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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짜 야수를 만났습니다 (2/17)

2장. 진짜 야수를 만났습니다

텐스테온 황제는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혼돈의 계곡으로 떠났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무사하시지?”

“네.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으시고 어둠의 문을 막으셨다 하옵니다.”

“그렇겠지. 강하신 분이니까.”

블레이크는 아버지를 걱정했고, 그가 무사하다고 하자 안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한 달 만에 귀환한 황제는 아들을 찾지 않았고, 블레이크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비 전하, 대장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알겠어.”

나는 한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오자, 한스가 조용히 고했다.

“실은 대장간에서 사람이 온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나를 찾으시는 거지?”

“네. 알고 계셨습니까?”

“응.”

황제가 오면 나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한스가 대장간 핑계를 댄 건, 블레이크가 모르길 바라서였겠지. 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블레이크가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면 그를 나무랐을 거다.

“아무래도 궁인들을 내친 일로 진노하신 것 같습니다.”

글쎄. 진노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척을 할 수는 있지만.

“폐하께서 물으시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제가 어린 비 전하께 궁인들을 모욕하고 내쫓으라고 사주했다고 말씀하신다면, 폐하께서도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한스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나 대신 자신이 이 일의 책임을 지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잘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한스는 작위도 없는 평귀족이었다. 그를 지켜줄 가문이나 재력이 없었기에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원작에서도 블레이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었지.

“한스.”

“네, 비 전하.”

“그렇게 쉽게 목숨을 던지지 마. 한스가 없으면 누가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겠어.”

“하오나….”

“그리고 걱정할 거 없어.”

나는 싱긋 웃었다.

***

블레이크에게 다시 대장간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뒤,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떠났다가 돌아왔으면서도 아들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매정한 아버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사실은 블레이크를 그리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둠의 문을 봉인하자마자 하루도 쉬지 않고 급하게 달려온 것도 모두 아들이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겠지.

텐스테온은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황제였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리차드도 텐스테온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열등감을 품을 정도였다.

제국을 건국한 필립 황제가 빛의 여신을 배신했고, 이로 인해 그의 핏줄에게 저주가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황실의 명예가 땅으로 추락할 터였다. 빛의 여신의 저주를 받은 황실을 누가 존경하고 따르겠는가?

황실에서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빛의 여신은 제국을 사랑했고, 폭군의 씨앗을 알려주기 위해 타락한 영혼을 가진 이에게 저주를 내렸다.]

황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거짓된 사실을 공표했다.

한 명만 고통받으면, 황실과 제국을 모두 지킬 수 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비밀은 계속 유지되었다.

‘저주의 계승자’는 전 제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선조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받는 희생자에서 영혼이 타락해 여신의 저주를 받은 죄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게다가 저주가 옮는다는 소문까지.

이 때문에 저주의 계승자가 되면 죽기 전까진 유폐된 남쪽 섬에서 나올 수 없었다.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블레이크에게 저주의 문장이 나타났을 때, 그는 당장 황태자직을 박탈당하고 남쪽으로 유폐되어야 했다.

하지만 텐스테온 황제는 블레이크를 외진 별궁으로 보낼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귀족과 신관들은 반발했다. 제국민들도 경악했다.

그러나 텐스테온의 강력한 황권에 밀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블레이크를 사랑하여 이렇게 조치한 거라면, 텐스테온이 아무리 강력한 황제라고 할지라도 귀족과 신관들이 힘을 모아 블레이크를 폐위했을 것이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금방 죽을 녀석인데 폐위니 뭐니 하는 귀찮은 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다는 듯, 애정은 없지만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는 듯 그를 방치했다.

카실 공작 쪽에서 황제의 진의를 의심하며 황태자궁에 첩자를 보내도 일부러 모르는 척 남겨두었다.

그들이 블레이크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그렇게 무심을 가장하며 아들을 지켰다.

블레이크를 별궁에 방치한 채, 얼굴을 보지도 않고 궁인들에게 핍박당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비밀리에 저주를 푸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찾는다.

여신의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흑마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자신이 대신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 흑마법은 리차드가 꾸며낸 가짜였고, 오히려 이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만다.

텐스테온이 세상을 떠나고, 블레이크는 그 뒤에야 폐위되어 남쪽으로 쫓겨난다.

그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고, 마지막까지 외로움 속에 발버둥 치다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모른 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부자의 비극을 막을 생각이었다.

황제는 블레이크를 사랑하고, 블레이크 역시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가운데서 두 사람의 진심을 전해줄 사람만 있다면, 오해는 쉽게 풀릴 것이다.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선 황제의 환심을 산 다음 두 사람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거야. 할 수 있어.’

나는 굳게 다짐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황제 텐스테온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블레이크와 같은 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얼굴도 닮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는 맹수였다.

원작의 주인공인 리차드처럼 그도 육식동물의 야성적인 오라를 풍겼다. 하지만 리차드와는 차원이 달랐다.

리차드가 탐욕스러운 들짐승이라면 텐스테온은 세상을 발밑에 깔고 있는 백수의 왕이었다.

붉은 눈동자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황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원작에 이런 묘사는 없었다. 그저 늦은 나이에 블레이크를 낳았던 강력한 황제라고만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많아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막연하게 중년의 늦둥이 아빠를 생각했던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게다가 강렬한 카리스마와 파괴적인 분위기, 묘하게 나른한 시선이 합쳐지며, 위험한 섹시함이 흘러넘쳤다.

도대체 왜 이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거지?

태어난 순간부터 ‘내가 바로 19금 로맨스의 주인공이다’라고 외쳤을 것 같은 남자인데?

“오랜만이구나.”

텐스테온의 입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는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서둘러 예를 갖췄다.

“제국의 위대한 빛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텐스테온의 카리스마에 눌려서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지만, 황제의 옆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색이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외모, 그리고 안경까지. 이쪽은 황제의 보좌관인 콜린일 거고, 그 옆에 있는 욕심이 많아 보이는 중년 남자는….

“황태자궁의 수석 시종을 하옥시켰다고 하던데, 어찌 된 일이냐?”

텐스테온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아이라면, 아니 어른이라도 두려움에 질식할 듯한 맹수의 목소리였다.

“그가 황태자궁에 배속된 예산을 횡령하였기에 벌을 내렸을 뿐입니다.”

내가 대답하자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시끄럽게 소리쳤다.

“횡령이라니요! 제 아들은 제국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오직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 모두가 꺼리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억울하옵니다!”

역시 쫓겨난 수석 시종의 아버지인 하멜 후작인가 보군.

“억울이요?”

나는 미리 준비한 장부를 황제에게 건넸다.

“이렇게 증거가 명확한데,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텐스테온은 내가 정리한 장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어차피 아는 내용일 텐데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많이도 해 먹었구나.”

스산한 목소리에 하멜 후작이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분명 조작을 한 겁니다! 저희 아들은 누구보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아이입니다.”

“황태자 전하께는 식어 빠진 시금치수프를 드리고, 자신은 황궁 요리사에게 특별히 명해서 송아지스테이크를 먹는 것이 후작이 말하는 충성입니까?”

나의 지적에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건방진 어린 하녀를 보는 듯한 무시와 분노가 깔려 있었다.

‘괴물 황태자랑 결혼한 주제에 감히 내게 모욕을 주다니.’

당장이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 같았다. 브라운 하멜이 누굴 보고 배웠는지 잘 알겠다.

“아니면 황태자궁의 예산을 빼돌려 도박판에서 탕진하는 것이 후작이 말하는 충성입니까?”

“말을 조심하십시오.”

하멜 후작이 협박하듯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뺨을 내리칠 듯 그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있던 텐스테온이 입을 열었다.

“후작, 죽고 싶은가?”

“네? 폐, 폐하, 갑자기 그게 무슨…!”

후작이 하얗게 질렸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하멜 후작을 바라보는 텐스테온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내 며느리에게 말조심하게.”

텐스테온의 ‘며느리’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하멜 후작은 물론 나도 당황하며 얼어붙었다.

야생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맹수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단어였다.

“폐,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비 전하께서 먼저 저희 가문을 모욕하였기 때문에….”

하멜 후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의 검이 그의 손목에 닿은 것이다.

“이 비루한 손은 왜 움직였던 것이냐?”

“그것이….”

“설마 황태자비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느냐?”

“아, 아니옵….”

“지금 짐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이냐?”

날카로운 칼날이 위태롭게 번뜩거렸다. 분명히 하멜 후작은 나를 때리려고 했다. 내가 황태자비고, 옆에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손을 멈춘 것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까지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그가 그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목이 잘려도 싼 놈이지만 막상 내 눈앞에서 날붙이가 번뜩거리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눈을 질끈 감자, 보좌관인 콜린이 다가왔다.

“비 전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가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소녀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황제궁 밖까지 배웅을 나온 콜린에게 영상석을 건넸다.

“이게 무엇인지요?”

“하멜 영식이 황태자 전하와 나를 모욕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석입니다.”

이는 황실 능멸죄를 물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원래 황제에게 직접 전달할 생각이었지만 콜린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으며, 텐스테온이 사실 블레이크를 사랑하고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신 겁니까?”

콜린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이 정도 증거도 없이 후작가를 건들 수는 없잖아요.”

전생에서 누명을 쓸 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CCTV에 상황이 찍힌 덕분에 억울한 누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CCTV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비열한 인간을 상대할수록 녹화는 필수였다.

“폐하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콜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하멜 후작은 황제의 앞에서 황태자비에게 손찌검을 하려 한 죄로 손이 잘렸다. 그의 아들은 수석 시종의 직위를 이용해 황실의 재산을 횡령하고, 황태자비를 모욕한 죄로 혀를 뽑혔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멜 부자는 30년간 노역형을 선고받고, 하멜 후작 가문은 작위를 박탈당했다.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편을 들지 못했다.

황제가 괴물 황태자 때문에 후작 가문을 벌하려 했다면, 귀족들이 그를 지킬 명분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황제는 황태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멜 부자가 황태자비를 모욕하고 황실을 능멸한 죄만을 물었다.

후작이란 자가 황제의 앞에서 황태자비에게 손찌검을 하려 하고, 그 아들은 하대를 하며 모욕하다니.

아무리 괴물 황태자의 아내라 한들 아득히 선을 넘는 행동이었던 탓에, 그들을 옹호해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텐스테온은 궁으로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하멜 후작은 앞에서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척을 하며, 뒤로는 카실 공작에게 줄을 댔다. 황제가 모르는 척 눈감아주고 있긴 했지만 사실 처단할 방법을 고민 중이었을 거다.

내가 확실한 증거인 영상석을 건네기도 했고, 후작을 치는 데 나름 공을 세웠으니 한 번 더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황제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황제의 정무가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오늘도 부르지 않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블레이크를 계속 방치할 셈이야?

물론 황제가 원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가 다시 무관심을 가장한 방치를 선택했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황제와 블레이크가 비극의 길을 걸어가는 걸 알면서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멜리사, 마차를 준비해줘. 필리온궁으로 가겠어.”

내가 황제궁으로 가겠다고 하자 멜리사는 당황했다.

“비 전하, 폐하를 뵙고자 하시면 먼저 알현을 청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정식으로 요청하면 거절하시겠지.”

차라리 무작정 찾아가는 게 낫다. 귀족들이 보더라도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겠지.

내가 강경하게 버티자 멜리사는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준비시켰다.

황궁은 하나의 마을처럼 넓으므로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마차나 말을 이용해야 했다. 특히 황태자궁은 필리온궁과 거리가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탈것은 필수였다.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다.

“전하….”

“앤시아, 어디 가?”

그는 내가 황제궁에 갔다가 하멜 후작에게 맞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속상해했었다. 내가 필리온궁으로 간다고 하면 말릴 거다.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광장에 잠시 다녀오려고요.”

“거짓말. 폐하께 가려는 거지?”

멜리사랑 하는 말을 들은 건가….

“금방 다녀올게요.”

“같이 가.”

“네?”

블레이크가 황태자궁 밖으로 나오겠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멜리사와 에드온도 놀란 눈치였다.

“부인은 내가 지켜. 그러니까 폐하를 뵈려면 나랑 같이 가.”

그는 내 행동을 막지 않고 대신 지켜준다고 말했다. 이 작은 소년이 든든한 남편처럼 느껴졌다.

“알겠어요. 같이 가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마차에 올랐다.

황제는 아들을 사랑한다.

제국의 황제로서 저주의 계승자를 먼저 부를 수는 없지만, 막상 찾아가면 문전박대를 하지는 않을 거다.

***

이미 황제의 정무가 끝났을 시간이었다. 나는 곧장 황제의 침실로 돌진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감히 황태자비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시종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내가 강하게 말하자 결국 물러났다.

황태자비에게 무엄하게 굴었다가 후작 가문이 멸망했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겠지.

“전하, 들어가요.”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꼭 잡고, 황제의 침실 문을 호기롭게 열어젖혔다.

“…….”

그리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텐스테온은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참인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 있고 얼굴과 몸에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커다란 타올로 하체를 가리긴 했지만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황제는 우뚝 선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내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저절로 고개를 숙여졌다. 그러자 조각으로 빚어낸 듯한 완벽한 근육에 시선이 꽂혔다.

아우, 눈을 둘 곳이 없네. 토끼 신랑이랑 함께 있느라 잠시 망각했는데, 19금 로판 세계긴 하구나.

“무슨 일이냐?”

