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게놈
갑작스런 초대에 얼떨떨한 기분이 된 휘문은 특유의 적응력으로 빠르게 회복하여 수연의 어머니가 좋아하신다는 화과자까지 챙겼다.
"꽃은 됐어."
라고 수연이 딱 잘라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장미도 백 송이쯤 샀을 것이다.
두터운 나무 대문 앞에 서서도 휘문은 장미를 샀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넓은 정원을 보고선 장미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온실이 있네?"
"국화 전용 온실이야. 우리 엄마 취미거든."
고색창연한 느낌이 묻어나는 수연의 집은 집보다 마당이 훨씬 넓어 보였다.
사포로 문질러 낡은 느낌을 자아낸 것이 아니라 진짜 닳아서 오래 되어 보이는 목조 주택이 인상 깊었다.
넓은 마당에 심은 국화 일색의 정원은 대단히 특이했다.
휘문은 그제야 수연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향수가 아니라 천연 꽃향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휘문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기된 얼굴로 수연의 어머니를 만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휘문이라고 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휘문은 안주인의 환영을 기대하고 싱긋 웃었다.
그런데 '어서 와요.' 한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가는 수연의 어머니에게 기가 눌리고 말았다.
황토색 개량 한복을 수수하게 입은 수연의 어머니는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수연만큼이나 키가 컸고 허리는 꼿꼿했으며 목이 가늘었다.
손에는 흔한 반지 하나 끼고 있지 않았고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데다가 머리엔 옥비녀를 꽂고 있었다.
피부는 방금 씻은 것처럼 차고 매끄러워 보였고 귀밑에 난 회색 머리칼은 고상한 느낌을 자아냈다.
절제된 느낌이 지나쳐 미망인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차 들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창으로 어둠이 스며들자 거실 곳곳에 있는 카틀레야 모양의 등이 불을 밝혔다.
"잠깐 있어.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수연이 2층으로 올라간 뒤 휘문은 거실 소파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화강석의 바닥이며 벽면에 놓인 오래된 반닫이와 장식장, 백 년은 더 되었을 것 같은 함지박,
자투리 천을 이어 붙인 테이블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안주인이 얼마나 공을 들여 닦고 손질하였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안주인의 눈은 깊은 우물의 컴컴한 바닥처럼 차갑게만 보였다.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휘문은 버릇처럼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향 짙은 국화차를 마시면서 감상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떼지 못했다.
햇살같이 밝고 명랑한 마력을 지닌 수연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안주인의 차분함 때문이었다.
왠지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은 엄숙한 공기가 감돌았다.
"수연이 회사 동료라구요?"
"아,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한 해 후배입니다."
"회사 사람을 집에 데려오기는 처음이군요."
"아, 저, 그게……."
휘문은 그보다는 좀더 가까운 관계라는 걸 밝혀야 할지 망설였다.
수연이 얘기하지 않은 것을 말해도 좋을지 몰랐고,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어쩐지 멋쩍었다.
보통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 탓이었다.
"아줌마, 오늘 저녁은 뭐예요?"
활기찬 목소리로 내려오는 수연을 보자 휘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높게 묶고 벨벳 트레이닝복을 입은 수연은 통통 튀어 오르는 소프트볼 같았다.
부엌에서 손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고는 우물우물하는 입으로 나온 수연은 어색하게 앉은 휘문의 옆에 풀썩 앉았다.
대통령 앞에나 앉은 것처럼 경직되어 있는 휘문은 수연의 스스럼없음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제 어머니지만 이렇듯 단정하고 깔끔하게 앉은 사람 앞에서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게 흐트러질 수 있는지…….
"아줌마, 콜라 한 잔 주세요."
"차 마셔."
"싫어. 차가운 거 마시고 싶어. 아줌마,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참, 휘문 씨 우리 엄마한테 예쁘다고 말했어?"
"아, 그,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마, 많이 들으셨을 것 같아서……."
"그래도 말해. 우리 엄마 은근히 그런 말 듣는 거 좋아하거든."
"물색없이 객쩍은 소리는. 엄마 흉보는 말인 줄도 모르고, 쯧쯧."
"아, 아닙니다. 정말 고우세요. 우아하시고 기품이 넘치시고, 또 단아해 보이시……."
