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5)

자유의 용량

 "언니, 얼굴 따갑지 않아요?"

 "아니. 왜?"

수연은 잔뜩 목을 움츠린 하루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혼잡한 구내식당에서 용케도 직선의 시선으로 보는 눈이 있었다. 

옭아매는 시선은 결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최면이라도 거는 것 같았다.

 "감정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왜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본대요? 얼굴에 기스 나겠네."

수연은 잠시 쏘아보다가 차갑게 외면하고서 다가오는 휘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휘문 씨, 여기."

 "아우, 영업부 내려갔다가 차 차장님한테 붙들려서 아주 죽을 뻔했어. 그 양반은 투자분석팀이 무슨 족집게 도사 양육소인 줄 아나 봐.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으시는지 아주 골이 다 지끈거려."

 "그거 차 차장님 전공이잖아요. 이번에는 무슨 종목이에요?"

 "삼원컴퓨터."

 "전자는 윤 대리님 담당인데 왜 박 주임님한테 물어요?"

 "차 차장님이 정말 상담하고 싶은 사람은 나도 아니고 윤 대리님도 아닌 것 같아."

 "그럼요? 영삼펀드?"

 "아니. 리서치부장."

 "아하!"

 "펀드매니저가 소총수라면 애널리스트는 전략가란 걸 알게 된 거지."

 "감히 이사님한테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박 주임님한테 정보 좀 빼달라는 거죠? 에그, 제발 공부 좀 하시지.

 나이도 있으신 분이 만날 손님들이랑 술만 푸고, 감은 딸리고, 어쩌시려나 몰라."

수연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얼굴에 지렁이 한 마리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럽고 찝찝했다. 

구불구불한 것이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은 이마에서 뺨을 지나 입술에까지 돌아다녔다.

지환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바라보는 눈빛이 남같이, 딴사람같이 번득했다. 

예전에도 저렇듯 반듯하고 단정하긴 했지만 옴짝달싹 못하게 위압적이진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보는 사람이 당혹스럽도록 짓누르지도 않았다. 수연은 소리치고 싶은 걸 참으며 식판에서 거의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런데 헛다리짚었네요. 이사님은 수연 언니한테 부탁해야 직통이잖아요."

수연은 하루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별로 안 친하다고 했잖아. 그만 좀 해."

수연의 뾰족한 표정에 식탁의 분위기는 금세 썰렁해졌다. 다시 식판으로 시선을 돌린 수연을 제쳐두고 하루는 휘문에게 눈짓을 했다. 

휘문은 고개를 돌려 뒤의 대각선 쪽에 앉아 있는 지환을 보았다. 지환은 손도 안 댄 식판을 앞에 두고는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휘문은 그 시선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수연이 있었다.

 "저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벌써 사흘째예요. 공개 추파."

수연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소리 나게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돌아서 가려다가 부아가 치밀어 홱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환의 눈이 부딪쳐왔다. 수연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다가갔다. 

멋쩍은 미소도 없이 담담히 바라보는 지환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연은 얼굴 가득 차가운 미소를 띠고선 이를 갈 듯 이죽거렸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그렇게 보시다간 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은데 좀 자중하시고 밥이나 드시죠."

그리고는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식당을 나온 수연은 부글부글 끓는 속에다 차가운 콜라를 들이부었다. 손등으로 거칠게 입을 닦는데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하겠다. 천천히 마셔."

화들짝 놀란 수연이 몸을 돌렸을 때 지환은 이미 등을 돌리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수연은 분을 못 이겨 씩씩 거친 숨을 쉬었다. 

노려보는 수연의 눈에 비친 것은 큰 키와 넓은 어깨였다. 보는 수연의 눈에서 차츰 독기가 빠져나갔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지환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수연을 흔들었다. 

성장해서 어른이 되고 멋진 남자가 된 지환의 모습이 수연의 분기를 흔들어 놓았다.

