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베라
무기력하게 앉아서 창밖만 보고 있는 건 수연의 생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겹겹이 닥친 충격과 혼란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수연은 생각도 없이 감각도 잃어버리고 의미 없는 오브제처럼
그저 빈 공간을 채우고만 있었다.
드문드문 건물이 보이고 한동안 차도 꽤 많이 보이더니 곧 울창한 소나무 숲에 파묻혔다. 그러고도 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리고 맑은 공기에 찬 기운이 감돌 즈음엔 곳곳에 불빛이 총총 빛났다.
소리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 빛이 들더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리자."
수연은 내밀어진 지환의 손을 멍하니 보다가 핸드백과 재킷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지환을 뒤에 두고 먼저 차에서 내리니 통나무로 지어진 3층의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녹음이 짙은 산을 배경으로 선 외딴 건물은 커다란 소나무에 둘러싸여 뾰족한 지붕만 간신히 보였다.
주차된 차가 몇 대 있긴 했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생경스럽지는 않았다.
그곳은 온천이었다. 건물은 고급스럽지도 화려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담했다.
기모노를 입고 나와 맞이하는 여성이 가식적이지 않은 미소로 반겼다.
지환이 이름을 밝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입니다.' 하고 안내했다. 마룻바닥이 100년은 되었을 것 같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더불어 온천은 어딘가 모르게 수연의 집을 닮아 있었다. 집을 둘러싸고 수목이 많은 것도 그렇고 나무로 지어진 것도 그랬다.
수연은 더 이상 '갑작스레 온천이라니! '하고 화를 내지 않았다.
이것도 지환의 계획이며 아무리 고집을 부리고 발버둥쳐도 지환은 기어코 자신의 계획대로 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지환에게 끌려 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수연은 너무 지쳤고 더러웠고 캐러밴에서는 자고 싶지가 않았다.
온천은 숙박업을 겸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약된 몇몇의 손님만을 받는 건지 온천은 두 사람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요했다.
수연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안내된 방으로 향했다. 다다미식의 방은 넓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개가 있었다.
전면의 활짝 열린 창으로 연못이 있는 소담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성들여 닦고 가꾼 흔적이 역력한 낮은 가구들과 화려한 문양의 화병들에서 전통과 기품이 느껴졌다.
"온천욕을 하시려면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흡사 일본 여성처럼 상냥한 여성이 내려놓은 것은 흑장미 같은 유카타 모양의 가운이었다.
실크의 빛을 내는 천 위에는 잔잔하게 벚꽃이 흩뿌려져 있었다. 수연은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살아 있는 듯 화사한 벚꽃 무늬를 어루만졌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어느 순간 뒤에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 지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건 서운했다. 사실은 좀더 불안한 느낌에 가까웠다.
여기에 또 홀로 버려진 건 아닌지 불안했다. 수연은 그런 자신의 허약함에 짜증이 나려했다. 잊으려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유카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길이가 짧아서 거의 나이트가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욕의 보다 얇고 가벼워서 피부에 닿는 감촉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나이트가운만 입고
밖으로 나서는 것 같은 기분은 묘하게 수연을 흥분시켰다. 종업원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허벅지와 유두를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섹시한 여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이쪽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종업원은 온 길을 되돌아갔다.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수연은 마치 이곳의 주인이 자신인 것 같았다.
주차장의 차 주인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수연은 갸웃하며 복도의 끝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무심코 정면을 본 수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 어떻게……."
어둠 속에는 흐릿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노천탕이 있었다.
그 주위엔 바위와 잘 다듬어진 회양목,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철쭉과 붉은 빛으로 시들어가는 벚꽃이 있고
그 사이에 에로스를 닮은 아기 천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빛이라곤 아기 천사의 손에 들린 작은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뿐이었다.
하지만 그 빛으로도 노천탕에 앉은 지환의 모습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리 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이나 손짓이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수연은 발밑에 깔린 자갈을 보다가 다시 눈을 들어 지환을 보았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만 달아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위압적인 느낌이 풍겼다. 수연은 그냥 돌아서 가버릴까 생각했다.