"됐어, 됐어. 그만해. 너무 그러면 괜히 또 싫어하시니까."
수연이 키득키득 웃는 걸 보고 휘문도 슬쩍 따라 웃었다.
하지만 표정 없이 가만히 차를 마시는 수연의 어머니를 보고는 재빨리 웃음을 거두었다.
클럽의 제비처럼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슬렁슬렁하는 실없는 인간으로 찍힌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반면 수연은 어머니의 무표정이나 휘문의 걱정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수연은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휘문 씨도 뭐 다른 거 줄까? 와인 한 잔 할래?"
"아, 아니, 난 됐어. 차 가져왔잖아."
"아, 맞다. 차 두고 가면 내일 출근하기 힘드니까 안 되겠네. 집에 술 괜찮은 거 많은데 아쉽다."
"아버님이 약주 좋아하시나보지?"
"좋아는 하시는데 집에선 잘 안 드셔. 집에 건 주로 내가 해치우지. 잠 안 올 때 종종 마시는 편이야. 표정이 왜 그래? 놀랐어?"
"으, 응, 좀.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잘 것 같은데."
"뭐?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잠탱이로 보여? 이래봬도 내가 얼마나 민감한데."
수연은 앉지도 않고 거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는 콜라를 마셨다.
휘문은 어떻게든 수연의 어머니와 대화를 엮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초면에 이것저것 묻기도 실례인 것 같았고 무엇보다 작은 실수라도 해서 책을 잡힐까 걱정이 되어 자연스럽게 굴 수가 없었다.
"이거 먹어 봐. 우리 아줌마 구절판 솜씨는 세계 최고야. 그렇죠, 아줌마?"
"세계 최고는 아니래도 우리 동네에선 최고지."
"에이, 아니에요. 제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면 세계 최고나 마찬가지라구요. 나중에 아줌마 모시고 식당이나 차려볼까 봐."
"호호, 좋지. 수연이가 사장하고 내가 주방장하면 되겠네."
후덕하게 웃는 아줌마의 펑퍼짐한 등이 따스하게 보였다. 휘문은 잠깐 수연의 어머니가 바뀐 것이 아닌가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기 페이스로 휘몰아쳐 버리는 수연의 명랑함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아줌마 쪽이 더 어머니 같았다.
"휘문 씨, 왜 그렇게 조용해? 그렇게 밥만 먹다가 체하겠다. 얘기 좀 하면서 먹어."
"어, 응."
식사 중에 얘길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밝은 태도로 얘기하고는 있지만 수연의 식사 태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범적이다.
국을 먹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수저를 한 손에 같이 쥐는 법도 없으며 쩝쩝 소리 내어 씹거나 입 안에 밥을 두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불편한 것 같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태도인 것 같았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수연의 예의바른 식사 태도가 유난히 눈에 띈 건 무중력 상태에 앉은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수연의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보다.
휘문은 안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수연에게 물었다.
"집이 되게 고풍스럽게 보이는데 얼마나 된 거야?"
"글쎄, 한 40년 됐나."
"올해로 37년 됐어요. 애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거죠."
"아, 네. 참 튼튼하게 잘 지으셨네요."
휘문은 긴장을 늦추려 애쓰며 좀더 칭찬을 했다.
"이런 목조 집은 오래될수록 멋이 나는 것 같아요. 정원도 그렇고 가구들도 그렇고.
손이 많이 갈 텐데, 정성을 이만저만 기울이신 게 아니겠어요."
"귀신 나올 것 같지 않아? 난 저 닥종이 벽지 보면 시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엄마, 제발 올해는 저 벽지 좀 어떻게 하자. 응?"
"박 군이 보기엔 어때요? 보기 안 좋은가요?"
"아, 아뇨. 소박하고 따뜻해 보이고 좋은데요."
"정말이야? 정말 저게 좋아 보인단 말야?"
"그, 그래. 나, 난 따뜻하고 정겨워 보이기만 하는데."
"그래? 흠, 역시 내가 이 집이랑 안 맞나 보네."
휘문은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마시는 수연과 소리 없이 국을 떠 넣는 안주인의 모습을 곤혹스럽게 쳐다봤다.
사실 전체적인 색감으로 봐서도 수연은 이 집과는 좀 어울려 보이지가 않았다.