위압적인 음성을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그렇다고 목적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황제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가 아들을 사랑하는 진심을 전부 털어놓을 만큼, 나를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신뢰와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칭찬이 최고지. 어서 칭찬을…!

“보, 복근이 매우 훌륭하시네요.”

뭐래? 앤시아, 너 미쳤어?!

말을 뱉는 순간 아차 싶었다. 블레이크도 놀랐는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안 돼. 이래서는 황제의 호감을 얻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전에, 단단히 찍히게 생겼다. 어서 수습해야 한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그게 남자 몸은 처음 봐서….”

“허어?!”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헛소리가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데, 블레이크의 경악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덟 살 아이가 듣기에도 내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나 보다.

아, 완전히 망했다.

“폐하, 그, 그것이 아니라. 제가 당황하여….”

“흐흠. 오늘은 대화를 하기 적당치 않은 것 같구나.”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검은 가운을 걸쳤다.

이왕 온 거 어떻게든 고집을 피워보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황제 폐하께서 가운 끈을 너무 단단히 묶으셨다.

얼빠진 말실수를 해버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텐스테온이 덧붙였다.

“곧 부르마.”

텐스테온의 시선이 나를 지나 블레이크에게 머물렀다. 강인한 얼굴에 아련한 그리움이 스쳤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네,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블레이크도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다르게 굳어 있는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아렸다.

***

황제를 만난 이후 블레이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자신을 내쳤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다 내가 실수를 한 탓이다.

“전하….”

“잠깐 쉬고 싶어. 그리고 에드온은 잠깐만 와봐.”

그는 나의 손을 놓으며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폐하도 왜 하필 그때 목욕을 하셔서! 가운이라도 입고 계시지…. 괜히 남 탓을 하는데, 기사 에드온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비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보겠습니다.”

“부탁할게.”

***

에드온은 블레이크를 따라 들어갔다.

“전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에드온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성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지만, 모두가 꺼리는 괴물 황태자의 기사가 되었다.

모두들 한직에 배속된 에드온을 비웃었다. 하지만 에드온은 자신의 어린 주군을 좋아했다.

이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기도 했다.

“에드온, 셔츠 벗어봐.”

그러나 지금의 명령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네. 전하.”

하지만 수행하지 못할 명도 아니었기에 셔츠를 벗었다.

블레이크는 에드온의 몸을 바라보았다. 황제만큼은 아니지만 근육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멋진 몸매였다. 블레이크는 그의 단단한 복근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에드온,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전하, 복근이 가지고 싶으세요?”

블레이크는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근육이 갈라지기는커녕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황제가 자신을 내보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온건한 반응이어서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앤시아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남자 몸을 처음 봤다니…. 나도 남자인데….’

그는 시무룩해하며 자신의 말랑말랑한 배를 매만졌다.

“응. 나는 똥배니까….”

“똥배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에드온이 자상하게 웃으며 단언했다. 그의 말을 들은 블레이크는 희망을 품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전하께서는 귀여운 ‘아기 배’시죠.”

“…….”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블레이크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

오늘 블레이크는 왠지 이상했다. 목욕할 때도 옷을 벗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목욕하는 내내 손으로 배를 가리고 입술도 뾰로통하게 나왔다.

단순히 부끄러워하는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아버지가 내쳐서 속상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목욕을 마치고 몸을 닦아 주려고 하는데, 그가 자꾸만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전하, 저를 똑바로 보셔야죠.”

그의 어깨를 딱 잡아서 돌리고, 배를 가리고 있는 손도 치워버렸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불만스러운 듯 볼을 잔뜩 부풀렸다.

“…후웅.”

아무래도 나한테 삐친 모양인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구, 우리 신랑, 볼때기가 터질 것 같네.”

나는 그의 말랑말랑한 양 볼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안 터져!”

발끈하는 모습도 귀엽네.

“귀엽다는 말이에요.”

“…….”

블레이크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아무리 귀여워도 더는 놀리면 안 될 것 같다. 이쯤하고 달래야지.

“전하, 내일 가마솥이 온대요. 제가 맛있는 요리를 많이 많이 해드릴게요.”

“싫어.”

“가마솥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실걸요.”

“나 이제 밥 안 먹을 거야.”

“왜요? 어디 아프세요?”

배가 아픈 건가? 걱정이 돼서 바라보자 그가 얼른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감췄다.

“보지 마!”

“전하….”

또다시 몸에 새겨진 문장이 신경 쓰이는 걸까? 괜찮다고 말하며 그의 문장을 만지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남자 몸도 아니지….”

“네?”

“나도 훈련할 거야!”

아, 블레이크가 화난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그게 남자 몸은 처음 봐서….”

내가 황제한테 한 말이 신경 쓰였던 거구나. 나는 빙그레 웃었다.

“죄송해요. 우리 신랑도 남자인데, 제가 깜박했네요.”

“깜박할 게 따로 있지이!”

사과하면 괜찮다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블레이크는 오히려 더 발끈했다.

“나도 복근 만들 거야! 밥도 안 먹을 거야!”

“그러지 마세요. 저는 지금 전하가 좋은걸요.”

나는 그의 배를 둥글게 문질렀다.

“아주 귀여운 아….”

“‘아기 배’ 아니야!”

블레이크가 내 말을 끊고 버럭 소리쳤다.

내가 ‘아기 배’라고 말하려고 한 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독심술이라도 쓰나?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블레이크는 후다닥 침대 위로 뛰어가 버렸다.

“전하, 아직 다 안 닦았는데 올라가시면 어떻게 해요.”

“몰라.”

블레이크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진짜로 더 놀리면 안 될 거 같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배에 바람을 넣었다.

일명 ‘배방구’를 시전하자, 블레이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뽀, 뽀뽀뽀뽀?! 뽀뽀했어?”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뽀뽀가 아니라 배방구라고 정정해야 하나. 그러면 또 삐질 것 같은데. 그래도 올바른 사실을 알려 줘야겠지.

“이건 ‘배방구’라는 거예요.”

“방구…?”

나는 다시 배방구를 시도했다. 그의 배에 그려진 까슬한 문장 위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자 부르르릉 소리가 났다.

“보세요. 방귀 소리 나죠?”

“방귀….”

왠지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않나? 여덟 살은 아닌가?

아무튼 이대로 다시 삐치게 둘 수는 없었다.

“에잇! 공격이다!”

나는 그의 배에 계속해서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하핫! 간지러워. 앤시아, 하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나는 배방구를 멈추며,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저는 전하가 좋아요.”

“나도 앤시아가 제일 좋아.”

“저는 제가 만든 요리를 전하가 맛있게 드실 때 제일 행복해요. 그러니까 내일도 밥 많이 많이 드셔야 해요?”

“…훈련해야 하는데.”

“먹고 훈련하시면 되죠. 저보다 크실 거라면서요?”

“클 거야!”

“그러면 많이 드셔야 해요.”

“알았어. 많이 먹을게!”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삐친 것도 잊고 금세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

황제 텐스테온은 오늘 보았던 블레이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 잔뜩 웅크렸던 몸을 당당히 펴고, 반려의 손을 굳게 잡았다.

감정이 사라진 듯 공허했던 눈동자가 찬란하게 반짝거렸고, 한 달 동안 잘 먹었는지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텐스테온은 보좌관이 올린 황태자비에 관한 보고서를 다시 바라보았다. 냉정하고 까다로운 콜린답지 않게, 보고서에는 황태자비에 대한 칭찬만이 가득했다.

“은한.”

텐스테온이 이름을 부르자,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은한’이었다.

‘은한’은 동방의 대제국 ‘창’에서 온 소년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용의 힘을 빌려서 사용한다는 ‘용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마법이나 마나와는 전혀 다른 신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텐스테온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던 은한을 구해주었고, 세상으로 나가길 거부하는 그 아이를 거두어 자신의 그림자로 삼았다.

그는 황제가 공식적으로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은한에게 맡겼는데, 그중에는 블레이크에 관한 명령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블레이크를 위해 동방의 식재료를 구할 때도 은한의 도움을 받았다.

“하명하십시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무사히 돌아갔느냐?”

“네, 폐하. 목욕을 하고 방금 잠이 드셨습니다.”

빛의 여신은 필립 황제의 배신에 분노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저주를 내렸다. 하지만 저주를 내릴 정도로 필립을 증오하였으면서도 빛의 힘을 완전히 거두어 가지는 않았다. 대신 끔찍한 복수를 했다.

황제가 빛의 힘을 사용하면, 그만큼 ‘저주의 계승자’에게 고통이 전해진다.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저주가 빠르게 퍼지며 몸을 잠식한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역대 황제 중에는 저주의 계승자가 받을 고통 따위는 무시한 채 빛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자가 많았으나 텐스테온은 그럴 수 없었다.

텐스테온은 그동안 빛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피할 수 없는 임무가 있었다.

서쪽 끝에 있는 혼돈의 계곡에는 마계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고, 이를 ‘어둠의 문’이라 불렀다.

‘어둠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날, 제국은 멸망에 이른다고 한다.

어둠의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의 힘’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황제는 여신의 힘을 받은 자로서 어둠의 문을 봉인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어둠의 문을 봉인하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도 외면하고 싶었다.

텐스테온이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빛의 힘을 사용한다면, 블레이크는 분명 끔찍한 고통을 겪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황제는 은한에게 블레이크를 맡기고, 혼돈의 계곡으로 떠났다. 그리고 어둠의 문을 봉인하자마자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달려왔다.

저주의 문장이 얼마나 더 퍼져나갔을까, 그 아이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까, 걱정하며 황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은한을 찾았다.

“블레이크는?”

“무척 잘 지내셨습니다.”

잘 지냈다고?

“아프지는 않았느냐?”

“네. 평온하셨습니다. 문장도 그대로이십니다.”

은한은 자신이 찍은 영상석을 황제에게 건넸다. 영상 속에 담긴 블레이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앤시아가 있었다.

텐스테온은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강력한 빛의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프지 않았고, 저주의 문장이 더 퍼지지도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저주가 풀릴 징조인가?

하지만 마냥 희망을 품을 수는 없었다. 드물긴 하지만 빛의 힘을 사용한 여파가 뒤늦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른 일은 없었느냐?”

“수석 시종, 하멜 브라운이 하옥되었습니다.”

“뭐라?”

은한은 한 달 동안 새로운 황태자비의 행적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앤시아가 수석 시종을 비롯하여 카실 공작이 심은 역겨운 첩자들을 모두 처리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텐스테온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앤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심하고 잔뜩 주눅이 들어 보이던 아이였다. 그런데 하멜 후작의 장남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불온한 자들만 골라서 내친 것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건가?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열 살 아이가 그렇게까지 통찰력이 있을 수 있을까?

텐스테온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황제가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멜 후작이 들이닥쳤다.

그는 뻔뻔하게도 황태자궁의 수석 시종인 자신의 아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다.

텐스테온은 곧장 앤시아를 불렀다. 하멜 후작의 말 따위는 무시해도 좋았지만, 그를 핑계로 앤시아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마주한 앤시아는 텐스테온의 생각보다 훨씬 총명했다.

후작에게 당당하게 맞서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내놓았다.

텐스테온은 앤시아를 무시하고 손찌검까지 하려 한 후작의 손을 그 자리에서 날려버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앤시아가 고맙고, 그리고 마음에 들었다.

“은한, 네가 보기에 황태자비가 어때 보이더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믿을 수 있어 보이더냐?”

은한은 지난 한 달 동안 몸을 숨긴 채 황태자를 살폈다. 혹시 모를 궁인들의 핍박을 감시하고, 저주가 심해지면 치료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목적을 잊고 오직 ‘앤시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고 총명하며 따뜻한 사람이었다. 고향을 잊은 지 오래였지만, 만약 자신의 곁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미련과 부러움이 들기도 했다.

“네. 좋은 분이십니다.”

“너까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구나.”

텐스테온은 솔직히 놀랐다.

은한은 그의 명령을 우직하게 따를 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고, 믿음은 더더욱 없는 소년이었다. 은한은 텐스테온 외에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텐스테온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도 많은 곡절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얼룩진 아이가, 한 달밖에 보지 않은 소녀를 칭찬하였다.

“불안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너무 완벽하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곁을 지켜주고 위로해줄 반려가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저주의 계승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비인 자신조차도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데….

결혼을 시켰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블레이크의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 하지만 앤시아는 텐스테온의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녀는 진심 어린 애정으로 블레이크를 감싸 안았다.

너무 완벽하니 오히려 의심됐다. 호수에 빠진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도 수상했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는 것은 아닐까?

텐스테온은 황제의 자질을 타고났다. 언제나 거침이 없었고, 그 선택이 틀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문제만은 조심스러웠다.

은한은 불안해하는 주군에게 작은 영상석을 건넸다. 텐스테온은 그가 준 영상석을 틀었다.

“에잇! 공격이다!”

앤시아가 블레이크의 배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녀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저주의 문장에 입을 맞추었고, 블레이크는 행복에 젖어 까르르 웃었다.

“하핫! 간지러워. 앤시아, 하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자신이 자리를 비운 한 달 동안 블레이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행복하게 웃을 줄이야.

저주에 걸린 이후로 저런 모습은 영영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텐스테온은 이만 불안을 내려놓기로 했다. 블레이크에게 웃음을 찾아준 아이다. 그것만으로 고맙고 소중했다.