지환과 이렇게 외진 곳에서 단둘이 온천욕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지환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이대로 달아나면 쫓아와 다그칠 것이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화가 나 이성을 잃으면 지환이 어떻게 나올지 알겠기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지환이 접근해 온다면…….
수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화가 나 있는 건 이쪽이다. 마음대로 내 반지를 버린 건 오빠니까. 접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걸 상기시켜야 한다.
냉정해지자. 멋대로 반지를 버린 건 정말 용서할 수 없다.
수연은 결심하고 자갈을 밟았다.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긴장감에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향긋한 냄새가 주위를 끌었다. 독특하고도 진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더니 몸속까지 퍼졌다.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노천탕 앞에 다다랐을 때의 수연의 얼굴은 긴장이 풀려 근육이 보드라워져 있었다.
"이건 무슨 계획인 거야?"
"오수연을 익혀서 잡아먹자는 계획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들어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짜도 다 소용없어. 난 더 이상 패륜은 저지를 수 없으니까."
"패륜?"
순간 지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지만 수연은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탕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와 감싸는 물의 따뜻한 온기에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
물의 바닥에는 질감 좋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그 바닥에 놓인 편편한 돌 위에 앉으니 물은 겨드랑까지 찼다.
수면 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붉은 꽃잎이 가득 떠 있었다. 옷을 벗고 들어갔어도 꽃잎들 때문에 몸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 알몸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누가 네 머릿속에 그 단어를 집어넣어놨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수연은 나른한 온기에 빠져 눈을 뜨지 않았다. 바위에 머리를 기대고 귀찮은 걸 떨쳐내듯이 중얼중얼 늘어놓았다.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볼 거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냐. 문제는 내가 이걸 문제 삼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
오빠와 나, 연관시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야. 이젠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내가 네 곁에 앉아서 이렇게 널 보고 있는데 그게 된다고?"
수연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바위에 기댄 채로 눈을 떴다. 불빛에 음영 진 지환의 얼굴은 아기 천사를 포획하려는 악마처럼 보였다.
"왜 안 돼? 오빤 12년 동안이나 날 모른 척했잖아. 오빠가 할 수 있는데 나는 못해? 나도 할 수 있어."
지환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했다. 수연은 외면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지환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하얗게 드러난 저 가는 목을 홱 꺾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목을 손아귀에 쥔다면 그 반대의 행위를 할 게 뻔했다.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탐미하며 애무할 것이다.
사실은 그게 더 급한 일이었다.
수연은 밤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요정이라는 작고 귀여운 이미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나른한 요염함과 자극적인 색기를 뿜어댔다.
지환은 자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치열한 전쟁을 하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수연을 덮치고 싶은 절망적인 욕구와 다투는 것이 차라리 즐거웠다. 예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 갈망은 오히려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파베라, 아편꽃, 사람을 중독시키는 꽃. 수면의 양귀비꽃처럼 매혹적인 수연에게 지환은 이미 중독되어 있었다.
꽃이 이끄는 대로 휘둘리며 욕정에 몸부림치도록…….
수증기에 수연의 뺨이 젖어갔다. 관자놀이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물방울이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 굴러 목덜미에서 가슴 속까지 흘러내렸다.
지환은 숨을 멈춘 채 물방울의 기행을 눈으로 쫓았다. 수연의 몸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이 물에 섞이어 자신의 몸 어딘가에 닿았을지도 몰랐다.
그 터무니없는 상상이 지환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수연은 찰랑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던 건지 눈앞의 것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뭐하는 거야?"
탕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지환이 눈앞에 와 있었다. 수연은 몸을 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저, 저리 가."
야단을 치려고 했던 건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환의 눈에 이미 성욕이 어려 있는 걸 눈치 채고 말았기 때문이다.
화급히 일어서 도망가려는데 한 발 앞서 지환의 손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지환의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 손바닥에 지환의 맨가슴이 닿는 순간 수연은 그대로 감전당해 버렸다. 수연은 그 전류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야, 약속했잖아. 내 허락 없이는 이러지 않는다고……."