이 집에 있는 수연은 수묵화에 그려진 붉은 태양 같은 느낌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짙어지는 것을 못 견딘 휘문은 좀더 용기를 내 화제를 바꿨다.
"오늘 새로 온 리서치부장 말야, 원래 그렇게 뻣뻣한 사람이야?"
"으, 응? 왜?"
"아까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인사해도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더라구.
비서실 강 대리 말에 의하면 전무님이 임원진들이랑 저녁 식사하자고 했는데 약속 있다고 거절했대.
자기 환영식을 해주겠다는 건데 선약 있다고 거절하다니 말이 돼? 완전히 서양식 사고에 물들어서 그런 건지……."
"거, 거절했다고?"
"그랬다니까. 얼마나 잘나면 그럴 수가 있냐. 부럽다 못해 얄미워지기 시작했어. 근데 그 사람 아직 이 동네 살고 있어?"
"아, 아니."
"저기, 어머님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휘문은 수연의 어머니를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지환의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수연이 오늘 그를 만난 충격으로 기절까지 했었다는 걸 전해 줄 겸 말이다.
"석지환 씨라고, 오늘 저희 회사에 리서치부장으로 왔거든요. 수연 씨가 보고 놀라서……."
그 순간 수연의 어머니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지며 딸그락 소리를 냈다. 휘문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안주인의 얼굴을 보고서 긴장했다.
무슨 대단한 잘못을 한 건 아닌지 놀라서 수연을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수연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수연은 도움을 요청하는 휘문의 시선을 지나쳐 어머니를 보았다. 수연은 확인하는 어머니의 눈빛에 대고 긍정했다.
'그래요. 당신이 버린 그 아들이 왔어요.'
어머니의 입술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애써 충격을 감추고 아줌마가 갖다 놓은 새 숟가락을 잡는 손가락 관절이 새하얗게 튀어나왔다.
수연은 그 손에서 눈을 돌리며 털어놓았다.
"놀라서 기절해 버렸어. 다신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놀랐던 거야? 죽었다는 소문이라도 났었어?"
"……그런 소문이라도 들었으면 다행이지."
"그럼?"
"그냥, 그냥 없어져 버렸어. 흔적 하나 안 남기고 깨끗이……."
이후 세 사람은 서늘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 수연은 또 콜라를 마셨고 휘문은 커피를 마셨다.
수연의 어머니는 5분쯤 자리를 지키다가,
"놀다 가도록 해요."
하고선 방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휘문은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긴장감에서 조금은 풀려날 수 있었다.
"수연 씨 방은 2층이지? 2층으로 가면 안 될까?"
"2층은 안 돼."
수연의 단호한 거절에 휘문은 좀 얼떨떨했다. 단둘이 있는 것을 빌미로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숨소리도 다 들릴 것같이 조용한 이 집에서 무슨 짓을 할 수 있다고.
"그게 아니라, 소화가 안 돼서 좀 걷고 싶어서 그래."
"그래? 하긴 우리 엄마랑 같이 밥 먹고 소화 잘 된다는 게 이상하지. 약 줄게. 잠깐만."
"아, 아니 됐어. 그냥 좀 걷자."
"그럼 정원이라도 둘러볼래? 겨울이라서 별로 볼 건 없지만."
수연은 콜라 잔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테이블에 발까지 올리고 있었다.
결벽증이 의심될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는 어머니에게서 어떻게 수연같이 자유분방한 딸이 태어났는지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쌀쌀한데 뭐라도 걸치고 나오지."
"괜찮아."
휘문은 자신이 석지환의 얘기를 꺼낸 이후로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지고 말수가 줄어든 수연의 태도에 여러 가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예전에 사귀었던 관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둘 중 누군가가 짝사랑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수연의 성격상 혼자만 좋아하며 마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수연의 심각한 얼굴을 봐선 고백을 하고선 퇴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예전에 수연이 프러포즈는 처음 하는 거라고 말한 걸 휘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반대로 석지환이 수연을 쫓아다닌 게 될 수도 있었다. 휘문은 그 추측에 좀더 믿음을 실었다.