지금의 지환의 모습은 예전의 '오빠 지환'과는 확연히 구별이 되었다. 예전의 지환은 큰 키에 마른 편이었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통통했던 수연과 몸무게도 별로 차이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지환은 대단히 건장하고 다부져 보였다. 

가까이 다가섰을 때는 우람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키도 더 훌쩍 커버린데다가 목도 굵어졌고 등은 더 넓어졌으며 허벅지는 양복바지에 빠듯하게 죄는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해 날렵하고 뚜렷한 얼굴 윤곽은 날카로운 칼로 깍은 듯 예리해 보였다.

걸음걸이도 달랐다. 예전엔 저렇듯 거만하고 당당하게 걷지 않았다. 

또 그때의 지환은 수연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수연이 싫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수연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눈앞에 지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가 정말 지환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예전의 지환인지, 지금의 지환에게 화를 내도 좋은 건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뭐가?"

 "둘이 지금 견우직녀 놀이해?"

수연은 들고 있던 콜라를 마저 마시며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휘문을 보았다. 휘문은 화가 난 목소리로 수연을 다그쳤다.

 "서로 번갈아 쳐다보면서 뭐하는 거냐고. 저 눈길 뭐야? 둘이 도대체 뭐야!"

수연은 찡그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이 찡그린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

수연이 인상을 쓰며 뺨을 감싸 쥐자 천성이 다정한 휘문은 곧 걱정을 했다.

 "왜? 왜 그래?"

 "아, 아니. 이가 좀……."

 "사랑니 난 거 아냐?"

 "아, 끔찍한 소리하지 말아줘."

 "어디 아 해봐. 내가 봐줄게."

 "됐어."

 "그러지 말고 아 해봐. 정말 사랑니 나는 거면 병원 가야 해. 나도 작년에 사랑니 뺐는데 하나도 안 아파. 차라리……."

 "아악, 싫어!"

수연은 따라오는 휘문을 뿌리치고 종종 걸었다. 휘문은 화난 것도 잊고 수연의 사랑니 걱정을 했다. 

그런 휘문의 순수하고 다정한 성품이 수연의 혼란스런 마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안 빼고 놔두는 게 더 아프다니까. 내가 잘 아는 병원 소개시켜 줄 테니까 같이 가자."

 "싫어. 참을래."

수연은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휘문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장난을 치고 까불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느낌은 어린 시절의 지환에 대한 느낌과 비슷했다. 지금의 지환에게선 그런 편안함이나 따스함 같은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과는 다른 눈빛으로 보는 지환이 두렵고 낯설어서 신경만 곤두섰다. 그런데도 그 눈길을 차갑게 무시하고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다른 눈인데도 보고 있으면 예전의 좋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문득문득, 지환이 정말로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놀랍고 반가워서 기뻐지려 했다. 

그런 감정은 다 누르고 화를 내려니, 미워만 하려니 힘이 드는 것이다. 분하지만 수연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휘문의 다정함이 더욱 필요했다. 휘문을 충동적으로 집에 초대한 것도 혼란스런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공주님."

 "왜."

 "내기할까? 사무실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기."

 "내가 그걸 왜 해? 치과를 가야 되는 건 난데, 나만 손해잖아."

 "내 손해이기도 해. 봐봐. 이 아프면 찡그리지? 그러면 안 웃지?"

 "그게 뭐."

 "그러면 내가 남국의 과일같이 싱그럽고 화사한 오수연표 미소를 못 보잖아. 그러면 엔도르핀이 안 생기고, 그럼 오래 못 살고. 내 손해 맞지?"

 "궤변은……. 잘생겨서 봐줬다."

수연이 웃자 휘문도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수연은 치과에 가고 싶은 마음이 결코 없었다. 

그래서 웃느라 방심한 휘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홱 밀치고선 계단을 잽싸게 뛰어올랐다.

 "야, 반칙이야!"

 "꺄아악!"