***

드디어 가마솥이 도착했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시골에서 쓰던 것과 모양이 거의 똑같았다.

그림과 설명만으로 가마솥을 완벽하게 구현한 대장장이가 존경스러웠다.

미리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가마솥을 올리자, 블레이크가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이런 거 처음 봐.”

“저도 처음 봐요.”

“저도 그렇습니다.”

멜리사와 에드온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스도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 전하께서는 동방의 물품에 대한 조예가 참으로 깊으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비 전하는 천재십니다.”

“맞아! 앤시아는 천재야!”

“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요.”

과도한 칭찬을 받자 민망하여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하루 종일 칭찬 감옥에 갇히겠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가 오늘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줄게! 다들 기대하라고!”

“아우, 안 됩니다. 저희 것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어떻게 감히 비 전하의 요리를….”

멜리사가 황송해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내가 요리를 할 때마다 매번 저런다. 내가 삼시 세끼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삼일에 한두 번 정도인데 말이다.

“괜찮아. 이렇게 가마솥이 이렇게 큰데 한 번에 많이 하면 좋지. 다 같이 도와주면 되잖아.”

“당연히 도와야죠!”

“나도 만들 거야!”

나를 돕겠다며 씩씩하게 손을 드는 블레이크를 보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걸어왔다. 황제의 보좌관인 콜린과 황제궁의 시종들이었다.

“제국의 빛인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예를 올린 뒤, 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축복인 비 전하를 뵈옵니다.”

콜린이 인사를 마치자 블레이크가 다소 경계를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비 전하께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저한테요?”

“네, 비 전하.”

그는 황실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하얀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오늘 유리 정원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곧 부른다고는 했지만, 어제 그렇게 큰 말실수도 했는데 이렇게 빨리 부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초대장까지 보내시다니.

하지만 놀라기에는 일렀다.

“그리고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선물이요?”

“네.”

나는 일단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황제의 시종들이 선물 상자를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그리고 끝도 없이 쌓이기 시작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은데.”

나는 응접실 한편을 가득 채운 상자를 보며 콜린에게 물었다. 그러자 콜린은 정중하게 답했다.

“아니요. 실수가 아닙니다. 이건 전부 폐하께서 비 전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그럴 리가. 황제가 나에게 선물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어제 말실수밖에 안 했는데….

설마 복근을 칭찬해 줘서 기분이 좋으셨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아무튼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콜린이 실수를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레스와 외투, 구두, 온갖 장신구가 끝도 없이 나왔다. 언뜻 봐도 내 사이즈에 맞는 옷들이었다. 결혼식 때 치수를 쟀을 테니 사이즈는 알고 있었겠지.

하나같이 아름답고 귀해 보여서 입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서 준비해야겠어요! 이러다 초대 시간에 늦겠어요!”

선물을 확인하던 멜리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걸.”

“고작 3시간이죠!”

시아버님을 만나는 데 굳이 꾸밀 필요가 있을까? 나는 심드렁했지만 멜리사는 강경했다.

“전하께 가마솥 요리를 해드리기로 약속했는걸.”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도 멜리사와 합심했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앤시아가 이걸 입으면 정말 예쁠 거야.”

블레이크는 에메랄드빛이 도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화사하면서도 티 파티에 어울리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역시 전하께서는 안목이 높으세요.”

멜리사도 동의했다. 나도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낙찰이었다.

내 방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에 어울리도록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었다. 그리고 황제가 선물한 드레스와 구두, 외투를 입고, 장신구를 착용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멜리사가 감탄했다. 솔직히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앤시아는 인형같이 예쁜 얼굴이었고, 평소에 입던 드레스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꾸미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비 전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에드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저 옷을 입고 가볍게 단장했을 뿐이었는데도 약속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늑장을 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한스와 에드온이 아름답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안 어울려요?”

“아, 아니! 너무 예뻐. 너무 예뻐, 앤시아.”

블레이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그의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다녀올게요.”

“응. 잘 다녀와.”

나는 블레이크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

한겨울이었지만 유리 온실에는 다양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텐스테온이 하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서 예를 올렸다.

“제국의 위대한 빛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앉거라.”

“예, 폐하.”

나는 맞은편에 있는 새하얀 의자에 앉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황제가 칭찬을 하자 긴장이 다소 풀렸다. 나는 활짝 웃었다.

“선물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구나.”

“특히 황금 공이 좋았어요.”

“금을 좋아하느냐?”

아니, 공이 좋다고 했는데, 왜 금이 좋냐고 물어봐. 저 아직 열 살이거든요. 게다가 진짜 금도 아니잖아요.

황금빛으로 반짝일 뿐 실제 금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황태자 전하와 함께 쓸 수 있는 물건이라 좋았어요.”

텐스테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황태자가 신경 쓰이느냐?”

“당연히 마음이 쓰이죠. 제 남편인걸요.”

“어떻게 그 아이를 좋아할 수 있지?”

“그건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네요. 그분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블레이크는 맑고 순수했다. 이 세상의 깨끗함과 귀여움을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예쁘고 또 예뻐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경멸하지.”

“거짓 소문에 현혹된 자들이죠. 그리고 폐하께서도 전하를 좋아하시잖아요.”

내가 싱긋 웃자 황제의 눈이 커졌다. 허가 찔린 표정이었다.

“…무례하구나. 그 아이는 저주의 계승자다.”

“그전에 폐하의 아들이죠.”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구나.”

텐스테온의 눈빛이 날카로운 칼처럼 번뜩거렸다. 하지만 예상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나는 진짜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아들이 미운데 며느리한테 선물을 보내주실 리가 없잖아요?”

“하멜 후작을 처리한 공을 인정한 것뿐이다.”

“어제 제가 무엄한 행동을 했는데도 용서해 주셨고요.”

“무엄한 행동인 건 아느냐?”

“헤헤. 너무 당황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도저히 ‘복근’ 사건을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의 일은 부분 기억 상실로 우기는 수밖에 없다.

“무엄한 것.”

텐스테온은 입으로는 혼내면서도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헤.”

나도 웃었다. 민망한 상황을 넘기는 데는 웃음이 최고였다.

“들거라.”

텐스테온이 음식을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테이블에 차려진 화려한 디저트를 보며 눈이 돌아가던 참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우선 새빨간 딸기가 올려져 있는 쇼트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포근포근하고 상큼한 케이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어요!”

“그러냐?”

“황태자 전하도 좋아하실 텐데….”

“…황태자궁으로 보내 마.”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자리에서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부자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였다. 우선은 황제의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했다.

“동방의 문화에 조예가 깊다던데.”

나에 대해서 미리 알아봤구나. 지금껏 아무 관심도 없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긴 하지.

“조예까지는 아니고, 흥미가 있는 편이에요.”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동방은 미지의 세계였다. 교류도 없고 그와 관련된 서적도 거의 없었다.

‘백작가의 서고에 자료가 있어서 보았다.’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갈 거다. 각 가문마다 자신들만의 지식을 가지는 경우는 흔했으니까.

하지만 블레이크의 치료를 위해서 동방의 자료까지 수집했던 황제라면, 열 살 소녀가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겠지.

“이건 폐하께만 알려드리는 건데요….”

나는 의자에서 내려갔다. 텐스테온은 나의 행동에 의아해했지만, 내가 귓속말을 하려고 하자 머리를 숙여주었다.

“저는 사실 언어 능력자예요.”

“언어 능력자…?”

“네. 세상의 모든 언어를 전부 알 수 있어요.”

사실 나는 이 세계와 여신의 저주, 동방의 정보 등을 알기 위해 황궁 도서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제국어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정말이냐?”

“네. 아버님.”

텐스테온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째 ‘언어 능력자’라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블레이크랑 많이 닮았네. 블레이크도 크면 저렇게 멋있어지는 건가?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저는 며느리니까, 폐하는 아버님이죠.”

나는 배시시 웃었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폐하’라고 할 뿐 그를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주지 않았다.

강하고 냉정해 보여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폐하’보다는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더 기뻐할 거다.

“그래, 그렇구나.”

텐스테온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럽게 결혼하여 힘든 점이 많을 거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그는 예법을 지키라고 호통을 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궁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네. 자주 찾겠습니다.”

오늘은 나만 초대를 받았지만, 언젠가는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함께 앉아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날이 올 거다.

그때 블레이크의 옆에 있는 건 다이애나일까?

갑자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

“아뜨!”

블레이크가 누룽지를 입에 넣었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얼른 그에게 찬물을 건넸다.

“후후 불어 드셔야죠.”

“너무 맛있는걸.”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드셨으면서.”

황제는 온갖 디저트를 황태자궁으로 보냈다. 기본적인 쇼트케이크나 애플파이부터 난생처음 보는 디저트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황실 요리사가 특별히 만든 디저트는 모양뿐만 아니라 맛도 훌륭해서 꿈에서도 생각날 것 같은 환상적인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 요리사의 솜씨도 느끼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마솥이 온 기념으로 ‘가마솥 밥’을 지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역시 가마솥 누룽지에 물을 넣고 끓은 ‘숭늉’이었다.

“이게 제일 맛있어!”

“제가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앤시아의 요리가 최고인 걸 어떡해.”

블레이크는 해맑게 웃었다. 그가 저렇게 잘 먹으니까 나도 기뻤다. 게다가 숭늉도 맛있었고.

아, 역시 나는 한식파야. 디저트는 정말 맛있었지만, 따뜻한 숭늉을 마시니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응?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앤시아,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착각인가 보다.

***

“무슨 일이냐?”

텐스테온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의 티타임 때문에 정무가 밀렸는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잖아요.”

“흐흠.”

황제가 당황한 듯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호칭을 정정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구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그야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안 됐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기념비적인 가마솥 첫날인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오늘 동방의 요리기구인 ‘가마솥’이 왔거든요. 그래서 ‘숭늉’이란 걸 만들어 봤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주전자에 담아온 뿌연 숭늉 국물을 찻잔에 따라서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처음 보는 낯선 음식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갔다.

“독특한 맛이구나.”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니. 괜찮다. 솜씨가 뛰어나구나.”

그는 숭늉을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막 했을 때는 더 맛있었는데, 필리온궁까지 오는 길에 조금 식었어요. 폐하께서 아모리아궁으로 와주신다면 더 맛있는 음식을 해드릴 수 있을 텐데….”

‘아모리아궁’은 황태자가 기거하는 남쪽 별궁의 정식 명칭이었다.

‘아모리아’는 제국어로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황제가 수많은 별궁 중에서도 그곳을 블레이크의 거처로 택한 데는 ‘아모리아’라는 이름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쯤 해야 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조바심 느끼지 말자.

“괜찮으시면 자주 해드릴게요.”

“그래. 자주 오거라.”

텐스테온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

화살에 맞은 채로 관군들에게 쫓겼을 때, 은한은 자신이 죽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훌륭한 주군을 만났다. 비록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그림자였지만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으니까.

그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구해준 주군께도 피해를 끼칠 수 있었다.

은한은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텐스테온은 은한을 배려했고, 위험하거나 힘든 일은 명령하지 않았다.

혼돈의 계곡으로 떠날 때, 자신을 두고 홀로 떠난 것이 다소 섭섭하기는 했지만, 주군께서 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 때문에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황태자궁에 머물며 블레이크를 지켰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은한은 요즘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오늘 요리는 된장찌개예요!”

“버섯계란말이를 만들었어요!”

“오늘은 소고기뭇국을 만들어봤어요.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앤시아는 매일같이 동방의 요리를 만들었다. 은한의 고국인 ‘창’국의 요리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고향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과거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국의 음식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미련과는 다른 본능이 그를 자극했다.

‘맛있겠다….’

앤시아가 요리를 할 때마다 은한은 먹고 싶다는 본능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는 그림자였다. 고작 식욕 따위에 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침이 고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은한은 텐스테온을 따르며 황제가 먹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았다. 하지만 특별한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임무를 위해 귀족들의 파티에 잠입한 경우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음식에 한눈판 적은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비의 소박한 요리는 왜 이리 군침이 도는 건지….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가마솥까지 등장했다.

가마솥을 만들겠다고 한 건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모양을 구현했을 줄은 몰랐다. 은한은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검은 가마솥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우습게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녀는 은한을 위해서 직접 요리를 해주시곤 했다.

황제의 후궁이나 된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한다며, 꼭 저렇게 천한 핏줄인 티를 낸다고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불길함을 품은 아들을 위하여 소매를 걷어붙였다.

은한이 과거의 상념에 젖어 들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앤시아는 가마솥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하얀 쌀밥을 보자,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앤시아는 밥을 먹은 뒤, 노릇노릇한 누룽지에 물을 부어서 숭늉을 끓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고기와 해산물로 만든 맛있는 요리들도 참고 버텼다. 그런데 숭늉에서 은한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일찍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아직 14살 소년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목적을 잃고 가마솥 주위를 배회했다.

‘딱 한 입만 먹는 거야.’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한스와 멜리사, 에드온이 가마솥 주변에 앉아서 숭늉과 누룽지를 먹으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숭눈? 성는? 이름은 어렵지만 정말 맛있네요!”

“어쩜 이렇게 고소할까요. 마시는 순간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에요.”

“누룽지만 먹어도 맛있네요.”

에드온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누룽지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자, 멜리사가 작게 타박했다.

“에드온 경,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아우, 저도 모르게 그만. 계속 손이 가서.”

