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5)

 조건반사 2

 지독히도 화창한 날씨에 머리가 어질했다. 

머리에 올려놓았던 레이밴을 내려 쓰고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도록 두었던 머리칼을 정수리 가까이로 높게 올려 집게 핀으로 고정시켰다. 

한결 시원해진 걸 느끼고 다시 공장으로 들어간 딱정벌레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골목을 걸었다. 

긴 두 블록이어서 집의 운전기사를 불러낼까 했지만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까 조심스러워 포기하고 말았다.

 "데리러 갈게."

 "안 돼. 엄마랑 마주치고 싶어?"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려."

집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지환을 말린 건 잘한 일이지만 강한 햇살 아래 아찔하게 높은 샌들을 신고 걷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수연은 1시간 전 지환의 전화를 받고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을 했던 사람치고는 거의 완벽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보다 훨씬 신경 썼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는 차림이었다. 

슬리브리스 톱에 리넨 소재의 짧은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캐주얼한 사파리 재킷을 걸쳤다. 

거기에 펀칭 장식이 된 원통형 토트백을 메고 액세서리는 테크노마린의 깜찍한 시계로 마무리했다. 

인도를 걷는 수연의 세련되고 시원스런 모습에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지곤 했다.

화장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외선 차단 크림에 야구모자면 충분했었다. 

수연은 후회하면서도 거리의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을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점검했다. 

어딘가 어색하거나 과장된 느낌은 없는지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미적거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약속 시각에서 20분이 흘러 있었다. 그래도 수연은 걸음을 재촉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안 오면 갈까? 내가 왜 꼭 굳이 이 약속을 지켜야 되는 거지? 이미 일은 다 해결이 난 건데…….

 아냐, 약속을 안 지켰다간 그 규범적인 성격에 참고 있을 리가 없어. 분명히 또 괴롭힐 거야. 차라리 하루 이틀 괴로운 게 나아.

 그냥 혼자 여행한 셈치고 완전 철저하게 무시하자. 그렇게 내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면 오빠도 포기하겠지. 그렇겠지?

생각에 잠겨 종마처럼 성큼성큼 걷던 수연은 높은 굽이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어맛!"

다행히 꼴사납게 넘어지진 않았지만 땅바닥에 거의 코를 찧을 정도로 비틀거렸다.

 "잘 넘어지는 건 여전하구나."

별안간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수연은 슈퍼맨처럼 불쑥 눈앞에 나타난 지환을 생뚱맞은 눈으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환은 완전히 딴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아이보리 색 면바지에 오리엔탈 블루 니트 셔츠를 입은 지환은 마치 지중해의 코발트빛 바다처럼 이국적으로 보였다. 

평소 꽉 채워진 와이셔츠에 가려져 있던 굵은 목이 나타나면서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까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보는 순간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떨결에 잡힌 손에 끌려 모퉁이를 돌았다. 피자 가게 앞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타."

지환이 타라고 문을 연 차는 흰색 캠핑카였다.

 "캐러밴을 타고 간단 말야? 설마 진짜 캠핑을 하려는 건 아니지?"

 "너 캠핑 좋아하잖아. 여름에 별장 마당에 텐트 치고 놀았던 거 생각 안 나?"

그땐 그랬지만 지환이 떠난 후로는 한번도 캠핑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또 지금은 성인이고 더군다나 오늘은 호텔이나 펜션 같은 곳에서 묵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준비를 해오지 않았다.

 "이건 불가능해."

수연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지환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순간 수연은 햇살을 무색케 하는 눈부신 느낌에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어렸을 때조차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웃는 지환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지환은 마치 자신을 보는 건 모두 휘어잡을 듯이 싱그러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수연은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무시하며 투덜거렸다.

 "좋아, 이걸 타고 가는 건 좋은데 캠핑은 싫어."

 "지금부터 서른 시간 동안 내 스케줄에 따르든지 김하루도 감봉 조치를 당하게 하든지, 선택은 네가 해."

 "어! 어, 어떻게 알았어?"

 "재즈바 하나 찾는 건 문제가 아니지. 왜 진작 말 안 했어? 김하루 대신해서 일해 준 거라고 말했으면 좋았잖아."

 "말한다고 뭐가 좋아지는데? 사진까지 찍혔는데 임원진이 내 말을 믿어 줄 것 같아? 괜히 하루 씨만 엮이게 되지."

 "그럼 김하루가 감봉당하는 것도 막아."