"그럼 허락해 줘."
"아, 안 돼. 싫어."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이 듣기에도 그 거절은 단호하지도 진실되지도 않게 들렸다.
화를 내고 있어야 할 이유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연은 절망감에 빠져 고개만 계속 저었다.
"안 돼, 안 돼."
"내 눈 보고 말해 봐. 넌 내 눈 보고는 거짓말 못하니까."
"싫어!"
갈망이 이글거리는 지환의 눈을 피하려고 끌어내린 시선에 다부진 어깨 근육이 들어왔다.
중앙에서 두 쪽으로 갈라진 두터운 가슴 근육이 보였다. 조금 전 손바닥에 닿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각목으로 맞아도 견딜 수 있을 것같이 단단한 느낌,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되살아난 감각에 사로잡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갑자기 턱이 잡혔다. 잡혀서 억지로 끌어올려졌다.
하는 수 없이 수연은 눈을 들고 지환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낮게 쉰 목소리가 물어왔다.
"키스해도 돼?"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눈, 거절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눈, 키스 그 이상을 바란다는 눈이 있었다.
수연은 울고 싶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지환의 강렬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수연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 시선을 느낀 수연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수연은 눈을 감고 말았다.
입술이 입술을 삼켰다. 빨판처럼 흡착한 지환의 입술이 수연의 도톰한 입술을 빨아들였다.
수연의 입술은 온천의 더운 열기와 지환의 뜨거운 열망으로 아프도록 부풀어 올랐다.
"하아……."
강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쉰 수연의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분출하는 욕구를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지환의 침입은 거칠고 난폭했다.
키스 당하기 좋도록 목이 꺾이고 입 안 깊숙이 들어온 혀에 혀가 휘감기자 수연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지환의 입속으로 빨아올려진 혀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지환의 입술이라고 느낀 순간 수연은
말할 수 없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눈으로 탐미했던 건장한 가슴에 기어이 손을 대고 말았다.
"으음……."
지환이 기뻐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연의 하얀 손이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을 따라 미끄러질 때마다 매끄러운 피부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었다.
그 반응이 수연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희열이라 움찔 놀라고 말았다. 움직임을 멈추자 지환이 입술을 뗐다.
타액의 은빛 줄이 입술과 입술 사이로 늘어졌다가 사라졌다. 몸이 물보다 뜨거워졌다.
"넌 내 거다. 기억하지?"
열에 들뜬 눈으로 강조하는 그 목소리는 12년 전 그 밤의 것과 똑같았다. 지환은 또다시 주술을 걸려고 하는 것이다.
"나, 난 싫어."
그 말을 내뱉는 것조차 지금의 수연에겐 매우 힘들었다. 몸은 뜨겁게 지환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흉터가 된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마음이 다시 아플 거라고 경고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 그만 나갈래."
일어서려는 수연을 지환이 다시 잡아 앉혔다. 물방울이 튀고 수면이 크게 흔들렸다.
"널 만지고 싶어."
"오빠."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어. 널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
"그만해."
"일방적으로라도 하고 싶어. 약이라도 먹여서 덮치고 싶어.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너만 보이고 너만 원해. 지금 당장 널 가지고 싶어. 손발을 묶어서라도 해버리고 싶……."
철썩!
수연은 너무 끔찍한 말에 놀라고 화가 나 지환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그대로 계속 말하게 놔뒀다간 지환이 무서워질 것만 같았다.
"제발 정신 차려!"
수연은 가슴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를 냈다.
"강제라도 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용서할 것 같아? 죽을 때까지 용서 안 할 거야!"
수연은 지환에게 다시 붙잡힐 걸 겁내며 재빨리 탕에서 나왔다. 한쪽에 마련된 수건으로 몸을 감싸는데 한기가 들었다.
그때 머리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연은 이 차가운 빗물이 지환과 자신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기를 바랐다. 자갈이 진한 어둠으로 물들며 밤은 깊어 갔다.
