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1장. 그녀는 만나고 싶다 (2/17)

1부 1장. 그녀는 만나고 싶다

그 뒤로?

아델라는 문지기에게 쫓겨났다. 1구역 안에 한 발자국도 들여 놓지 못 하고 아주 깔끔하게 제지당했다.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진짜 중요하게 전할 말이……! 저기요! 제발요! 이 성과 이 나라의 무운이 걸린 일이라고요!”

더불어 제 명이 걸린 일이고요!

물론 이 말까지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델라가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문지기 둘은 그녀를 달랑 들어 멀리 쫓아냈다.

펜베르크 성에서 아델라는 평민이었으니 대귀족인 공작을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작가 여식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을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델라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부터 문제였다. 어찌어찌 수를 써서 마지막 성벽을 통과한다고 해도 공작을 바로 만날 순 없었다. 저택 정문에서 또 잡힐 것이 분명했다.

아델라는 어떻게 해야 자기가 살고, 이 성 사람들이 살 수 있는지 고민했다.

가장 우선순위는 아델라 자신이 맞았지만, 수많은 회귀 동안 죽어 간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너무 끔찍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아델라와 사람들이 당한 일은 전쟁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대량 학살이었다.

아델라는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끔찍한 고통을 이들에게 대물려 주고 싶지 않았다. 덧붙여 자신도 그 학살의 희생양이 될 수 없었다. 절대로.

‘근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죄다 죽였을까?’

문득 든 생각은 길게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가 몇 번의 회귀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전쟁광, 미치광이라는 것뿐이었다. 어느 나라에서 일으킨 전쟁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누가, 왜, 어떤 이유로 학살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델라는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 *

“하아…….”

“이번에는 또 뭐니?”

“에효…….”

욘제타의 물음에 턱을 괴고 앉은 아델라는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던 아델라의 금빛 눈동자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에 나갔다 오더니 계속 이 상태였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양고기 스프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델라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기계적으로 퍼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욘제타가 그녀를 불렀음에도 그녀는 계속 허공만을 주시했다.

“아델라, 계속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면 오늘 저녁밥은 없다?”

움찔,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먹고 있어요…….”

“그러다가 코로 들어가겠어. 무슨 일인데? 아까부터 왜 그러니, 답지 않게.”

“그냥…… 어떻게 하면 공작 각하를 뵐 수 있을까 고민 중이라 그래요.”

사실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아델라가 아는 선에서는 아마 그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 것이다. 다만 몸이 엄청나게 고생하고,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 흠이었다.

“얘가 갑자기 웬 생뚱맞은 소리래? 너도 설마 그분께 반해서 그러니?”

“얼굴도 본 적 없는데, 반할 새가 있나요…….”

공작의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은 소문으로 익히 들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성주의 얼굴이 빼어나든 말든 관심 없었다. 그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빠 일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욱 성주의 얼굴에 관심이 없었다. 공작의 얼굴이 아델라를 먹여 살려 주지는 않았다.

성주의 얼굴을 보러 중앙 광장에서 죽치고 있을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다만 지금은 공작을 살려야 자신도 살 확률이 올라가니까 그를 만나려는 것뿐이었다.

“왜, 요 건너편 골목에 꽃집 딸내미가 소문으로만 듣고 반해서 이번에 공작가 하녀로 들어갔다잖니.”

이런 아가씨가 성안에 몇십 수레는 될 것이다.

“공작가에서 하녀를 모집했어요?”

아델라는 꽃집 딸의 소식보다 그 뒤에 나온 소식에 더 관심을 가졌다.

“너한테도 얼마 전에 말해 줬잖아. 그땐 콧방귀도 안 뀌더니.”

“저한테요?”

수많은 회귀를 겪느라 이전 일들은 가물가물했다. 아델라는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얘가. 젊은 나이에 벌써 기억력이 그러면 어떡해? 내가 그 이야기 꺼낸 지 3일도 안 됐다, 얘!”

“그, 그래요?”

아델라는 욘제타의 핀잔에 뜨끔했다. 아델라에게 3일 전이란 몇십 년 전과도 같았다.

“근데 하녀를 왜 구해요? 공작가에 사람이 부족한가?”

“그 이유도 말해 줬는데!”

욘제타의 눈이 가늘어졌고, 그녀의 눈빛에 아델라는 할 말이 없었다. 공작가 하녀에 대한 기억을 왜 머릿속에서 싹 지웠는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진짜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남을 수가!

솔직히 당시에는 혹할 만한 직장이 아니긴 했다. 온갖 허드렛일은 다 하고, 주인마님 심기라도 거스르는 날에는 바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자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럴 바에야 지금 하는 장사가 나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귀 이전의 일을 이렇게 싹, 백지장처럼 지워 버릴 수가 있다니. 회귀하면서 벌어진 일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나 보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제가 깜빡했나 봐요! 예?”

아델라는 금빛 눈망울을 빛내며 욘제타를 졸랐다. 안 그래도 예쁜 외모의 아델라가 더 예쁘게 표정을 지으니 욘제타는 당할 길이 없었다.

“공작님 약혼녀가 곧 온다잖니? 새 식구가 느니 하녀들도 더 필요한 거겠지.”

“아…… 그, 도망.”

“도망?”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아델라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별다른 수가 생기나 했더니 이쪽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것도 절대 잡아서는 안 되는, 앞날이 아주 확실히 정해져 있는, 그런 줄이었다.

마티나 헤게이든.

공작의 약혼녀로서 공작이 전쟁을 치르러 펜베르크 성을 비웠을 때 성을 지키는 총사령관이 되는 여자였다. 그녀는 전쟁을 떠나는 공작에게 펜베르크 성을 지켜 내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웬걸.

공작이 떠나고 바로 다음 날 그녀는 펜베르크 성에서 종적을 감췄다.

아델라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에게 전쟁은 감당 못 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아델라도 전쟁은 무서웠다. 안 죽으려고 이전 회귀에서 도망 다닌 걸 생각하면 마티나 헤게이든의 선택이 이해는 갔다.

다만, 그녀가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아 있던 채로 도망갔다는 게 문제였다. 총사령관이 성을 비우면 밑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물론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마티나가 성으로 온 지 겨우 5개월 만에 터진 전쟁이었다. 그녀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수비대를 다스릴 역량도 없었다.

그랬기에 수비 대장으로 있던 이가 총사령관 대신 지휘를 맡게 됐다. 원래는 부사령관과 수비 대장이 같이 방어해야 했지만, 마티나가 부득불 우겨 자신이 부사령관에 달하는 지위를 가져갔다. 그래 놓고 튄 것이다.

그녀가 도망간 후, 부사령관과 공작의 공석을 채운 건 수비 대장이었고, 그가 유능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아델라는 그 상황을 지난 회귀 때 경험했다. 그녀는 수비 대장을 보면서 확실히 사람은 유능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충성심까지. 완벽한 부하 직원, 아니 완벽한 충신이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아델라는 마티나의 하녀로 들어가는 방법은 제외시켰다. 자신의 호상 길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장담하건데, 마티나도 그렇게 도망 다니다가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목표가 정해지니 그다음 행동은 금방 결정됐다. 아델라는 얼른 스프를 흡입했다. 오늘 당장 실천할 생각이었다.

5개월.

국경 지대에서 전쟁이 터져 왕의 명으로 공작이 차출되어 펜베르크 성을 떠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그 전까지 공작을 만나야만 했다. 어떻게든 공작을 만나 보호를 하든가 사실을 알리든가, 뭐라도 해야 했다.

* * *

진갈색 생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금안의 미인이 성벽을 따라 이른 새벽부터 뜀박질을 한다는 소문이 3구역 곳곳에 돌았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계속 그녀가 눈에 띄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그녀에게 작업을 걸려고 같이 뛰는 이들도 생겼고, 그녀를 응원하는 이들도 생겼다. 이 광경도 아델라는 지난 회귀 때 경험한 일이었다. 아무 표정 없이 강약을 조절하며 뛰던 아델라가 욘제타의 가게에서 멈췄다.

“여기가 레이디 댁인가요?”

“아기자기한 외관이, 딱 레이디를 닮았군요.”

이건 또 어디서 붙은 놈들이야, 라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아델라는 휑하니 욘제타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아델라는 뛰는 중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 점이 다른 이들에게 냉매력(?)으로 어필이 된 모양이었다. 뭐, 냉미녀? 차가운 게 다른 이들과 달리 매력적이라나? 아델라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들의 한심스러운 잣대였다.

