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나이 스물에
옥진은 가난은 하여도 뼈대는 있던 집안에 귀염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둘이 있었지만 어렸을 적 모두 사고로 잃고 늦게 보게 된
딸 옥진을, 부부는 하늘이 주신 선물로 알고 애지중지 키웠다.
옥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을에서 꽤 알부자로 소문난 집에서 탐을 낸다 하였다. 당사자도 아니고 그 어머니가 오며가며 보고 마음에
두었다하여 곧 상견례가 이루어졌다. 신랑감은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에 체격이 좋고 사내다운 기개가 넘치는 청년이었다. 반면 옥진은
이른 봄 목련 봉오리처럼 단아하고 해사하여 음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혼사는 옥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머니 약값 대기에도 빠듯한 가난한 살림인 줄을 알고 시댁에선 몸만 오라 했다.
지병이 있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어머니는 평소 애지중지 키우시던 국화 묘목을 혼수로 싸주셨다. 그렇게 옥진은 꽃다운 나이 스물에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3대독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여자는 무엇이고 아내는 무엇이며 며느리는 또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애정과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살았다. 시어머니는
옥진을 딸처럼 여기며 부엌살림을 가르치고 바느질을 가르치고 몸단장하는 법도 일러주었다.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어여쁜
아내에게 푹 빠져들어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애하고 아끼며 정을 주었다. 큰 고달픔 없이 살아온 이십 년 인생이지만, 옥진은 그 중에서
가장 호사를 누리며 행복한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괄괄한 성격이지만 잔정이 많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옥진을 참하다 하고 곱다고도 하였지만 더러는 답답증이
인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갈등이야 어느 고부간이나 겪는 것이었고 두 사람 역시 조금씩 삐걱삐걱하면서 차츰 숙이고
깎으며 잘 맞추어 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똥 싸는 모습까지 예뻐 보인다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옥진의 행복은 든든했다.
결혼을 하고 1년이 흐른 뒤에도 남편은 늘 옥진에게 안달했다. 남편은 아직도 아내의 알몸을 온전하게 본 적이 없었다. 젖가슴이야 술김에
옷고름을 잡아 뜯어 본 적이 있지만 사타구니 안쪽은 어슴푸레한 달빛에 더듬더듬 만져본 것이 전부였다. 옥진은 병석에 누워서도 아버지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처럼 단정한 것이 옳은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항상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단장을 했고 남편이 있을
적에는 화장실을 가는 것도 조심했다. 그럴수록 남편이 조급증을 내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옥진의 몸에 밴 품행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시집을 오고 2년 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에 또 친정아버지를 여의었다. 혈혈단신 끈 떨어진 연이 된 옥진은 시어머니를
부모님처럼 의지하며 남편을 목숨처럼 받들며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냈다. 후에 옥진은 그때에 부모님을 따라 죽지 못한 걸 통한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여읜 아픔은 그 뒤에 닥칠 고통에 비하면 전초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교회도 절도 가지 않는 시어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 있었다. 바로 점집이었다. 남편이 3살 때 열병에 걸렸다가 사지
멀쩡하게 살아난 것도 무당의 영험이요, 남편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는 것도 부적의 신묘불측한 기운 탓이며, 시어미 봉양 잘하고 부부 금실
좋은 며느리 얻은 것도 일월성신의 보살핌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시어머니에게 옥진의 유산은 환란과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뒤로 아버지마저 잃은 충격으로 옥진은 유산을 했다. 본인도 임신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삼일장 뒤에 찾아온 하혈은 옥
진에게 당혹감과 함께 끔찍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소식은 아들이 건강하고 며느리 나이 아직 한창인데다 부부 사이까지 좋아 아무런
걱정이 없던 시어머니의 꽁지에 불을 붙여놓았다. 시어머니는 매년 새해가 되면 액맥굿을 하는 것도 모자라 한 줌도 안 되는 핏덩어리로
스러진 아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굿을 치렀다.