철두철미한 지환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유보되는 법이 없었다. 예약된 것이기도 했지만 물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환은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앉은 수연을 힐끔 보았다.
조금 전의 수연이 섹시한 요정 같았다면 지금의 수연은 우아하고 깨끗한 금단의 열매 같았다.
흰 바탕에 연한 초록빛의 나비가 수 놓여진 유카타가 수연의 새하얀 피부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수연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 없었다. 눈길도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지환은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을 후회했다. 그때 수연이 때려주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할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그때에는 어둠과 향기와 물에 젖은 수연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그대로 삼켜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갖가지 생선회는 모두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비취색의 접시에 맛있게 담긴 무침회와 전복전, 황돔구이, 굴튀김이 야채들과 함께 나왔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곳은 한눈에 지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수연과 살았던 본가의 이미지를 풍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조용한 분위기와 정갈한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
담백하고 깔끔한 회가 입맛 없는 얼굴로 앉은 수연의 마음을 돌려놓기를 바랐다.
열어놓은 창으로 비가 시원스레 쏟아지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창 앞에 놓인 고무나무 넓은 잎을 때렸다.
투둑투둑.
그 빗소리 때문에 대화는 단절되었지만 지환은 이 침묵이 좋았다.
식탁을 두고 마주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평온한 시간을 갖는 것, 이것 또한 수연과 나누고 싶은 여유였다.
지금은 그 밑바탕에 수연의 분노가 깔려 있지만 언젠가는 편안하게 미소 짓는 수연과 이러한 시간을 갖고 말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인이란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얇고 긴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그 아래로 이미 알고 있는 풍만한 가슴이 부드러운 실크 천에 휘감겨 있었다.
넓은 소매 안으로 희고 보드라운 팔이 드러날 때마다 지환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자신을 자제해야 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수연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수연은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는 여자다.
어렸을 때부터 수연은 마음만 먹으면 꾀병을 부려 며칠이고 학교를 빼먹을 수 있는 아이였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면 난데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고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면 단식 투쟁을 불사하며 고집을 부렸다.
규율이나 원칙으로 통제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지환뿐이었지만 그건 12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지환이 더 다그치거나 하면 줄을 끊고 달아나버릴 것 같았다. 수연을 놓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지환은 깨작거리고 있는 수연의 접시 위로 연한 회 한 점을 간장에 찍어 놓아주었다. 수연은 가만 보더니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먹는 걸 보니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계속 이것저것을 옮겨주었다. 그러나 수연은 곧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좀더 먹어."
"오빤 여전히 잘 먹네. 예전에도 뭐든 잘 먹었지. 오빠가 먹는 걸 남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지환은 자신 쪽의 회가 반 이상 준 걸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시설에서의 기억은 항상 배가 고팠다는 것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늘 그랬던 것 같지만."
"그럼 밥 안 남기는 건 고아원에서부터 습관이 된 거야?"
"아무리 배가 불러도 차려졌을 때 먹지 않으면 안 됐지. 나중이란 건 없으니까."
지환의 대답을 듣고 묵묵히 접시를 보던 수연은 젓가락을 들고 조금 더 먹었다. 사뭇 진지하게 먹으며 수연이 말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오빠가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살았다는 거. 오빠 지금 모습 보면 태어날 때부터 황금왕관 쓰고 나온 황태자 같아."
"위로하지 않아도 돼. 태생에 열등감 같은 건 없으니까."
"위로하는 말 아냐. 사실이 그래."
빗소리가 타닥타닥 울렸다. 잠시 후 수연은 더는 못 먹겠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다시 놓았다.
"과일 가져올 거야."
"피곤해. 잘래."
수연은 물을 마시고 일어서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여기서 잘 거야?"
"다른 방으로 갔으면 좋겠니?"
지환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수연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의 줄지 않은 상을 안고 홀로 남은 지환은 잠시 그대로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수연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은 몰랐었다.