욘제타는 아델라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위층에 가서 씻으라고 전했다. 그러고는 가게 문 앞에 붙어 있는 파리 떼들을 없애려 비린내 나는 물을 가게 밖으로 뿌렸다.

촤악!

“아악! 이게 뭐야! 거, 아줌마! 일 좀 제대로 합시다!”

“으억! 비린내!”

“나이스.”

위층으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아델라가 욘제타를 응원했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몇몇 남자들을 보던 욘제타는 가게 문을 닫고 투덜거렸다.

“넌 저것들 달고 꼭 우리 가게로 오더라.”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침 뱉기에는 생글생글 웃는 아이가 너무 예뻤다. 저게 어딜 봐서 차가운 매력이라는 거야?

하지만 욘제타는 투덜대면서도 아델라에게 붙은 파리 떼들을 퇴치해 주었다. 예쁜 얼굴 때문에 어디 가서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된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아델라는 예전 회귀 때 자신의 가게로 바로 돌아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그 뒤로 그녀는 욘제타 가게에 먼저 들러 아침을 먹고 사람들이 한가해질 즈음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아하하하. 어쩔 수 없지. 아델라가 예쁜 걸 어째. 그러다가 어떤 늑대가 해코지할 줄 알고. 차라리 우리 가게에 오는 게 나아!”

“데이브 아저씨!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그래. 오늘도 열심이구나.”

욘제타의 남편인 데이브가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아델라와 인사를 나눴다. 욘제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오늘 판매할 재료를 마저 손질했다.

확실히 아델라의 생사를 모르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안 그래도 갑자기 애가 안 하던 짓을 해서 죽을 때가 됐나 싶었으니까.

“근데 너 진짜로 수비대에 지원할 거야?”

보송보송한 상태로 맛나게 빵을 뜯어 먹던 아델라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욘제타의 눈에는 아직도 애처럼 보이는데, 여린 아이가 어째서 그런 험한 곳에 간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잘 운영하던 잡화점도 닫아 놓고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 쉬는 시간 빼고는 계속 훈련을 하고 있었다. 체력과 근육을 더 단련해야 한다나?

욘제타는 꼬질꼬질했던 예전의 아델라를 떠올렸다. 또래보다 작고 왜소한 몸에 머리는 산발에다가 옷은 거의 누더기였다. 그런 아이가 가엾어 먹을 것을 준 게 인연이 되었다.

돈을 벌 수 있게 도와 달래서 욘제타의 음식점에서 일을 시켰었고, 돈을 번 지 4년 만에 아이는 작은 가게를 얻어 독립했다. 기특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처음 작고 왜소한 체격은 잘 못 먹고 자라서였다는 것을 보여 주듯,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간식까지 꼭 먹던 아델라는 금세 훌쩍 자랐다. 지금은 욘제타의 키를 넘어서고 또래들과 비슷한 키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꼬질꼬질해서 몰랐는데, 여느 귀족 아가씨 뺨치는 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덕분에 욘제타 주변 상인들이 자신의 아들을 소개시키려 줄을 대고 있었다.

“진짜로 해야겠니? 우리 아몬이 그러는데 돈은 잘 벌지만 죽을 만큼 힘들다던데……. 남자인 아몬도 힘든데, 너는 오죽하겠니?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

“아몬이 먼저 선임으로 들어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저 돈이라면 사족 못 쓰는 거 아시면서!”

사실 과거에 아델라는 아몬과 전혀 다른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하지만 아델라는 욘제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네가 돈 버는데 악착같은 건 알지만……. 이젠 좀 편해졌잖니.”

“빚은 계속 갚아야죠!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죠, 뭐! 얼른 떼돈 벌어 와서 다시 가게 꾸려도 되니까요.”

환하게 웃는 아델라한텐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았기에, 욘제타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욘제타는 아델라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그 부모의 낯짝이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집안 빚까지 짊어지게 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었다.

* * *

“중!”

“주웅? 잠시만이요. 중이라고요? 다시 봐 주세요. 저 여태 상위권이었는데?”

아델라는 모든 시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분명 각 시험에서 몇 위, 몇 위, 라고 호명해 줄 때, 자신은 늘 20위 안쪽이었다. 힘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달려서 20위 밖으로 떨어졌지만 그 한 번 빼고는 대부분 높은 순위를 받았다.

그런데도 중이라니?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시험관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험관은 아무 표정 없이 아델라를 위아래로 훑더니 다시 중이라고 못박았다.

일전에는 ‘하’였으니 성장한 건 맞지만, 아델라는 ‘상’을 받기 위해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수련했다. 하에서 중으로 오를 수 있는 시험을 치르는 게 약 2개월 뒤였고, 중에서 상으로 오르는 시험은 언제 치러질지 몰랐다.

아델라가 상을 받으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공작을 따라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은 상급 수비병에서 뽑는다. 그것도 소수만. 그런데 이럴 수는 없었다. 아델라는 원정 전까지 상급 수비병으로 오르는 승급 시험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남은 기간 3개월. 그 3개월 내에 상급 수비병 안에서도 눈에 띄어야 했다. 그런데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중급이라니.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차라리 죽고 다시 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계속 죽다 보니 그게 더 쉬운 길 같았다. 아델라는 악마한테라도 홀린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퍼뜩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아델라! 아직 끝이 아니잖아!’

그래, 이제 시작이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죽는 것은 정말 최후의, 최후의, 최후! 그 끝까지 갔을 때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을 리셋 할 수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나 가능했다.

* * *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금발의, 수려한 외모를 지닌 사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멀리에는 막 들어온 수습 수비병들이 훈련 중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다가 콧노래를 부르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금발에 푸른빛 눈동자가 특징인 번듯한 외모와 단정한 군청색 제복이 조화를 이뤄 그는 동화 속에서 쏙 하고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항간에는 백마 탄 왕자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나타났다 하면 옆 건물에서 일하던 하녀들도 쪼르르 달려 나와 그의 자태를 구경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하녀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직 단 한곳으로만 향했다.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른 남자는 목소리를 잠시 가다듬었다.

똑똑.

“흠흠. 린다, 나야.”

남자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들어와.”

약간 낮게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남자는 문을 열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였다.

남자는 문을 살짝 열어 안을 살폈다. 린다라고 불린 여성의 날카로운 회색빛 눈동자가 남자에게 날아들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하게 여자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왜, 왜?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왜 그래, 여보.”

남자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 봐도 실수한 기억은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아내는 너무 예뻤다.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려 만 동그란 머리도 너무 귀여웠고,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도 너무 예뻤다. 이 콩깍지는 아마 평생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느새 헤벌쭉하게 웃으며 자신의 아내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그의 아내, 린다는 더 열이 났는지 거의 눈에서 광선을 쏠 것처럼 자신의 남편을 쳐다보았다.

“헤이든 세이즈.”

풀 네임을 부르면 1차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헤이든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린다 곁으로 급하게 다가갔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렇게 안 좋은 일이야?”

헤이든의 물음에 린다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그에게 쭉 밀었다. 헤이든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신입 수비병들의 시험 결과표였다.

“쌀가마 지고 달리기 114명 중 25위. 장애물 빠르게 격파하기 114명 중 10위. 돌 매달고 오래달리기 114명 중 14위. 1 대 1 무투 승. 이런 사람이 중급을 받았어. 어떻게 생각해?”

“체격은 하…….”

“여자분이셔.”

“뭐? 진짜? 이거 누가 기록한 거야?”

린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한 장의 서류를 더 꺼냈다.

“이게 뭘까?”

“이게 뭔데?”

“진짜 몰라?”

린다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이게 뭐야?”

서류를 확인한 헤이든의 눈이 커졌다.

“신입 수비병 합격자 중 여성이 있을 시, 상급 등급을 부여하지 않는다?”

“부사령관이 모르면 누가 알까?”

린다가 팔짱을 끼고 묻자 헤이든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 아니야. 우리 지원서에 성별 쓰지도 않는 거 알잖아.”

“근데 왜 낙인은 부사령관 낙인이야?”

“그건…… 모르겠는데……. 근데 내가 찍은 거 아니야! 진짜야! 믿어 줘!”

“네가 아니면 각하께서 하셨다는 건데, 그건 더 못 믿겠거든.”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어? 각하는 믿는데 왜 남편은 못 믿어? 나 진짜 아니라니까!”

“그럼 누군데!”

린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헤이든이 주춤 물러섰다.

“그래. 예전의 헤이든이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한데, 이 서류는 뭐냐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린다는 헤이든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섰다. 린다가 헤이든에게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뒤로 물러났다.

“거기 서.”

