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장. 19금 피폐 소설에 빙의했는데, 토끼가 있습니다
2장. 진짜 야수를 만났습니다
3장. 노란 멍멍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4장. 붉은 동백나무와 검은 맹수
1장. 19금 피폐 소설에 빙의했는데, 토끼가 있습니다
너무 추웠다. 얼음 속에 갇힌 듯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내가, 내가 그렇게 싫으면…!”
희미한 의식 속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소년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굴이 절반 정도 가려져 있었지만, 물에 흠뻑 젖은 채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과 루비같이 새빨간 눈동자가 참 아름다웠다.
소년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고이더니, 나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소년의 눈물이 따뜻했다.
***
나는 화려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비 전하! 깨어나셨습니까!”
“비 전하가 깨어나셨다!”
비 전하라니? 나를 말하는 건가?
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에 보석을 박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페리도트 빛의 눈동자. 오밀조밀 귀여운 얼굴. 사람이 아니라 꼭 인형같이 생긴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이게 나라고?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의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는 며칠 동안 쓰디쓴 약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이곳이 ‘야수와 영애님’이라는 19금 피폐 소설 속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수와 영애님’은 동화 ‘미녀와 야수’를 비튼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저주받은 괴물 황태자 블레이크와 야수같이 거친 남자 리차드가 여주인공 다이애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줄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여주인공인 다이애나의 이복 언니 ‘앤시아’로 빙의했다.
‘앤시아’는 어린 나이에 황태자 블레이크와 결혼을 하여 황태자비가 된다. 하지만 저주받은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고, 결혼식 당일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블레이크는 절망하고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기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다이애나가 그의 저주를 풀기 전까지 황태자는 누구도 믿지 않는 냉혹한 사람이 되고, 결국 그런 마음의 어둠 때문에 다이애나에게 선택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다.
원작대로라면 앤시아는 물에 빠져서 익사했고, 블레이크는 그녀의 차가운 시체를 건져 올렸을 거다. 하지만 내가 빙의하면서 앤시아는 죽지 않았다.
“내가, 내가 그렇게 싫으면…!”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던 소년이 바로 블레이크겠지.
하지만 그는 내가 깨어난 지 닷새가 지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상처를 받은 거다. 자기 얼굴을 보고 무섭다며 신부가 자살을 시도했는데 멀쩡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직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했다.
“비 전하, 어딜 가시려고요?”
“황태자 전하께 갈 거야.”
“황태자 전하께요…?”
시녀 멜리사가 당황했다. 황태자가 싫어서 자살 기도까지 했으면서, 건강을 차리자마자 그를 만나겠다고 하니 놀랄 법도 했다.
“응. 데려다줘.”
“비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번 일로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떠나시겠다는 말은 조금 뒤로 미루는 것이….”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내가 이혼을 요구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고, 안내해.”
하지만 나는 블레이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원작에서 블레이크를 가장 좋아했다. 결국 다이애나가 리차드를 선택하며 내 주식은 허무하게 망해버렸지만, 어쨌든 블레이크의 참혹했던 어린 시절을 바꿀 기회가 왔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앤시아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앤시아는 벨라시안 백작과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하지만 앤시아를 낳자마자 첫 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벨라시안 백작은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여 다이애나를 낳았다.
벨라시안 백작은 앤시아를 천덕꾸러기 취급했고, 황태자가 저주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도 앤시아를 황태자비로 보냈다.
앤시아는 단순히 블레이크의 흉측한 외모 때문에 자살한 게 아니었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때문에 차가운 물 속으로 몸을 던진 거다.
어쨌든 나는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고, 이대로 블레이크를 절망 속에 처박아두고 떠날 생각도 없었다.
시녀는 나를 블레이크의 침실로 안내했다.
“나 혼자 들어갈게.”
시녀를 밖에 둔 채,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황태자 전하, 저예요.”
그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오, 오지 마!”
그는 나를 거부했다. 당연하다. 그 난리가 났었는데 내가 반가울 리 없지.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나는 오해를 풀고 싶었다.
“전하….”
“오지 마! 나, 나는 흉측하니까. 오지 마. 놀랄 거야.”
내가 미워진 게 아니라, 또 놀랄까 봐 그러는 거였어?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이불을 벗겨버렸다.
“아, 안 돼!”
그가 애처롭게 외치며 이불을 잡기 위해 손가락을 바둥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불을 아예 전부 거둬서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그가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추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을 보니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어둡고 퇴폐적인 절륜남 블레이크는 어디로 가고, 새하얀 토끼 같은 소년이 내 눈앞에 있었다.
“벗기다니! 허락도 없이 벗기다니!”
단어를 애매하게 생략하지 마! 이 19금 피폐물 서브 남주야!