"아무렴 묵은 귀신보다 새 귀신이 영험하겠지. 내가 보기엔 금와보살 대주할미는 벌써 몸을 옮겨갔어. 예전에는 금와보살 이마빡이 금칠을
한 것처럼 반짝반짝 했었는데 요즘엔 영 우중충하거든. 작년까지만 해도 눈에 반딧불이 한두 마리 든 것 같았단 말이지. 아무래도 신기가
다한 것 같다. 내일에는 강 회장 댁이 의탁한다는 델 한번 둘러봐야겠다. 이태원 어디에 있다는데 한 달 전에 말해 두지 않으면 코빼기도
못 본다는구나. 동자보살님이라는데 소시 적에 밥 훔쳐 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딱 알아맞힌다지. 내 가서 너희 합방할
날부터 잡아 올 테니 그전엔 아예 명곤이 곁엔 얼씬도 말아라."
다음날 그 동자보살에게 다녀온 시어머니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동자보살의 욕을 해댔다.
"망할 놈의 사기꾼 같으니! 내 딱 보니 소 뒷걸음질에 쥐 잡는 격이야. 영력 받은 행세는 하는데 몸주대신이 영 신통치 않아. 두고 보거라.
한 달이 못 가 문 닫고 말 테니! 어디다 대고 절손이야, 절손은! 빌어먹을 놈! 어린 것이 감히 누구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 대고 욕을 푸지게 해주고 오는 참이다. 에잇, 재수 옴 붙었다, 재수 옴 붙었어!"
그러고 나서 하루 꼬박 끙끙 생몸살을 앓으신 시어머니는 다음날로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용하다는 보살을 찾아다녔다. 선녀보살,
일월보살, 작두보살, 최보살, 족집게무당, 처녀무당, 현풍할매무당, 황해도만신, 백두도령……. 거기에서 시어머니가 얻은 건 대가 끊긴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와 신경화병이었다. 열에 여덟 꼴로 절손을 얘기하니 시어머니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건 3대 독자를 낳은 시어머니의 긍지와 의무이자 삶을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의지였다. 당신이 그 귀한 3대 독자를 낳았는데
당신의 몸에서 나온 아들에서 대가 끊긴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였다. 시어머니는 대를 잇기 위해서는 목숨을 감하는 일이라도 서
슴없이 할 태세였다.
욕을 푸지게 하고 나왔다던 동자보살에게 절손을 막고 대를 잇는다는 부적을 사들이고 선녀보살에게 굿을 하게 했다. 옥진은 시어머니와 함
께 인왕산 선바위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수탉이 낳은 계란을 먹고 아들만 셋 낳은 여자의 속옷을 입었다. 그러는 사이 꼭 아들을 낳아야겠다
는 의지는 시어머니에게서 옥진에게로 옮아갔다. 대를 잇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자식을 낳고 싶었고 시어머니의 애착과
시달림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옥진과 시어머니에 비해 남편은 고부가 하루 종일 매달려서 고심하고 있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던 사업에 한창 재미를 들여 바깥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은 꼬박꼬박 잘 먹고 있지? 치성 드리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네, 어머니."
옥진의 다짐을 받고도 못마땅한 시어머니는 아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진맥을 짚어 봐도 이상이 없다하고 병원에서도 둘 다 정상이라는데 어찌 이렇게 애가 안 생겨. 곤이 너 혹시 어디 딴 계집이라고 보고 있는
거 아니냐?"
"허허, 허허허, 어머니도 참……."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야. 똑바로 대답을 해봐. 어디 딴 데 보는 데가 있지?"
시어머니는 옥진을 한자리에 두고도 서슴없이 그런 걸 묻고 있었다. 옥진은 굳은 얼굴로 슬쩍 자리를 피했지만 두 귀는 남편의 대답에 쫑긋
세워져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회사 일로 바빠서 집에도 잘 못 들어오는데 딴 데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아침부터 뭐 하러 그런 말씀을 하세요.