수연은 느긋한 자세로 차문에 한 팔을 짚고 기대고 있는 지환을 얄밉게 쏘아봤다.

 "아주 이제는 협박에도 도사가 됐네. 자꾸 그러면 회사고 김하루고 다 떼버리는 수가 있어."

 "훗."

 "왜 웃어, 기분 나쁘게?"

 "넌 그렇게 못해. 나한테 지기 싫을 테니까. 나 때문에 물러서는 건 네 자존심상 절대 못하지."

지환의 말이 맞았다. 수연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지환이 너무 얄미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자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좁은 데서는 절대 못 잔단 말야."

수연은 짜증을 냈다. 그래도 여유롭게 웃고만 있는 지환을 노려보다가 쿵쾅 소리를 내며 차 위로 올랐다. 

너무 심통을 부린 탓에 그만 차의 지붕에 정수리를 쿡 찧고 말았다.

 "아야!"

 "괜찮아?"

지환의 손이 금세 뻗어왔다.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쓸어주었다. 수연은 쌀쌀맞은 얼굴로

 "됐어."

하며 몸을 뺐다. 차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지환을 보며 수연은 결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즉시 호텔 방을 잡고 내일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집으로 와버려야지. 

1박 2일의 약속은 지키는 거니까 지환도 더 이상 토를 달지는 못할 것이다.

 "안전벨트 매."

말도 최소한 아낄 것이다. 얼굴도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어야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행이 되게 해주겠어.

 "고속도로 타면 뒤로 가서 편안하게 있어. 피곤하면 자도 좋고 TV를 봐도 좋고."

수연은 화난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고 앞만 쳐다봤다. 지환의 시선을 느꼈지만 고집스럽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음악 들을까?"

봄비같이 촉촉하고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퍼진 이후로는 지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수연은 차츰 경계가 풀려서 어깨에 힘이 빠지고 꼭 모으고 있던 허벅지도 헐거워졌다. 머리를 시트에 기대고 스쳐가는 풍경을 봤다. 

눈부신 햇살에 초록빛 잎들이 윤기를 띠며 반짝반짝했다.

 "어디……."

수연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나와 버린 것이다. 

목적지가 궁금했지만 그걸 묻는 건 말을 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다짐에 위배되는 거였다. 

수연은 새침하게 팔짱을 끼고는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바다."

지환의 목소리에 수연은 다짐도 잊고 홱 머리를 돌려 지환을 보았다. 잘생긴 옆얼굴을 보는데 절로 입이 열렸다.

 "바다?"

 "그래, 바다 보여줄게."

여름도 아니고 웬 바다. 그런데 머리에선 지환이 입은 셔츠 빛깔처럼 푸르른 물빛이 떠올라 버렸다. 

흰 파도 거품과 끝도 없이 넓은 백사장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에도 스파에서 지냈을 뿐 진짜 바다에는 가보지 못했다.

 수연은 지난밤 잠을 좀 설친 데다가 일찍 일어난 탓에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선잠이 들었다가 깨우는 지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뒤에 가서 편안하게 자."

잠은 자지 않을 거였지만 그렇다고 지환의 옆에 붙어 있는 것도 싫었다. 수연은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돌려 뒤쪽으로 가보았다. 

이 캐러밴에서 절대 편안하게 자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부의 아늑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달라지려 했다. 

캐러밴의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싱글 침대 2개가 평행으로 놓여 있는 침실과 테이블과 소파가 있는 거실이 있고 화장실엔 변기와 세면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거실엔 텔레비전과 오디오 시설이 되어 있고 부엌엔 냉장고와 전자렌지 및 각종 식기류가 골고루 준비되어 있었다. 

옷장 안에는 지환의 것인 듯한 점퍼와 두 벌의 트레이닝복이 걸려 있었다. 여벌의 옷을 가져오지 않을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밀폐된 곳에서 지환과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어렸을 적엔 한 텐트 안에서 속옷바람으로 뒹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째서 낯 뜨거운 그림부터 떠오르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환이 떠났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오빠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이렇게 뜨거운 불덩이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맹렬한 박동을 느끼진 않았었다.

수연은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밀랍된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집 2층, 그들만의 공간이었던 그곳의 공기처럼 차 안에도 세상과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른한 봄이 아니라 작열하는 여름 같았고,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 정지한 것 같았으며, 

등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환의 점퍼를 어루만졌다. 거기에 묻어 있던 지환의 체취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입술이 가을 낙엽처럼 바싹 말라왔다. 입술을 핥고 점퍼에 코를 묻었다. 깊이 파묻을수록 지환의 냄새가 났다. 