순간적으로 분노했지만, 바들바들 떠는 블레이크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감정을 억눌렀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우선은 오해를 풀어야 한다. 나는 일단 그의 침대에 걸쳐 앉았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울먹거리며 슬금슬금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피폐 소설의 서브 남주님은 아직 흑화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바들바들 떠는 그의 손을 강하게 잡고, 얼굴의 절반을 가린 가면을 단숨에 벗겨버렸다.
“무, 무슨 짓이야!”
그는 당황하며 내 손에 들린 가면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가면을 바닥에 던지며 블레이크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보, 보지 마!”
블레이크는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나는 손에 힘을 주며 그가 나의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황태자 전하는 아름다우세요.”
“뭐…?”
“저는 황태자 전하처럼 아름다운 분을 뵌 적이 없어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왼쪽 얼굴은 새까만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눈과 아직 어린 소년임에도 오뚝한 코, 새빨간 입술, 유려한 턱선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다이애나를 만나면 저주도 풀릴 거다. 원작에서 저주의 문장이 사라진 블레이크의 얼굴은 전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왼쪽 얼굴이 문장에 가려진 지금도 아름답고 예뻤다.
“하지만 너는 나를 싫어하잖아….”
“싫어하지 않아요.”
“하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전하, 저는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에요.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호수에 떨어진 거예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앤시아는 블레이크의 얼굴에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 하지만 나는 사고인 척하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이 몸의 주인인 앤시아였다. 만약 나라면 그의 얼굴 때문에 놀라며 호숫물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거다.
“…정말이야?”
“네. 물에 빠진 저를 전하께서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정말 고마워…?”
“네. 전하.”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당연히 감사하죠.”
“후웅.”
블레이크의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귀여운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따뜻한 눈물이 나의 손등 위로 투둑 떨어졌다.
“나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네가 죽는 줄 알고….”
“죽긴 왜 죽어요? 이렇게 멋진 분과 결혼도 했는걸요.”
“내가 구해줘서, 그래서 네가 원망했을까 봐…. 네 얼굴을 보는 게 겁이 나서….”
블레이크는 닷새 동안 혼자서 끌어안았던 걱정과 불안을 눈물과 함께 쏟아내었다.
“아니에요. 저는 황태자 전하가 좋아요.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소년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나도 네가 좋아.”
블레이크, 거짓말쟁이네. 블레이크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이애나다.
황제도 블레이크가 다이애나를 좋아하는 걸 알고, 벨라시안 백작가에 혼담을 넣었다. 물론 백작은 다이애나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펄쩍 뛰며 앤시아를 보냈지만.
뭐, 세상에는 선한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지.
“그럼 우리 같이 잘까요?”
“…….”
내가 말을 꺼낸 순간, 블레이크가 내 품에서 떨어지더니 후다닥 뒷걸음질을 치며 침대 헤드에 바짝 붙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서브 남주님. 내가 몹쓸 짓이라도 제안한 것 같잖아.
벨라시안 백작 가문은 빛의 힘을 지니고 있다. 다이애나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었던 것도 벨라시안 집안이 지닌 빛의 힘 덕분이었다.
앤시아 역시 벨라시안 가문의 사람이었다. 빛의 계승자인 다이애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빛의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블레이크가 걸린 저주는 단순히 얼굴에 문장이 새겨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통증이 따른다고 했다. 특히 추울수록 그 고통이 심해진다.
나를 구하기 위해 차디찬 겨울 호수에 뛰어들었으니, 블레이크도 많이 힘들었을 거다. 게다가 힘들면 힘들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성격도 아니니 혼자 끙끙 앓았겠지.
벨라시안 가문이 지닌 빛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체 접촉이 필요했다. 은밀한 접촉을 할수록 치료 효과가 높다고 했다.
참, 19금 피폐 소설다운 설정이네.
하지만 우린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원작의 내용에 충실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그 대신 손이라도 잡고 자려고 했는데, 블레이크의 표정을 보니 내가 크나큰 실수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전하, 이상한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
“우린 결혼했잖아요. 그러니까 함께 잠을 자는 게 당연하죠. 그렇게 겁먹을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블레이크가 오들오들 떨며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운걸….”
“…….”
원작의 야성미 넘치는 블레이크는 어디로 가고, 조그마한 토끼가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정말로 10년만 지나면 저 토끼가 퇴폐 늑대남으로 변하는 건가? 인간의 성장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이리 와요!”
어쨌든 아픈 아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꼭 안고 있는 베개를 뺏고 블레이크의 양손을 꼭 잡았다.
“우린 부부니까, 이제부터는 매일 함께 자야 해요.”
“매, 매일…?”
“왜요? 싫어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앤시아는 괜찮아?”
“뭐가요?”
“나랑 자도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죠. 저는 황태자 전하가 좋은걸요.”
“내가 좋으하웅….”
블레이크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똥그랗게 뜨더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정체불명의 의성어를 내뱉고 있는 블레이크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어때요? 조금이라도 편해진 느낌이 들어요?”