“비 전하께서 만들어주신 귀한 음식이잖아요. 조금 아껴 드세요.”

“네. 멜리사 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추우니까 숭늉도 좀 드시고요. 목 메겠어요.”

“넵!”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쉽게 자리를 뜰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은한은 다시 임무로 복귀했다.

“후후 불어 드셔야죠.”

“너무 맛있는걸.”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드셨으면서.”

“이게 제일 맛있어!”

“제가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앤시아가 최고인 걸 어떡해.”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오늘도 사이가 좋았다.

은한은 장차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흑룡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받다가 결국 이 머나먼 서대륙까지 오게 되었다.

친부인 황제는 그를 죽이려 했고,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블레이크 황태자는 저주에 걸렸다. 흉측한 저주의 문장이 전신을 덮었으니 은한보다도 처지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앤시아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황태자를 좋아해 주었다.

황제도 블레이크를 무척 아끼긴 했지만, 그는 황태자의 친아버지였다.(물론 자신의 아비는 그런 정조차도 없었지만….) 하지만 앤시아는 황태자와 완전한 남이었고, 애정 없이 정략결혼을 했으며, 나이도 어렸다.

아이들은 천진하고 솔직하지만, 그러기에 잔인하다. 예쁜 걸 좋아하고 흉측한 것을 싫어한다. 어른들도 그러한데 어린아이가 그런 감정을 참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앤시아는 달랐다.

그녀는 블레이크를 진심으로 아꼈다.

‘나에게도 저런 사람이 있어 주었다면 미래가 조금은 바뀌었을까?’

은한이 상념에 젖어 드는데, 앤시아가 갑자기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한은 은신술을 써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잡념에 빠진 나머지 술법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기척을 느꼈을 뿐 들키지는 않았다. 그는 술법을 다시 정비하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황태자비는 숭늉을 가지고 황제궁으로 향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은한은 서둘러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은한.”

앤시아가 집무실을 떠난 뒤 황제는 은한을 불렀다. 주군의 부름에 그는 곧장 술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숭늉’이라는 것은 어떤 요리이냐?”

“황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렇구나….”

“소박한 맛이지요.”

그러니까 위대하신 폐하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에게 주십시오!

은한은 뒷말을 삼키며, 숭늉이 담긴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텐스테온은 먹는 것에 특별한 흥미가 없었다. 진귀한 식재료가 올라와도 은한이나 콜린 등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곤 했다. 그러니 숭늉도 자신에게 줄 터였다.

은한은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주전자에서 숭늉을 따라서 호로록 마실 뿐이었다.

이대로는 숭늉이 모두 바닥나고 말 거다. 은한은 용기를 내었다.

“폐하, 저도 한 모금만….”

“안 된다.”

하지만 자상하던 주군은 냉정하게 은한의 부탁을 거절했다.

“내 며느리가 만들어 준 것이다.”

텐스테온은 결국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시며 주전자를 비웠다.

***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한 모금도 안 주시고….’

은한은 의기소침해하며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폐하께서도 미안하셨는지 당분간 편히 쉬라고 하였지만, 그건 은한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가마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이건 진짜 기회였다. 은한은 가마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뚜껑을 여는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어서 몸을 숨겨야…. 하지만 자신의 몸을 아예 감추는 은신술은 용술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도의 술법이었다.

은한은 당황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몸을 숨기는 은신술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용술사였기 때문에, 얼른 술법을 수정하여 자신의 몸을 검은 고양이로 바꾸었다.

***

아무래도 오늘 너무 과식했다. 디저트만 먹고 끝냈어야 했는데….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마솥이 왔는데 개시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빵빵한 배를 문지르며 산책을 하는데, 가마솥이 있는 아궁이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얼른 뛰어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가마솥 뚜껑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카실 공작이 사람을 보낸 건가? 아니면 리차드 그 자식의 짓인가?

황급히 주위를 살피는데, 검은 고양이가 보였다.

“어, 고양이?”

“야옹.”

나는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아직 새끼인지 크기가 작았다.

“고양아, 설마 네가 가마솥 뚜껑을 연 거야?”

“야~옹.”

고양이가 고개를 숙였다. 왠지 내 말에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구, 배가 고팠구나. 들어와. 언니가 우유 줄게.”

“야옹! 야옹!”

고양이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가마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숭늉이 먹고 싶어?”

“야옹!”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네.

“고양이가 숭늉을 먹어도 되나….”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우유도 일반 우유는 안 된다고 했던 거 같고.

“야옹! 야옹!”

고양이가 다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먹을 수 있다는 뜻인 거 같았다.

이 세계에 고양이 전용 사료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결국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줘야 한다. 저렇게 원하니 조금만 줘볼까?

나는 고양이를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비 전하, 웬 고양이예요?”

멜리사가 검은 고양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원래 이곳에 살던 고양이는 아니었는지, 멜리사도 처음 보는 눈치였다.

“밖에서 주웠어. 배가 고픈 것 같아서 숭늉을 좀 주려고.”

“제가 금방 준비할게요.”

“응. 부탁할게. 살짝만 데워줘.”

나는 그녀에게 숭늉을 부탁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길고양이답지 않게 몸이 깨끗했다.

“어디서 왔어?”

“야옹.”

“주인은 있어?”

“…야옹.”

검은 고양이는 귀엽게 울 뿐, 조금 전처럼 머리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물론 실제로 고양이가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소통을 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엄마는 어디 있어?”

“…야옹.”

“미안.”

고양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표정이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사과했다.

검은 고양이는 무척 순했다. 나는 고양이를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다가, 멜리사가 데워준 숭늉을 주었다. 약간 미지근한 게 온도가 딱 좋았다.

고양이는 게 눈 감추듯 숭늉을 먹어 치웠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야옹.”

고양이는 서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추운 겨울에 밥도 못 먹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 귀여운 야옹이를 굶겼어. 주인이 있다면 못된 주인이네.”

“야옹!”

고양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깨끗하고 주인이 있는 고양이인 걸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작은 애한테 밥도 안 먹인 거야? 하지만 굶었다기에는 영양 상태는 양호해 보이는데….

“우리 야옹이를 슬프게 하다니, 주인만 없으면 언니가 키우고 싶다.”

고양이를 꼭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그러자 고양이가 가만히 있었다. 살짝 굳은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어쨌든 참 순한 고양이었다.

“앤시아, 뭐 해?”

블레이크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검은 고양이를 자랑했다.

“밖에서 검은 고양이를 주었어요. 귀엽죠?”

“…꼭 그렇게 껴안아야 돼?”

“얼마나 얌전한데요. 우리 야옹이도 언니가 좋은가 봐요.”

“…수컷이야.”

“아, 정말요?”

나는 고양이를 일단 침대에 내려놓았다.

“우리 야옹이 정말로 수컷인지 확인해 볼까?”

“야옹!”

몸을 눕혀서 암컷인지 수컷인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고양이가 갑자기 발버둥을 치며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야옹아….”

갑자기 앙칼지게 굴어서 당황했지만, 일단은 다시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냅다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어…! 야옹아!”

서둘러 고양이의 뒤를 쫓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주인에게 다시 돌아간 걸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왠지 아쉬웠다.

***

오늘 하루는 정말로 길었다. 황제의 티타임에 초대되고 선물도 받았다. 황제가 준 디저트를 블레이크와 함께 나눠 먹었고, 가마솥으로 요리도 했다. 그리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도 만났다. 정말로 길었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잠을 청하려는데, 블레이크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전하, 왜 그러세요?”

“야옹.”

그가 뜬금없이 고양이 흉내를 냈다.

“전하…?”

“앤시아가 고양이만 좋아하니까 나도 고양이 할래.”

“네?”

“야옹.”

블레이크가 고양이 소리를 내며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앤시아, 내가 있는데 다른 동물이 또 필요해?”

이봐요, 본인이 토끼라고 완전히 인정하는 겁니까?

“내가 토끼도 고양이도 강아지도 다 할 테니까 다른 동물 찾지 마.”

“전하….”

“야옹.”

블레이크가 고양이 소리를 내며 나를 새초롬하게 올려다보았다.

“아….”

“야오옹?”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나는 굴복하고 말았다.

“전하, 너무 귀엽잖아요!”

나는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이 세상의 어떤 귀여움도 우리 신랑을 이기지는 못할 거다.

***

리차드는 황궁의 시종이 올린 보고서를 읽었다.

황제와 앤시아의 교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서 귀한 동방의 식재료를 잔뜩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단순히 식재료뿐만이 아니다. 드레스나 보석부터 마나석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앤시아에게 선물을 보내주었다.

텐스테온은 황태자에게 최소한의 예산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황태자비에게 선물을 준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물품을 보내주고 있었다.

앤시아.

하멜 후작 가문을 쓰러트리는 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출하더니, 황제의 호감을 산 건가?

텐스테온은 리차드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저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이길 바란 적도 있었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텐스테온의 철옹성 같은 마음을 열 수는 없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황후와 보좌관인 콜린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던 황제를 이토록 쉽게 허물어트리다니.

앤시아는 괴물 황태자에 이어 황제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도대체 앤시아,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떻게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아이의 마음을 받아줄 걸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결혼을 하자마자 돌변하다니. 지조라고는 없는 여자군.

리차드는 앤시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중요할 때 쓰려고 아껴두었던 인어의 숨결까지 보내며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앤시아는 리차드의 성의를 단칼에 내쳤다.

이렇게 매정할 데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탐이 났다.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 물건일수록 갖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보물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떡해야 앤시아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을까?

그 아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차드가 앤시아를 손에 넣을 방법을 고민하는데, 아버지인 카실 공작이 그를 찾았다.

리차드는 카실 공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카실 공작의 장남이자 리차드의 이복형인 프랭크도 있었다.

“찾으셨습….”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둔탁한 물건이 날아왔다.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었기 때문에 리차드는 가볍게 몸을 틀어서 작은 조각상을 피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리차드는 카실 공작의 말뜻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몰라서 묻는 거냐! 황제가 오늘도 황태자비에게 선물을 보냈다. 황태자비가 황제궁을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어! 봉인제 때 황궁 무도회에도 함께 참석할 거라고 한다!”

곧 제국에서는 어둠의 문을 봉인하고 황제가 무사히 귀환한 것을 축하하는 황궁 무도회와 축제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이 축제를 ‘봉인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봉인제는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제국뿐 아니라 서대륙 전체가 즐기는 축제이기도 했다.

각국의 사절단이 모두 모이는 무도회에서 황제가 황태자비의 손을 잡고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황제가 황태자비를 어여삐 여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되면 황태자의 위치 또한 자연스럽게 올라갈 터였다.

“그러합니까?”

“하멜 후작부터 봉인제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무능한 놈! 역시 천박한 노예의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카실 공작은 그동안 벌어진 문제를 전부 리차드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복형인 프랭크는 고소하다는 듯 리차드를 비웃었다.

리차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카실 공작은 황제의 동생이었다. 하지만 같은 형제라 하여도 그 그릇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놀드 카실은 텐스테온을 질투하고 그의 자리를 탐했지만 능력이 부족했다.

카실 공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첫째 프랭크와 셋째 네온은 공작 부인의 자식이었고, 둘째 리차드는 로움족 노예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공작은 리차드를 자신의 수치라 여겼다. 공작 부인보다도 더 리차드를 경멸했다. 노예의 피가 섞인 아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놀드 카실은 프랭크와 네온에게 자신의 모든 걸 주려 했다.

황태자가 있다고는 하나 저주를 받아서 죽을 운명이었다. 차기 황제는 아놀드 혹은 프랭크나 네온의 몫이었다.

애석하게도 장남 프랭크는 카실 공작을 닮아 무능했고, 막내 네온은 아직 너무 어렸다.

카실 공작도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쉽고 명예로운 자리가 있으면 프랭크에게 맡겼고, 어렵고 더러운 일은 리차드에게 시켰다.

우스운 점은 누가 실수를 하든 그 책임을 리차드에게 묻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리차드는 실수를 한 역사가 없으니, 프랭크가 저지른 잘못을 리차드가 일방적으로 뒤집어쓸 뿐이었다.

“송구합니다. 하멜 후작 영식이 횡령한 자금을 가지고 함께 도박을 벌인 것이 프랭크 형님이시다 보니, 공작가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막기에 급급하여….”

“뭐야! 너 미쳤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자, 리차드가 혼나는 걸 희희낙락 지켜보던 프랭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실 공작도 프랭크의 편을 들었다.

“듣기 싫구나. 네가 출신이 천하고 나이가 어리지만, 가문을 위해 비루한 재주를 쓰고 싶다고 하길래 특별히 기회를 주었거늘, 그따위 핑계를 대는 것이냐?”

카실 공작과 하멜 후작은 친분이 깊었고, 후작 영식은 프랭크와 절친한 사이였다. 후작 영식을 황태자궁의 수석 시종으로 추천하고 첩자의 임무를 맡긴 것도 그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자 그들은 리차드 탓을 하였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화도 나지 않았다.

“더 이상 황태자비의 영향력이 커져서는 안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말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떠올려 보거라!”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리차드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실 공작은 리차드의 천박한 피를 싫어했지만 그의 비상한 머리는 유용하게 여겼다. 공작은 즉각 반색했다.

“무엇이냐?”

“황태자비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리차드가 말하기 무섭게 프랭크는 꼬투리를 잡았다.