수연은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랐다. 뒤에서 무서운 소리를 내며 쫓아오는 휘문의 기세에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사무실을 향해 복도를 뛰었다. 모서리를 도는데 별안간 딱딱한 무엇과 쿵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부딪친 충격에 튕겨나는 수연의 몸을 힘센 팔이 끌어당겨갔다. 균형을 잃고 흔들린 수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손바닥에 두툼하고 단단한 근육의 느낌이 닿았다. 뒤이어 시원하면서도 강렬한 향기가 코를 민감하게 자극했다. 

그 향기를 느낀 순간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관능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얼굴이 붉어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피부가 달아오르고 숨이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쫓아 온 휘문이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의외의 장면에 놀란 휘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환을 보았다. 

그리고 지환의 품에 안긴 채 홀린 듯 올려다보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두 사람을 에워싸고 묘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숨쉬고 있는 공기는 자신의 공기와 다른 것 같았다. 마치 그들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이 가로놓여져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들 사이엔 분명 뭔가가 있었다.

 세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지환이었다.

 "괜찮니?"

수연은 놀라 후닥닥 몸을 떼었다. 뒤에 휘문이 서서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수연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화장실로 피신한 수연은 차가운 타일 벽에 이마를 대고는 세차게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건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오수연.

수연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 손가락 사이로 방울방울 맺힌 작은 기포를 보았다.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지환과 부딪친 순간, 지환의 몸과 닿은 순간 자신의 몸이 반응을 했다.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뛰고 달아오르고 화끈거렸다. 

12년 전, 지환의 말이 떠올랐다.

 '네 기억이 날 잊어버려도 네 몸은 날 기억할 거야. 네 몸에 날 새겨 넣을 거니까.'

그 말이 주술이었던 걸까. 그날 밤, 주문 같던 그 말이 정말 내 몸에 마법이라도 걸어버린 건가. 

몸이 끌렸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오빠의 말대로 내 몸은…….

수연은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황당한 생각에 빠진 자신을 비웃으며 거울을 봤다. 

그런데 거기에는 상기된 얼굴의 낯선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수연은 동창회 모임에 같이 가자는 휘문에게 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물을 마실 때마다 욱신거렸기 때문에 꼭 핑계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수연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차라리 휘문을 따라가는 게 나을 뻔했다고 후회했다.

 "이제 오니?"

 "네, 다녀왔습니다."

 "이리 와 잠깐 앉아라."

어머니의 낌새가 심상찮았다. 보통 때 같으면 방에서 책을 읽거나 국화차를 마시거나 국화잎을 닦고 있어야 할 어머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오롯이 앉아 있었다. 수연은 각오를 하고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환이 왔다는 게 사실이냐?"

각오하고 있던 질문이 나왔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심술궂은 기분으로 어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언제?"

 "며칠 안 됐어. 우리 회사 리서치부장으로 왔어. 참 신기한 우연이지?"

 "우연? 우연일 리가 없지."

냉랭한 어머니의 어조에 수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의심하고 있듯이 어머니가 지환과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당장 회사 관둬라. 그 녀석이랑 다신 만나지 마. 알았니?"

 "오빠가 용서를 빌면? 그래도 안 돼? 그래도 엄만 오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순간, 어머니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평소에는 시종일관 단아한 빛을 띠는 어머니의 얼굴에 한기가 돌았다.

 "그 녀석이 뭐라고 했어?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던?"

 "아, 아니. 그냥 내가 궁금해서 묻는 거야."

 "용서를 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남남이었던 사람들이니까.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지.

 그 녀석이랑은 더 이상 맺을 연이 없다."

 "그때 오빤 겨우 열아홉이었어. 엄마가 찾아가 설득할 수도 있었잖아. 아무리 그런 철없는 말을 했어도, 그래도 그때는 아들이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정을 딱 끊을 수가 있었어? 한 번쯤은 찾아갈 수도 있었잖아. 난 아직도 그게 너무 이상해.