괜히 옥진이 맘 상하겠네."
"아니면, 아니면 어째서 애가 없냔 말이다. 굿도 하고 치성도 그리 드렸건만……. 혹시 받은 날에 안 하고 헛짓 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어머니. 꼬박꼬박 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참,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그 일을 할 때 말이다, 아주 깊숙이 넣어야 한다. 그래야 씨가 기운이 덜 빠지는 게야. 날 훤히 밝기
전에 하고, 쌀밥에 고기 많이 먹고, 자주 하면 못 쓴다. 자주 하면 진기가 빠져서……."
"어머니, 그만하세요. 어머니 말씀대로 다 잘하고 있다니까요. 애야 생길 때 되면 생기겠죠. 둘 다 아직 젊고 몸 건강한데 뭐가 그리 걱정이세
요."
"이놈아, 이 오씨 집안이 손이 얼마나 귀한 집인지 몰라서 그러냐. 내가 너 낳기 전에 너희 할머니한테 얼마나 볶임을 당했는지 너는 모를 게다.
시집 온 지 3년 만에 너를 낳고 내가 목을 놓아 울었다. 요 고추 하나 얻으려고 내가 그 고생을 했나 싶은 게……. 에고, 누가 알겠니.
내 속만 타지, 내 속만 타."
시집을 온 지 5년이 되던 해에 남편이 집을 지어 주었다. 시어머니의 아들 닦달에도 옥진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넓은 화단을 갖고 싶다는 옥진의 바람에 따라 정원이 넓은 집을 지어주었다. 그 집이 완성되던 날 집 구경을
시켜주던 남편이 말했다.
"소일거리 삼아 텃밭이라도 가꾸든지 해. 친구도 없고 나다니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고 어머닌 아들 타령만 하시
니까 마음 둘 곳이 없을 거야. 장모님처럼 국화라도 키워봐. 장가들기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말야, 당신은 흰 국화를 닮았어. 맑기가 깊은
산속 샘물 같고, 소복처럼 깨끗하고 단정하고, 허튼짓은 절대 안 할 사람처럼 보였지. 나는 당신 몸에서 나는 향기가 참 좋았어.
범하고 싶은 충동이 일더군. 하하, 난 당신을 보면 산적 같은 기분이 들곤 했어. ……그동안 당신한테 못해줬던 거, 앞으로 못할 일들 다
포함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담아 지었어. 이 집은 당신 거다. 내 사랑하는 여자 황옥진한테 주는 내 마음이다."
옥진은 매일 마룻바닥을 닦았다. 방을 닦고 기둥도 닦고 베란다 난간도 닦고 벽과 천장도 닦고 2층도 닦았다. 나무에서 빛이 나도록 닦고 또
닦고 가꾸었다. 그리고 국화를 심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밤마다 심었고 시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었고 마음 허전하고
고독하고 괴로울 때마다 심었다. 그렇게 심은 국화는 앞뜰을 메우고 뒤뜰을 메우고 집안을 가득 채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옥진은 두 번째 유산을 했다. 결혼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여자가 돼서 제 몸 하나도 간수를 못하누! 몸을 그렇게 부리는데 다 큰 애라도 어디 붙어있겠니! 누가 너한테 집안일하라든! 몸 간수
잘하라고 누누이 일렀건만 기어이 애를 놓치고 말아! 저년이 우리 집안 대 끊으려고 들어온 악귀가 아니냐! 에고, 망할 것! 저런 박복한 걸
며느리로 들이다니 내 천추의 원한이다, 원한이야! 아이고, 어머니! 저 원수 년을 어찌하면 좋겠소! 아이고, 어머니!"
본디 혈압이 높으셨던 시어머니는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서 당신의 병을 쫓는 굿을 했다. 그 굿 덕분인지 다시 예전의 기운을
되찾은 시어머니는 또 여러 보살님들을 찾아다니셨다. 그 무렵 시어머니의 모습은 옛 마을 어귀에 있는 천하여장군 같았다. 엄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워서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다.