“멍청한 소리 하네! 황제가 그렇게 예뻐하는데, 우리 쪽에 붙겠어?”

“황제가 아무리 잘해준들 괴물 황태자의 아내일 뿐입니다. 그 괴물이 살아야 얼마를 더 살겠습니까? 잘 구슬리면 금방 넘어올 것입니다.”

“방법이 있느냐?”

카실 공작은 리차드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언제나 정확한 답을 찾아내는 아이였다.

“황태자비는 아비의 사랑에 늘 목말라했죠. 벨라시안 백작의 말이라면 쉽게 따를 것입니다.”

“벨라시안 백작이라….”

공작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벨라시안 백작은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

벨라시안 백작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앤시아가 황제에게 예쁨을 받자, 귀족과 상인들은 앞다투어 친부인 길버트 벨라시안을 자신들의 모임에나 집으로 초대했다.

벨라시안 가문은 유서 깊은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그들의 선조이자 위대한 빛의 마법사인 ‘라온텔 벨라시안’은 필립 황제를 도와 아스테릭 제국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빛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빛의 계승자’조차도 힘이 미약했다.

이제는 그 명맥마저 끊겼는지 온전한 힘을 갖춘 계승자가 아예 나오지 않고 있었다.

벨라시안 가문은 점차 쇠락했고, 길버트는 돈 때문에 부유한 남작의 외동딸과 결혼하기까지 했다.

자작도 아니고 남작이라니!

도무지 가문의 격이 맞지 않았지만 딸을 데려가면 전 재산을 넘겨주겠다는 조건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 부인이 앤시아를 낳다가 산고로 세상을 떠나자, 길버트는 서둘러 두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 길버트와 같은 백작 가문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 다이애나를 얻었다.

황제가 청혼서를 보냈을 때, 길버트는 기겁했다.

황제가 원하는 건 다이애나가 분명했다. 하지만 길버트는 사랑하는 딸을 괴물 황태자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청혼에 강제성은 없었다. 텐스테온 황제는 강인했지만 폭군은 아니었다. 청혼을 거절한다고 하여 보복을 가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황제가 보내온 막대한 청혼 예물을 거부하기는 아까웠던 길버트는 다이애나 대신 앤시아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려서 하루빨리 부유한 가문에 시집 보내려던 아이였다. 비싼 값에 팔아 치웠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천덕꾸러기였던 앤시아가 황제의 눈에 들었다. 황제는 요즘 앤시아를 친딸처럼 애지중지한다 하였다.

지금껏 은근히 길버트를 무시하고, 괴물 황태자를 사위로 맞았다며 조롱했던 귀족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하지만 몰려드는 초대장을 받고 파티에 참석하면서도 길버트의 기분은 편치 않았다.

“폐하께서 비 전하를 위하여 이름난 의상실은 전부 예약하셨다지요? 제 여식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하. 그랬더군요.”

“폐하께서 비 전하를 위해서 이번에 경매로 나온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입하셨다면서요?”

“네, 뭐.”

길버트는 다 알고 있던 일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사실 전부 금시초문이었다.

앤시아는 결혼한 이후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길버트 역시 그녀와 소식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괘씸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비록 결혼 예물이 아까워서 황실에 시집을 보내긴 했지만, 저주받은 괴물과 결혼한 것은 벨라시안 가문의 수치였다.

길버트는 이대로 연을 끊다가 괴물 황태자가 죽으면 앤시아도 가문의 명부에서 파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가 앤시아를 친딸처럼 아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길버트는 부랴부랴 앤시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제야 네가 조금은 가문에 보탬이 되겠구나, 라는 칭찬을 담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번에 북부로 가는 길을 정비한다고 하던데, 벨라시안 백작께서 건설권을 가져가시는 거 아닙니까?”

“백작께서 재무 장관에 오르실지도 모릅니다.”

“하멜 후작 가문이 사라졌으니, 이번에 벨라시안 가문이 승작될 수도 있겠군요.”

“좋은 정보가 있으면 조금 알려주십시오.”

“아들이 이번에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는데 성적이 조금 저조하여서…. 제1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은데 백작께서 힘을 좀 써주십시오.”

귀족들의 말을 들은 길버트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하….”

좋은 정보가 있다면 자신도 알고 싶었다. 청탁을 받을 위치였다면 먼저 나서서 명단을 모았을 거다.

앤시아는 불효막심한 딸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그 행운을 나눌 줄을 몰랐다.

앤시아가 조금만 더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황제에게 가문의 승작은 물론, 길버트가 요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청해야 했다.

좋은 사업이 있으면 미리 길버트에게 귀띔하고, 청탁을 들어주며 아버지의 면도 세워줘야 했다.

하지만 앤시아는 조금도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앤시아는 매일같이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았지만, 자신의 친정인 벨라시안 백작 가문에는 금화 한 닢조차 보내지 않았다.

만약 다이애나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그 착한 아이는 상황이 나아지자마자 아버지와 가문을 가장 먼저 챙겼겠지.

차라리 다이애나를 보낼 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리 황제의 사랑을 받더라도 우리 소중한 다이애나를 괴물의 신부로 만들 수는 없었다.

길버트는 앤시아만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 카실 공작의 보좌가 다가와서 은밀하게 말을 전했다.

“벨라시안 백작님, 공작 전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

보좌관이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자, 카실 공작이 길버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벨라시안 백작.”

아놀드는 그동안 파티에서 길버트를 만나도 본 채도 안 하고 무시했다. 백작이라고는 하나 영지도 없고 재산도 변변치 않은 길버트를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아놀드가 길버트를 따로 불렀다.

황제가 앤시아를 총애하니 그녀의 친부인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길버트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공작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길버트의 불손한 태도에 아놀드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심하고 아둔하기로 소문난 길버트 벨라시안다웠다. 자신에게 잘해주면 한없이 기어오르고, 무시하면 한없이 비굴해지는 졸렬한 작자였다.

“신수가 훤해졌군.”

“폐하께서 제 여식을 워낙 아끼니 기쁠 수밖에요.”

“자네가 여식을 아끼나 보군.”

“뭐, 그 아이가 저를 워낙 따르죠. 뭐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요.”

길버트는 허세를 떨었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앤시아는 길버트에게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지금은 토라진 모양이지만,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다만 딸을 먼저 찾아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그 계집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나 보지?”

“제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아이입니다.”

길버트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요즘 보기 드물게 교육을 잘 받은 아이군. 자네 둘째 여식도 언니만큼 훌륭한가?”

“앤시아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아이입니다. 다이애나는 제 자랑이죠.”

애지중지 키운 다이애나가 앤시아 그 천덕꾸러기 따위와 비교당하자 길버트는 발끈했다.

“그렇게 뛰어난 아이라면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군.”

“우, 우리 다이애나를요?”

길버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 앤시아가 황제의 예쁨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괴물 황태자의 아내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죽으면 결국 궁에서 내쫓길 터였다.

만약 다이애나가 카실 공작의 며느리가 된다면, 장차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진짜 황제의 장인이 되는 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백작의 자식 교육이 얼마나 훌륭한지 확인해야겠지만….”

아무리 아둔한 벨라시안 백작이라지만, 지금 공작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벨라시안 가문과 앤시아가 공작의 편에 선다면, 그 대가로 다이애나를 차기 황후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길버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쓸모없는 딸을 이용하여 다이애나를 황후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앤시아가 카실 공작의 편에 선다면 황제의 총애가 사라지고 미운털이 박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천덕꾸러기가 어찌 되든 길버트가 알 바 아니었다.

“당장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고작 감기 때문에 나를 오라 가라 한 거냐!”

남자가 소리를 치며 뺨을 내려쳤다. 객관적으로는 미남이었지만 악랄한 표정 때문인지 잘생겼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소녀가 빌었다. 나의 목소리지만 내가 아니었다. 이건 진짜 앤시아의 기억이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작은 소녀는 열기로 인해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에게 계속 사죄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뺨이 아팠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아파요. 많이 아팠어요.”

“너 같은 건 가문의 수치다! 격이 떨어지는 남작 가문 주제에 돈을 앞세워서 벨라시안 가문에 들어오다니, 네 어미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죄송해요….”

“죄송하면 당장 죽어라! 목을 매든 물에 뛰어들든 당장 죽어! 네가 하루빨리 죽는 것이 벨라시안 가문을 위한 길이다!”

벨라시안 백작이 악다구니를 썼다. 백작 영애의 방이라기에는 작고 초라한 공간이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기계처럼 연신 고개를 숙이는데, 맑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앤시아! 앤시아!”

“앤시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블레이크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악몽을 꿨어?”

악몽? 그래, 꿈이다. 하지만 평범한 꿈이 아니었다. 이건 앤시아의 기억이다. 그녀의 기억이 꿈으로 나타난 거다.

꿈만 꿨을 뿐인데도 마치 내가 실제로 겪었던 것처럼 몸이 떨리고,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네. 악몽이었어요.”

“어떡해….”

악몽을 꾼 건 나인데, 블레이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나랑 같이 있어서 나쁜 꿈을 꾼….”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블레이크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애, 애, 앤, 앤시아!”

블레이크가 당황하며 버둥거렸지만 나는 더욱 힘을 주었다.

이렇게 블레이크를 안고 있으니, 꿈에서 느꼈던 슬픔과 절망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하….”

“응?”

“전하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아요.”

“치이. 매일 이러면서.”

“그러니까 매일 좋죠.”

나는 복슬복슬한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

나는 가끔씩 앤시아의 꿈을 꿨다. 백작은 앤시아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고, 그녀는 고통을 겪었다.

원작에서는 벨라시안 백작이 딸들을 심하게 차별했다는 묘사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활자로 읽을 때와 실제 앤시아의 입장을 겪어보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앤시아, 이 어린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스로 물에 뛰어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은 견뎠을까?

원작에서는 앤시아가 외모에 집착했기 때문에 블레이크의 흉측한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거라며, 은근히 비난하고 조롱하면서 수군덕거리는 귀족들의 대사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볼수록 블레이크의 외모 때문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죄송하면 당장 죽어라! 목을 매든 물에 뛰어들든 당장 죽어! 네가 하루빨리 죽는 것이 벨라시안 가문을 위한 길이다!”

앤시아를 죽인 사람은 그의 아버지인 벨라시안 백작이다.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원작의 내용과 내가 봤던 꿈을 함께 떠올리고 있는데, 멜리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 전하, 벨라시안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벨라시안 백작이?”

갑자기 편지를 보내며 귀찮게 굴더니 기어이 찾아왔구나.

“어떻게 할까요?”

멜리사는 내가 백작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앤시아가 백작 가문의 천덕꾸러기였다는 건 유명한 사실인 데다가, 내가 백작의 편지를 무시하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을 거다.

“응접실로 모셔.”

솔직히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다이애나의 일도 있으니 평생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

길버트는 짜증이 치솟았다.

아비가 찾아왔는데 맨발로 뛰쳐나와서 공손히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응접실에 방치하다니.

괘씸한 것. 예법 교육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시켜야겠다.

물론 길버트는 앤시아에게 따로 예법 선생을 붙여준 적이 없었다. 가문의 수치에게 교육은 사치였다. 그저 말을 안 들면 몇 대 때려주면 그만이다.

길버트는 이를 악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55분이나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면 황태자비의 방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앤시아와 시녀, 그리고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다 이제야 기어 나온…!”

윽박지르던 길버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저 아이가 정말 ‘앤시아’인가?

앤시아는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앤시아는 우울하고 음침한 아이였다. 언제나 낡아빠진 드레스를 입고 백작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화려한 보석이 장식된 드레스, 정교하게 세공된 머리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구두, 그녀는 하나같이 최고급 제품을 걸쳤고, 예쁘면서도 우아한 멋이 풍겼다.

옷 때문인가? 아니다. 도도한 시선, 꼿꼿이 세운 허리, 당당한 걸음걸이,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길버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뀌었다. 화를 내는 길버트에게 앤시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을 당당히 받아쳤다.

“무슨 일이시죠?”

“건방진 것. 아버지에게 인사할 줄도 모르느냐?”

길버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옷이 바뀌고 태도가 건방져졌다고는 하나 앤시아는 앤시아였다.

황제가 조금 예뻐한다고 오만방자해진 것 같은데, 그럴수록 강하게 눌러서 주제를 깨닫게 해줘야지. 그가 앤시아를 찍어 누르려고 하는데, 시녀 멜리사가 끼어들었다.

“비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시녀는 가난한 몰락 귀족의 여식이고, 그 옆에 있는 기사는 평민 출신이라고 했지. 괴물 황태자의 곁에 붙어 있는 놈들답게 하나같이 질이 떨어지는 쓰레기였다.

고작 시녀 따위가 나에게 훈계를 하다니!

“이게 어디 감히 시녀 주제에 황태자비의 부친이 말하는 데 끼어드는 것이냐?”

길버트는 멜리사에게 윽박을 질렀다.

카실 공작은 앤시아를 회유하고 황태자궁에 사람을 심으라 하였지만, 길버트는 이 기회에 황태자궁을 아예 장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앤시아뿐 아니라 건방진 궁인과 기사들의 교육도 똑바로 시켜야겠다.

그때 앤시아가 싸늘하게 뱉었다.

“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뭐야!”

“행패를 부리실 거면 이만 가보세요.”

“이년이! 황태자비가 되었다고 봐줬더니!”