오래 숙성시킨 코냑의 향기 같은…….

 1시간 후, 수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 밖을 보다가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와 눈이 마주친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샌들도 선글라스도 벗겨져 있고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샌들은 결코 자신의 습관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이불을 밀쳐두고 샌들을 신고 화장실로 가 거울을 봤다. 머리가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을 씻고 다시 침실로 가보니 선글라스 옆에 집게 핀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으며 묶어 올리는데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니?"

구겨진 치마를 손으로 펴며 부엌 쪽으로 갔다.

 "배고프면 냉장고에 피자 있으니까 데워 먹어."

쳇,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아니면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수연은 운전 중인 지환의 뒤통수에 대고 입술을 삐죽이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알차게 큰 냉장고 안에는 야채와 과일, 와인에 고기까지 여러 가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수연은 피자 박스와 콜라 캔 하나를 뺐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전자렌지에 피자를 데우며 콜라를 마셨다.

 소파에 앉아 커튼을 살짝 열었다. '홍성 12km'라는 표지판이 스쳐지나갔다.

 "홍성이 어디지?"

수연은 중얼거리다가 전자렌지의 벨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접시에 데운 피자 한 조각을 담다가 머뭇했다. 

망설이다가 짧게 한숨을 뱉고는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피자 먹을 거야?"

 "응?"

 "피자 먹을 거냐구."

 "아니."

 "그럼 뭐?"

 "응?"

수연은 목청을 높이려다가 접시를 들고는 지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럼 뭐 먹을 거냐구. 마실 거라도 줘?"

 "커피."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나왔다.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커피를 준비했다. 

한숨 자고 났더니 곤두섰던 신경이 느슨해지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도 시들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지환을 아주 모른 체하고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을 정도로 생각의 여유도 찾았다. 

예전에 오빠였던 지환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 눈앞의 남자에게도 익숙해지고 길들여질까 봐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한 번은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얘기를 들어주고, 그리고 설득해 타협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관계로 남든…….

 수연은 쟁반에 피자와 콜라와 커피를 올리고는 앞자리로 갔다.

 "조심해."

 "걱정 마. 이래봬도 카페 사장이었어. 이정도 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한 손으로 쟁반을 받쳐 들고는 긴 다리를 들어 올려 기어스틱을 타넘고 조수석에 안착했다. 

피자 접시가 쟁반에서 거의 미끄러질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커피가 조금 쏟아진 건 애교였다.

 "자, 커피."

받아든 지환은 한 모금을 마시고는 컵 꽂이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블랙으로 마시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전 사원이 다 알걸?"

 "뭐?"

 "전략팀 장안나 씨 작품이야. 그 아가씨 오빠한테 빠져서 오빠 프로필을 완전히 다 꿰고 있어.

 학벌에 경력은 물론이고, 웅가로 양복을 즐겨 입고, 매킨토시 노트북을 쓰고, 중요한 사인은 696,000원짜리 몽블랑 만년필로

 꼭 왼손으로 한대. 나 원 참, 만년필 가격은 어떻게 알았나 몰라. 결재 올릴 때도 컴퓨터에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고 서운하다던데

 신경 좀 써주지 그래? 그리고 또 뭐라더라……."

 "그 아가씨 안 되겠네. 입단속 좀 시켜야겠군."

 "아침은 맛없는 보리빵에 커피, 점심은 보통 외부 약속 아니면 구내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수연은 자신이 들은 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 움찔했다. 

그땐 그냥 건성으로 들었었는데 어느새 세세한 것까지 다 머릿속에 입력을 해두었다니…….

 수연은 손으로 피자를 말아 쥐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피자로 입을 막아두지 않으면 또 무슨 얘길 할지 몰라 자신이 무서웠다.

 "맛있니?"

수연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지는 치즈를 손가락으로 걷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우물 씹다가 지환을 보며

 "한 입 먹어 볼래?"

라고 한 건 정말 충동적이었다. 거기에 지환이

 "줘봐."

한 건 절대 충동적인 대답이 아니었을 것이다. 충동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지환이니까 말이다.

수연은 후회하며 자신이 한 입 베어 먹은 피자를 지환의 입에 대주었다. 지환은 눈을 도로에 고정시킨 채 턱을 내밀어 피자를 먹었다. 