어차피 뒤가 문으로 막혀 더는 후퇴하지도 못했다.

“우선 진정해 봐, 린다, 여보. 내, 내가 알아볼게. 알아보고, 아까 그분 등급 제대로 받게 할게. 응?”

어느새 헤이든의 바로 앞까지 온 린다가 홱 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지?”

“으응.”

다행히 문이 부서지는 불상사는 면했다.

헤이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로 앞까지 온 린다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날카롭게 곤두세웠던 분위기를 곧 가라앉힌 린다도 그를 마주 안았다.

이 부부의 흔한 아침 풍경이었다.

* * *

“예, 제가 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뭐가 이렇게 당당해?

헤이든은 어이가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뻔뻔한 태도였다.

“인사에 대한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영애. 이렇게 마음대로 규율을 바꾸는 건 질서에도 어긋나고 무엇보다 신뢰가…….”

“예전부터 각하의 눈에 띄려 일부러 수비병을 자처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각하도 무인이다 보니 그들에게 마음을 써 줬다고 들었고요. 전 그런 이들을 뿌리부터 뽑으려는 것일 뿐이에요.”

그건 억지였다. 공작이 여자 병사들에게 더 신경 쓴 적은 없었다. 다 같이 독려하며 공을 치하했으면 몰라도, 유독 누군가에게만 편의를 봐준 적이 없었다.

공작은 남녀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차출했고, 자신의 사람들에게 친절했을 뿐이다.

“들어와서 물 흐릴 바에야 없는 게 낫죠. 솔직히 여성이 수비병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싶네요. 그들을 수비병으로 키울 시간에 다른 수비병을 더 뽑고 말죠.”

‘그건 곱게 자랐으니 할 수 있는 말이고.’

공작에게 찝쩍거리는 여자들을 잡으려면 오히려 하녀들을 솎아야 했다. 시커먼 마음을 품고 있는 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헤이든은 자신의 앞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여성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공작의 약혼녀만 아니었으면 상대도 안 했을 인간상이다.

마티나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헤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마티나는 자기가 귀여운 외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헤이든 앞에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게 헤이든이 가장 질색하는 표정이라는 건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다음번에는 저한테 의견이라도 물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편히 쉬십쇼.”

헤이든은 그녀와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갈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마티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화병이 나느니 공작에게 따로 보고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어머. 혹시 제가 실례를 저질렀나요? 전 각하를 생각하여……. 절대 린다 경을 욕보인 건 아닙니다. 그분처럼 대단한 분은 제 평생 본 적이 없어요. 그분은 특별한 분이시고, 보편적으로 그렇게 강한 여성은 적기에…….”

“이 문제에 린다 경을 끼워 넣지 마십쇼.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헤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마티나는 놀란 눈을 했다. 강아지같이 큰 금빛 눈망울이 지진을 일으키며 떨렸다. 자신한테 웃어 주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부드러운 얼굴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서릿발 날리듯 굳으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전 그런 의도가…….”

“그런 의도가 아니셨겠지만, 그런 의도로 들릴 수 있으니 조심해 주십쇼. 그럼.”

린다에게 보였던 가벼운 이미지는 어디 가고 단단하고 진중한 남자가 마티나의 앞에 서 있었다.

헤이든은 마티나의 입에서 린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불쾌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어째서인지 마티나가 린다를 자꾸 의식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린다가 공작의 최측근인 것을 안 다음부터였다.

워낙 린다를 사랑한 헤이든이었기에 린다에게 향하는 찰나의 적의도 그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번에 괜히 린다를 끌어들이며 말한 것도 그녀를 의식해서라는 것을 헤이든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던 헤이든은 곧장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헤이든 세이즈 경 듭니다.”

“들라.”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빛 눈동자가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헤이든에게 향했다.

헤이든은 눈부신 공작의 외모에 잠시 주춤했다.

언제 봐도 잘생겼다. 같은 남자가 봐도 빼어나게 잘생겼다. 헤이든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공작은 어딜 가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였다.

단정하게 짧은 검푸른 머리는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났고, 이 세상 맑음이 아닌 것 같은 하늘색 눈동자는 그를 한층 더 신비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 아래로 뻗은 날카로운 콧날과 유려한 얼굴선은 그의 인상을 청초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몸까지 아주 완벽했다. 아마 저기서 웃음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이 성이 미어터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왕이 되었을지도…….

뭐, 여기까지는 너무 비약인 것 같긴 하지만, 과거에 이웃 나라 공주들에게 구혼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헤이든은 그가 항상 무표정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얼굴을 보면 그의 약혼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론 린다를 걸고넘어진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말이다.

“표정이 왜 그러나, 경.”

“아. 아! 각하!”

“귀 안 먹었네. 말하게.”

“지금 당장 처리해 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거 처리 안 해 주시면 저 이혼당해요.”

되도 않는 엄포에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이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 말하라는 신호였다. 헤이든은 그의 앞에 아까 린다가 말한 여성의 시험 성적과 지원서를 내밀었다.

“이 사람, 등급 교체를 요청합니다.”

헤이든이 등급 교체를 요청한 적은 처음이었다. 많은 신입을 받으면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저드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아델라?”

“예, 남녀를 떠나서 시험 성적만 보면 분명 상을 받을 인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중을 받았고요. 린다 경이 확인해 본 결과, 얼마 전에 신입 수비병에 여성이 붙을 시, 상급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문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명을…….”

이저드는 물으려다가 말고 인상을 구겼다.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딱 하나, 예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헤게이든 영애랑 꼭 혼인을 하셔야겠습니까? 아집과 무지로 뭉친 사람을 안주인으로 모시고 싶진 않습니다.”

“동감이네.”

“그런데 왜 거절 못 하십니까? 왕께서 명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점점 말이 짧아지는 헤이든에게 이저드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미간에 주름이 더 깊게 파였을 뿐이다.

“왕실에 밉보여서 좋을 건 없어.”

“이미 왕실에서는 각하를 배척하는데, 각하가 충심을 보여 무슨 이득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득이 왜 없나.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걸.”

그거면 족하네, 라고 덧붙인 이저드는 그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 그것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혼인하실 겁니까?”

“귀족 간의 혼인이란 게 다 그런 것을. 하지만 계속 경의 권한을 침범한다면 수를 써야겠지.”

“제발, 그래 주십쇼. 각하께서 안 하시면 언젠가 제가 이 결혼 무횹니다! 하고 식장에 난입할지도 모릅니다.”

헤이든의 투덜거림에 이저드가 설핏 웃었지만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표정 없이 헤이든이 가지고 온 서류에 등급을 고치고는 직인을 찍었다.

* * *

“아델라! 아델라 수습병!”

꼭두새벽부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델라는 부스스한 머리로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켰다.

“네! 중급 수습병 아델라입니다!”

눈도 안 뜬 채로 벌떡 일어서자 아델라를 부른 선임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현 시간부로 경은 숙소를 옮긴다.”

“예?”

중급 수습병! 수습병! 수습! 이렇게만 불리다가 갑자기 경이라고 불리니 아델라는 어리둥절했다. 아델라는 멀뚱멀뚱하게 선임을 쳐다보았다. 아델라와 생활하는 다른 수습병들도 멍하니 선임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아델라 경은 오늘부터 상급 수비병으로 격상됐다. 축하한다.”

“예에?!”

당사자보다 더 놀란 이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세상이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경이라는 호칭을 붙이더라니.

상급 수비병부터는 수습 기간이 없었다. 신입이든 선임이든 상급 수비병이 되면 무조건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고 보았기에 상급으로 확정되면 그 사람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됐다.

아델라는 잠시 넋을 놓았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며 짐을 챙겼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이런 행운이! 영락없이 손가락 빨고 죽나 했더니 1구역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 1구역이 뭐야, 상급 수비병 숙소는 공작의 저택과 아주 가까웠다.

아델라는 자신한테 뜻밖의 행운이 따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 *

“아델라!”

“헉, 아몬!”

아델라를 발견하고 멀리에서 뛰어오는 남자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한 것이 곧 화를 낼 것 같았다. 아델라는 예상외의 만남에 잠시 주춤했다.

분명 여태까지의 회귀 중에는 아몬을 만나지 못했다.

‘그럼,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건가? 바뀔 수…… 있을까?’

아델라는 다가오는 아몬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 바뀐 것은 거의 없지만 어쩐지 이번 생은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한 말로 자신은 전쟁을 막지 못한다. 그랬기에 막을 수 있는 인재를 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 것 아닌가. 호상을 위해서는 이 성의 주인,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이 살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야 했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거야?”

