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1/17)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1

| 목 차 |

프롤로그.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1부 1장. 그녀는 만나고 싶다

1부 2장. 그녀는 잡고 싶다

1부 3장-1. 그녀는 알고 싶다

프롤로그.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아델라는 죽기 직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선연한 검의 감촉과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던 핏줄기와 두려움에 찬 사람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지던 기억까지. 그녀의 눈앞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그녀 또한, 누군지도 모를 이의 검에 찔려 죽었다.

그것이 아델라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첫 번째 회귀의 기억이었다.

* * *

“아델라, 일찍 일어났네?”

“욘제타 아주머니! 마침 잘 만났어요! 6개월 뒤에 여기 점령당하니까 얼른 짐 싸세요! 최대한 동쪽으로! 동쪽으로 도망가요. 그래요, 하이크 제국이 좋겠네요.”

“뭐? 무슨, 무슨 소리니, 아델라?”

“빨리요! 빨리! 여기에서 곧 전쟁 날 거니까, 다른 분들한테도 전해주시고요! 얼른 여길 떠나야 해요!”

그렇게 욘제타를 재촉했지만, 욘제타를 포함한 다른 가게 상인들은 아델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믿지 못했다. 철옹성이라고 불리는 왕국 최고의 방어 시설을 갖춘 펜베르크 성이 함락당할 리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델라는 혼자 짐을 싸서 성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도무지 아델라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다들 농담이나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아델라도 철의 요새인 펜베르크 성이 그렇게 함락될 줄은 몰랐다. 미래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이곳이 함락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아델라의 두 번째 회귀의 기억이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성을 도망쳐 나온 그녀는 또다시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 하이크 제국조차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그다음 그녀는 세상의 끝이라는 바다 건너 작은 섬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다음으로 그녀가 한 일은 전쟁 중에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한 고찰이었다. 전국적으로 전쟁이 퍼지니 전쟁통에 살아남아야 했다. 감옥에서 뒷돈을 줘 보기도 하고, 미인계를 부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전쟁에 참여해 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왜! 어째서!

아델라는 익숙한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몇 번째 회귀인지 셀 수도 없었다. 눈빛만 보면 나무로 된 천장을 뚫어 버릴 기세였다. 그녀는 지금 강한 울분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신이 계신다면 저한테 정말 왜 이러시는 거죠?”

아델라가 잘못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처음 펜베르크 성이 함락되어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흑마법을 부린 것, 딱 그거 하나뿐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녀는 지독히도 오랜 고통을 겪는 중이었다.

그녀는 매우 억울했다.

살기 위해 자연사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 그렇게 잘못한 일이란 말인가.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란 말인가.

당시에 아델라는 살기 위해 아는 흑마법을 다 때려 박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자연사가 발동되는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델라는 그렇게 뛰어난 흑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자기한테 무슨 흑마술을 얼마나 걸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델라는 평생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을 탐한 적 없었고, 권력을 욕심낸 적도 없었다. 거짓말은 조금 해 봤지만 악행을 저지른 적은 하늘에 맹세코 없었다. 나름 선량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희망인 줄 알았던 회귀는 저주가 되어 돌아왔다.

“하…….”

그녀는 퀭한 얼굴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작은 가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크고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아델라는 회상에 잠긴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이곳에 정착한 지도 벌써 5년째였다.

벨제프 자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이런 조그만 가게에 머물기까지, 그녀는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남모를 사정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이 성에 정착하고 나름 행복한 생활을 영위 중이었다.

제스트윈 공작이 다스리는 펜베르크 성은 치안도 좋았고, 복지도 괜찮았으며, 이주민들에게 친절했다. 괜히 왕국 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것이 아니었다.

흠이라면 변방이라 인접 국가와 전쟁이 터지면 전면전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물론 펜베르크 성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적군한테 점령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곳이 한순간에 불바다가 된다니, 아델라는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이 거리가, 저 성이, 이곳 사람들이, 그리고 자신이…….

“아델라, 일찍 일어났네?”

욘제타의 안부 인사도 벌써 몇 번이나 들어 봤다.

“그러게요. 일찍 일어나서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숱한 회귀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중에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자살 시도도 해 봤는데, 끔찍한 고통만 남고 절대로 죽지는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뒤로 그녀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호기심은 독이었다.

“무슨 걱정 있니? 얼굴이 왜 그래?”

“걱정은요. 사람은 결국 다 죽는 걸요…….”

세상 멸망설까지 나올 기세로 땅을 파는 아델라를 보던 욘제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얘가 왜 이래? 나한테 말할 수 없는 일이면 가서 산책이나 하면서 기분 풀고 와. 너 너무 일만 하긴 했어! 얼른 다녀와. 가게는 내가 잠깐 봐줄 테니까.”

“그렇죠……. 평생 열심히 돈만 벌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얘가 점점! 얼른 다녀와. 자, 이쪽 거리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 적으니까, 중앙 광장까지 다녀와.”

회귀하기 전과 비슷했다. 아델라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욘제타의 신분패와 신원 증명서를 보며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후에도 그녀의 인생은 바뀌지 않았다. 똑같이 굴러 갔고, 예정대로 흘러갔다.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뭘 더 해야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죽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발버둥 쳤지만, 아델라에게 돌아오는 건 또다시 죽음뿐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가늘고 길게 살 수 있는 거지?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해?’

전쟁에 참여했다가 서툴러서 금방 죽고, 조금 익숙해져서 성을 지키기 위해 나섰는데도 죽었다. 스스로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뭐가 남았기에 이토록 생을 반복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운이 더럽게 없는 건가?’

아델라는 중앙 번화가 입구에서 우뚝 멈췄다.

‘……정말 운이 없는 걸까?’

불현듯 최근 회귀 때가 생각났다.

성이 함락당한 이유, 수비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하거나 도망간 이유. 아델라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방어를 포기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펜베르크 성 정중앙에 높게 치솟은 성벽을 향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어차피 죽지 못하는 몸이니, 정말 마지막으로 인생 최대의 미친 짓을 해보기로 했다. 아델라의 눈에 어떤 확고한 결심이 떠올랐다.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 각하를 뵙고 싶습니다.”

전장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펜베르크 철옹성의 주인을 직접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델라는 길고 얇게 자연사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래, 호상. 호상이고 싶었다. 여태까지 얼마나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이렇게 전쟁의 희생양으로 계속 죽기에는 너무너무 억울했다.

그녀가 살기 위해서는 공작을 살려야 했다. 공작의 죽음 이후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 성을 지켜야 했고, 이 나라를,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을 지켜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더는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전쟁에서 이기면 아델라가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성이 함락당하는 가장 큰 원인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분명 공작한테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많은 회귀 동안 그녀가 건진 유일한 단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