오늘 본 석지환의 저돌적인 태도를 볼 때 충분히 스토커의 자질이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건 휘문은 자신보다 몇 계급이나 높은 석지환이 라이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관을 나서자 휘문은 양복저고리를 벗어 수연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수연이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휘문은 그에 용기를 얻어 수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좀더 자신의 소유욕을 발휘하여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수연은 아무 저항 없이 휘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휘문은 안심하여 부드럽게 웃었다. 웃는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걸으니까 꼭 부부 같다. 근데 여기 있는 화초는 다 어머니가 가꾸시는 거니?"
"응."
"저기 바위 사이사이에 있는 것도 다?"
"응. 다 국화야. 거기 있는 것들은 산국화."
"분위기가 참…… 독특하구나."
"을씨년스럽지."
휘문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휘문은 작게 끄덕끄덕했다.
꽃이 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정원은 좀 을씨년스러웠다. 어디엔가 머리 푼 소복 귀신이라도 숨어 있을 것 같이.
정원을 한 바퀴 돈 다음 휘문은 안방의 어머니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수연의 집을 나왔다.
장차 수연과 관계가 더 깊어진다고 해도 장모가 될 사람에게 푸근한 애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추운데 들어가."
"응. 조심해서 가. 도착하면 전화해."
휘문은 키스하고 싶은 걸 참고 차에 올랐다. 평소보다 한결 조용하고 차분한 수연은 더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런데도 휘문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수연의 어머니가 어디선가 우물 같은 눈으로 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휘문은 사이드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수연의 모습을 보았다.
수연의 모습이 작아질수록 수연의 뒤에 있는 목조 주택은 점점 위용 넘쳐보였다. 불 꺼진 2층의 검은 창이 섬뜩한 느낌을 주며 드러났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로체스터 가의 비밀의 방 같았다. 인육을 뜯는 미친 여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곳에 수연을 둬도 좋을지 마음이 뒤숭숭하고 찜찜했다.
한편, 휘문을 보낸 수연은 담 밑을 서성이며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지환이 약속이 있다며 전무님의 호출을 거절했다는 말을 듣고서부터 수연의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초조하고 화가 나고 혼란스러워 나무 대문에 이마를 콩콩 찧었다. 점점 강도를 높여 쿵쿵 찧다가 급기야는 괴성을 질렀다.
"아악!"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 수연은 2층으로 올라가는 첫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선 주방을 향해 외쳤다.
"아줌마, 나 약 먹고 잘 거예요! 깨우지 마세요!"
아줌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미친 듯이 샤워를 하고 속옷을 입고 신경안정제를 먹고 침대에 들어갔다.
10시가 갓 넘은 시각이었다.
화란이 아르마니를 개업하고서 그가 들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문을 닫을 시각인 새벽 2시쯤에 와서 10분간 머물렀을 뿐이었다.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간 뒤로 두 번째 방문을 한 오늘, 그는 7시부터 와서 자리를 지켰다.
로맨틱한 분위기는 즐길 줄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자신의 테이블에 있는 장식용 초에 불을 붙여달라고 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크리스털 화병을 자신의 테이블로 옮겨달라고까지 했다.
그 크리스털 화병에 핏빛 라넌큐러스 한 송이를 꽂아주자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
화란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학생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은 양복차림으로 카페테리아에 홀로 앉아 PDA에 빠져 있었다.
(그는 물가 높은 맨해튼에서 허리띠 졸라매며 아르바이트에 급급한 여느 유학생들과는 달랐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이미 그는 기업분석가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그를 위한 펀드가 조성될 정도였던 것이다.)
화란은 그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껴 접근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거
절에 익숙지 않았던 화란은 호기심과 오기와 열정에 휘말려 일방적이고도 끈질기게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1년여 만에 겨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화란을 감동시킨 그의 마력이란 건 뉴욕대학 경영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MBA와 CPA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명석한 남자가 훤칠한 키에 얼굴까지 핸섬한데다가 섹시한 느낌의 근육질에 뉴요커 못지않은 패션 감각까지 갖추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화란이 빠져버린 건 그런 완벽히 멋진 남자가 지독히도 금욕적이라는 대목이었다.
그는 술도 담배도 섹스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를 위해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라곤 에스프레소뿐이었다.
그는 저녁도 마다하고 술도 싫다하고 열한 잔째의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팔각형의 유리방에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문 쪽만 바라봤다. 마치 온몸의 신경을 칼날처럼 첨예하게 갈고 있는 듯 보였다.