“아몬 경!”

“아몬 겨엉? 너 진짜 이 일 하게? 왜? 너, 장사 잘하고 있었잖아. 근데 갑자기 왜?”

아몬은 정말로 답답한 표정으로 아델라에게 다다다다 물었다.

“자자, 진정하고. 일단 하나씩 해, 하나씩.”

이게 진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지만 아몬은 아델라에게 이유를 듣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됐어.”

아몬의 진지한 고동색 눈동자가 아델라의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우선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이유는?

아몬은 마른침을 삼키고 아델라를 보았다.

“돈을 많이 준대서!”

“뭐?”

너무나 황당한데, 너무나 아델라다운 이유라 아몬은 할 말을 잃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에는 목숨 걸잖아. 요즘 너무 불경기라 돈이 안 벌려서 걱정했거든. 근데 마침 주기적으로 돈이 나오는 직업이 있네?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자기가 생각해도 아주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아몬한테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얘가 머리가 아픈 것 같다며 더욱 반대하겠지. 그러다 욘제타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델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결사반대할 것이다.

아몬은 아델라의 대답에 황당한 표정을 했다.

“이 일은 그렇게 취미로 막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연한 걸 말한다는 표정으로 아델라가 아몬을 보았다.

아몬은 암담해졌다. 아델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몬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장사만 하던 애가 갑자기 군인이 된다고 나섰으니. 처음 아델라가 수비병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뜯어말린 욘제타도 이런 반응이었다.

“돈이 부족하면 차라리 내가 빌려 줄게.”

물론 욘제타도 이런 말을 했었다.

“나 빚지는 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렇게 말하면 아델라를 아는 이들은 백이면 백, 말을 잇지 못했다. 속으로 그녀의 부모를 원망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평생 빚을 갚으며 살아온 아델라가 빚지는 것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의 아델라는 빚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 했지만, 아델라의 회귀를 모르는 아몬이나 욘제타한테는 이 말이 아주 잘 통했다. 역시 아몬은 침통한 표정으로 끄응 하고 신음을 삼켰다.

“주기적으로 돈 나오는 직업은 많잖아.”

“그런 직업은 많지만 수비병이 그중 최고지. 특히 상급 수비병이 되면 동전 색깔부터 다르대.”

그건 또 누가 흘린 정보야.

수비병들이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정확히 얼마를 받는다는 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같은 상급 수비병 사이에서도 자신의 급여를 남한테 알려 주지 않았다. 기밀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서로 밝히지 않게 됐다고 할까?

물론 아델라는 상급 수비병의 급여를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아델라한테 추파를 던지던 몇몇 상급 수비병들 덕분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급여를 그렇게 줄줄 털어놓더라. 인생에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이럴 때 쓰이다니.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더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아몬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델라의 굳건한 눈빛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아몬이 아는 아델라는 돈 문제에 집착이 꽤 심한 편이었다.

“내가 부탁해도…… 하겠지. 그래. 하겠지, 너는.”

아몬은 거의 포기한 듯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엄! 돈이 있는 곳에 내가 있지.”

저 강렬한 의지. 아몬은 아델라를 절대로 막을 수 없었다. 저렇게 마음먹으면 꼭 해야만 하는 아델라였다. 그는 아델라의 의지에 한숨만 작게 내쉴 뿐이었다.

반면, 아델라는 속으로 아몬에게 수백 번 사과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진짜 돈이 필요했으면 이 짓 안 했다. 이전 회귀 때 서너 번 해 봤는데, 수비병은 봉급은 두둑하게 받았지만 그만큼 이리저리 굴려졌다. 거기에다 강제 전쟁 참여로 죽기까지!

아델라가 봤을 때 수비병들이 돈을 많이 받는 것은 순전히 생명 수당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전부터 자신이 돈을 밝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며 돈을 벌고 싶어 하진 않았다.

아델라는 자신의 목숨이 소중했다. 회귀 전이나 회귀 후나.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사지에 뛰어들겠는가. 자신은 불나방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살아야 하니까, 이곳까지 흘러들어 오게 된 것뿐이다.

욘제타와 함께 아델라를 줄곧 챙겨 준 사람인 아몬에게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하게 되어 매우 미안했지만 아델라로서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정신이 회까닥 돌아 버린 사람보다는 단순히 돈만 밝히는 사람이 더 나았다.

* * *

“훈련 시작하도록. 아델라 경은 앞으로 나오고.”

훈련장에 모인 상급 수비병들은 많이 겪는 일인 듯 목검을 들고 일대일 연습을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훈련 교관 앞으로 다가섰다. 아몬은 그런 아델라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다가 훈련에 참여했다.

아델라는 자신보다 약간 작은 키의 여성 앞에 멀뚱히 섰다. 그러자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여성, 린다가 아델라한테 목검을 던졌다.

“네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기 위한 거니 최선을 다해. 날 이겨도 좋아.”

“예…… 엣!”

휘익!

아델라가 미처 되묻기도 전에 그녀의 바로 눈앞에 목검이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목검을 든 아델라가 린다의 검을 받아 냈다.

콰직!

아니, 받아 냈다고 착각했다. 같은 목검이 맞는지, 아델라가 들고 있던 목검이 보기 좋게 부러졌다. 아델라는 지이잉, 하고 울리는 손바닥을 보다가 놀란 눈으로 린다를 쳐다보았지만 린다는 무표정하게 다시 새 목검을 던져 줬다.

“다시.”

여태 훈련 교관한테 이런 식으로 일대일 교육, 혹은 실력 검증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시, 교관님!”

“전장에서 잠시란 없어.”

콰직!

또 하나의 가녀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정말로 나뭇가지를 꺾은 것처럼 뽀각 하고 빠개졌다. 아델라는 허망한 표정으로 다시 날아든 새 목검을 낚아챘다.

“호칭은 린다 경 정도면 된다. 다시.”

이 사람……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나? 라고 아델라는 생각했지만 사실 신입 상급 수비병들은 이미 다 겪은 일이었다. 아델라가 늦게 승급되는 바람에 혼자 겪게 된 것뿐이다. 굳이 누군가를 원망하자면, 마티나 헤게이든을 원망하면 된다.

하지만 아델라는 이러한 사정을 하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마음뿐이었다.

휘익!

이번에도 목검이 날아들자 아델라는 저것에 맞으면 어디 한군데 부러진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몸을 피했다. 아델라가 옆으로 몸을 틀자, 이번에는 린다의 손이 아델라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손은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요!’

속으로 외쳐 봤자 지금은 통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를 악물고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린다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거의 다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 머리 모근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참아 보려고 해도 생리적으로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이었다.

“아악!”

아델라는 황당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 나 지금…… 머리채 잡힌 거야?’

자신이 많은 대련을 해 봤던 건 아니지만 대련을 하면서 머리채가 잡혀 본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몸은 거의 다 빠져나왔는데, 긴 머리카락이 린다의 손에 잡히고 만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린다와 아델라에게 쏠렸다.

“누가 눈 돌리라고 했나! 훈련에 집중 안 해?”

린다의 벼락같은 고함에 사람들이 후다닥 눈을 돌렸다. 린다가 아델라의 머리를 놔 주자 아델라는 머리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눈을 껌벅였다.

“전장에서 우아하게 검으로만 맞대고 싸우는 줄 알아? 상급 수비병인 이상, 어떤 경우의 수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그렇다고 누가 머리채를…….

아델라는 그제야 린다가 머리를 틀어 올린 이유를 깨달았다.

말로 해 주시면 되지, 꼭 몸소 고통을 겪게 하시다니. 왜인지 자신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델라는 과거 훈련 교관님이 잠시 그리워졌다. 그 역시 린다와는 다른 스타일의 스파르타였지만, 다짜고짜 패지는 않았다.

아델라는 고통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오늘 온몸이 근육통으로 죽어 나갈 것을 확신하며 목검을 치켜세워 린다에게 뛰어들었다.

* * *

“으으윽…… 나 죽네…….”

“그래. 그 반응이 정상이야.”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아델라는 아몬과 나란히 숙소 복도를 걸으며 연신 신음했다. 아몬에게 신입이면 다들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오해는 풀렸지만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 대련이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너 꽤 오래 버틴 거야. 난 너 그 뒤로 몇 번 더 머리채 잡혔을 때 당황해서 금방 무너질 줄 알았어.”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었지. 암.”