저주를 푸는 빛의 기운이 좀 느껴졌으려나?
“아….”
블레이크는 대답 대신 ‘가오나시’같이 바람 빠진 목소리를 냈다.
여주인공인 다이애나하곤 손만 잡아도 저주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적혀 있었는데, 같은 벨라시안 가문이라도 조연인 나의 힘은 별로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에휴. 이왕 소설에 빙의했으니 다이애나를 만나기 전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갈 블레이크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는데,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나 보네.
나는 손을 풀고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블레이크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지 마!”
“…네?”
“따, 따뜻했어. 앤시아의 손이 따뜻했어. 그러니까 가지 마.”
뒤에서 안았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참 울보구나.
“안 가요.”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블레이크의 손을 풀었다.
“정말?”
“네. 이불을 가지려고 내려온 것뿐이에요.”
나는 손에 쥔 이불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다시 침대 위로 후다닥 올라갔다.
백 허그까지 해놓고 왜 또 토끼처럼 오들오들 떠는 거야?
“저랑 같이 자는 게 내키지 않으세요?”
“그게 아니라…. 저, 정말로 괜찮아? 나 같은 괴물이랑 같이 자도….”
“전하!”
내가 강하게 소리치자, 블레이크가 깜짝 놀라며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괴물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전하는 괴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렸죠. 전하는 아름다우세요. 괴물 같은 게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리고 전하의 저주는 풀릴 거예요.”
“내 저주가…?”
“네. 반드시 풀릴 거예요. 열여덟 살이 되면 모든 저주가 풀리고, 행복한 날들만 펼쳐질 거예요. 그러니까 약한 마음을 먹으시면 안 돼요. 남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열여덟.”
작고 붉은 입술에서 체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벨라시안 가문에 ‘빛의 계승자’가 있는 것처럼, 제라실리온 황실에는 ‘저주의 계승자’가 있었다.
제국을 건국한 태조 필립 황제는 빛의 여신과 연인 관계였다.
빛의 여신은 사랑하는 필립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었고, 필립은 여신의 힘을 빌려 제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황제가 된 필립은 빛의 여신을 배신하고 새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이에 분노한 빛의 여신은 필립의 자손들에게 풀리지 않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저주의 계승자는 얼굴에 검은 문장이 새겨지고, 그것이 전신을 뒤덮으면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모두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블레이크도 열여덟 성인이 되는 날 밤, 죽음의 직전까지 내몰린다. 하지만 다이애나를 만나면서 저주가 풀리게 된다.
나는 절망에 빠진 블레이크의 손을 잡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할게요. 전하는 결코 저주에 먹히지 않을 거예요. 제 목숨을 걸고 약속해요.”
“안 돼!”
그가 손을 거칠게 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그런 약속 하지 마! 너는 죽으면 안 돼! 내가 죽어도 너는 내 몫까지 살아야….”
나는 그의 손을 다시 가져와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블레이크는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가 힘을 단단히 주자 결국 실패했다.
“안 죽어요. 황태자 전하도 저도 안 죽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앤시아….”
“아이구, 우리 남편은 울보네.”
손수건으로 그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 울보 아니야.”
“울보 맞는데요.”
“아니야!”
블레이크는 입술에 힘을 꽉 주며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이 북받치는지 결국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괜찮다고 등을 다독여 줬다. 그리고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
눈을 뜨자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는 블레이크의 얼굴이 보였다.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상관없이 귀여웠다.
새하얀 볼살을 톡 건들려고 하는데, 손이 무거웠다. 블레이크가 나의 오른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부끄럽다더니 아침까지 잡고 있었던 거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나는 왼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블레이크가 눈을 떴다.
“죄송해요. 제가 깨웠어요?”
“아니.”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왜 웃으세요?”
“좋아서.”
“뭐가요?”
“앤시아가 내 옆에 있어 줬잖아.”
그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분명 19금 피폐물에 빙의했는데, 토끼같이 귀여운 남편이 생겨버린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미소를 마주한 순간, 나는 이 토끼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히 소설에서 좋아하던 캐릭터여서가 아니었다.
뭉클한 무언가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
나는 블레이크를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저주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블레이크가 다이애나를 만나기 전까지라도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야수와 영애님’은 19금 피폐 소설이다 보니 주인공들이 성인이 된 이후의 시점부터 이야기가 전개되고, 어린 시절에 관한 내용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인물들의 대화나 짧은 설명들 속에서 과거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 세 가지 커다란 비극을 겪게 된다.
첫 번째 비극은 저주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비극은 결혼 첫날 신부였던 앤시아가 자살한 것. 그리고 마지막 비극은 아버지인 텐스테온 황제의 죽음이었다.
황제 텐스테온이 승하하자, 블레이크의 숙부이자 남자 주인공 리차드의 아버지인 카실 공작이 새로운 황제가 된다.