차츰 옥진은 굿을 하는 무당의 시중을 드는 데에 이골이 났다. 하도 빌어서 손바닥 금이 다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지치다 못해 무감각했고
짜증을 넘어서 저주스러웠다. 그들이 풍기는 독특한 냄새와 울긋불긋한 색깔만 봐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남편의 아내도 없고, 시어머니의
며느리도 없고, 오로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인 자신밖에 없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옥진의 신경질에 남편조차도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집안일을 등한시한 덕분인지 남편의 사업은 날로 커져갔다. 그때 옥진은 남편에게서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여자의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
짙은 향수와 새빨간 립스틱, 교태 어린 웃음소리 배인 손으로 느닷없이 안겨주는 보석들.
"허튼 데 가서 돈 쓸 거 없다."
"허튼 데라뇨,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허, 참."
남편의 웃음은 얄팍해서 금세 속을 알 수가 있었다. 옥진은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남편의 사랑마저
자신에게서 떠난다면 자신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살아도 좋은 건지 두렵기만 했다.
"내가 마침 맞는 사람 하나 구해 놨으니 조금만 기다려 봐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밭이 안 좋아서 애가 자꾸 미끄러진다니 좋은 밭을 구해 와야 되지 않겠니."
"어머니!"
남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어머니를 탓했다.
그날 밤 남편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옥진을 달랬다. 옥진은 등을 돌리고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편의 손을 거부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안으려던 남편이 그 시늉마저 멈춘 건 강제로라도 안으려던 남편 앞에서 눈물을 터트린 날부터였다.
남편은 벼락같이 화를 냈고 지쳤다고 말했다. 국화처럼 고결해 보여 좋다던 남편은 국화처럼 뻣뻣한 여자 진저리쳐진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남편의 돌아선 마음을 잡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눈물만 났다. 옥진은 하루하루
배짝배짝 말라만 갔다.
어딘가에 아파트가 마련되고 거기엔 굉장한 돈을 지불하고 사들인 여자가 있었다. 출장이 아니고는 그래도 꼬박꼬박 집으로 들어오던 남편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옥진은 땅을 파고 국화를 심고 물을 뿌리고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하루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보다 남편이 더 미웠다. 자신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두 사람이 너무도 밉고 저주스럽고 싫었다. 죽어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어금니를 물었다.
"얘가 어디서 눈물 바람이야! 그렇게 청승을 떨고 앉았으면 들어온 복도 나가는 게야! 양반 댁에서 그런 것도 안 가르치고 뭘 했누!
시어미 원망하고 앉았다고 없는 애가 생기니! 네 팔자 사나운 걸 알아야지!"
독한 말을 내뿜던 시어머니는 아들이 진정으로 바람이 날까 걱정은 하였다. 때때로 옥진을 불러 앉혀놓고 눈물을 찍어내며
"내 며느리는 너뿐이다. 내가 네 속을 왜 모르겠니. 네 시할머니한테 내가 고스란히 당했는데 그 마음을 내가 왜 몰라. 걱정 마라.
속정이 들게는 하지 않는다. 내 며느리는 너 하나다."
고 하셨다. 하지만 옥진은 차라리 이대로 내쫓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딸 시집 잘 보냈다 생각하시고 돌아가신 부모님 밟혀 내 발로 나갈
수 없으니 소박을 시켜달라고 하고 싶었다. 차마 그 말을 못 뱉은 것은 시어머니가 정말로 내쫓을까 겁이 나서였다. 옥진은 남편의 곁을
떠난다는 것, 남편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죽고 말 것이었다.