그 뒤로 아델라는 두어 번 더 머리채가 잡혔지만 머리를 정리할 수 없었다. 머리를 틀어 올릴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전장에서는 시간 따위 안 준다며 막무가내로 대련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델라는 뽑히지 않은 머리카락을 보며 그나마 안도해야 했다. 아직도 머리통은 얼얼했지만 말이다. 공작을 만나기 전에 머리카락부터 사수해야 될 줄이야.

아델라는 깊게 한숨을 쉬며 아몬과 갈림길에서 안녕을 고했다.

“내일은 천천히 알려 주실 테니까 걱정 마. 진짜 능력 확인 차 그러신 거야.”

어둠이 짙게 깔린 아델라의 낯빛을 보던 아몬이 헤어지기 전에 그녀를 달랬다.

“그나마 위로가 되긴 하네. 잘 자. 내일 봐.”

아델라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아몬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며 숙소로 돌아갔다.

아니, 아몬만.

아몬이 숙소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아델라는 잽싸게 다른 길로 빠졌다. 몸이 말을 안 듣고 삐걱거렸지만 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꼭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다. 3개월 안에 눈에 띄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쉴 틈이 없었다.

오늘 대련으로 아델라는 더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은 아직 멀었다. 이대로라면 전장에 발도 못 붙일 것이다. 그러니 아델라는 오늘 린다가 알려 준, 많은 것을 소화할 작정이었다.

오늘도 특훈. 남는 건 연습뿐이다!

* * *

환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 고요함으로 덮여야 할 복도에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깔렸다.

린다와 있을 헤이든을 만나러 상급 수비병 건물로 향하던 이저드는 미세하게 평소와 다른 주변 분위기에 귀를 기울였다. 미약한 바람 소리 사이로 조그맣게 앓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서 들렸다. 아무래도 훈련장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이 시간에 상급 수비병 훈련장을 이용할 사람은 없었다. 린다나 헤이든 정도?

하지만 그 둘은 추가 훈련을 하더라도 호위병 훈련장에 와서 호위병들을 다 깨워서 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일이 많아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저드는 확인 차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맞고 이런 소리를 내나 했는데, 소리와 가까워질수록 아님을 알았다.

정말로 누군가가 따로 추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매우 고통스럽다는 소리를 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저드는 조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여태 추가 훈련을 위해 훈련장에 나온 이는 없었다. 이저드가 직접 뽑은 정예 부대인 호위병들도 추가 훈련이라면 학을 떼고 도망쳤다. 린다가 호위병이고 수비병이고 닦달을 하며 추가 훈련을 시켜도 그때만 잠깐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도 단 한 명이, 자발적으로, 이 늦은 밤까지 훈련 중이었다.

그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린다가 보면 이보다 더 뿌듯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훈련장으로 향하는데, 역시가 역시나인지 린다는 이미 훈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린다가 이저드의 유리같이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에 담겼고, 바로 그 뒤를 헤이든이 이었다. 둘은 이저드의 기척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각하.”

“와 있었군.”

이저드는 익숙하게 둘 옆에 섰다.

이저드와 린다, 헤이든이 서 있는 곳은 훈련장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계단식으로 된 커다란 운동장 맨 위에 서 있었으니 당연했다.

운동장 아래에 있는 사람이 엄청 작게 보이는 곳에서 셋은 힘겹게 목검을 휘두르는 누군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셋은 그 누군가가 훤히 보였다.

“흐압! 흐으으으―! 으흡! 악!”

요란한 소리와 지친 몸놀림으로 보건데, 꽤 긴 시간 동안 이곳에서 훈련한 것 같았다.

“누구지?”

“제가 아침에 말했던 사람 있잖습니까? 아델라 중급 수비병. 아니지, 아델라 경이요.”

헤이든의 말에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훈련이 없었나?”

“그럴 리가요. 제 스타일 아시면서.”

린다의 눈은 누구보다 밝게 빛났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갈고닦을 원석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게 몇 년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모르겠다. 정예 부대라는 공작의 호위병들조차 빈둥거리는 마당에 이제 갓 들어온 수비병 신입이 자진해서 훈련하는 날이 오다니!

린다는 오늘 몇 번이나 자신의 검을 막아 낸 아델라를 떠올리며 기대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린다만큼은 아니었지만 흥미가 생긴 것은 이저드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과거의 린다와 겹쳐 보이기도 했다. 제대로 키우면 꽤, 아주, 매우 쓸 만한 인재로 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린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델라라고 했나?”

“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이저드가 입을 떼자 린다의 기대 가득한 눈빛이 따라붙었다.

“경의 생각대로 키워 보길. 한 달 정도의 시간을 주지.”

“어흐…….”

린다가 제대로 훈련을 시키면 얼마나 빡세게 굴리는지 아는 헤이든은 그건 좋지 않은 생각 같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앓는 소리를 냈다.

린다와 이저드가 웬일로 신나 보여서 헤이든은 둘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저 불쌍한 희생양에게 명복을…….

“맡겨만 주십쇼.”

그렇게 아델라에게는 본의 아니게 지옥문, 아니 극한 훈련의 문이 열렸다.

* * *

“악!”

“너 여기도…… 멍…….”

멍 없는 곳이 없었다. 요 며칠 동안 아주 지독하게 당해서.

“처음만 그러는 거라며. 처음만 그렇게 막 굴리는 거라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줘 봐, 브라더.”

아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린다가 아델라를 굴리는 걸 보면 잔뼈 굵다는 수비병 선임들도 혀를 내둘렀다.

“휴…… 그러니까 내가…….”

“쓰읍. 그런 이야기 말고. 도대체 교관님께서 왜 그러는 걸까? 내가 밉보였나? 내가 뭐 잘못했어? 나도 모르는 새에 나 여기 누가 꽂아 줘서 들어왔나? 그래서 찍혔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린다가 자신한테 이렇게 가혹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보다 더하게 구른 적도 많긴 했지만 그거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아픈 감각이 기억도 안 났다. 이렇게 며칠 내내 뚜들겨 맞아서 온몸이 멍들고 아팠던 적은 그 많은 회귀에서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맞으면서 훈련받은 훈련생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었다.

“내가 선임들한테 슬쩍 물어봤는데…… 너 아무래도 단단히 찍힌 것 같아.”

“내가? 왜?”

아델라가 큰 눈망울을 치켜뜨고 놀라서 물었다.

“내 말은 그, 찍힌 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찍힌 게 아니고 널 아주 확실하게 키우실 생각 같다고…….”

키울 생각인데, 왜 매번 반 죽여 놓는 거죠?

아델라는 억하심정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조금 안심하긴 했지만 이 이유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물어볼 거야. 꼭, 물어볼 거야.”

“그럴 시간이 있길 간절하게 기도해 줄게.”

“두고 봐. 물어볼 거야. 왜 이러시는지, 진짜 키우려고 이러시는 건지.”

그러나, 그렇게 굳은 마음으로 향한 훈련장에서 아델라는 또 먼지가 흩날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녀야 했다. 어째 깨끗한 몸이 한 시간을 못 갔다.

아델라는 기운이 다 빠져 입안에 흙먼지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엎어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아침에 다시 하자.”

탁.

목검을 보관함에 끼운 린다가 엎어진 아델라에게서 멀어졌다.

‘아, 안 돼! 오늘은 반드시!’

“끄윽― 경!”

아델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몇 번 헉헉대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현재 그녀한테는 이 자세가 최선이었다.

“왜?”

“후아…… 후우……!”

다행히 린다는 가지 않고 아델라를 기다려 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델라는 너무 힘들어서 침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 힘겹게 침을 삼켰다. 까끌까끌한 가루들이 딸려 왔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아니었다.

“말해.”

“혹시 저한테 억하심정이 있으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린다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혹시 절 키우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린다의 표정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 같았다. 아델라는 당당한 린다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사실은…….”

보통 말해 주지 않나?! 통보도 없었던 데다가 강제라니? 당하는 당사자 입장은 어디 있죠?

일단 공작 측근의 눈에 든 것은 아델라에게 아주 좋은 징조였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공작을 만나기 전에 훈련하다 몸이 바스러지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아델라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정말로 고민되었다.

기뻐해야 되겠지? 기뻐해야 하는 건데……. 하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의 앞날이 너무 빤히 보였던 것이다. 이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 하하하…… 여, 영광입니다!”

“억지로 웃는 거 다 보인다.”

“하하…….”

힘이 없으니까 평소에 잘 짓던 영업용 미소도 지어지지 않았다.

“하기 싫어?”

그렇게 물으면 아델라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암.

“아닙니다!”

“좋아. 들어가서 쉬어.”

‘교관님 너무……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대답만 하면 돼, 아닌가?’