새벽 2시에서 10분이 흘렀다. 화란은 종업원들을 먼저 보내고 홀에 앉은 마지막 손님에게 폐점 시각임을 알렸다.
서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커플 손님이 퇴장한 뒤 아르마니에는 화란과 그만이 남았다.
"케이크라도 좀 먹을래?"
말해 놓고선 아차 했다. 그가 단 건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고마워."
7시간 넘게 쓰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오래된 장롱문처럼 꺼끌꺼끌했다. 화란은 참을성을 잃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리 그녀라도 말이지, 석지환을 7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건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어떻게 생각해, 석지환?"
"7일도 아니고 겨우 7시간이야."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 농담도 뭐도 아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 관념이 칼 같은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란에게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에 더욱더 마음이 괴로웠다.
그 '그녀'가 지난 8년간 자신이 질투하고 부러워했던 바로 '그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가줘. 문 닫을 시각이야."
화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쌀쌀맞게 뇌까렸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그는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요구했다.
"여기 2시간 정도 더 쓰면 얼마지?"
"뭐?"
"4시까지 빌리자. 계산은 할 테니까."
"4시까지 기다리겠단 말야?"
화란은 기막혀하며 자조 섞인 눈으로 그를 보았다.
비즈니스가 아닌 것에도 이렇게 맹목적일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는 것이 기막혔다.
그것도 그의 '그녀'로 인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화란은 '그녀'가 무척이나 궁금해서 그가 '그녀'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흥분이 되었었다.
그녀가 자신보다 예쁜 여자인지 더 고운 여자인지 궁금해서 그만큼이나 기다려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은 짜증이 되었고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무지막지한 기다림은 자존심 상하고 상처 받고 단념하고 포기하고 절망한 과정을 다 거쳤으니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질투할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화란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하필이면 왜 우리 가게일까. 석지환이 이 양화란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건가?
내가 그녀 얼굴을 확 그어버리면 어쩌려고 여길 약속 장소로 잡았어? 지환 씨 정말 강심장이네.
아무리 친구라고 말했어도 순도 100퍼센트의 친구는 아닌 거 알면서……."
화란은 말꼬리를 흐리다가 떠보는 눈으로 물었다.
"내가 그렇게 깨끗이 말끔히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그러면서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날 물로 본 건가? 흠……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던 거겠지?"
"……."
"응?"
"……그녀가 해산물 요리를 좋아해. 여기가 그거 전문이라며."
일말의 기대를 사뿐히 즈려밟는 지환의 대답은 비참하게도 진실했다. 화란은 허탈하고 무안해 스스로를 비웃었다.
"후, 겨우 그것 때문에 여기로 정했다고? 내가 미쳤지. 콩나물국밥집이나 차릴걸."
화란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7시간이나 넘게 기다리고 앉아 있는 그가 꼴 보기 싫은 한편,
그녀가 어서 나타나 어떤 여잔지 보여주었으면 좋겠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영원히 나타나지 않아주었으면 더더욱 좋은 심정이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해. 그렇게 꼿꼿한 정신으로 어떻게 기다리니?"
"됐어."
화란은 아물어 벌써 무덤이 된 상처가 또다시 벌어져 가슴이 아팠다. 그를 이렇게 맹목적이게 만든 그녀가 정말 미웠다.
미운 것 이상으로 부러워 질투가 났다.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도 거부하며,
오롯이 앉아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그가 너무 이상해서 마구 패주고 싶었다.
그래봤자 무심한 눈초리, 무정한 목소리로 '관둬 너만 아플 뿐이야.' 같은 대답만 들을 뿐이겠지만.
화란이 신경질 섞인 한숨을 쉬며 자리를 뜨는 순간 입구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검푸른 카펫 위에 늘씬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회색 벨벳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화란은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그녀'라는 걸 알아보았다.
화란은 그녀의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신경을 모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온몸의 혈관이 팽팽히 조여드는 것 같았다.
"소, 손님."
자존심 상하게도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죄송하지만 저희 영업은 2시까지……."
"석지환 어디 있어요?"
그녀는 당차게 화란의 말을 자르며 물어왔다. 순간 불쾌해진 화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관찰했다.