자신을 기억하길 바랐고 그리워하길 바랐지만 이렇게 상처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돌아오지 못해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수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갑게 맞아 주리라고 믿었었는데…….
상을 치우게 하고 거실의 불을 끄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외로웠다. 지난 12년은 외로움의 무덤이었다.
외로움의 깊이만큼 그리움이, 애정이 쌓였다. 그 사랑으로 인해서 더욱 더 외로웠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사랑이 있는데, 그런데도 외로웠다.
빗소리가 울리는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으려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떠나면서 끊었던 담배가 12년 만에 다시 피우고 싶어졌다.
그 생각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옆방에 누워 있는 수연에게로 생각이 옮겨질 거였다.
한동안 비 오는 정원을 보고 있던 지환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캐러밴에 두고 온 노트북을 가져와 일을 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곧장 문으로 향하려 했지만 수연의 방 쪽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연은 이미 잠이 들었는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면 수연이 어떻게 반응할까. 그대로 안아버리면 수연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환은 유혹에 못 이겨 방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휙 몸을 돌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환은 비를 맞으며 차로 갔다. 원래는 노트북을 방으로 가져와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수연이 있는 한 도저히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차에 앉아 일을 하기로 했다. 전원을 켜고 모니터를 보면서도 한동안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들리는 빗소리와 커피 향에 휘말려 조금씩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다. 그렇게 밤은 흘렀다.
우르르르 콰쾅!
느닷없는 굉음에 고개를 들었다. 어깨가 결리고 눈이 뻑뻑했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차창으로 번쩍하는 우뢰가 보였다. 4월에 천둥이라니…….
지환은 컴퓨터를 끄고 식은 커피를 개수대에 부었다. 뻐근한 허리를 펴며 창밖을 보니 빗줄기는 더 거세어져 어린 가지들이
휘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환은 차에서 나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깐이었는데도 머리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손으로 간단히 털고는 방으로 향했다.
수연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은 어둠과 빗소리에 잠긴 채 그대로였다.
수연이 천둥소리에 놀라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던 지환은 안심하고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빠……."
지환은 놀라 멈칫했다.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휙 몸을 돌렸다. 수연의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지환은 다급히 걸어 방문 앞에 섰다.
문을 열려다가 머뭇하고는 잠시 기다렸다.
"오빠…… 흑, 흑!"
분명한 울음소리였다. 수연의 울음소리였다. 지환은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에 적응한 눈에 방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지환은 다가가 옆에 앉았다.
"오빠, 오빠…… 흐흑, 무서워. 제발…… 가지 마."
수연은 자고 있었다. 자면서 울고 있었다. 감은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수연은 머리를 흔들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계속해서 지환을 불렀다.
"오빠……."
"수연아, 수연아!"
지환은 울고 있는 수연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 떠. 괜찮아. 꿈이니까 눈 떠."
그러나 수연의 눈은 좀처럼 떠지지가 않았다. 지환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거칠게 수연의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수연의 뺨을 감싸고는 소리쳤다.
"바보야, 눈 떠. 눈 뜨란 말야!"
"흐흑!"
흐느낌 사이로 수연이 눈을 떴다.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울먹이다가 지환을 알아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오빠?"
"그래, 나야. 괜찮아?"
주위를 둘러본 뒤에야 상황을 알아차린 수연은 안고 있는 지환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손등으로 젖은 뺨을 닦고는 떨리는 몸을 옹송그렸다.
"돼, 됐어. 괜찮아."
"왜 그런 거야? 나쁜 꿈 꿨니?"
"나쁜 꿈? ……맞아, 나쁜 꿈이야. 나쁜 기억이 떠오르는 꿈이니까 나쁜 꿈이지."
"나쁜 기억?"
정상을 되찾은 수연이 고개를 들고 지환을 쳐다보았다. 지환은 어둠 속에서도 수연의 눈빛에 비난이 서려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오빠가 떠나기 전날 밤, 그 기억."
"그날 밤 일이 꿈에 나타난다는 거야?"
"정말 지독한 밤이었어."