벨라시안 백작은 손을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작께서는 하멜 후작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길버트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앤시아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랫사람을 부르듯 길버트를 ‘백작’이라고 칭했다.

저 버르장머리를 당장 뜯어고쳐야 하는데…! 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하멜 후작이 앤시아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다가 손목이 잘리고 작위를 잃지 않았던가?

그녀는 지금 길버트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거다.

길버트는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앤시아가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구박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던 멍청한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황태자비이자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애, 앤시아, 내가 잠시 흥분하여 실수를 했구나. 하지만 너도 아버지를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면 쓰니?”

길버트는 비굴하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앤시아는 가차 없이 그를 내쳤다.

“당장 나가세요! 앞으로 다시는 황태자궁에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특별히 넘어가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앤시아!”

하지만 앤시아가 내친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이애나를 황후로 만들 기회가 사라지고 말 거다.

“앤시아!”

길버트는 나가지 않고 버티려 했다. 하지만 결국 기사 에드온에게 질질 끌려 나가고 말았다.

***

나는 벨라시안 백작을 만났다.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남자였다.

‘너도 가문에 쓸모가 있구나, 선물을 받았으면 가문에도 보내야지 너만 독차지하는 거냐? 이기적인 것!’ 따위의 재수 없는 편지만 보내다가 직접 찾아왔길래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나 했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개소리였다.

내가 요즘 황제 폐하한테 예쁨받는다고 하니까, 윽박질러서 대충 겁을 준 뒤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 한 거겠지.

인간 말종 쓰레기 같으니라고.

그렇게 쫓겨난 이후에도 백작은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하나같이 읽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였기 때문에 이제는 봉투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벨라시안 백작의 문제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황태자비로서 ‘봉인제’에 참가해야 한다.

나는 무도회의 예법을 익히고 파티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춤’이었다.

나는 전생에서도 춤이란 걸 춰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 가벼운 율동을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 전하, 오른발!”

“아아!”

내가 시작부터 틀리자 춤을 가르치는 샤르딘 백작 부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교계에서 온화한 인품으로 명성이 자자하다던 샤르딘 백작 부인도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열흘 동안 도입부에서 버벅대고 있으니, 지금까지 참은 것도 대단하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하실 수 있으세요!”

샤르딘 부인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미소 지었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가 참을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 보였다.

“자, 다리를 모으시고, 오른발 왼발. 좋아요.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좋아요! 잘하고 계세요. 자, 턴!”

“아!”

그 순간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도 건들지 않았는데 스텝이 꼬이며 혼자 나자빠진 것이다.

“앤시아!”

“비 전하, 괜찮으세요?!”

“어머, 비 전하!”

“야옹!”

블레이크부터, 샤르딘 부인, 멜리사, 그리고 검은 고양이까지 다가와서 나를 둘러쌌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민망하다.

“괘, 괜찮아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비 전하,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오늘도 그렇게 별 성과 없이 춤 연습이 막을 내렸다.

***

“야옹아. 이리 와.”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검은 고양이를 불렀다. 검은 고양이는 이따금 찾아와서 나의 주위를 맴돌곤 했다.

“야옹.”

내가 부르자 고양이는 스르륵 다가와서 내 품에 안겼다. 개냥이도 이런 개냥이가 없다. 순하고 애교도 많고, 예쁘기는 얼마나 예쁜지.

나는 야옹이의 머리를 문질렀다. 주인이 있는 고양이 같았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다.

“야옹아, 너도 오늘 내가 넘어지는 거 봤지?”

“야옹.”

야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특했다.

한스의 말로는 황궁 마법사가 키우는 고양이인 거 같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나는 춤에 소질이 없나 봐.”

“야옹.”

“아니라고?”

“야옹!”

“잘할 수 있다고?”

“야옹!”

야옹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정말로 말을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내가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야옹이가 누나를 응원해줬으니까, 숭늉을 줄게.”

야옹이를 확인한 결과 블레이크의 말대로 수컷이 맞았다. 나는 그때부터 호칭을 언니에서 누나로 정정했다.

“야옹! 야옹!”

야옹이는 이상하게 숭늉을 좋아했다.

성별을 확인했을 때, 왠지 모르지만 야옹이가 무척 의기소침해했다. 하지만 숭늉을 주자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기분을 풀었다.

나는 야옹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멜리사, 숭늉 좀 부탁해.”

“미리 준비해놨죠.”

멜리사는 접시에 담은 숭늉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야옹이는 내 품에서 내려와 숭늉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작은 고양이를 보자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때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블레이크는 복근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에드온에게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하, 많이 배우셨어요?”

“응. 그런데 쟤 아직 안 갔어?”

블레이크는 오늘도 야옹이를 보자마자 날을 세웠다.

“전하, 야옹이한테 왜 그러세요. 동물도 예뻐해 주셔야죠.”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블레이크였지만, 지금은 불퉁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야옹이를 살폈다.

“마음에 안 들어.”

“전하,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하지만 이거 동물 같지가 않은걸?”

“네?”

동물 같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말뜻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어리둥절한데, 숭늉을 먹던 야옹이가 움찔 떨었다.

“왠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블레이크가 야옹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야옹이는 그의 손을 피하더니 그대로 창문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야옹아!”

야옹이를 잡으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찾지 마.”

“전하….”

“왜 자꾸 다른 수컷에게 관심을 주는 거야.”

블레이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말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잖아요.”

“그래도 싫어. 수컷은 나 하나로 충분하잖아.”

그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수컷인가…?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피어오르는데, 블레이크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토끼 귀 모양을 만들었다.

“이제 토끼는 싫어?”

“아니요!”

“고양이가 좋아? 야옹?”

“우리 신랑이면 다 좋아요!”

나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데, 크면 얼마나 대단할까. 거기에 저주까지 풀리면 제국 여인들의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을 거다.

“헤헤헤.”

블레이크가 언제 고양이한테 날을 세웠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야옹이는 주인에게 돌아간 것 같고 내 신랑도 저렇게 웃으니, 뭐, 됐나.

“전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응!”

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쉽게 대답하시면 어떻게 해요? 제가 이상한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요.”

“상관없어. 부인이 하는 부탁은 다 들어줄 수 있어.”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됐지만 제법 듬직한 신랑이었다.

“그럼 춤 연습을 도와주세요!”

“춤?”

“네. 아무래도 혼자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파트너가 필요해요!”

“나도 춤은 잘 모르는데….”

“못 춰도 괜찮아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3층의 홀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춤 연습을 하는 장소였다.

“나보다는 에드온이 낫지 않아? 키도 폐하랑 비슷하고.”

나는 무도회에서 황제와 첫 춤을 출 예정이었다.

황제가 어둠의 문을 봉인한 것을 기념하는 무도회였다.

나는 황태자비의 자격으로 황제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저주의 계승자인 블레이크는 무도회에 갈 수 없었다.

블레이크는 이에 대해 조금도 우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시했고,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쓰지 않도록 배려했다.

차라리 그가 여덟 살 아이답게 파티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면 마음이 조금을 편했을 거다.

“제 첫 춤은 전하랑 함께 추고 싶어요.”

비록 무도회장이 아니라 별궁의 작은 홀이지만, 첫 춤은 블레이크와 함께 추고 싶었다.

“앤시아….”

“조금 능숙해진 다음에 춤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열흘 동안 전혀 발전이 없었네요….”

황제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고 춤을 추기로 결정됐을 때부터, 내 인생의 첫 춤은 블레이크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사실 금방 익혀서 연습 파트너를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너무 늦어졌다. 춤 실력도 여전히 제자리였고.

“못 춰도 돼.”

블레이크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전하의 발을 밟을 거예요.”

“밟아도 돼.”

“전하를 아프게 하기 싫은걸요.”

“앤시아가 밟는 건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발을 밟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거짓말 아니야. 앤시아는 요정이라 가벼운걸.”

“제가 요정이에요?”

“응. 요정이야.”

블레이크가 해맑게 웃었다. 갑자기 요정이라고 하니까 조금 민망한데. 그래도 듣기 싫지는 않았다.

“시작할게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고,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꽤 긴장한 것 같았다.

“부끄러우세요?”

매일 손을 잡고 자는데도 새삼스럽게 부끄러운 건가?

“아, 아니.”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의 첫 춤이 시작되었다.

“아아! 죄송해요!”

나는 시작하자마자 블레이크의 발을 밟고 말았다.

물론 발이 닿는 느낌이 들자마자 곧바로 뒤로 뺐기 때문에 세게 밟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팠을 거다.

스텝 순서는 맞게 밟았지만 파트너와 함께 추다 보니 간격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저, 춤은 안 되나 봐요.”

“처음이라 그런 거야. 앤시아는 할 수 있어!”

블레이크는 나를 응원해 주었다. 그래, 파트너랑 하는 게 처음이라 그럴 거야. 할 수 있어!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파트너와 함께 연습할 레벨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스텝을 밟다가 블레이크를 밀칠 것 같고, 뒤로 빼면 너무 떨어지고, 중심을 잡기도 어렵고 다리도 꼬였다. 발을 밟은 건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나를 잘 리드해 주었다.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가볍게 수습하며 부드럽게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전하는 춤을 잘 추시네요. 배우신 적 있으세요?”

“앤시아가 배우는 걸 봤잖아.”

“아….”

블레이크는 내가 춤 연습하는 걸 지켜보았다. 옆에서 본 사람도 이렇게 잘하는데, 직접 배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긴장을 조금만 풀면 훨씬 잘할 거야.”

그는 내 생각을 읽은 듯 가볍게 위로했다. 블레이크는 가끔 듬직한 남편 같을 때가 있었다.

우리는 연습을 계속했고, 가까스로 왈츠 한 곡을 끝까지 출 수 있었다. 물론 스텝을 배운 대로만 밟은 것일 뿐 동작은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했지만 말이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창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겨우 한 곡 췄네요. 전부 전하 덕분이에요.”

“너무 부담 갖지 마. 폐하는 나보다 훨씬 잘 추시는걸. 실수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럴까요?”

“응. 그리고 다들 앤시아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스텝 같은 건 확인도 못 할걸.”

블레이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예쁠 거야. 다들 앤시아한테 반하겠지. 나도 보….”

그가 말을 흐렸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하려던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보고 싶다고 말하려던 거겠지. 나도 블레이크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었다.

봉인제처럼 큰 파티가 아니라도 좋다. 블레이크와 함께 파티에 가고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춤을 추고 싶었다. 어설퍼도 좋고, 허름한 드레스여도 좋다. 그냥 블레이크와 함께 추억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블레이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저주가 풀려야 한다. 그리고 저주가 풀리기 위해서는 다이애나가 필요했다.

블레이크는 멋지게 성장해서 무도회에 참석하고 춤도 출 거다. 하지만 그때 그의 옆에 있는 건 내가 아니겠지….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른이 되면 무도회에 참석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응. 그때는 꼭 내가 앤시아를 에스코트할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

나는 하루에 최소 한 번씩은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짜잔! 아버님, 오늘은 제가 뭘 만들었게요?”

나는 비장의 요리인 고추장찌개를 선보였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굳은 얼굴로 붉은 국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간이 크구나. 눈앞에서 황제의 암살을 시도하다니.”

“이거 독약 아니거든요!”

“다들 그렇게 말은 하지.”

황제는 무심히 말하면서 고추장찌개를 한 스푼 크게 떴다.

나는 맵고 얼큰한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직 어렸고, 다른 궁인들도 매운 음식은 입에도 못 댔다.

그렇다고 가마솥에 한가득 끓여놓고 나 혼자 먹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방법을 찾았다.

텐스테온이 매운 음식을 잘 먹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도 매운맛 동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기뻐하며, 매운 음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푸짐하게 만들어서 황제와 함께 먹곤 했다.

텐스테온도 한식에 제법 익숙해져서 밥과 국물을 먹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어때요?”

“맛있구나.”

“다행이다.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은. 며느리가 해준 음식인데 안 먹을까?”

“독약이라면서요.”

“독이어도 먹는다.”

텐스테온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고추장찌개를 입에 넣었다.

며느리한테 너무 빠진 거 아니에요?

“독은 드시면 안 되죠! 폐하가 아프면 블레이크 전하가 슬퍼한다고요!”

“그 아이가?”

황제의 입가에 씁쓸함이 번졌다.

“네. 슬퍼하죠.”

“내가 무엇을 해줬다고…. 미워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를 미워하실 리가 없잖아요.”

원작에서 블레이크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 때문에 죽은 사실을 몰랐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러니 나는 그의 마음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빛이시잖아요. 황태자 전하와 제국민을 위해서라도 폐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셔야죠.”

텐스테온이 세상을 떠나고 불행해진 건 블레이크뿐만이 아니었다.

아놀드는 오만하며 무능했고, 그의 아들들이 황위를 두고 다투며 제국은 쑥대밭이 된다.

블레이크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위해서라도 텐스테온을 허무하게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콜린 경께 들었는데, 어제도 밤을 새우셨다면서요? 정무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최우선이라고요.”

“잔소리는 그만하고 너도 어서 들거라.”

쉬라고 하면 꼭 잔소리 취급을 하네. 지독한 일 중독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조언이든 충고든 잔소리든 상관없이 뭐든 1절만 하자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나도 얼큰한 고추장찌개에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선물을 줘야겠구나.”

또 뭘 주시려고.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놔둘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지금까지 받은 선물도 차고 넘치는걸요.”