숙부는 블레이크를 황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저주에 걸린 무력한 소년은 남쪽 섬에 유폐되어 참혹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블레이크는 이미 저주의 계승자가 된 상태다.
이는 내가 빙의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고, 직접 치료해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친부인 텐스테온 황제의 죽음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3년 뒤의 일이니 내가 노력한다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텐스테온 황제의 죽음을 막으려면 우선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할 텐데….
황제는 황태자와 앤시아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어둠의 문을 막기 위해 혼돈의 계곡으로 떠났다. 어둠의 문을 닫고 돌아오려면 최소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될 거다.
그러니 내가 초조해한다고 황제가 일찍 돌아올 일은 없었다. 오히려 성급하게 움직이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나는 조바심을 버리고, 일단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블레이크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도 독서도 방에서 했다.
나는 매일 그와 함께 잤고, 자연스레 그의 방에서 식사를 하고, 책을 보고 수다도 떨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오늘도야….’
나는 탁자 위에 올라온 아침 식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풀, 풀, 풀!
사흘째 아침,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풀때기만 올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메뉴도 거의 비슷했다. 시금치 수프와 토마토 샐러드, 버섯 구이는 어제저녁에도 올라왔던 메뉴다.
어제보다 수프가 조금 짠 걸 보니, 새로 끓인 것도 아니고 어제 만든 걸 다시 데워줬나 보다.
나는 맛있는 걸 좋아하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똑같은 것만 먹어도 되고, 채소만 있어도 괜찮다.
그러니 음식 자체에는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어린 소년과 소녀의 식단이 아니라,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식사였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이들의 식사라고 하기에 재료가 부실했고, 성의도 없었다.
“…전하.”
“응?”
“전하께서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음. 다 좋아.”
“고기나 생선 같은 것도 좋아하세요?”
“응.”
블레이크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이 죽은 토마토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블레이크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저주에 걸렸다고 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도 없었다.
그런데도 매일 풀때기와 재탕을 한 음식만 나온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저주에 걸린 괴물 황태자라고 무시하는 거구나.’
황태자궁은 황제가 기거하는 필리온궁에서 한참을 떨어진 외진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황궁 구석에 있는 별궁에 처박힌 채 황제가 찾지도 않고, 저주에 걸려서 얼마 살지도 못하는 여덟 살배기 어린 황태자. 게다가 그의 결혼 상대는 백작가의 천덕꾸러기인 앤시아였다.
앤시아가 블레이크보다 연상이라고 하지만 고작 열 살이다.
황태자 부부라고는 하나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으니, 대놓고 무시를 하는 거다.
“앤시아, 왜 그래? 맛이 없어?”
내가 물끄러미 음식만 바라보고 있자, 블레이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걱정을 했다. 나는 얼른 경직된 표정을 풀고 싱긋 웃었다.
괜히 블레이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맛있어요. 전하, 이 버섯구이 좀 드셔보세요.”
“버섯은 싫은데.”
“건강을 위해서 드셔야 돼요. 아-.”
“아-.”
내가 버섯을 직접 집어주자, 블레이크는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억지로 입에 넣었지만 맛은 없는지, 그는 곧장 컵을 집었다. 나는 그런 블레이크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가 바르르 떨었다.
“어! 소, 손은…! 여긴 침대도 아닌데!”
남편님, 식사 중에 무슨 말씀이세요?
“물로 대충 삼키지 말고, 꼭꼭 씹어 드세요.”
“응….”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이 발그레해진 모습이 귀여웠다.
이 토깽이가 나중에 늑대가 된다는 거지…. 정말 가능할까?
블레이크는 버섯을 정말로 싫어하는지, 눈을 감고 억지로 인상을 찌푸리며 꼭꼭 씹다가 겨우 삼켰다. 나는 그가 버섯을 모두 먹는 모습을 확인하고 손을 뗐다.
“이제 물 드셔도….”
물을 드시라고 말하려는데, 블레이크가 떨어지는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왜 그러세요?”
“손이 따뜻해…. 앤시아가 잡아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
편해졌다기에는 너무 오들오들 떨었던 거 같은데.
어쨌든 블레이크가 편하게 느꼈다면, 나에게도 빛의 힘이 조금은 있는 걸까?
***
식사를 마친 뒤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황태자궁을 관리하는 수석 시종 브라운을 불렀다.
“비 전하,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공대를 하고 있으나 표정과 말투에서 오만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분명 하멜 후작의 장남이라고 했지. 내가 아팠을 때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자다. 황태자비인 나보다 장차 후작가를 계승할 자신의 신분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거다.
“황태자 전하의 식사가 무척 부실하더군요.”
“아. 그것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전 또 무슨 급한 일이라고.”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의 음식에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급한 일이 아닙니까?”