 내가 그렇게 찾아 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런데 엄마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한 번에 오빠를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한 번 찾아보지도 않고, 찾아서 달래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단박에 잘라버릴 수가 있었어? 난 그게 더 가슴 아팠어.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강아지도 아니고 아들이었잖아. 15년이나 아들로 살았잖아."

 "그 아일 한 번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수연은 섬뜩한 엄마의 대답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뭐, 뭐라구?"

 "그 앤 데려다 키운 아이였을 뿐이다."

 "엄마!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수연은 일어서는 어머니를 낯선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 나올지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차게 대했던 거야? 난 그냥 오빤 남자니까 엄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왜 키웠어? 친아들로 키울 거 아니면 왜 데려다 키웠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다. 넌 내일 당장 회사나 정리해."

 "그건 싫어."

방으로 들어가려던 어머니가 멈춰 섰다. 몸을 돌리고 보는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수연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회산 계속 다닐 거야. 오빠한테는 분명히 말했어. 다신 얽히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직장이라면 아버지가 얼마든지 구해 줄……."

 "싫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할 테니까 걱정 마. 엄마가 뭘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 만들지 않을게."

어머니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 듯 한동안 가만 서 있다가 그대로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수연은 어머니와 지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번도 아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어머니의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어머니지만 그렇게 냉혹한 가슴을 가지고 있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수연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며칠째 맥을 추지 못했다. 아무리 화사한 나이 스물다섯이라 해도, 아무리 화장으로 덧칠을 해도 하루의 피로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졸기 시작한 하루는 급기야 점심시간을 할애해 부족한 잠을 채워보려 했다. 

그러나 잠의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하자 피로는 더 귀찮게 조르며 달려들었다.

 "하루 씨, 서고 가서 태양물산 작년도 신규 사업 발표한 자료 좀 찾아줘."

이때 하루는 졸고 있었다. 3초가 흐른 뒤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 씨!"

윤 대리의 목청이 커졌다.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수연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하루 씨, 김하루."

 "네, 네!"

수연이 흔들어 깨우자 드디어 일어난 하루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애 뱄냐. 갑자기 무슨 잠을 저렇게 자."

 "어! 과장님 그거 성희롱이죠? 가만 있자,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수연은 호들갑스럽게 핸드폰을 찾아들고는 김 과장 앞으로 들이댔다.

 "자, 다시 말씀해 주시죠, 과장님. 동영상으로 저장해서 사내 게시판에 띄워드릴게요."

 "에헴, 투자분석팀 김하루 씨가 대낮부터 졸았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뭐라고 하셨죠, 김 과장님?"

 "아, 그러니까 그게…… 아마 춘곤증 때문이겠죠. 하하하."

 "에이, 약한 모습."

수연은 핸드폰을 거두며 김 과장에게 눈을 흘겼다. 수연이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 하루는 또 설핏 졸고 있었다. 

그때서야 수연은 요즘 하루가 매일 밤 재즈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걸 상기했다. 

수연은 눈을 감고 있는 하루의 옆구리를 톡톡 쳐 깨웠다.

 "아르바이트 아직 안 끝났어?"

 "네. 이제 보름됐는걸요."

 "도대체 무슨 돈이 얼마나 필요하기에 그래?"

 "240만 원요."

 "뭐?"

수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족하게만 자란 수연은 겨우 그 정도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까지 한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저축해 둔 거 없어? 아니면 카드 대출이라도 받으면……."

 "태황 주식 샀다가 물먹었어요. 그거 메워 넣으려는 거예요. 엄마 몰래 적금 깨서 샀단 말예요. 

다음달이 적금 만긴데 빵꾸 난 거 알면 우리 엄마 까무러치실 거예요."

 "적금, 하루 씨 월급으로 넣는 거 아냐?"