시어머니의 눈물 다짐은 진정이었는지 아파트의 여자는 한번도 옥진의 앞에 나타나 시비를 거는 일이 없었다. 내 남자니 물러서라 한다면
옥진은 그대로 혀를 깨물고 말았을 것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속정 들게 하지 않겠다는 이유 때문인지 여자는 석 달이 지나
돌려보내졌다. 이상한 건 남자의 사타구니 냄새만 맡아도 싹을 틔울 거라고 뽑혀 온 여자의 자궁에서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그 일이 옥진이 집안에서 저주를 퍼붓는 탓이라고 욕을 해댔다. 별안간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는 가위로 국화 줄기를 싹
둑싹둑 잘라버렸다. 옥진은 아연실색해서 미친 듯이 국화를 자르고 있는 시어머니를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다 이 망할 풀 때문이다! 이것이 곤이 기를 다 빼먹는 거다! 다 잘라버려야 돼! 어찌 이렇게 내 앞길을 막아! 응! 너는 지긋지긋하지도 않니!
자그마치 10년이다, 10년! 차라리 죽자, 죽어! 나랑 같이 양잿물이라도 마시고 죽자, 이 못난 것아!"
아파트에는 2년 동안 총 네 여자가 거쳐 지나갔다. 세 여자는 태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한 여자는 선금만 받고서 나흘 만에 사라졌다.
달아난 여자에게는 다른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시어머니와 남편은 크게 다투었고 옥진은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갔다.
마흔에 접어들자 남편도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금씩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조강지처 이외 다른 여자를 넷이나 품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그것이 괴로웠는지 아니면 그것을 무기로 삼기로
했는지 더더욱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녔다. 옥진은 피폐해진 마음에 다시 국화를 심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집이 완공되던
날 눈물 돌게 했던 남편의 말을 곱씹으며…….
시어머니의 절대적인 믿음을 받고 있던 무당들이 절손을 막는 비책으로 준 부적과 굿과 씨받이는 15년간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뿌리
깊이 박힌 시어머니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고 더 용하고 영험한 보살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게 만들었다. 서슬 퍼렇던 시어머니의
기세가 꺾인 건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기고부터였다. 시어머닌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드신 상황이 되자 급기야 옥황선녀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날카로운 눈을 하고서 옥진을 보았다. 옥황선녀는 가짜 진주알로 장식한 족두리를 쓰고 선녀의 날개 옷 같은
걸 입고 있었다. 꿇어앉은 시어머니의 절을 받으며 옥황선녀가 말했다.
"애를 봐야 애를 낳지."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애를 봐야 애를 낳는다니……."
"며느리 눈을 봐. 자식 받을 눈인가. 눈에 웬 할망구가 들어앉았어. 들어온 애마다 족족 잡아먹는다."
"아이구, 아이구, 어머니! 그 할망구가 누구요! 내 집에 붙은 그 귀신이 누구요!"
"이 며느리 조상귀신이네. 어미냐, 할미냐."
"뭐, 뭣이! 이년이, 이년이 우리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하고 들어왔구나!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을 알았어! 에잇, 이 망할 것아!
이 주리를 틀 년!"
시어머니는 두 주먹을 쥐고 옥진의 등이며 가슴팍을 내리쳤다. 옥진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옥황선녀를 노려보았다. 가슴에 비수라도
있으면 여자의 심장에 내리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어디에 귀신이 붙었단 말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의 어머니가 딸 잘 되게 도와주었으면 도와줬지 해코지 할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믿고 있는 시어머니가 차라리 불쌍했다.
"이년을 쫓아내면 되겠소? 이년만 내쫓으면 절손은 면하겠소?"
"아들 잡고 싶어? 쫓아내면 원한 품고 더 괴롭힐 텐데."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물을 받쳐야지. 잡아먹을 걸 하나 던져주면 얌전해질 것이네. 어디 가서 업둥이라도 하나 데려와. 사내놈으로 데려오면 사내놈을 점지해
줄 것이고 계집년을 데려오면 계집년을 내릴 것이네. 대 잇고 싶으면 보시布施를 해야지, 그저 먹으려고 드니 괘씸하지 않나. 어미 아비
없는 불쌍한 인생 하나 구제해 주세. 허면 은혜를 내리지."