뜨거운 치즈가 길게 늘어져 줄이 생겼다. 수연은 손가락으로 줄을 뚝 끊어 지환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손가락 끝에 지환의 혀가 살짝 닿았다.

 "음, 맛있네."

 "머, 먹겠냐고 할 때는 싫다하고선……."

 "원래 뺏어먹는 게 더 맛있는 거야."

수연은 화끈거리는 손가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화장지에 손을 닦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호흡은 진정되지 않았다. 벌컥벌컥 콜라를 들이켜고 허겁지겁 피자를 먹었다.

 "이제 안 뺏어먹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누가 주기나 한대. ……배고프면 말해. 한 조각 데워줄까?"

 "됐어."

수연은 피자를 다 먹고 포만감에 기분이 넉넉해져 느긋이 앉아 음악을 들었다. 

천성이 명랑 쾌활한 수연은 금세 들떠서 새롭게 등장하는 주변 풍경에 좋아라했다.

 "야호, 바다다!"

1시간이 지나자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연이 창문을 열자 지환이 선루프까지 열어주었다. 

짠 바다 내음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몰려왔다. 누구의 폐도 거치지 않은 것 같은 신선한 공기가 가슴을 뻥 뚫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 같은 넓은 바다가 경직된 마음을 풀어놓았다.

 "음, 좋다."

수연은 창밖으로 팔을 내밀어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바람을 즐겼다. 그러는 사이 캐러밴은 끝도 없이 펼쳐진 황금 모래사장에 세워졌다. 

사람도 갈매기도 없이 한적한 바닷가였다. 물빛의 바다 위로 햇살이 황금비늘처럼 반들반들 빛을 발했다.

 "정말 여기가 최종 목적지란 말야?"

 "왜, 싫어?"

수연은 파도와 장난을 치고 바람에 웃음을 날리며 한바탕 뛰고 놀다온 참이었다. 들고 있던 샌들을 모래 위에 놓고는 뒤뚱거리며 신었다.

 "경치는 좋지만 여긴 밥 먹을 때도 없고 구경할 데도 없잖아."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여기 앉아서 바다 감상이나 해."

지환은 고급 알루미늄 재질의 의자를 펴고는 수연을 앉게 했다. 파라솔을 꽂아 그늘을 만들어주고 그 옆에 자신의 의자를 놓았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점심을 준비해 볼까."

 "누가? 오빠가?"

 "내 계획 망치지 말고 꼼짝 말고 앉아 있어."

계획? 하긴 지환이 계획 없이 무슨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캠핑카며 피자며 이 한적한 해변이 모두 지환의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완벽히 수연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환의 계획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수연은 무기력한 행복감에 젖어 잠 오는 아기처럼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활기와 생동감을 좋아하는 자신이 나른한 햇살과 잔잔한 바다에 빠져 

조개처럼 얌전해지는 것조차 지환의 계획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캐러밴에서 비치보이스의 <코코모>가 흘러나왔다. 그 경쾌한 음악 때문에 정말 버뮤다의 어느 해변에 와 있는 기분이 되었다. 

4월 서해에서 뜨거운 버뮤다의 낭만을 느껴보라는 지환의 발상에 웃음이 났다. 햇살에 포박당하고 바다에 취해 절로 미소가 걸렸다.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수연의 손에 차가운 칵테일 잔이 쥐어졌다.

 "건배."

지환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쳐왔다. 

잠깐 눈을 든 수연은 미소 짓고 있는 지환을 보고서는 다시 게으름에 빠져 눈을 내리고 바다를 봤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잔을 입으로 옮겨 입술을 축였다. 새큼한 크랜베리와 오렌지 향이 입 안을 깔끔하게 적셔주었다.

수연이 몽롱한 눈으로 해변의 정취에 빠져 있는 동안 지환은 그릴에 양갈비를 구웠다. 

대하도 굽고 양파도 굽고 가지도 굽고 방울토마토와 버섯도 구웠다. 

냉장고에 있던 그 야채들이 다 나와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다. 

지환의 손놀림은 요리사처럼 능숙하지도 그렇다고 처음인 것처럼 서툴지도 않았다.

수연은 이따금씩 지환의 움직임을 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둘만 외딴 무인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선 무슨 일을 해도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상처와 분노조차도…….

12년의 세월은 지환과 눈이 마주한 그 순간에 메워져 버려 금세 친밀감을 만들어냈다. 