아델라는 린다의 태도에 뭐라 토를 달 수 없었다. 직급도 직급이었지만 힘들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이저드는 오늘도 평소보다 빨리 일을 마쳤다.

그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서류를 책상 한편에 착착 정리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어딘지 밝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이렇게 일을 빨리 끝낸 기간이 벌써 3주째로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전까지 그의 일상은 일과 훈련이 다였다. 그가 커다란 저택에서 가는 곳은 딱 세 곳뿐이었다. 침실, 집무실, 호위병 훈련장. 딱 이 세 곳.

그런 사람이 갑자기 밤마실을 나가기 시작하니 시종들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그 궁금증을 꺼내지 않았다.

이저드를 모시는 대부분의 시종은 철저하게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저드는 집무실에서 나와 시종장한테 겉옷을 건네받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지 말도록.”

이 역시 3주 전부터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3주 전부터 저택을 나서자마자 딱 선을 긋듯 시종들을 물렸다. 시종들은 이저드가 어디로 향하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저드는 시종들을 떼어 놓고 익숙하게 상급 수비병 훈련장으로 향했다.

“각하.”

아무래도 매번 같은 시간대에 훈련장에 가다 보니 이저드랑 린다가 중간에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린다는 3주 동안 매일 훈련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이저드를 보며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건 감시 아닙니까? 절 너무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경을 못 믿는 건 아니네. 물론 감시도 아니야.”

그건 린다도 알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농을 건넨 거였다.

아델라의 행보가 궁금해서 찾아오는 이들은 이저드 말고도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호위병들 사이에서 아델라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오늘은 그녀가 추가 훈련을 나오나, 안 나오나 매일 내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뭐야? 왜 또 늘었어?”

린다의 목소리에 어둠 속에서 아델라의 훈련을 지켜보던 몇몇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쇼, 각하.”

“오셨습니까, 각하.”

“난 신경 쓰지 말고 앉게.”

이번에 모인 호위병들을 대강 세어 봐도 벌써 열 명은 넘었다. 이러다가 호위대 애들 다 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시간에 훈련이나 더 하시지?”

린다가 핀잔을 놓으며 앉자 어둠 속에서 호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할까……. 보고 있으면 의욕이 생긴다고 해야 하나?”

“의욕이 생기면 너희도 추가 훈련해.”

“어? 전 했어요. 하고 오는 길이예요.”

“그거 참 잘했네.”

평소 칭찬을 잘 안 하는 린다한테서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누군가가 헤헹 하고 웃었다.

확실히 아델라가 하루도 빠짐없이 추가 훈련을 해서인지 그녀한테 자극을 받은 몇몇 호위병들이 자진해서 개인 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조금씩 생겨났다.

잘 하면 단체로 추가 훈련을 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린다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나저나 저 검술, 린다 경 스타일은 아니지 않아요?”

“내 스타일이 뭔데?”

“확실히…….”

“내 스타일이 뭐야?”

린다가 다른 이들한테 물었지만 다들 유심히 아델라만 볼 뿐이었다.

“내 스타일이 뭐냐니까?”

“묵직하고 정직한?”

털썩.

누군가 린다의 옆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 옆에 바짝 앉은 그는 그녀의 남편, 헤이든이었다. 그가 씩 웃자 린다도 피식 웃었다.

“아리스 경의 검술 스타일 아닌가?”

한마디 말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던 이저드가 입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어둠 속에 있던 아리스에게 향했다.

“제…… 스타일 같아 보이긴 합니다만, 전 아델라 경을 모릅니다. 가르쳐 본 적도 없고, 만나 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아리스를 포함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모르는 일이지만, 아리스는 아델라를 가르쳐 본 적이 있었다. 아델라가 회귀하기 전에.

그녀의 검을 잡는 법부터 휘두르는 법, 피하는 법, 기본자세는 모두 아리스의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하급 수비병 때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은 아델라만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귀의 기억은 아델라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랑 처음 대련할 때도 제 검을 흘려보내려고 했어요. 자세 잡는 것만 봐도 기본기는 갖춰져 있었죠.”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아리스에게 향했다.

“저 아닙니다. 정말로.”

아리스가 힘주어 다시 말하니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그럼 검술 스승이 따로 있나 보죠. 아리스 경 같은 스타일의.”

“그렇겠죠. 아리스 경이 거짓말할 위인도 아니고.”

이저드와 린다, 헤이든 포함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몬과 친분이 있었으니 그한테서 배웠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한 명, 호위병들 사이에 조용히 이 상황을 관망하던 단 한 명만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델라를 흥미롭게 내려다보다가 맨 뒤편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 * *

“아주머니! 아저씨! 저 왔어요!”

아델라는 한 달 만에 숙소를 벗어났다. 특별히 받은 하루 휴가였다. 그녀는 잔뜩 신이 나서 욘제타네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두 손에 바리바리 무언가를 싸 들고 온 아델라를 보며 욘제타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에 든 건 다 뭐니?”

“아, 이건 아주머니 거구요. 이건 아저씨 거! 그리고 이건 아몬 거, 이건 루 거……. 아 참, 이번 달에 루 안 왔어요?”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보따리를 확인하려 테이블로 다가가던 욘제타는 아델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네? 분명 이맘때쯤 왔는데…….”

시기가 약간 빗나갔나?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는 아델라의 소꿉친구이자 보따리장수였다. 아델라가 자작가에서 도망칠 수 있게 그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뒤로도 역시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델라의 가게에서 파는 물건 대부분이 루가 가져온 것들이었고, 자작가에 몰래 돈을 보낼 때도 루가 도와줬다.

오늘쯤이면 루가 올 시기와 겹칠 줄 알았는데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하는 수 없이 돈은 욘제타한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복 안쪽 주머니를 뒤져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가 요즘 바빠서 루가 올 때 못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제가 루랑 못 만나면 이것 좀 전해 주세요.”

욘제타는 그녀에게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전해 받았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이거 이번 달 봉급이니?”

“네. 저 상급 수비병 됐거든요.”

“근데 그걸 다……? 이거 이번 달 봉급 전부 아니야?”

“네. 맞아요.”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너 설마 이거 다 집에 보내려고?”

“네.”

“이거 다 보내면 넌 어쩌고?”

“괜찮아요. 어차피 돈 쓸 일도 없을 것 같고, 저 또 한두 달 넘게 못 나올 것 같아요. 돈이야 앞으로 계속 벌 텐데요.”

아델라는 돈을 모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번에 루가 왔다 가면 두 달 뒤에는 출정이다. 그전에 루한테 두둑이 챙겨 주고 싶었다. 그한테는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이런 푼돈으로는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도…….”

“진짜로 괜찮아요. 밥도 잘 나오고 잠잘 곳도 편하고 훈련하면서 돈도 벌어요. 훈련에 적응하기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완전 좋아요.”

다 좋다는 것치고는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걱정이 된 욘제타는 아델라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아델라는 얼굴 살이 빠진 대신 눈에서 생기가 돌았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의지가 보였다.

아델라가 이리도 확고하니 욘제타는 말리지 않았다. 아델라한테도 생각이 있겠지. 항상 악착같이 살던 아이니 오죽 잘하련만, 역시 걱정은 됐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정말 다행스럽게도요?”

아델라가 장난스럽게 웃자 욘제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주 웃었다.

“아델라! 같이 좀 가자니까 그새를 못 참고……!”

“아몬!”

아델라 만큼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온 아몬한테 욘제타가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몬은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거였다.

“오랜만에 봬요, 어머니.”

너무 기뻐하는 욘제타를 조금 부끄러운 듯 아몬이 안았다.

아름다운 모자 상봉을 턱을 괴고 지켜보던 아델라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줌마! 아몬이 글쎄! 중앙 광장 부띠끄으!”

“야, 아델라!”

“부으띠끄! 아가―!”

아델라가 뒤를 길게 끌자, 아몬이 손가락 하나를 펴서 그녀에게 보였다. 당연히 욘제타는 보지 못 하는 각도에서.

“하얀 거?”

“하얀 거!”

‘1실버. 오케이!’

아몬은 아델라와 함께 휴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미 늦었지만.

그러게 누가 저번 휴가를 그렇게 날리라고 했니? 부티크 아가씨가 그리 예쁠까? 욘제타는 목 빼고 아몬이 나올 날만 기다렸는데.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 봤자 다 소용이 없다고…….

아델라는 얄밉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니?”

“아! 아몬이 아주머니 옷 사려고 부티크 가서 옷 고르는데 너무 늦어서 제가 먼저 와 버렸다고요.”