"어, 업둥이를 어디서……."
"동남쪽이 좋겠다. 기가 밝네. 연이 있어."
옥황선녀의 말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의 시어머니 속을 시원하게 박박 긁어준 셈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또 다른 보살을 찾아 물어보며 검증을 받았을 테지만 몸이 급속도록 허약해지신 시어머니는 자신의 기력이 전 같지 않은 걸 알고서는
곧장 일을 진행시켰다. 양자까지 들여야겠느냐고,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보자는 남편의 설득에도 시어머니의 고집은 꺾이질 않았다.
옥진과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이끌려 원하지도 않는 양자를 들이게 되었다. 그들이 방문한 고아원은 평소 남편의 회사에서 후원하고 있는
곳 중 하나로 외진 곳에 있는 오래 된 복지 시설이었다. 거기엔 만 1세 미만의 영아에서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모두 80여 명의
아이가 있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벽돌이 무너지고 금이 가 있는 낡은 건물은 외관의 허름함보다 더 낙후한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낡고 허름한 것은 둘째 치고 더럽고 지저분한데다가 그늘까지 깊었다.
옥진은 좁은 방에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복작거리며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필이면 이런 곳의 아이를 데려다 키워야 되겠느냐
고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시어머니는 꼬장꼬장한 표정으로 옥진을 나무랐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딱 여기가 동남쪽이다. 그리고 곤이 회사에서 후원하고 있으니 우리 집이랑 연도 있고, 이보다 알맞은 데가 어디 있어.
옥황선녀님 말씀하신 곳이 바로 여기다. 보시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너는 나서지 말고 입 꾹 다물고 있어. 감히 네가 입이 열 개라도
말할 계제가 되느냐. 제 주제도 모르고선!"
옥진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아이들을 보았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심이 없던 남편은 아이들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는지
이 아이, 저 아이 안아보고 얼러 보기도 했다. 옥진은 처음으로 남편도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이기는 척 씨받이들을
받아들였을 땐 여자 욕심 때문만 아니라 자식 욕심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바닥에 엎드려 겨우 머리 드는 아이들이 옥진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옥진은 한참동안 뻐근한 가슴으로 그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구슬처럼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옥진을 향해 환히 열려 있었다. 이제 겨우 목을 가누는 아이들이 안아달라고 조르는 눈으로
옥진을 한없이 쳐다보고 있는 게 너무도 측은하고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옥진은 어떤 아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가슴 깊이 포근한 살
결을 맞대고 싶은 간절한 마음 이면에 지난 15년 동안 피눈물 흘렸던 세월이 서럽고 분해서 증오스런 마음이 일었다. '아이'라는 그 자체가
지긋지긋한 원한이었고 피맺힌 설움이었다. 어떤 아이도 자신의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옥진은 남편이 칭얼대는 아이를 안타까워하며 안아주는 걸 보고서는 아예 눈을 돌려버렸다. 그때,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깡마른 몸에 거무튀튀한 얼굴, 유난히 눈동자가 까맸다. 이발할 때를 놓친 삐죽삐죽한 머리가 물을 발랐는지 기름을 발랐는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마치 동남아 지역의 원주민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는 옥진을 보더니 머리가 거의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해왔다. 왼쪽 이마
위로 반듯하게 그어놓은 가리마가 하얗게 드러났다. 아이는 빗자국이 선연히 남은 그 머리를 다시 들고서 제법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석지환입니다. 네 살입니다. 밥도 잘 먹도 청소도 잘하고 구두도 잘 닦습니다."
그러더니 아이는 조르르 달려가 현관에 벗어놓았던 남편의 구두를 가지고 와보였다. 남편의 검은 구두는 은빛 광택이 돌도록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여있었다. 아이는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옥진을 보고 있었다. 그때 옥진은 아이의 모습과 말과 행동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아이는 이 시설에 있는 어떤 아이보다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누구의 손이 닿아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는 부모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신생아가 아닌 아이들은 입양이 힘들다. 사내아이라면 더 힘들다. 그러니 번번이 실패했을 것이다.