어려보이는 그녀는 눈썹도 그리지 않은 얼굴에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집에서 자다가 나온 것 같은 모습인데도 얼굴에선 빛이 났다.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는 벨벳 트레이닝복이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미끈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마치 유연하고 늘씬한, 한 마리의 샴고양이 같았다. 윤기 흐르는 털 속에 앙칼스런 발톱을 숨기고서,
거만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자세로 새침하게 걷는 샴고양이.
"죄송하지만 누구라고 하셨죠?"
"석지화……."
대답을 하다말고 그녀는 화란의 뒤쪽을 노려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동작이 그녀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녀는 옆에서도 들릴 만큼 거친 숨을 쉬며 화란의 앞을 지나쳐갔다.
화란은 키가 큰 그녀가 성큼성큼 유리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를 맞이하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도 보았다. 숨길 수 없는 고통이 화란의 가슴을 쓰라리게 관통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녀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란은 쟁반에 물 컵을 올리다가 그의 부드러운 대답을 들었다.
한 번도 듣지 못한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너 기다리고 있어."
했다.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고도 그녀의 목소리는 가시 돋쳤다.
"날 왜 기다려? 도대체 왜 기다려?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야?"
"네가 올 때까지……."
"집어치워!"
화란이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은 것과 동시에 그녀가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어맛!"
놀란 화란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두께가 10센티미터쯤 되는 육중한 테이블이 쓰러지고 장미 봉오리 장식이 되어 있는 의자 팔걸이가 부러졌으며
그의 물 잔이 카펫을 적셨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않고 경직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에 떠는 그녀이외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기다리다 안 오면 가야지 왜 기다려!"
화란은 충격에서 벗어나서 곧 분노가 치솟았다.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은 그인데 어째서 그녀가 화를 낸단 말인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봐요, 아가씨."
그러나 그녀는 화란의 부름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흥분해 다가드는 화란을 막은 것은 그였다.
"화란아, 콜라 한 잔만 가져다줘."
심지어 화란에게 부탁하는 그조차도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녀만 보았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콜라 한 잔 줘. 얼음은 넣지 말고."
반복하는 그의 주문에 화란은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그를 보았다. 화란이 그렇게 놀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화란이 아는 그는 콜라라면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냄새도 싫어했고 보는 것도 싫어했으며
심지어 누군가 '콜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도 듣기 싫어했었기 때문이다.
"누가 콜라 마시고 싶대! 대답하란 말야! 왜 기다렸냐고 묻잖아!"
화란은 당당하게 소리치는 그녀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콜라'에는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콜라'는 그녀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너무 미웠다. 그의 '콜라'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가 너무 밉고 부러워서 서러웠다.
화란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그와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관심을 돌리지는 못했다.
세 사람의 얽힌 시선과 호흡 속에 격렬한 감정들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잠시 후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가 올 거란 걸 믿었으니까."
"뭐? ……미, 믿어? 왜? 왜 믿어? 왜 날 믿어?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날 믿어? 오빠가 무슨 염치로 날 믿어! 믿지 마! 믿지 말란 말야!"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나중에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화란은 그녀가 울고 있단 걸 알았다.
흐느끼지도 떨지도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옅은 조명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들춰내고 말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는 그들만의 추억과 감정이 진하게 맺혀 있었다.
화란은 귀를 기울였다. 숨구멍도 없는 사람처럼 반듯하고 딱딱한 그를 8년간이나 지켜보던 인내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오빠가 뭔데 날 믿어? 오빤 날 믿게 했어? 난 오빠 안 믿어! 그러니까 오빠도 나 믿지 말란 말야!"
그녀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분노는 매우 역설적이었다. 그와 그녀가 얼마나 서로를 믿고 있는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그녀도 믿고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가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믿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복잡하고도 단순했다. 어쨌건 둘은 서로를 미치도록 믿고 싶어 하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석지환 어디 있냐고 했다.
그녀는 몇 시간이 되었건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끈질긴 기다림의 밑바닥에도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오빠를 다시 보면……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할까. 수도 없이 생각했어. 어떨 땐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한 적도 있었어.
세월 흐른 건 다 지워버리고 어렸을 때처럼 뛰어가 안길까, 아니면 어른스럽고 세련되게 미소 지으며 악수나 할까.
그것도 아니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화를 내버릴까.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손대지 마!"
그녀가 매몰차게 뿌리쳤는데도 그는 조금도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안쓰러워하는 빛이었다.