“제국의 빛이라….”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저주에 걸린 황태자를 ‘빛’이라고 칭한 것이 우습다는 반응이었다.
“비 전하, 이제 막 오셔서 뭘 모르시나 본데, 황태자궁의 예산이 풍족하지가 않습니다. 폐하께서 예산을 주시지 않는데, 저희들이 뭘 어찌하겠습니까?”
브라운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황태자궁의 예산이 사치를 부릴 정도로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고기 한 점 올라오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지도 않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아직 어리셔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알아들으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대를 파직하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오만하던 브라운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나는 그를 상대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서 옆에 서 있는 호위 기사 에드온에게 명했다.
“에드온 경, 황태자궁의 예산을 횡령한 브라운 하멜을 하옥하고 그 죄를 추궁토록 하세요.”
“횡령이라니요! ‘횡령’이 뭔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잘 압니다. 그대가 한 짓이 바로 횡령이죠.”
그는 경악했다. 그리고 에드온이 자신을 정말로 끌고 나가자, 이성이 뒤집혀 발악하기 시작했다.
“당장 놔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하멜 후작 가문의 후계자다! 저주받은 괴물한테 시집와놓고 꼴에 황태자비라고 위세를 떠는 거냐! 후회하게 될 거다! 당장 이 손 놓지 못해!”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를 모욕한 죄도 추가하도록 하세요.”
나는 그의 말을 상대하는 대신 화병 옆에 숨겨놓은 영상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체크하며, 에드온에게 명령했다.
“네, 비 전하.”
에드온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뒤, 브라운을 끌고 나갔다.
갑작스럽게 수석 시종이 끌려 나가자, 황태자궁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하지만 나는 분위기를 수습하는 대신 그 여세를 몰아 황태자궁의 사람들을 대거 해고했다.
블레이크가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대부분의 궁인들이 그를 배신하고 남자 주인공인 리차드의 편이 된다. 미래의 배신자를 굳이 곁에 둘 필요는 없었다.
블레이크를 무시하고 경멸하거나 불성실한 자, 또는 원작에서 그를 배신한다는 묘사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더니 황태자궁이 텅텅 비었다.
“시종과 시녀는 모두 황제 폐하께서 직접 뽑으신 자들입니다. 이렇게 내쳐도 괜찮을는지요.”
시녀 멜리사가 걱정했다. 멜리사는 내가 블레이크를 만나겠다고 했을 때 그의 기분을 걱정했던 시녀로, 원작에서도 에드온, 한스와 함께 블레이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 없이 즉답했다.
“괜찮아.”
황제는 내 행동을 나무라지 않을 거다. 그 문제라면 자신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나의 예상대로 수석 시종 브라운은 막대한 예산을 빼돌렸다.
하지만 그가 고기를 구입할 돈을 지급하지 않았을지언정, 어제저녁에 먹은 요리를 재탕 삼탕하라고 주방에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짓을 한 건 요리사였고, 나는 황태자를 무시하고 근무에 태만했던 요리사들을 모두 해고했다.
“오늘 요리는 내가 만들 거야.”
“비 전하께서요?”
“응. 재밌는 걸 찾았거든.”
궁인들을 해고하며, 장부와 식료품 창고를 확인했다. 그리고 창고에서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간장, 된장, 고추장이다!
황제는 블레이크를 위해 전 세계를 뒤져서 몸에 좋다는 식재료는 전부 사들였고, 그중에는 동방의 음식들도 있었다.
막상 요리하는 방법도 효능도 몰라서 방치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횡재였다.
엄밀히 말하면 간장, 된장, 고추장이라는 이름도 아니고 맛도 조금씩 달랐지만, 이 정도가 어디야. 다시는 한식 구경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장 종류뿐 아니라, 온갖 재료들이 다 있었다. 이런 걸 두고 풀때기만 주다니! 나는 분노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
황태자궁에서 일하면서도 저주의 계승자라는 이유로 블레이크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블레이크도 그걸 알고 웬만하면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신랑을 눈치 주는 잡것들은 내가 모두 쫓아버렸으니,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궁을 활보할 수 있었다.
나는 식사 준비를 마친 뒤, 블레이크를 식당으로 불렀다.
“짜잔!”
그리고 자체 효과음을 발사해주었다.
쌀밥과 된장찌개, 동그랑땡.
들인 정성에 비해서 결과물이 적었지만, 이게 한식의 묘미 아니겠는가? 게다가 된장 맛이 한국 된장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게 뭐야?”
“동방의 요리예요! 책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마침 창고에 재료가 있길래 만들어 봤어요!”
“앤시아가 직접 만든 거야?”
“네. 전하.”
“와.”
블레이크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요리를 물끄러미 내려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먹는 거야?”
아, 한식은 처음 보는 걸 테니, 먹는 방법을 알려줘야겠구나.
나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블레이크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동방의 요리라 생소하시죠. 저도 최근에 알았어요. 이건 동그랑땡이라는 음식이에요.”
