 부모의 외면 속에 한이 서린 집에서 자연히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한 몸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게 된 남매의 외곬 사랑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지환과 수연처럼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 함께하면 고통과 슬픔도 기꺼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닌가 합니다.
저희 집은 딸만 넷이어서 어머니는 아들 없는 것에 늘 자격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가 타박을 하는 사람도 없는데 친지들 모이는 때면 당신께서 먼저 '아들 낳는 책임은 남자 쪽에 있다'는 말을 꺼내곤 하십니다. 어렸을 땐 듣기 싫었지만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듣다보니 흘려듣게도 되고, 이제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알 것도 같아서 맞장구도 쳐드립니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제 어머니도 옥진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누구보다 옥진에게 많은 애정을 느낍니다.
원고 분량이 많아서 고생하셨을 김진웅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진 씨, 아름 양, 결정적 힌트 주신 드림언니, 티파니 가족들, 다음 카페의 이찌코 님, 파란미디어 박대일 편집장님, 마지막으로 어머니, 감사합니다.
힘찬 첫 걸음을 내딛는 파란미디어가 기분 좋은 파란을 일으키길 바라며 후기를 마칩니다.
국향 그윽한 가을을 기대하며
이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