“뭘 그런 걸 다 사 오고 그러니…… 그냥 와도 되는데.”

욘제타는 아델라와 아몬을 뿌듯한 얼굴로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꼭 이렇게만 사이가 좋았으면.

* * *

“아델라! 너 진짜 이러기야?”

“내가 뭘? 내가 뭘 했더라?”

아델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중앙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숙소였지만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몇 개 사 갈 생각이었다.

“남의 약점 잡아서 돈을 뜯어 낼 생각을 하냐?”

“어? 그 아가씨다!”

“뭐? 어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아몬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아델라는 잽싸게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러게 누가 아주머니한테 비밀 만들라고 했니!”

“야! 아델라! 너!”

아델라한테 또 속은 아몬은 열을 냈지만 이미 아델라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럴 때면 아몬은 정말로 아델라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같은 시각, 아델라는 몸을 살짝 숙이며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는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역시 아몬은 놀려야 제맛이야.

아몬이 시야에 안 보일 정도로 멀어졌을 때에야 아델라는 속도를 줄이고 허리를 폈다.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누군가와 한 번도 부딪치지 않고 피해 간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몸놀림이 전보다 더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교관님이 헛것을 가르치신 건 아니었구나.’

물론 린다가 듣는다면 괘씸해했을 소리였기에 아델라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당연히 그녀는 없었다.

휴, 요새 하도 린다한테 시달리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주변에서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아델라는 누군가와 퍽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어어……?

‘분명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텁!

상대방과 너무 강하게 부딪친 나머지 아델라의 중심이 잠시 휘청거렸다. 다행히도 부딪친 누군가가 아델라의 어깨를 잡아줘서 넘어지진 않았다.

아델라는 인기척도 못 느꼈던 사람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손질된 오렌지 빛의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그 다음에는 수려한 외모였다. 그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자신을 담고 있는 사내의 흑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델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에서 어깨를 빼냈다.

“죄송합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보니, 그가 입은 검은색 제복이 어딘가 낯익었다.

“호위대…….”

“아델라 경?”

응?

동시에 말한 아델라와 남자는 놀라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표정을 푼 사람은 남자 쪽이었다.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명 인사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날 처음 보지? 난 벤슨. 보시다시피, 공작 각하의 호위대 소속이야.”

“어…… 네, 전 수비대 소속 아델라입니다.”

아델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벤슨이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악수를 청해 왔으니 받아 주는 게 예의라 받아는 줬는데…….

‘……?’

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하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손에 힘을 줬다. 아델라는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으로 그와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그의 손에서 조금 이상한 점을 목격했다. 그의 손목 쪽에 검게 그을린? 검게 내려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새하얀 손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색이었다.

“아. 미안, 미안. 가까이 보고 싶어서 그만.”

그러나 아델라가 그의 손목을 자세히 확인하기 전에 그는 천천히 아델라의 손을 놔 줬다. 아델라는 허공에서 머물던 자신의 손을 어색하게 갈무리했다.

“어둠 속에서만 봐서 몰랐는데, 미인이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델라는 아직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방금 그건 뭐였고, 지금 이건 또 뭐지? 작업 거는 건가? 어둠 속? 스토컨가?

“그 눈은 파렴치한을 보는 눈빛인데…… 무슨 오해가…….”

아! 벤슨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델라 경이 생각하는 그런 파렴치한은 아닌데!”

“아뇨. 파렴치한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델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호위병한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거짓말도 잘하네. 난 그냥 네가 밤에 훈련하는 걸 잠깐 봤을 뿐이야.”

네? 뭐라고요? 그, 혼자 허공에 칼질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고요? 일부러 밤늦게 한 건데?

아델라가 눈을 조금 키웠다. 벤슨은 아델라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모르는 사실을 줄줄 늘어놓았다.

“참고로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린다 경도 봤고, 헤이든 경도 봤고, 아리스 경…… 아, 모르려나? 수비 대장님도 봤고, 우리 호위대도 반 정도는 봤을 걸?”

미세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죠?”

헉, 이거 잘못하면 의심받을 수도 있겠는데?

아델라는 떨리는 동공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아리스 경까지 봤다면…… 분명 검술 스타일을 봤을 텐데, 그럼 의심을 할 수도 있다. 아아, 이렇게 망하나?

그 새벽에 그 많은 사람이 왔다 갔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각하께서도 보셨지.”

벤슨은 이저드가 보았다는 사실까지 말하면 아델라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저드의 이름이 들리자 반대로 매우 침착해졌다.

“……각하께서 보셨다고요?”

아까는 미친 듯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는데, 공작이 봤다고 하니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공작의 눈에 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대로 하기도 전에 이미 공작의 눈에 들었다니! 이렇게 수월할 수가?

한 달 만의 쾌거였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아니지, 아냐. 이렇게 쉬울 리가 없어.

“거짓말 아니시고 진짜 각하께서 보셨다고요? 다른 분들하고 다 같이? 언제부터요?”

“으음…….”

말이 막힌 쪽은 벤슨이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허공을 주시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모르지. 난 어제 아델라 경을 처음 봤는데?”

생글생글 웃고 있으니,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근데 왜, 각하의 유무가 중요해?”

벤슨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 승급이 걸린 일이면 중요하지 않을까요?”

“수비병 승급은 헤이든 경의 권한인데?”

“그건 저도 압니다. 전 그것만 생각한 게 아니라서요.”

“그게 아니면…… 혹시 호위대?”

“그럼, 전 너무 영광이죠.”

아델라는 딱히 자신의 목적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카우트 돼서 호위대로 들어가면 아주 금상첨화였다. 호위대는 무조건 공작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벤슨은 린다가 왜 아델라를 키우려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린다와 아주 똑 닮았다. 저 포부하며, 당당함하며.

“그런데…… 네가 각하께 배울 수 있을까?”

이건 무슨 소리? 아델라는 지금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 벤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같이 포부도 좋고, 기세도 좋았던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대부분 호위대에 들어오고는 오래 못 버티고 나갔어. 왜인 줄 알아?”

“왜요?”

“가르치는 사람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봐서.”

“……예?”

그녀가 세상에서 들어본 이유 중에 가장 황당하고 허무한 이유 같았다.

“그게 무슨……?”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더라?”

아델라도 안 믿겼다.

“어쨌든 그래. 각하께 배우는 건 몸도 힘들지만, 마음이 더 힘들어.”

어차피 아델라는 지금 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다. 그러니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뭐라고 할까……. 연모하는 이가 눈앞에서 움직이고, 만질 수도 있고, 말을 걸 수도 있고, 나한테 너무 친절한데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 그런 감정 고문?”

벤슨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델라의 표정은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

아델라가 들어본 이저드에 대한 소문 중에 가장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과장도 정도가 있지.

“희망이 아예 없으면 꿈도 안 꾸는데 희망은 계속해서 주고 꿈도 꾸게 하는데 정작 손에는 안 잡히는 거, 그거 진짜 힘들다?”

그래, 힘들긴 하지. 힘들다는 건 아는데 아델라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이쯤 되니 그녀는 이 사람 진짜 호위대 맞나 싶은 의심까지 들었다.

“지금 내 말 안 믿지?”

“사실 조금…….”

벤슨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흐음? 반응을 보아하니 각하 뵌 적이 없구나?”

엄청, 매우 잘생겼다고 소문으로 듣기만 했다.

“역시 없구나. 그럼 못 믿을 수도 있지. 어쨌든 힘내. 내 조언 잊지 말고.”

조언? 어디가? 아델라한테는 황당한 헛소리로 들렸을 뿐이다.

“그럼, 다음에 또 봐.”

다음이 또 있어?

아델라는 애써 웃으며 그와 작별했다.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순 없지 않은가.

* * *

어제 그를 출처가 불분명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상한 호위병이라고 생각한 걸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델라는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직접 마주한 순간, 그녀는 그렇게나 무시했던 성내의 수많은 여성한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싶어졌다. 이러니까 너도나도 하녀 지원한다고 난리가 났지.

‘이 사람이, 내가 살려야 하는 공작 각하라고?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 말로만 들었던?’

너무 잘생겨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살다 살다 눈도 못 마주치겠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벤슨은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아닌 외몬데? 엘프나 요정이나 신이나…….

“……경, 아델라 경.”

“헉, 예?”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홀린 듯 넋을 놓았다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미쳤다, 미쳤어. 미친 외모다.

아델라는 소문이 과장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그의 외모에 비해 소문이 축소된 느낌이었다. 이 정도 외모면 몇몇 여자들이 목숨 걸고 저택에 들어갈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내 말 들었나?”