화란은 이토록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저렇게 진한 감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화란은 내장을 에는 고통에 배를 쥐어틀었다. 그의 눈에 떠오른 아픈 빛이 화란을 더 깊은 비참함으로 떨어뜨렸다.
"나도 오빨 믿었던 때가 있었어. 엄마 아빠는 몰라도 나는 보러 와줄 거라고 믿었어.
최소한 오지 않는 이유라도 말해 줄 거라고, 변명이라도 할 거라고 믿었었단 말야!
왜 안 왔어? 왜 전화도 안 했어? 정말 오빤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을 만큼 우리 가족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하찮았어?"
"편지 했었어. 전화도……."
"엄마가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했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고, 이제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가족은 필요 없다고!"
"……그리고 또…… 어머니가 뭐라고 했지? 내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 뭐라고 했어?"
"엄만 오빠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도리라고 하셨어.
그거 알아? 오빠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해도, 엄만 지금까지 오빠에 대한 원망 한마디 하지 않으셨어!
그런데 오빠는 왜 그랬어? 왜 돌아오지 않았어!"
"그 말을…… 믿었니? 가족이 필요 없다는 말을, 그런 말을 내가 진심으로 했을 거라고……."
"안 믿었어! 믿을 수가 없었어! 믿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믿을 수밖에 없었어. 오빤 정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소식 한 장 없었으니까! 어디 있었어? 내가 오빠 찾아서 뉴욕을 얼마나 헤맸는지 알아?
가이드 했던 유학원은 문을 닫았고 엄만 오빠가 어느 학교로 갔는지조차 모른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한 줄 알아?
오지환 이름 석 자 들고 뉴욕을 다 뒤졌다구!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석지환으로 나타나! 기가 막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원망했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얼마나……."
그녀의 울분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부터 귀까지 붉은 기가 돌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가슴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열기가 목을 타고 얼굴을 타고 눈으로 화기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지켜보는 화란의 눈에도 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이가 보일 정도였다.
화란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자신이 애타게 갈구하던 바로 그것, 그의 애욕인지…….
열기 밴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열기에 타버렸는지 깊이 쉰 채로 흘러나왔다.
"알아. 내가……, 내가 잘못했다."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오빤 자기 편한 대로 우리 가족을 버렸어. 그래놓고선, 이제 와서 다시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계획적이었어. 그렇지? 오빤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던 거지? 그래서 그날 밤……, 날 버렸어. 그지?"
화란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키워준 은혜라는 건 무슨 뜻일까. 가족을 버렸다는 건 누구의 가족을 말하는 건가.
그녀의 가족은 누구이고, 그의 어머니는 또 누구일까.
"그래. 동생인 넌 버렸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겠다는 계획 따윈 없었어. 돌아올 수가 없었다. 내겐 시간이……."
"그렇다면 된 거네! 나도 오빠를 버렸으니까. 내 오빠 오지환은…… 죽었어. 내 앞에 있는 석지환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그녀는 떠났다. 들어올 때처럼 쌩 바람을 일으키며 향기를 몰고 나갔다. 화란은 코끝에 스치는 독특한 향기에 코를 씰룩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알싸한 잔향이 유령처럼 공기 속을 부랑했다.
한참의 정적이 지난 후 화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그녀란 말이군. 석지환 심장."
굳어 꼼짝도 않던 그가 천천히 움직였다. 화란은 쓰러진 테이블을 세우는 그를 보며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감탄했다.
"그녀, 성질이 대단한걸. 화려한 미모에 불같은 성질이라…… 석지환 심장답네."
"소란 피워서 미안하다. 변상할 테니까 청구서 보내라."
"잡지 않아?"
"……."
"저렇게 혼자 가게 두는 거야?"
"……지금은."
그 대답에 실오라기만큼 피어오르던 화란의 희망이 무참히 짓뭉개어졌다. 화란은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끼며 유리벽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흠, 지금은 줄을 늦출 때라는 거야? 석지환도 줄다리기를 할 줄 아는지 몰랐네."
"각오했던 것보다 더 힘들겠어."
"뭐가?"
"수연이가 너무……."
"너무 뭐? 너무 울어서? 너무 화내서?"
"……예뻐져서."
화란은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물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의자도 무엇도 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아직도 그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화란은 피가 나도록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녀 이름이 수연이었구나. 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