신생아일 때부터 이 시설에 있었다면 자라온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예비 부모들을 만났을 것인가. 그들의 눈에 들려고 아이는 갖은
노력을 해왔을 것이다. 머리를 빗고 깨끗한 옷을 입고 손님의 구두를 닦고…….
옥진은 차가운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겨우 네댓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이 사내아이의 영악한 발버둥이 싫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거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애쓰면 애쓸수록 너만 괴로울 뿐이다.
차라리 그냥 받아들여라. 그냥 받아들여.
옥진의 냉랭한 표정에 아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아이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더 번득이는 눈망울로 옥진을 꼿꼿이 바라보았다.
자신은 여기에서 벗어나고 말겠노라고 도전하는 아이의 전투적인 눈빛이 비수 같았다. 바득바득 매달리는 아이의 시선은 운명에 순응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옥진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아이에게 가슴을 찢는 절망감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원장실에서 아이들에 관한 정보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창가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 일은 삼, 삼 이는 육, 삼 삼은 구, 삼 사 십이……."
창문으로는 아이의 검은 머리만 보였다. 하지만 옥진은 그 아이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립니까?"
"아유, 쟤가 또……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선 원장은 복도로 나가 호통을 쳤다. 보육 교사를 불러 아이를 단속시키지 않았다고 야단도 쳤다. 하지만
아이는 중간 중간 창가에 매달려 구구단을 외우며 대화를 방해했다. 결국 시어머니가 아이를 불러들이라고 했다.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옥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석지환이고 네 살입니다. 밥도 잘 먹고 청소도 잘하고 구두도 잘 닦습니다."
"고놈 참 영특하게도 생겼다."
시어머니는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더니 구구단을 외워보라고 했다. 아이는 2단에서부터 9단까지 단숨에 줄줄 외웠다.
천자문의 앞부분도 술술 외우더니 잘한다고 박수를 치는 시어머니와 장단을 맞추어 노래도 부르고 국민체조도 했다. 그렇게 시어머니의
혼을 쏙 빼놓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시어머니는 혀를 쯔쯔 찼다.
"안됐다. 조렇게 잘생기고 똑똑한 놈을 아까워서 어떻게 버렸을까. 어미 속이 속이 아니겠다. 나이만 좀 덜 먹었어도……."
아이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옥진은 아이의 눈에 찔끔 맺히는 물기를 보고 고소해했다. 거봐라, 내 말이 맞지.
그러나 아이는 끈질겼다. 의논 후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나오는데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제 윗옷으로 차를 닦고 있었다.
한겨울 칼바람이 불어 아이의 젖은 머리칼에는 살얼음 같은 서리가 끼여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만지작거려
손자국이 난 곳마다 더운 입김을 불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남편의 운전기사는 어이없어 하면서 웃고만 있었다.
"고 녀석 참…… 아깝다."
시어머니는 보고서 입맛을 다셨고 옥진은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쳤다. 시설에 다녀온 며칠 후 시어머니는 옥진 내외를 불러 앉혀 놓고
심각히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고 아이가 눈에 밟혀서 밤에 잠이 안 와."
"하지만 어머니, 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고놈은 똑똑해서 지가 양자로 들어오는 걸 알 것이다. 나중에 볼썽 사납게 재산 싸움하는 것보다 애초에 너는 데려온 자식이니까 넘보지
말라고 못 박아두는 게 낫지 않겠니."
"정말 아이가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어허, 무슨 말을 하려고! 부정 탄다. 옥황선녀님이 점지해 주신댔으니까 틀림없다. 나는 믿는다. 틀림없이 오씨 집안 4대 독자를 옥진이가
낳을 게다."
올 겨울 접어들어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유난히 저승꽃이 많이 피었다. 그래선지 시어머니의 말은 옥황선녀보다 더 음습하고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 재앙이라도 닥칠 것 같았다.