“동그랑땡?”
“네. 전하처럼 동글동글 귀여워서 동그랑땡이라고 불러요.”
“나, 나, 귀여워?”
“네. 꼭 토끼 같으세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스푼으로 밥을 푸고, 그 위에 절반을 자른 동그랑땡을 올렸다.
“전하, 아-.”
“아-.”
우리 토깽이, 이제는 입도 크게 잘 벌리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밥을 먹여주었다. 블레이크는 입 안에 든 음식을 꼭꼭 씹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이떠!”
“맛있어요?”
“응!”
음식이 입 안에 꽉 차서 발음이 새는 것조차 귀여웠다.
“이번에는 혼자 드셔보세요.”
나는 그에게 스푼을 건넸다.
“이건 ‘된장찌개’라는 요리예요. 밥을 먼저 드신 다음, 수프처럼 이 국물을 스푼으로 떠서 드셔보세요.”
“응. 알았어.”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그리고 맛이 독특하니까 입맛에 안 맞으시면 억지로 드시지 마시고요.”
“응.”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밥을 먼저 먹은 다음 된장찌개를 한 스푼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전하, 왜 그러세요?”
“맛있어!”
“정말이요?”
대한민국 된장보다 순했지만 그래도 이 세계 기준으로는 워낙 독특한 맛이다 보니 걱정했는데, 다행히 입맛에 맞은 모양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최고야!”
“그렇게 맛있으세요?”
“응!”
“그럼 자주 해드릴게요.”
“앤시아가 직접 만들어 주는 거야?”
“당연하죠.”
“우와!”
환하게 웃는 블레이크를 보니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된장찌개는 감자가 핵심이에요. 감자랑 같이 드셔보세요.”
“응!”
나는 블레이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남편이 아니라 육아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이 정도가 좋았다.
블레이크가 저주에서 풀리려면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
나는 블레이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곁을 지키다가,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떠날 생각이었다.
***
시녀 멜리사와 시종 한스, 그리고 기사 에드온은 하루 업무를 마치고 테라스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로 좋은 분을 맞이하신 것 같습니다.”
한스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석 시종의 행태에 이가 갈리던 참이었는데, 그 일당들까지 모조리 쫓아내고 나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후련합니다.”
에드온은 단호하게 수석 시종의 죄명을 읊던 황태자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총명함과 위엄.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도 뛰어났다.
오늘 수많은 이들이 내쫓겼지만, 그중 억울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나같이 전하를 뒤에서 욕하고 조롱하며 일을 게을리하는 자들만 골라서 벌을 주거나 해고시켰다.
“무엇보다 두 분이 사이가 좋으셔서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멜리사는 앤시아가 호수에 빠졌던 날을 떠올렸다. 자살이 아니라 사고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동시에 그때 비 전하께 큰일이라도 났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그래도 요리는 멜리사 님이 가르쳐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스는 동방의 요리라면서 해괴한 음식을 만들던 앤시아를 보며 경악했었다.
요리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고 극구 말렸음에도 황태자비는 기어이 동방의 재료를 이용하여 괴작을 만들어냈다.
“모양이 독특해서 그렇지, 비 전하 나름대로 요리 철학이 있으시던걸요.”
“맞습니다. 동그랑땡이라는 건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도 좋아하셨지 않습니까?”
에드온도 멜리사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그 요리들은 너무 참신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니까 문제없습니다.”
황태자비가 만든 요리가 제국의 상식을 깰 정도로 독특한 건 사실이었지만, 멜리사는 황태자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게다가 돈을 주고 고용한 사용인도 아니고 부인이지 않은가?
“하긴. 두 분 말이 맞습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면 되지요.”
한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궁인들을 함부로 해고한 일을 추궁할지 모른다. 하지만 멜리사, 한스, 에드온 세 사람은 황태자비 전하께 해가 가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앤시아는 황태자 전하에게 미소를 되찾아준 소중한 분이었다.
주군인 블레이크의 아내이자, 이제는 자신들의 주인이기도 했다.
***
이번 일로 블레이크의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도 해고되었다.
그녀는 블레이크를 좋아하는 것처럼 굴다가, 그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자마자 돌변하는 인물이었다.
너의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고, 아무도 너 같은 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었지.
그 하녀의 대사처럼 블레이크의 몸에는 저주의 문장이 퍼져 있었다.
블레이크를 동정하거나 연민을 느끼는 자들이라도 저주의 문장에 직접 닿는 것은 꺼린다. 저주가 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녀로 바꾼다고 해서 원작의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므로, 나는 직접 블레이크의 목욕 시중을 들기로 했다.
“전하, 오늘부터는 제가 목욕하는 걸 도와드릴게요.”
“…….”
책을 읽고 있던 블레이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벌떡 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서 욕실로 들어가세요.”