수연 자신 안에 있는 추억이 너무도 달콤해서 어색함이나 거리감 같은 건 간단히 녹아버렸다. 

그러나 늘 옆에 있어줬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지환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수연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분의 식사가 근사하게 차려졌다. 적어도 시각과 후각으로는 고급 레스토랑 음식처럼 훌륭했다. 

하지만 수연은 시장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아 지환이 먹기 좋게 잘라놓은 양갈비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찍어 올렸다.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만을 섞어 드레싱으로 뿌리는 걸 봤기 때문에 맛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어때?"

수연은 씹으며 지환을 보았다. 지환은 아직 자신의 고기는 자르지도 않고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먹을 만해."

수연은 무심하게 대답하고서 또 한 조각을 찍어 오물오물 씹었다.

 "이 샐러드도 먹어 봐. 자몽 소스로 버무린 거야."

수연은 내색 않는 지환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은 누구의 평가나 칭찬에 흔들리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지환인데 어쩐지 지금의 지환은 조바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수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보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양상추를 맛있게 먹었다.

 "어때?"

아, 알았다. 수연은 흥분해서 눈이 반짝했다. 알아낸 것에 기분이 들떠서 가슴이 파닥파닥 뛰고 눈이 촉촉해졌다.

 "어떠냐구?"

수연은 짓궂게 떠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평가해 주었다.

 "맛있어. 돈 받고 팔아도 될 정도로 맛있어. 솔직히 놀랐어. 바닷가에서 이런 화려한 요리 먹게 될 줄 몰랐거든. 

어떻게 요리까지 잘하냐.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그제야 지환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수연은 나이프를 드는 지환을 보며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왜 웃어?"

 "오빠가 칭찬 받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 이제 보니 순 내숭이었네. 학교 다닐 때 상장을 그렇게 많이 받았어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더니."

 "상장보다 네가 칭찬해 주는 게 더 좋았지. 차라리 1등 놓쳤을 때 너한테 위로 받는 게 더 좋았어."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하지 마. 그러니까 꼭 일부러 2등했단 소리로 들려."

지환의 표정이 변했다. 수연은 그윽하게 보는 지환의 눈빛에 흔들려 쥐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한테만 인정받으면 다른 사람은 뭐래도 상관없었어. 지금도 난 네 칭찬이면 돼.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버텨온 거니까."

말갛던 하늘 끄트머리에서 검은 구름이 너울너울 흘러들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에 그늘이 드리우고 싱그러웠던 바람은 어느덧 농밀한 공기를 자아냈다. 

포크를 놓친 수연은 토네이도의 핵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지환의 눈에서 격렬한 감정을 엿보았다.

 "나, 난…… 오빠 맘이 정말이라고 안 믿어."

수연은 억지로 시선을 떼고 다시 포크를 쥐었다. 고기에 버섯에 방울토마토까지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 얘기 이제 그만해."

수연은 화난 것처럼 굳은 얼굴로 보는 지환을 의식하며 더 맹렬히 음식을 먹었다. 

블루스라도 춰야할 것 같은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연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와인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보고 있는 지환의 시선은 피했지만 집요한 유혹에선 달아날 수가 없었다.

 "네 마음속에 있는 오지환을 죽였다면 그놈이 남긴 상처도 죽였어야지."

 "가슴에 박힌 칼자루 빠져나갔다고 상처도 사라져?"

 "그럼 다시 칼자루를 받아들이면 되겠군."

 "참 잔인하네. 내 가슴에 다시 칼자루를 꽂으라구? 그 칼자루가 되고 싶어? 다시 내 오빠로 돌아올 거야?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지환을 다시 오빠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한 건 지환이 절대 수긍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한 일이란 거 너도 알잖아.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싫어. 우리 둘 다 원하지 않는 일이야."

 "끔찍한 실수였어. 그 실수로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을 망친 거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 석지환이라는 남자와 오수연이라는 여자로, 남남으로 시작하는 거다."

수연은 와인 잔을 깨끗이 비우고도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에 드리우는 구름의 그림자를 보다가 지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환은 여전히 요구하는 눈으로 수연을 보고 있었다.