지환에게도 지독한 밤이긴 했다. 수연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인정했던 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목표가 생긴 밤이기도 했다. 돌아와 수연을 다시 얻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느라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이었다.
그날 밤에도 오늘처럼 폭우가 쏟아졌었다.
"아악! 정말 싫어!"
수연은 귀를 막고 머리를 흔들어댔다.
"저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지환은 절규하는 수연의 귀에서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들게 했다.
"계속 그랬어?"
원망하는 수연의 눈빛이 그 대답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계속?"
"얼마나 끔찍한 줄 알아! 이래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날 밤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미칠 것 같아! 비가 오면 약도 듣지 않아!
잠을 잘 수가 없어!"
수연이 소리쳤다. 지환은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손을 올렸다. 수연이 힘들어하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아아, 난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건가!
지환은 너무도 수연이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젖은 뺨을 닦아주려 향하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너 어떻게 울었는지 알아? 가지 말라고 했어. 오빠 가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울었어."
"거, 거짓말."
"이제 괜찮아. 그 밤이 지독한 건 내가 네 곁을 떠났기 때문인 거다. 안심해.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니까."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야!"
수연은 두려운 표정으로 소리치고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지환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문득 손가락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수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손가락 끝으로 그 부위를 더듬었다.
좀더 느끼려는 순간 지환이 거칠게 손을 뺐다.
"그만 자. 무서우면 내가 옆에……."
"자, 잠깐. 잠깐만."
수연은 몸을 일으켜 낮은 서랍장 위에 있는 스탠드 불을 켰다.
"손 줘봐."
"그만 자."
수연은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지환의 왼손을 완강히 잡아당겨 불빛 아래 비춰보았다.
손목을 가로지는 건 분명 흉터였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이거 뭐야?"
수연은 빼려는 지환의 손목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고는 다그쳤다.
"대답해!"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내,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
"수연아……."
"빨리 말해. 나 도는 거 보고 싶어?"
"……."
"오빠!"
"……미국은 너무 멀었어. 주위는 낯설었고, 공부는 막막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널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집에선 전화도 편지도 오지 않았어.
대학에 합격하고부터는 학비도 오지 않더군. 학비가 그나마 연결되어 있는 끈이라고 생각했는데……."
"미, 믿을 수 없어. 어, 엄마가 학비까지 끊었단 말이야?"
"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끝이라고 생각했지. 눈을 떠도 내가 원하는 세상은 아니었어. ……눈 뜨기가 싫었다.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워서……."
"그래서?"
"……죽고 싶었다."
"그, 그래서? ……그, 그었어? 오빠 손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지환의 표정으로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수연은 망연자실해 잡고 있던 지환의 손을 툭 놓았다.
"미쳤어."
수연은 충격에 얼어붙었다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열아홉의 오빠, 혼자 미국에서, 가족들의 염려도 애정도 없이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막막했으면…….
그래도 죽으려고 하다니!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왜 그랬어?"
수연은 주먹을 쥐고 지환의 가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내려치다가 급기야 마구 주먹질을 하며 소리쳤다.
"왜 그랬어! 나 다시 안 보려구! 나 영원히 안 보려구! 미쳤어! 정말 미쳤어!"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는 줄 알아! 그래도 나는, 나는……. 죽어! 죽어버려!"
"수연아……."
"보기 싫어! 나가! 다시는 보기 싫어!"
온몸으로 절규하는 수연의 몸을 지환이 안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수연의 몸을 안고 흔드는 지환의 얼굴은 검게 굳어 있었다.
지환의 가슴에 맺힌 고통과 상처는 눈물로도 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응고되어 있었다.
울지도 못하는 지환에게는 목 놓아 우는 수연을 안고 달래는 것이 위안이었다.
"잘못했어."
수연의 흐느낌 사이로 지환의 굵은 목소리가 흘렀다. 마치 가슴속에 응고된 고통을 토해 내는 듯한 격한 어조가 차갑게 절제되어 흘러나왔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다신 안 그래.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다신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