“안 돼! 저주가 옮으면 어떻게 해!”
“안 옮아요.”
“불행해질지도 몰라!”
‘빛의 여신이 내린 저주의 문장을 보거나 닿으면, 저주가 옮거나 불행해진다.’
그런 헛소문 때문에 ‘저주의 계승자’는 외부에 나오지도 못하고 남쪽 섬에 유폐되었다.
블레이크도 저주의 문장이 나타나자마자 황태자직을 박탈당하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황제 텐스테온이 강력히 반대한 덕분에 계속 황궁에서 지낼 수 있었다.
“불행해지지 않아요. 그런 거 헛소문이니까 무시하세요.”
“헛소문이 아닐지도 몰라!”
블레이크는 강경하게 버텼다. 그 소문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원작에서도 자신과 함께 있으면 불행해진다는 말을 자조적으로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었는데.
“이미 얼굴도 보고 손도 잡았잖아요.”
“그건 작잖아. 몸에 있는 문장은 크다고!”
“헛소문이라니까요. 어서 오세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블레이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저주 때문에 몸이 약한 편이고 체구도 작았다. 나이도 내가 두 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신장도 힘도 내가 앞섰지만, 사내아이가 마음먹고 버티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하, 어서 오시라니까요.”
“흉측하단 말이야! 괴물이라고!”
블레이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터트렸다.
소문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을 보여주기 싫었던 거구나. 이미 얼굴과 손의 문장을 봤기 때문에 몸도 괜찮을 거라 여겼었는데, 실수였다.
앤시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자살 기도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전하….”
“앤시아가 보면 싫어할 거야!”
블레이크는 작은 몸을 웅크리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전하, 고개 숙이지 말고 저를 보세요.”
블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원래도 빨간 눈이 더 빨개졌다. 어쩜 저리 잘 우는지….
“제가 전에 말했죠. 전하는 괴물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하가 괴물이면 부인인 저도 괴물이게요?”
“앤시아는 달라! 앤시아가 얼마나 예쁜데….”
신랑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왼쪽 얼굴을 덮은 저주의 문장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흠칫 몸을 떨었다.
“흉측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렇게 만진다고 해서 불행해지지도 않고요. 저는 전하랑 결혼하고 매일 행복한걸요.”
“…행복해?”
“네. 전하가 제 남편이라 행복해요.”
“나도, 나도, 앤시아랑 결혼해서 행복해.”
블레이크가 나의 품에 안겼다. 나도 그를 꼭 안아주었다.
“전하, 다시는 괴물이니 뭐니 그런 나쁜 말 하면 안 돼요.”
“응.”
“다음번에 또 그런 말 하면 정말 화낼 거예요.”
“안 그럴게. 화내지 마.”
“그럼 이제 목욕할까요?”
그 순간 블레이크가 움찔 떨더니, 고개를 저었다.
“왜요? 저는 괜찮다니까요.”
“부끄러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오구구, 창피하셨어요?”
“노,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귀여워서 그렇죠.”
어차피 목욕 시중을 받는 동안은 속바지 같은 하얀 천을 두른다. 게다가 황족이나 귀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기 때문에, 이렇게 의식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무엇보다 장차 19금 피폐물의 서브 남주님이 되시는데 말이다.
“놀리는 거잖아!”
“그렇게 부끄러우셨으면서 그동안 시중은 어떻게 받으셨어요?”
“그건 앤시아가 아니었으니까….”
“저만 차별하시는 거예요?”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블레이크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면 안 돼!”
그는 옷을 벗기 전까지도 내가 자신의 몸을 보고 놀랄까 봐 걱정했다.
“이제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죠.”
“이거 보고 나 싫어하면 안 돼!”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정말 화낼 거예요. 이번엔 진짜예요.”
“나 떠나면 안 돼!”
“…….”
걱정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블레이크가 성인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
여주인공인 다이애나만이 그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 내 역할은 이 어린 소년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다가,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앤시아, 나 떠날 거야?”
새빨간 눈망울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겨우 달랬는데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나는 얼른 활짝 웃었다.
“아니요.”
거짓말….
“토끼 같은 남편을 두고 제가 어딜 가겠어요.”
이건 하얀 거짓말이다.
“정말이지?”
“그럼요. 저는 여기가 제 집인걸요.”
나는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자, 어서 목욕해요. 이러다 날 새우겠어요.”
“응.”
블레이크는 주저하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옷을 벗었다. 나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놀라는 표정을 보인다면 블레이크가 상처받을 거다.
셔츠를 벗자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인 작은 몸이 드러났다.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되었는데, 문장이 몸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나의 손을 잡았다. 혹여 내가 또 도망치지는 않을까, 호수로 뛰어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말라서 어떻게 해요. 전하가 너무 날씬해서, 제가 뚱뚱해 보이겠어요. 이제부터 살을 빼야겠다.”