 "내 어린시절이 행복했다면 그건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다른 곳에 정신 팔려서 놀고 있다가도 오빠가 날 다정하고 든든한 눈길로 보고 있는 걸 확인해야지 마음이 놓였어.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 눈길이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12년간 돌아오지 않았어.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그때 수연은 영혼의 일부분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삶은 시간의 흐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절망감, 배신감, 외로움에 썩어 들어간 그리움을 잘라버리고, 그리고 죽는 날을 향해,

 대바늘로 솜이불을 깁듯이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넘기며 살았다. 몸은 살아 생동하되 정신은 반 허물어져 황량한 채로…….

그런데 이제 와 지환이 그 황폐한 들에 단비를 뿌리고 있다. 

갈증에 허겁지겁 그 습기를 들이마시고는 있지만 황폐한 들엔 좀처럼 싹이 트지 않을 것이다.

 "보상할게. 내가 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오빤 오빠 의지대로 한 것뿐일 테니까. 오빠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은 내 잘못이지.

 이 세상에 절대란 건 없는데 말야."

 "수연아……."

 "나 신경안정제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어. 혼자선 엘리베이터도 못 타. 대학 들어가고부터는 남자친구를 밥 먹듯이 갈아 치웠어.

 그 남자들 그 어딘가, 어느 구석인가는 다들 조금씩 오빠를 닮았지. 걸음이 오빠 같은 사람도 있었고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도 있었어.

 그런 남자들만 눈에 띄었어. 이별하고 만나고 다시 이별하고……. 시간을 죽이면서 아무 목표도 없이 그냥 살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겠다고? 천만에. 사양할래. 그렇게 배신당하고도 오빠 받아들이면 난 정말 밸도 없는 여자잖아?"

그러나 지환을 밀어내고 있는 진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배신의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 받아들이기가 무서운 것이다. 

다시 또 끔직한 일이 일어나 회생 불능한 절망에 빠질 것 같아 두려웠다. 

자존심 상하게도 지환에게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나약하고 소심해진 것이다.

 "나 고등학교 수학여행에 쫓아온 거 기억하니? 학교 수업까지 땡땡이 치고 집엔 말도 안 하고 나와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었지.

 넌 나랑 떨어지는 거 못 견뎌했어."

 "날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래?"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마음 흔드는 감정을 수연은 거친 분노로 거부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빠 없인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잖아! 내가 그렇다는 거 알면서……, 다 알면서도 떠났잖아!"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 모르겠니?"

 "자그마치 12년이야! 12년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돌아올 수 있는데도 오빤 그러지 않았잖아.

 한순간만, 그때 한순간만 곁에 있어 주었어도……."

 "너 보면 흔들릴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어. 널 가질 수 있는 자격 갖춘 남자가 되고 싶어서……."

 "듣기 싫어! 이런 얘기 이제 지겨워!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데 뭘 하잔 거야!"

 "수학여행까지 쫓아온 너 봤을 때, 너무 행복해서 네 손 잡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었어.

 그때 그러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됐었다. 다시는 후회할 일 만들지 않을 거다. 두 번은 안 놓쳐."

눈물이 솟구친 수연은 의자를 쓰러뜨리며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지환의 옆을 지나는데 손이 잡혔다.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지환이 놓지 않았다.

 "이거 놔!"

소리 친 순간 갑자기 손이 거칠게 당겨졌다. 수연은 지환의 눈이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커플링에 고정되어 있는 걸 보았다.

 "이게 뭐지?"

 "상관 마."

 "뭐냐니까!"

지환이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수연은 놀라서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곧 다시 끌어당겨져서 지환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수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환을 올려다보았다.

 바다라도 얼릴 듯한 무시무시한 표정과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자존심으로 버티며 반항했다.

 "커플링이지 뭐긴 뭐야!"

순간 손가락에서 반지가 홱 빠져나갔다. 거칠게 뽑아져서 손가락뼈가 아팠다. 

수연은 통증에 인상을 쓰다가 바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환의 등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거야! 버리기만 해! 가만 안 둬!"

그러나 지환의 기세로는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릴 것만 같았다. 수연은 달려가 지환을 붙잡았다. 밀려온 바닷물이 발목을 적셨다. 

아무리 비정상적으로 더운 4월이라 해도 바닷물은 시렸다. 

그러나 붙잡아 세운 지환의 표정에 비하면 바다의 차가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돌려줘!"

 "이건 절대 용납 못해. 내게도 한계가 있어."

눈은 얼음처럼 차갑고 호흡은 경주마처럼 거친데도 지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수연은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느낌이었다. 