 "이건 생활비 매달 드리는 대신 넣기로 한 거여서 엄마 거예요. 이거 타면 집수리하겠다고 얼마나 기대하고 계신데요.

 내가 그때 뭐에 씌었었다니까요. 어떻게 적금 깨서 주식 살 생각을 다 했는지. 하여간 욕심 부리면 되는 게 없어요."

 "와, 하루 씨 의외로 살뜰하네. 사람이 아주 확 달라 보여."

수연은 새삼스런 눈으로 하루를 보았다. 새침데기에 얌체 짓만 하는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로 보았던 하루가 갑자기 어른스럽게 보였다.

 "언니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다른 사람은 아마 철딱서니 없는 게 사고만 친다고 할 거예요."

 "왜, 내가 보기엔 기특한데. 그럼 한 달만 아르바이트하면 되는 거야?"

"보통예금에 들어 있는 거랑 이번 달 월급 받으면 겨우 돼요."

 "내가 빌려줄게. 이자 없이."

 "됐어요."

 "아무 때나 갚아도 돼."

 "어차피 빚이잖아요. 이제 보름만 참으면 되는데요, 뭘. 어쨌든 고마워요."

수연은 기운 없이 웃는 하루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발견했다.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 씨! 아직도 안 갔어?"

 "아, 네?"

 "제가 가져올게요."

수연은 일어서려는 하루를 앉히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연을 보았다.

 "태양물산 작년도 신규사업 보고서 말씀이죠?"

 "그래. 보도 자료 말고 우리 팀에서 정리한 것도 가져와."

 "네, 알았습니다."

수연은 씩씩하게 서고로 갔다. 투자분석팀과 같은 층, 맨 끝에 있는 엄청나게 큰 방이 서고였다. 

한 면이 12개의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려다보는 경관도 좋고 햇빛도 잘 들어왔다. 

서고로 들어선 수연은 단순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파일 박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거대한 모빌랙 사이로 들어갔다. 

파일 박스들은 종목 번호순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태양물산의 종목 번호를 모르는 수연은 모빌랙 사이에서 빠져나와 

문에 붙은 종목 번호표를 훑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수연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등장한 것은 지환이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손에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수연은 뜻밖의 만남에 놀라서 움찔했다. 

12년 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지환을 이렇게 문득문득 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두려움과 함께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파닥거렸다.

 "자료 찾으러 왔니?"

수연은 대답도 않고는 홱 몸을 돌렸다. 분명히 태양물산의 종목 번호를 읽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종목 번호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수연은 지환이 나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을 하고 좁은 모빌랙 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짙은 모빌랙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맥박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뭘 찾고 있어?"

지환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수연은 한껏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아실 것 없어요. 이사님이나 빨리 찾아서 나가시죠."

 "난 찾을 게 좀 많은데, 도와줄래?"

 "싫어요."

수연은 매몰차게 대답하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뭐가 재미있다고 웃어. 제길, 도대체 종목 번호가 몇 번인 거야!

수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문 쪽으로 슬금슬금 걸었다. 모빌랙 사이로 들어갔는지 다행히 지환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수연은 재빨리 문에 서서 종목 번호를 확인하고는 숫자를 중얼거렸다.

 "공팔공삼, 공팔공삼……."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에 지환이 서 있었다. 손에 파일을 들고서 집중해서 뭔가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연이 모빌랙 앞에 서서 주춤거리자 지환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태동기업? 아니면 태양물산?"

수연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거부하듯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태양물산."

 "재무제표? 실적분석?"

 "전년도 신규사업."

 "전년도 신규사업이라…… 여기 있네."

지환은 금방 파일을 찾고서는 수연을 향해 내밀었다. 수연은 잠시 파일과 지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파일을 받기 위해선 지환의 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모빌랙의 간격을 1미터나 벌여 놓았는데도 엄청 좁게 보였다. 

그 사이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지환과 있게 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단 몇 초라도 말이다.

 "가져갈 거야, 말 거야?"