“저……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십쇼.”

“경의 소속은 앞으로 호위대로 변경될 거고, 훈련은 이제부터 나한테 받게 될 거네.”

“그건 곤란…….”

헙.

아델라는 무의식적으로 내뱉어 놓고 입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놓치지 않고 들은 이저드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곤란?”

이저드한테 훈련을 받으면 진짜로 벤슨의 말처럼 될 것 같아 순간적으로 나온 자기 방어였다.

‘정신 차리자, 아델라. 이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니!’

“각하께서 곤란하지 않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아델라는 속으로 ‘내 호상, 내 호상, 내 호상!’ 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직 마음을 다잡기는 이르네. 경한테 물어볼 것이 있어.”

아델라는 그를 돌같이 보기로 마음을 다잡고 굳은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과거를 좀 조사했네.”

뒷조사를? 알아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아델라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호위대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5년 전에 정착했더군. 그런데 그 전에 경이 어디서 뭘 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 아델라라는 이름은 흔해서 이름으로 조사하려면 너무 오래 걸리고. 그래서 묻는 말이네만, 경이 직접 알려 줬으면 좋겠어. 경의 신분.”

이건…… 일종의 시험인가? 아델라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제 대답 여하에 따라 합격 여부가 달라집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이저드는 표정 변화 없이 아델라를 무심하게 마주 보았다. 침묵이 계속되는 와중에 아델라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찔러 본 것뿐인데 무언가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신분에 대해 말하기를 망설였다.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약속까지 해야 할 정도의 신분인가?”

“그 정도의 신분은 아닙니다만…… 절 잡아들이지만 말아 주세요. 각하께 피해가 간다면 제 발로 떠날 테니, 차라리 떠나라고 해 주십쇼.”

아델라의 이야기는 꼭…… 그녀가 잡아들일 만한 어떤 짓을 한 것처럼 들렸다. 도망자 신세였나?

“경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지.”

이해해 줄까? 아니, 이해까지는 안 바라고 모른 체해 줄까?

아델라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잡혀 들어가면 죽고, 그러면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제 신분은…….”

그러나 입을 떼려던 아델라의 말문을 막은 것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이었다.

“안 비켜요?”

“이따 다시 오십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지금 당신 앞에 있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압니다, 헤게이든 영애.”

“그래요. 그런데도 내 앞을 막아서?”

“각하께서…….”

짝!

안에서도 들릴 만큼 누군가가 크게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라는 입을 열려다 말고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급자 앞에서 허락도 없이 먼저 일어나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아델라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맞은 이로 추정되는 자가 그녀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짜악!

한 번 더 뺨을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아델라는 이제 더는 마냥 서 있을 수 없었다.

“있게. 경이 나서서 어쩌려고 그러나.”

화가 잔뜩 나서 정색한 아델라를 슬쩍 보던 이저드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독인 후 문을 열었다. 그러자 성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씩씩거리는 마티나와 두 번의 뺨을 맞았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강직하게 선 린다가 있었다.

“무슨 소란인가?”

“각하!”

마티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저드의 품에 뛰어들었지만 이저드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그러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시선으로 린다를 보았다.

“무슨 소란이지?”

“별일 아닙니다.”

“아닙니다, 각하. 린다 경이 감히 절 무시했습니다. 그랬기에 제가 벌을 좀 줬습니다. 린다 경은 제가 상급자인 걸 계속 잊으시는 모양이라.”

마티나는 린다를 흘겼다.

그녀는 안 그래도 요즘 공작이 밤마실을 나가서 린다를 자주 만난다는 소리를 들어 심사가 뒤틀린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밤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린다의 집무실을 공작이 찾았다는 말에 결국 폭발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이곳에 온 순간부터 눈엣가시였던 여자다.

마티나는 이참에 린다의 버릇을 고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공작가 안주인이 되면 당연히 해야 할 아랫사람 관리 중 하나였다.

“헤게이든 영애.”

“네, 각하.”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당당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시녀들 또한 허리를 꼿꼿이 펴고 린다를 노려보았다. 고작 뺨 두 번이었다. 마티나한테 있어서 이제 시작인 훈육이었기에 오히려 당당했다. 사실, 이 정도는 훈육 축에도 못 꼈다.

“린다 경은 내 아랫사람이고, 린다 경의 상급자는 나뿐입니다. 영애께 부사령관에 달하는 직책을 줬지만 그건 유사시에 대한 대비일 뿐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그 권한을 휘두르면 곤란합니다.”

“예…… 예?”

“앞으로 다시 린다 경 이외에 내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오늘처럼 경고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가, 각하?”

“그리고 앞으로 예법 선생을 붙여 드리죠. 백작가에서의 예법과 공작가에서의 예법이 이토록 다르니, 성실하게 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에 혼인식을 올리죠.”

“네, 네? 그건……!”

아델라는 문 뒤에서 듣고 있다가 그만 손뼉을 칠 뻔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문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이저드의 말은 너 예의 완전 없으니까 다시 배우고 와라, 하는 말과 같았다. 그것도 귀족가 여식한테 말이다.

아델라는 문이 열리기 전에 잽싸게 다시 소파에 가서 앉았다. 타이밍 좋게 아델라가 앉자마자 린다와 이저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델라는 쪼르르 린다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뺨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아니, 우리 교관님 때릴 곳이 어딨다고! 얼굴도 조그맣고, 몸도 작고! 아, 물론 마티나가 좀 더 작지만. 아, 또 있네. 교관님이 몸이 더 좋으시지. 항상 수련을 하시니…….

그래도! 우리 교관님이 뭘 잘못했다고!

“아악, 저 미친!”

……어익후.

아주 잠시 린다의 성격을 잊고 있었다. 마티나가 공작의 약혼녀만 아니었으면 린다의 손에 가루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러셔야 교관님이지. 누가 보면 아델라가 린다를 키운 것처럼 아델라의 표정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경한테는 정말 미안하군. 볼은 괜찮나?”

“각하께서 미안할 건 또 뭐랍니까? 저런 손으로 쳐 봤자 얼마나 아프겠어요? 기분은 드럽게 나쁘지만. 헤이든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나라도 소문을 막기는 무리네.”

“제가 말할 거니까 각하께서는 아무 말 마세요. 그나저나 경은 왜 그런 표정이야?”

둘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붙었다. 아델라는 방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제가 왜요?”

“방금 엄청 불손한 표정이었어.”

“에이,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교관님께.”

아델라와 한 달 정도 붙어 있다 보니 린다는 그녀의 예쁜 미소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처음에는 저렇게 웃는 게 진짜로 아무것도 몰라서 웃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저게 사실은 머리를 굴리고 있는 표정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아냈다.

린다는 장난스럽게 짓는 아델라의 미소를 보다가 두 손을 올렸다. 올라간 린다의 손이 머문 곳은 말랑말랑한 아델라의 양 볼이었다.

“으어어어― 제셩해여!”

“날 놀릴 생각을 해?”

음? 말랑말랑해서 떡 만지는 기분이네.

린다는 역으로 아델라를 놀리며 환하게 웃었다.

요즘 친해져서 그런지 아델라가 종종 장난을 쳐 오는데 그게 가소롭다 못해 귀여웠다. 귀여운 동생 하나를 더 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친해 보이는군.”

아, 맞다.

린다는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를 놔 줬다. 아델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 볼을 감쌌다. 린다의 손맛은 언제 맛봐도 정말로 너무 심하게 아팠다.

“예, 친하죠. 제 제자니까요.”

“그래? 흠…… 알았네. 둘 다 이만 할 일 하러 가게.”

“확인은 다 하신 겁니까? 그럼 오늘이 제가 시키는 마지막 정규 훈련이 되겠네요.”

어라? 잠깐만요.

지금 린다를 쫓아가면 어마어마한 훈련이 기다릴 것 같았다.

린다한테 받는 마지막 훈련인 데다가 린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마티나, 저 사람은 왜 가만있는 사람 화를 돋우고 가? 그 화를 누가 감당하라고!

“그렇게 되겠군. 호위병 숙소는 훈련 끝나고 경이 안내해 주게.”

‘어, 어어어……? 저기, 잠깐, 잠시! 아직 제 신분 안 밝혔잖아요!’

아델라는 린다의 손에 이끌려 억울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바라봤다. 그녀를 본 그의 표정에 얼핏 웃음이 서린 듯했지만 곧바로 사라져 아델라는 확인도 못 하고 린다의 집무실에서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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