“아모리아궁에 유리 온실을 지어주마.”

“정말요?”

나는 반색했다.

황태자궁은 낡고 삭막했다. 사랑이라는 뜻의 ‘아모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정원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겨울이 되면 꽃 한 송이도 보기 어려웠다. 나야 밖에 나가서 보면 된다지만 블레이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 호수를 메우고 그곳에 온실을 지을 거다.”

앤시아가 물에 빠진 이후 호수 주변에 커다란 담장이 세워졌다. 봄이 되면 담장을 치울 줄 알았는데, 이대로 메워버리기로 했나 보다.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그때는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빠진 거였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예요.”

“내 며느리를 위험하게 만든 호수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텐스테온의 눈가에 싸늘한 냉기가 번뜩였다.

아니, 호수가 무슨 부모의 원수도 아니고 너무 비장하신 거 아니야?

***

“폐하께서 호수를 메꾸고 그 위에 유리 온실을 만들어주시겠대요.”

나는 황제와의 대화 내용을 블레이크에게 전했다.

블레이크는 저주가 나타난 이후 줄곧 이 별궁에서 지냈다. 호수에 추억이 있을지도 몰랐다.

유리 온실이든 호수든 블레이크가 원하는 걸 택할 생각이었다.

“잘됐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웃었다.

“호수를 메워도 괜찮으세요?”

“응. 앤시아를 빠트린 호수잖아! 없어져야 마땅해!”

블레이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자가 쌍으로 호수를 적대했다.

외모는 몰라도 성격은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씩 빼도 박도 못하는 핏줄이라는 걸 실감할 때가 있었다.

도대체 호수에 무슨 죄가 있다고….

“정말로 괜찮으세요?”

“응! 당장 메웠으면 좋겠어!”

이걸로 ‘유리 온실’은 확정이었다.

“호수를 전부 온실로 만들면 엄청 크겠다. 앤시아는 뭘 심고 싶어?”

온실. 온실이면 역시….

“배추요.”

“배추?”

“네. 동방에서 나는 채소예요. 그걸로 ‘김치’라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요.”

“김치?”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만약 김치가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요리가 훨씬 늘어날 거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묵은지된장지짐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나도 먹을래!”

“전하는 매워서 못 드실걸요.”

“나도 먹을 수 있어!”

“에이, 아직 안 돼요. 조금 더 크면 드세요.”

“나 다 컸어!”

“어이구, 다 크셨어요.”

나는 블레이크의 양 볼을 꾸욱 눌렀다. 요즘 들어 살이 적당히 올라서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후웅, 다 컸는데….”

블레이크는 왠지 모르지만 억울해했다.

“우리 신랑 빨리 크라고 시금치도 심어야겠네요.”

“…시금치?”

“네. 그리고 콩이랑 깻잎, 고추, 호박도 심고 싶어요!”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블레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꽃은?”

“호박꽃도, 고추꽃도 얼마나 예쁜데요.”

온실이라고 꼭 꽃만 심으란 법이 있나. 이왕이면 꽃도 예쁘고 먹을 것도 얻으면 더 좋지.

“전하는 심고 싶은 꽃이 있으세요?”

“장미!”

“장미요?”

“응. 앤시아를 위해서 새빨간 장미를 심을 거야.”

블레이크는 활짝 웃었다.

붉은 장미의 꽃말은 ‘사랑’이다. 청혼할 때 주는 꽃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붉은 장미를 받아도 되는 걸까? 나는 검은 문장이 새겨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무도회를 앞두고 드레스가 도착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3명의 디자이너가 각각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드레스였다.

세 개의 의상실 모두 내 옷 한 벌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다른 예약은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답게 드레스는 세 벌 모두 훌륭했다.

열 살 소녀의 귀여움을 한껏 살린 여리여리한 핑크색 드레스,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최고급 원단과 보석을 사용하여 멋스러움을 극대화한 무채색 드레스, 마지막으로 황실 전통 디자인을 산뜻하면서도 우아하게 풀어낸 클래식한 드레스였다.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건 핑크색 드레스였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21세기 대한민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무채색 드레스였다.

하지만 나는 전통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골랐다.

황제는 황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무도회도 혼자 참석했다.

그런 그가 나와 함께 입장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일부 귀족들이 반발했다. 텐스테온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고, 또 하멜 후작의 사건이 있기 때문에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귀엽거나 세련되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무도회를 통해 내가 바로 제국의 황태자비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렇게 강한 황태자비가 있으니, 감히 블레이크의 자리를 넘보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경고할 생각이었다.

나는 블레이크의 옆을 잠시 지키다 사라질 조연이었지만, 그래도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

대망의 무도회 당일,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블레이크도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앤시아….”

“저 때문에 깼어요?”

“아니. 일어나려고 했어. 지금 가는 거야?”

“네. 전하, 저 다녀올게요.”

황후와 친분이 있었다는 샤르딘 부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황태자궁에 방문해서,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샤르딘 부인 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태자궁의 출입 자체를 꺼렸고, 나는 원래 황태자비의 궁이었다는 세피아궁에서 무도회 준비를 해야 했다.

“잘하고 와.”

블레이크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블레이크는 언제나 웃었다. 나만 황제의 선물을 받고, 나만 예법을 배우고, 나만 무도회에 참석하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서운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드레스나 구두 등 함께 쓸 수 없는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물을 블레이크와 공유했다. 황제도 그런 뜻으로 나에게 수많은 선물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직접 선물을 받는 것과는 다르겠지.

나는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전하, 저는 말이죠. 황제 폐하께서 주시는 선물이 사실은 전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가….”

블레이크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언제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를 피했다.

블레이크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상처를 알기 때문에 억지로 화해를 시킬 생각은 없지만, 오늘은 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폐하께서는 전하를 사랑하세요. 그러니까 며느리인 저한테도 잘해주시는 거예요.”

“아니.”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앤시아에게 선물을 준 거야. 내 아내여서가 아니라 앤시아라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신 거야.”

“전하….”

“어쩌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나보다 앤시아가 선물을 받는 게 더 기쁘니까, 폐하께서도 그걸 알고 부인한테 선물을 보낸 거야.”

“…….”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순수하게 반짝였다.

나는 깨달았다. 블레이크는 애초에 섭섭해한 적이 없었다. 서운함을 애써 숨긴 것이 아니라, 내가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한 것이다.

“앤시아, 오늘 즐겁게 보내고 와.”

블레이크는 이번에도 웃었다. 나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라는 듯….

***

나는 세피아궁으로 갔다. 그러자 열 명이 넘는 여인들이 나를 둘러싸며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머리, 화장, 안마 등 각 분야의 최고 실력자라고 했다.

아름다운 꽃잎을 띄운 물에 목욕을 한 뒤, 향유로 마사지를 했다. 얼굴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르고, 손톱과 발톱까지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머리 손질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관리받는 건 굉장히 기분 좋으면서도 피곤한 일이구나. 아직 무도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쳤다.

“비 전하,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단장을 시작하는 건 조금 오버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여유를 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파티가 시작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황실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가 거울 안에 있었다.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았고, 우아하지만 노숙하지 않았다.

황태자비의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새벽부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새벽부터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비 전하를 모실 수 있어서 저희가 더 영광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비 전하이실 겁니다.”

그녀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찬사에도 왠지 허전함이 느껴졌다.

블레이크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분명히 변신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겠지….

무도회의 예법과 왈츠 스텝을 복습하기에도 바쁜데 머릿속에서 블레이크의 얼굴이 좀처럼 떠나지를 않았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자 텐스테온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예쁘구나.”

“아버님도 멋지세요.”

텐스테온은 나의 드레스에 맞춰서 전통적인 스타일의 예복을 입었다. 그저 옷만 바꿔입었을 뿐인데도 야성적인 맹수의 아우라가 더욱 짙어졌다.

“아부는.”

“아부 아닌데요. 우리 아버님이 멋있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멋진 거죠? 오늘따라 아버님에게서 벽이 느껴져요.”

“벽?”

“완벽이요! 아버님 완벽하세요!”

1절부터 10절까지 주접을 떨고 싶은 완벽한 비주얼이었다.

“실없기는.”

황제는 내 말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손을 건넸다.

“가자.”

“네. 아버님.”

***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나는 황제의 손을 꼭 잡고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입장에 맞춰서 연주가 바뀌고 무도회 참가자들은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위대한 빛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리차드를 찾아냈다. 별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놈이 가장 먼저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짜증 나는 놈이다. 반역 꿈나무인 걸 저렇게 티를 내내. 아예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

거슬려서 째려보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리차드는 나를 보더니 씩 입꼬리를 올렸다. 왜 저래. 인어의 숨결을 거부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 건가. 짜증이 나면서도 왠지 소름 끼쳤다.

나는 얼른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모름지기 주인공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우리 블레이크처럼 귀엽든가!

하필이면 리차드 같은 놈을 주인공으로 낙점한 작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텐스테온이 질문을 건넸다. 나는 발꿈치를 올리고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텐스테온이 귓속말을 하도록 몸을 낮춰주었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아버님이 제일 멋있어요.”

“하하. 실없기는.”

텐스테온은 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무도회장이 술렁거렸다. 도대체 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나는 당황해서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보셨습니까? 폐하께서 무릎을 굽히셨습니다.”

“웃으신 거 맞죠?”

“폐하께서 웃으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어둠의 문을 봉인할 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오?”

“웃을 줄 아는 분이셨습니까?”

“세상에나. 비 전하를 아낀다는 말이 사실이신가 봅니다.”

뭐야? 고작 웃었다고 이러는 거야? 도대체 평소 어떤 이미지였길래?

나는 황제를 올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다시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귀족들을 응시하자,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역시 제국을 호령하는 백수의 왕다웠다.

황제와 내가 자리에 착석하자 봉인제의 행사가 시작되었다.

신관과 귀족, 기사, 마법사, 아카데미의 대표가 각각 어둠의 문을 무사히 봉인한 황제를 칭송했고, 외국의 사절들도 대륙의 위기를 막은 텐스테온 황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텐스테온은 모든 영광을 빛의 여신과 제국민 모두에게 돌렸다.

황제가 답례를 마치면 나에게 춤을 신청할 거다. 그리고 우리의 춤과 함께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된다.

긴장되진 않았다. 그래도 블레이크와 연습을 하며 많이 늘었으니까. 다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무도회의 첫 춤은 블레이크와 추고 싶다. 연습이 아니라 진짜 ‘무도회의 첫 춤’을.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지만 미련이 남았다.

물론 이제 와서 못 추겠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사랑스러운 며느리와 첫 춤을 추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내 춤 실력이 많이 녹슬었더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빛의 여신께 이 영광을 돌리며, 봉인제를 기쁘게 즐겨주게.”

텐스테온은 답례를 마치고 자리에 착석했다. 내가 당황하여 눈을 깜박거리자, 이번에는 그가 작게 속삭였다.

“첫 춤은 블레이크와 추고 싶었던 거지?”

“…네.”

내 마음을 알고 계셨구나.

“나는 두 번째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내가 고맙지.”

텐스테온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따뜻한 아버지의 손길이었다. 그 순간 다시금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머머! 방금 보셨어요? 이번에는 폐하께서 먼저 귓속말을 하셨어요!”

“폐하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내가 환청을 들었네! 폐하께서 ‘사, 사랑스러운 며느리’라고 한 것 같아.”

“나도 들었네! 혹시 어둠의 문을 봉인하시면서 정신 교란 마법이라도 당하신 게 아닌가?”

텐스테온은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 거야. 그래도 다들 황제의 온화한 모습에 놀랐을 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카실 공작의 무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못마땅하게 보다가, 내가 바라보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왈츠 연주가 시작되었음에도 사람들은 댄스보다 나와 텐스테온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춤은 추지 않더라도, 황태자비로서 첫 파티이니 즐기고 오너라.”

“네. 아버님.”

내가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사람들은 앞다투어 인사를 청했다.

“비 전하, 과연 제국의 축복답게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쉘드론 후작입니다.”

“쉘드론 후작, 반갑습니다. 이번에 아드님께서 기사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하셨다죠? 축하드립니다.”

내가 축하 인사를 건네자, 쉘드론 후작의 눈이 커졌다. 벌써 놀라면 이른데.

“에밀리 영애, 결혼 축하드립니다.”

“마르시온 백작 부인, 닷새 전에 귀한 손주를 보셨다면서요? 어둠의 문이 닫히고 나서 태어난 아이는 빛의 여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하죠.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내가 무도회 예법과 춤만큼 신경을 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귀족의 명부를 외우는 일이다.

무도회 참석자 중 유력 귀족들의 프로필, 그리고 하위 귀족 중에서도 특별히 축하할 일이 있는 이들의 명단을 달달 외웠다.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를 가겠다 싶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제국은 결혼이 빠르고 사교계 활동을 비교적 일찍 시작하는 편이다.

만약 앤시아가 사교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면, 그녀와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야 하는 등 암기 난이도가 최악으로 치달았을 거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벨라시안 백작은 다이애나의 사교 활동만 지원하고, 앤시아는 꼭 필요한 행사가 아니면 외출도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다. 친한 친구도 없었다.

사실 귀족들의 명단을 파악하는 건 황후나 황태자비의 기본 소양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오랜 사교계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히거나 시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오늘이 사교계 데뷔였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만하면 ‘황태자비 앤시아’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인사가 슬슬 마무리되어 갔다. 벨라시안 백작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였지만, 내가 노려보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나를 배려하거나 눈치를 봐서 저러는 게 아니다.