가슴속에 불같이 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지환의 자제력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그 자식,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거 알아. 그러니까 놔둔 거다. 하지만 이런 장난은 용서 못한다.

 이런 걸로 나 자극하지 마. 그 자식 뭉개버리는 수가 있어."

반지는 기어이 바다 속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지환의 표정과 말에서 뚝뚝 묻어나는 잔인함에 수연은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충격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지환은 멀어지고 반지는 사라진 뒤였다.

 "앗, 차가!"

좀더 밀려온 파도가 무릎 위까지 덮쳐 올랐다. 그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든 수연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어떻게 내 물건을 바다에 던질 수가 있어!

불같은 성질이라면 뒤지지 않는 수연이었다. 수연은 모래 뒤범벅이 된 발로 캐러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옷장 안에 넣어둔 핸드백을 꺼내서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더 부아를 돋우려는지 지환은 우아한 외견과 어울리지 않는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수연은 넓은 등을 사납게 노려보고는 씩씩거리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지환이 보고서 뒤쫓아 왔다.

 "어디 가는 거야?"

 "놔! 다신 오빠랑 상종 안 할 거야! 꼴도 보기 싫어! 말도 안 섞을 거야!"

소리친 수연은 거칠게 지환을 뿌리치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다시 지환에게 붙들렸다.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

세차게 밀쳐내고 발목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뛰었다.

 "수연아!"

쫓아오는 지환의 목소리에 더 힘을 내 달렸다. 그러다가 발이 엉켜 모래 위로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으읍!"

입으로 모래가 들어왔다.

 "수연아! 괜찮아?"

 달려온 지환이 어깨를 붙들어 일으켜주었다. 머리도 얼굴도 옷에도 모래가 묻어 엉망진창이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건 이 순간 너무나도 지환의 팔이 의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지환의 팔에 매달려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저리 가……."

수연은 비참한 기분에 빠져 지환의 팔을 밀어냈다.

 "다친 데 없어? 괜찮아?"

팔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는 지환의 손길에 수연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리 가! 내 몸에 손대지 말란 말야, ……흐흑!"

수연은 모래 위에 앉아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지환의 품에 안겨 들어올려졌을 때에도 수연의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수연은 지환의 어깨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내 반지 찾아내! 반지 찾아내란 말야!"

지환은 대꾸도 않고 캐러밴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수연은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침대에 내려졌을 때에는 기운이 빠지고 분노도 사위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렀다.

 "내가 오빠한테 뭐야. 오빤 또 나한테 뭐야."

수연은 침대에 앉아 원망스런 눈길로 지환을 올려다보았다.

 "봐. 우리 벌써 이렇게 서로를 힘들게 하잖아. 말해 봐. 이래도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있어서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도 까마득해. 떨어져 있는 동안 너무 애태워서 까맣게 탄 가슴밖에 안 남았어.

 까맣게 탄 가슴들이 만나서 서로한테 뭘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지환이 내려앉았다. 수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선 격한 감정을 토해 냈다.

 "난 타지 않았어. 너한테 내 심장 두고 갔으니까. 네가…… 비어 있는 내 왼쪽 가슴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오면 돼.

 그러면 내 심장은 완벽해지는 거야. 너 더 이상 괴롭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행복한 일만 있게 해줄게. 약속한다."

 "약속하지 마! 아무것도 약속하지 마!"

수연은 터져 나오려는 격분을 가라앉히려 깊이 숨을 내쉬고는 뒷말을 이었다.

 "우린 우리 손으로 행복을 망쳐버렸어. 12년 전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빠는 몰라.

 책상에 다리 하나만 빠져도 책상은 무너져. 겨우 다리 하나가 빠져도 책상은 무너지는 거야.

 내 세상을 무너지게 만든 건 오빠였어. 날 상처투성이 고슴도치로 만든 건 오빠야. 모르겠어?

 내 마음을 닫게 만든 건 오빠란 말야. 그러니까 두드리지 마. 그만 두드려!"

 "수연아……."

지환이 손을 뻗어왔다. 수연은 뺨을 만지려는 지환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 지환은 말없이 그대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수연은 젖은 눈으로 그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그 시선 때문인지 지환은 캐러밴의 입구에서 멈추어 수연을 돌아봤다. 

빛을 등진 지환의 얼굴은 검은 가면을 쓴 것처럼 어두웠다.

 "사랑한다, 오수연."

순간 수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차오른 이슬을 토해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너…… 죽도록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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