지환이 짜증스런 투로 재촉했다. 수연은 더 망설이며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빠른 걸음으로 모빌랙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환의 손에서 파일을 잽싸게 가로채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때 지환의 팔이 덮치듯 수연의 몸을 휘감아 끌어안았다.

 "꺅!"

놀란 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 있는 힘껏 몸을 틀었다. 

하지만 뒤에서 꽉 부둥켜안은 지환의 팔은 족쇄처럼 더 강하게 수연을 옭아맬 뿐이었다. 

지환의 팔에 묶인 수연은 자신의 가슴 앞에서 교차된 지환의 팔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풀리지 않아 화를 내며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왜 이래! 이거 안 놔! 빨리 놔!"

 "쉿!"

수연은 갑자기 입이 틀어 막혔다.

 "으읍!"

그 순간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서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공포와 불안이 겹친 수연은 발버둥치는 걸 멈추고 숨을 죽였다. 

높은 곳의 파일을 찾는지 사다리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읏차."

하고 힘쓰는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려니 작은 소리도 쉽게 감지되었다. 

파일 박스가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서류를 넘기는 소리, 중얼중얼 읽는 소리. 수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째서 지환의 손을 뿌리치고 당당히 나가버리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로지 지환과 같이 있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수연의 입을 막고 있던 지환의 손이 움직였다. 지환의 손가락이 수연의 입술을 더듬었다. 

수연은 흠칫 놀라서 지환의 손목을 붙잡고는 잡아떼려 했다. 그러자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쉬."

지환의 그 낮은 속삭임이 새어나갔는지 서류 넘기던 소리가 뚝 멈췄다. 수연은 들킨 건가 생각하고 잔뜩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숨을 멈춘 채 3초쯤 흘렀다. 서고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심장은 콩알만큼 졸아들었다.

잠시 후 다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은 눈을 감으며 멈추었던 숨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안도한 것은 그 순간뿐이었다. 지환의 숨결이 민감한 피부를 자극하며 다가온 것이다.

 수연은 두려움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이러면 안 돼. 다신 이러면 안 돼. 이젠 열다섯 살이 아니잖아. 제발 정신 차려, 오수연.

수연은 멈춰버린 근육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지환의 체취가 파도처럼 수연을 덮쳤다. 

그 체취는 욕정이 깃든 남자의 향기일 뿐 더 이상 오빠의 체취가 아니었다. 

몽롱하도록 취하게 하는 지환의 마법에 걸린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수연의 허리를 감고 있던 지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무기력하게 끌려간 등이 자연스럽게 지환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나른하게 풀어져 단단하고 따스한 지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지환의 탄탄한 허벅지가 닿는 걸 느꼈다. 그 느낌이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어서 음탕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으음……."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밤, 열다섯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무방비하고 혼란스러웠다. 

감각을 일깨우는 지환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른하고 몽롱해진 수연은 눈을 감은 채 지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지환의 숨결이 뜨겁게 목덜미를 태우며 다가왔다. 

수연은 홀린 것처럼 머리를 기울여 드라큘라에게 바쳐진 미녀처럼 하얀 목덜미를 내주었다. 

달아오른 지환의 입술이 뽀얗게 드러난 수연의 목에 입맞춤을 했다.

 "하아……."

수연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지환의 팔을 꼭 움켜잡는 것으로 쾌감을 전달했다. 

수연의 반응을 느낀 지환의 입술은 더욱 탐욕스럽게 매끄러운 피부를 핥았다. 

축축한 타액을 흘리며 턱을 타고 올라서 상기된 뺨을 빨아 당겼다. 지환이 탐욕을 불태울수록 수연의 몸은 흐물흐물해졌다. 

등이 깊이 휘고 머리가 젖혀지고 허리가 흔들렸다. 지환은 허물어지려는 수연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받치고서 수연의 입술을 찾았다. 