분명히 내가 자기를 존경하고 따른다고 자랑을 해놨을 텐데, 그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겁이 나서 못 오는 거겠지.

벨라시안 백작의 옆에 작은 소녀가 보였다. 나와 같은 금발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아이였다.

앤시아와 닮은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귀여운 분위기에 눈매가 처져 있어서 순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 아이가 바로 다이애나구나. 소설 속에 묘사되었던 모습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다이애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시야에 한 남자가 걸렸다.

리차드가 다이애나를 지나,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네.”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렇게 거절당해놓고 왜 또 말을 거는 거야?

“잠시 못 본 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나이도 어린데 멘트가 느끼하군. 사실 따지고 보면 평범한 말이었지만 저 녀석이 해서 그런지 괜히 싫었다.

“감사합니다.”

예의상 대답을 하는데, 그가 손을 내밀었다.

“비 전하, 저에게 영광스러운 첫 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뭐야, 이 자식은.

텐스테온이 춤을 추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말로 그의 춤 실력이 녹슬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텐스테온이 춤을 잘 춘다는 건 모든 제국민이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샤르딘 백작 부인이 왈츠의 교본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지. 몇 년 추지 않았다고 녹슬 실력이 아니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내가 아직 춤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거나 다른 사정이 있다고 짐작했기 때문에 나에게 춤을 권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황태자비였다.

황태자비의 첫 춤 상대는 당연히 황태자여야 했다. 황태자에게 사정이 있다면 황제나 친부, 또는 남자 형제와 추는 것이 암묵적인 법도였다.

다들 신분과 사정을 고려하여 인사만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당당하게 춤을 권하다니.

벨라시안 백작조차 내가 거부할까 두려워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

거절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건가? 그 뻔뻔스러운 자신감이 리차드답긴 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어요.”

“춤이 서투르다 하여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잘 리드해드리겠습니다.”

나의 실력이 떨어져서 황제가 춤을 추지 않는 거라 단정하고 있군.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두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하여튼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놈이다.

“저는 폐하만큼 멋진 분이 아니면 춤을 추고 싶지 않은데요.”

리차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다.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이용하기 일쑤였지만, 단 한 사람 텐스테온만큼은 인정했다.

존경심을 넘어서 열등감도 가지고 있었다.

자존심을 긁힌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지만, 사실 이만하면 나도 배려를 해준 거다.

“어머, 비 전하, 폐하보다 멋진 분은 이 세상에 없답니다.”

“맞아요. 폐하 같은 분을 찾으시다가는 평생 아무하고도 춤을 추지 못하실걸요.”

“텐스테온 폐하는 오직 텐스테온 폐하 단 한 분뿐이세요!”

나의 말을 들은 귀부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황제 때문에 나의 눈이 한껏 높아졌다고 생각할 뿐, 리차드가 부족해서 거절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리차드의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굳어갔다.

***

황궁에서 가장 넓은 홀에서 열리는 파티였지만, 인구 밀도가 워낙 높다 보니 좀 답답했다.

인사도 마치고, 리차드도 치워버린 나는 테라스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시원한 공기를 맡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블레이크는 뭘 하고 있으려나? 앤시아가 되고 나서 이렇게 긴 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신랑 보고 싶네. 나 보고 싶다고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똑똑똑.”

별궁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데 귀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무도회장에는 여러 개의 휴식용 테라스가 있다. 쉬고 싶은 사람은 커튼을 닫고 테라스에 들어간다. 커튼이 닫혀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목소리로 노크를 했다. 테라스가 꽉 찼나 보네. 다리가 얼마나 아팠으면 저럴까.

“들어와.”

내가 허락하자 커튼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금발의 소녀가 들어왔다.

바로 다이애나였다. 그저 어린 귀족 영애이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갑작스러운 여주인공의 등장에 당황했다.

“다이애나….”

“언니….”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그녀가 눈꼬리를 휘며 활짝 웃었다.

“언니 오늘 너무 예쁘다. 천사 같아.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우아하고 멋있어.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다이애나는 작은 입술을 열심히 움직이며 나를 칭찬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질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사실 다이애나는 앤시아를 무척 좋아했다. 하나뿐인 언니였으니까. 앤시아도 처음에는 다이애나를 예뻐했다.

하지만 벨라시안 백작의 차별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백작은 다이애나에게는 커다란 방을 주고, 앤시아에게는 낡은 창고방을 주었다. 다이애나에게 온갖 드레스, 보석, 장난감을 사주면서도 앤시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사교계에 주목받을 수 있도록 다섯 명의 교사를 고용하여 가르쳤지만, 앤시아에게는 책 한 권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지만 부모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차별하는지 모를 수는 없었다.

다이애나는 이런 상황이 싫었다. 그녀는 드레스나 보석보다는 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공부도 언니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뜻을 내비칠 때마다, 백작은 앤시아를 때렸다. 앤시아가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순진한 다이애나를 꾀었다며,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욕을 퍼부었다.

다이애나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작은 실수를 저질러도 앤시아의 탓이라고 우기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앤시아는 다이애나를 멀리했다. 다이애나도 언니에게 더 이상 놀아달라고 할 수 없었다.

원작에서 다이애나는 겉으로는 밝게 행동하면서도 속은 깊은 우울감에 젖어 있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며, 그 죄책감을 마지막까지 잊지 못한다.

언니가 아니라 자신이 황태자와 결혼을 했다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지.

앤시아가 자살하자, 벨라시안 백작은 당황한다.

딸의 죽음을 슬퍼한 건 아니었다. 그는 황제가 결혼할 때 주었던 결혼 예물을 다시 가져갈까 불안해한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백작에게 막대한 위로금을 보낸다.

앤시아의 결혼 예물과 황제에게 받은 위로금으로 백작 가문은 부유해졌지만 다이애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언니의 비극과 죽음 위에 쌓아 올린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간다. 그리고 모두가 꺼리는 블레이크의 시녀가 된다.

앤시아의 죽음과 블레이크의 절망을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앤시아는 죽지 않았다. 물론 진짜 앤시아는 떠났지만, 다이애나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그녀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인사할 때도 너무 멋있었어.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할 거야. 모두들 언니를 칭찬하고 난리도 아니야. 나까지 어깨가 으쓱했다니까!”

‘야수와 영애님’ 외전에서는 앤시아가 다이애나를 원망하지 않았단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질투 나고 미운 마음이 든 건 사실이지만, 유일하게 자신을 좋아해 주었던 동생을 싫어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이애나라면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나는 원작을 떠올리며 최대한 진짜 앤시아처럼 보이도록 말했다.

“고마워.”

“정말 예뻐.”

다이애나가 해맑게 웃었다. 다행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 몸은 괜찮아?”

“어?”

“물에 빠졌었다면서.”

“아, 응….”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언니, 이거 받아.”

다이애나는 작은 붉은색 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불의 마나석으로 만든 보온 도구야. 이걸 가지고 있으면 따뜻할 거야. 좀 더 일찍 주고 싶었는데, 겨울이 끝나버렸네.”

다이애나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나는 괜찮아. 다 나았는걸.”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 내 용돈으로 몰래 산 거야!”

그녀는 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보온 도구를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언니에게 뭐라도 주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진짜 앤시아는 세상을 떠났으니까….

“고마워. 잘 쓸게.”

다이애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은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것이 블레이크와 많이 닮았다.

“뭘 이런 거로 울어.”

“언니가 받아주니까 너무 좋아서….”

내가 손수건을 건네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거 쓰면 돼. 그런데 언니, 손수건도 진짜 예쁘다. 폐하께서 주신 거야?”

“응.”

“폐하께서 언니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 다행이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에게서 사랑스러운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여주인공은 다르구나.

혹시라도 남자 주인공인 리차드처럼 다이애나도 이상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소설로 읽을 때보다도 훨씬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블레이크와 다이애나가 나란히 선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두 사람은 무척 잘 어울릴 거다.

기뻐해야 하는데 왠지 우울해졌다.

***

무도회를 무사히 마치고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마차가 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내 집이 최고다.

“앤시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블레이크가 다가와서 살포시 나를 안아주었다. 나도 그를 꼭 껴안았다.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나를 환영해줄 가족이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물론 같은 황궁 안에서 움직인 거긴 했지만, 짧은 여행을 마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하, 저 어때요?”

“예뻐.”

짧은 말이었지만, 오늘 하루 종일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기뻤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고 목욕을 했다. 깨끗하게 씻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으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침대 위로 올라가자, 블레이크가 눈을 반짝였다.

“앤시아, 오늘 재미있었어?”

“많이 긴장해서 정신없었어요. 하지만 새롭고 좋았어요.”

“춤은 췄어? 폐하께서 잘 리드해주셨지?”

“아니요. 안 췄어요.”

“왜?”

“제 첫 춤은 전하랑 추고 싶어서요.”

“…….”

“폐하께서도 알고 배려해 주셨어요.”

블레이크는 입을 다물었다. 기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말했다.

“폐하랑 추지 그랬어. 나는 그런 곳에 가지 못할 텐데….”

“왜 못 가요?”

“나는 저주에 걸렸잖아….”

“제가 말했죠. 전하께서는 꼭 나으실 거예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전하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전하, 저랑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약속?”

“네. 나중에 저주가 풀리시면, 꼭 저랑 춤을 춰주세요.”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주가 풀린 블레이크랑 함께 무도회장에서 춤을 춰보고 싶었다.

“당연하잖아. 내가 앤시아 말고 누구랑 춤을 추겠어?”

나는 대답 없이 웃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앤시아, 나는 너무 무서워.”

“저주는 반드시 풀리실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주가 아니라, 앤시아가 나를 떠날 것 같아서 무서워.”

그는 나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부인이 갑자기 나를 두고 떠날 거 같아.”

“…제가 가긴 어딜 가요.”

이제는 익숙해진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내 손을 더욱 힘껏 움켜잡았다.

“앤시아, 나를 떠나지 마.”

“전하….”

“나한테는 앤시아뿐이야. 앤시아가 원하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나를 떠나지 마!”

내가 거짓말한다는 걸 느꼈는지, 블레이크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절박하게 외쳤다.

“전하, 울지 마세요. 울지 말아요.”

나는 그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면 되는데,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던 하얀 거짓말이 어째선지 나오지 않았다.

“앤시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줘.”

“전하….”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떠나지 않아요.”

하지만 블레이크의 애원에 굴복하며 결국 또다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

블레이크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과 동시에 나는 이별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앤시아가 자살을 시도한 줄 알고 충격을 받았을 블레이크를 달래주고 싶었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다이애나는 블레이크의 첫사랑이다. 비록 다이애나가 리차드의 계략에 넘어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갈라지지만, 그녀 역시 처음 사랑했던 사람은 블레이크였다.

그러니 지금은 블레이크가 어려서 나를 따르고 있어도 다이애나를 만나면 결국 그녀를 선택할 거다.

나는 리차드 그 자식이 혹시라도 원작처럼 다이애나를 차지하기 위해 계략을 세운다면, 그걸 철저히 차단한 뒤 퇴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블레이크가 생각보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공주병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다음 날, 나는 벨라시안 백작에게 다이애나가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백작은 언제든지 다이애나를 보내겠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벨라시안 백작은 다이애나가 앤시아와 말을 섞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니 거절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

“전하, 오늘은 제 여동생이 놀러 오는 날이에요.”

“응. 알아.”

블레이크는 잔뜩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떠나지 말라고 하며 그렇게 울었으면서, 막상 첫사랑을 만나려니 긴장되나 보다.

나 몰래 한스한테 말해서 새 옷도 맞추었다. 오늘 입은 옷이 바로 그 옷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저런다. 몇 시간을 만난 사람과 헤어져도 대성통곡하다가 다음 날이 되면 잊어버린다. 그걸 알면서도 괜히 섭섭했다. 잘된 일인데도 말이다.

“긴장되세요.”

“조금. 처제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응? 첫사랑의 설렘이 아니라, 상견례 모드였던 거야? 그래서 긴장한 거야?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내 앞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이애나는 여주인공답게 성격이 착하고, 저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원작보다 이른 만남이긴 하지만, 너무 늦는 것보다는 빠른 게 나을 거다.

나는 블레이크의 크라바트를 다시 고쳐 매주었다.

얼마 안 있어 벨라시안 가문의 마차가 도착했다.

“언니!”

병아리처럼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는 오늘따라 무척 귀여웠다.

“언니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정말 꿈만 같아서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아, 너무 좋아. 언니, 오늘도 너무 예쁘다. 왜 이렇게 점점 예뻐져?”

다이애나는 원작보다 훨씬 밝고 약간 말이 많았다. 나는 쉴 새 없이 재잘대는 그녀의 말을 적당한 선에서 끊었다.

“다이애나, 먼저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려야지.”

“아,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반가워요. 벨라시안 영애.”

블레이크가 제법 어른스러운 투로 말했다.

“전하,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이애나도 훌륭한 예법을 구사했다. 그녀에게서 저주의 문장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내 상상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다이애나, 미안하지만 나는 잠깐 폐하를 뵙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줄래.”

“응! 걱정하지 마!”

“전하, 다이애나한테 궁을 안내해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지. 나한테 맡겨!”

“부탁드려요.”

나는 해맑게 웃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황궁 도서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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