옥진은 숨이 막혔다. 부엌에서 감자를 썰다가도 식칼을 부르르 움켜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대로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시어머니의
심장에 내리꽂고 싶었다. 때로는 어머니의 휠체어를 연못 안으로 밀어 넣고 싶은 마음에 화들짝 놀랐다. 옷을 갈아입혀 드릴 때면 옷고름으로
어머니의 주름진 목을 죄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섬뜩해지기도 했다.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시어머니에게 사랑받았던 기억 같은
건 말끔히 잊어버리고 이 증오를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옥진의 가슴엔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멍울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아이를 데려오던 날 옥진은 자신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들어올 아이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보면 그 아이의 눈을
파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남편은 아이를 데려다 놓고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자정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들어온 남편을 방
한쪽에 밀쳐놓고 옥진은 신방을 지키는 새색시처럼 꼼짝도 않고 앉았다. 저 낯선 아이를 내 자식으로 키우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더럽고 추한 핏줄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그때 옥진의 마음으로 뜻밖의 의심이 깃들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선뜻 네 살이나 먹은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셨을까. 그렇게 내 핏줄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
드르릉 코를 고는 남편을 보았다. 코가 닮은 것도 같았다. 거무튀튀한 이마도 닮은 것 같았다. 사내다운 골격하며 뾰족한 귀하며…….
옥진은 자는 남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소리 없이 울며 가슴팍을 내리쳤다. 눈을 뜬 남편이 옥진을 안았다. 안으로 흐느껴 우는 옥진을
안고서는 옷을 벗겨냈다. 옥진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남편의 얼굴을 할켰다. 화가 난 남편은 크르릉대며 옥진의 젖가슴을 짓이겼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옥진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남편의 어깨를 물어뜯고 피눈물을 쏟아냈다. 가슴은, 절규와 오열을 품은 먹먹한
가슴은 깨끗이 난도질당해 처참히 침몰되었다. 그러나 그날의 고통으로 옥진은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다.
옥황선녀의 영험함이 은혜를 베풀어 아이를 주셨다. 커다란 비단잉어를 가슴에 안는 태몽을 꾸시고서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화기가 돌아
백 년은 더 사실 것 같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몇 달을 못 참으시고서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 옥진의
배가 부풀어올 무렵이었다. 하지만 옥황선녀의 영험함은 반쪽짜리였다. 아이는 딸이었다. 대를 이은 사명을 다하였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히
저 세상으로 떠나셨을 시어머니도 뒤통수 맞은 기분일 것이다. 비단잉어는 딸이었다.
남편은 허탈해했지만 옥진은 통쾌했다. 15년 세월에 조금은 앙갚음이 되었다. 그러나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남은 딸은 이제는 돌아올 것
같은 남편의 사랑을 앗아갔다. 자신의 탯줄을 끊고 나온 아이답지 않게 생기가 넘치고 발랄해 청년 시절처럼 맑게 웃는 남편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옥진은 딸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제 아비를 쏙 빼닮아 내 자식 같지 않았고, 군데군데 시어머니의 괄괄함이 묻어나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반면 데려온 아이는 도무지 애 같지가 않았다. 바늘 끝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반듯했고 실수도 없고 귀여움도 없었다.
보면 볼수록 아이의 영악함이 섬뜩하게 싫어서 소름이 다 끼쳤다.
아이는, 자식이란 건 더 이상 옥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이는 시어머니에게나 의미 있는 제물이었을 뿐이었다. 아이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제 옥진은 자신을 해체하고 난도질한 잔인한 운명을 외면할 생각이었다. 남편의 사랑으로 잉태된 집에서, 숭고한 친정어머니의
정신이 깃든 국화 앞에서, 그 무엇에도 고통 받지 않으며 초연히 이 생을 정화할 것이다. 시어머니의 욕심과 무당들이 불러들인 잡귀와
남편의 방탕함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자신의 피폐한 영혼을 깨끗이 씻어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