욕망의 의지가 담긴 손가락에 턱을 붙잡혀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키스 당했다. 도발적으로 벌어진 수연의 입술에 키스가 퍼부어졌다. 

지환은 흠칫흠칫 떨며 순간순간 달아나려는 수연의 턱을 꽉 움켜쥐고선 세게 입술을 빨았다.

수연은 당혹스럽도록 강하고 단호한 지환의 키스에 압도되어 버렸다. 받아들이는 것 이외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도록 강요하는 키스였다. 

입술을 열고서 소유욕을 주장하며 찾아드는 지환의 혀를 맞아들였다. 키스는 폭풍처럼 격렬하고 깊어졌다. 

수연의 가슴은 흥분된 쾌감에 부풀어 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지환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다. 

본능적으로 흔들리는 수연의 엉덩이가 지환의 긴장한 부위를 문질러댔다. 지환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손을 미끄러뜨렸다. 

수연의 턱에서 목을 타고 내려온 손이 거침없이 수연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흣!"

지환은 쾌감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수연의 입술을 막고 키스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홀린 듯 응하는 수연의 몸짓이 지환을 극도의 흥분으로 몰고 갔다. 

지환은 거칠고 부드러운 키스를 반복하며 수연의 하얀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얇은 브래지어에 감싸인 풍만한 가슴을 손에 넣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에 욕망이 더욱 솟구쳤다. 

참지 못한 지환은 거친 동작으로 수연의 하체를 바짝 끌어당겼다.

환각 같은 지환의 체취와 황홀한 쾌감에 취한 수연은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지환의 입술에 입술을 맡기고 지환의 손에 가슴을 점령당한 채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지환의 남성에 자신의 엉덩이를 음란하게 비벼댔다. 

피하기는커녕 압박해 오는 느낌을 쫓아 더욱 자극했다. 좁은 치마가 끌어올려지고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에 불덩이 같은 손이 닿았다. 

점점 더 중앙으로 파고드는 그 뜨거운 불길에 수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하지만 수연이 달아나려고 엉덩이를 뒤로 뺄 때마다 지환은 더 미칠 듯 타오를 뿐이었다.

지환은 둘의 거칠어진 호흡 때문에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소리가 새어나가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누군가가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다. 지환의 그 생각이 수연에게 전달되었는지 갑자기 수연이 눈을 번쩍 떴다. 

크게 떠진 수연의 눈에는 욕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환이 확신을 가지기도 전에 욕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대신 충격과 이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이 풀린 것을 느낀 지환은 이 순간을 연장하고 싶은 욕구로 다급히 손을 움직였다.

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환의 손이 매끄러운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수연의 팬티 중앙에 닿은 것이다. 

상황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인 수연은 후닥닥 지환의 손을 밀어냈다. 동시에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수연은 흠칫 놀라 숨을 멈추고 긴장했다.

 "흠흠, 여기가 무슨 호텔인가. 민망해서 더는 못 있겠네. 저 나갑니다. 그럼, 계속 수고들 하시죠."

그리고 문이 닫혔다. 수연은 그대로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수연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니 너무 끔찍해서 구토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너무 역겨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미, 미쳤어? 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다시 네 오빠가 되는 거냐? 이미 그럴 수 없잖아."

수연의 기분을 알아챈 지환의 진지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걸 찾으려고 왔어. 잊지는 않았겠지? 네가 누구 건지……."

휙 몸을 돌린 수연은 지환의 얼굴이 돌아가도록 뺨을 때렸다. 붉게 물들어 가는 지환의 뺨을 보는 수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시 내 몸에 손대면 죽여 버릴 거야!"

수연은 부들부들 떨며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서고를 뛰쳐나왔다.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흥분한 수연은 허겁지겁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을 집어넣어 몇 번이나 입 안을 헹구었지만 자책감은 가시질 않았다. 

지환이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스스로의 감정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친 게 아니면 정말로 지독한 주술에라도 걸린 게 틀림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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