“그러지 마! 앤시아는 많이 먹어야 돼!”
“많이 먹어요?”
“응. 지금도 얼마나 말랐는데.”
“전하보다 제가 더 큰걸요?”
“우웅!”
그는 나의 정수리를 올려보더니 입술을 툭 내밀었다. 나보다 작은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나, 금방 클 거야!”
“저도 클 건데요.”
“내가 더 빨리 클 거야!”
갑자기 승부욕을 불태우는 블레이크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응! 기대해!”
“자, 어서 욕조 안으로 들어오세요. 감기 걸리겠다.”
나는 그를 욕조 안으로 이끌었다.
블레이크의 피부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저주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은 까슬까슬 딱딱했다. 문장이 퍼질 때마다 살이 파이는 고통이 동반된다고 한다. 이 어린 소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나의 손이 닿자, 블레이크가 흠칫 떨었다.
“하지 마. 저주가 옮으면 어떻게….”
“안 옮아요. 한 번만 그런 말 하면 진짜 화낼 거예요.”
“응….”
나는 빛의 계승자가 아니기 때문에 블레이크의 저주를 완전히 풀지는 못한다. 하지만 벨라시안 가문이 지닌 빛의 힘이 나에게 조금이나마 있기를 바라며, 그의 등에 새겨진 검은 문장을 어루만졌다.
“앤시아 손은 약손, 우리 신랑 배는 똥배.”
“똥배 아냐!”
아니, 이건 그냥 노래인데…. 예상치 못한 격한 반발에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여긴 이런 노래가 없겠구나.
사과하려고 했지만, 막상 볼을 잔뜩 부풀리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조금 놀리고 싶어졌다.
“에이, 배가 나왔는데요.”
“이건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야!”
“그게 똥배예요.”
“나 이제 밥 안 먹을 거야!”
“그럼 계속 저보다 작을 텐데요.”
“어! 그럼 안 되는데….”
중대한 사실이라도 깨달은 것처럼 블레이크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은색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전하, 똥배 아니에요. 그러니까 많이 많이 드세요. 그래야 빨리 크죠.”
“응! 많이 먹고 빨리 클게!”
“네. 빨리 크세요.”
블레이크는 똥배가 아니다. 너무 말라서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약손이면 좋겠다. 블레이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도록….
***
블레이크는 한식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 주니까 예의상 맛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입맛에 맞아 보였다.
블레이크가 그렇게 좋아하니 요리를 만드는 나도 즐거웠고, 더 나아가서 본격적인 한식을 만들고픈 욕심이 생겼다.
‘아궁이랑 가마솥을 만들어 볼까….’
스토브와 오븐, 화덕으로는 한식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나는 빙의되기 전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한적한 시골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작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주워서 아궁이에 넣고,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오히려 이 세계로 떨어지기 직전, 하루하루 삶에 치여 바쁘게 살았던 기억보다 그 시절의 추억이 더 또렷했다.
가마솥은 그림을 그려서 대장장이한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가마솥이 오면 아궁이도 만들어달라 해야지.
화덕 문화가 발달했으니 아궁이는 쉽게 만들 거다. 아궁이를 만드는 원리는 알고 있으니, 여차하면 내가 직접 만들어도 되고. 이왕 제작하는 거 2개는 만들어야지.
가마솥이 뭐냐고,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신 거냐고 물어보면, 동방의 요리책에서 봤다고 대충 둘러대면 될 거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가마솥을 놓을 위치를 탐색하며 황태자궁 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엄마야!”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뒤에 서 있던 소년이 싱긋 미소 지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키가 훤칠하고 체격도 다부졌다. 짙은 눈썹, 또렷한 눈매, 약간 각이 진 턱선.
신비롭고 아름다운 외모의 블레이크와는 정반대로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선이 굵은 정석적인 미남이었다.
붉은 눈동자에 오만한 성품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 야수 같은 눈빛이다.
잠깐, 야수라….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야수 같은 눈빛, 목덜미에 남아 있는 오래된 상처….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이 소년은 ‘야수와 영애님’의 남자 주인공인 ‘리차드’다.
“리차드…?”
그래도 만에 하나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오만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랜만이다. 앤시아.”
아, 역시 맞는구나.
리차드는 황제의 동생인 카실 공작의 차남이었다.
황태자인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린 데다가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기 때문에, 카실 공작과 그의 아들들이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었다.
하지만 리차드는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천한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스테릭 제국은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적은 편이었지만, 노예의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게다가 리차드는 황족의 상징인 은발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노예였던 어머니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리차드의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텐스테온 황제가 세상을 뜨자, 동생인 아놀드 카실은 황태자인 블레이크를 폐위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이때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리차드였다.
그는 카실 공작의 세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으로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결국 황좌에 오른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는 다이애나를 이용해 블레이크마저 없애버리지.
나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다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텐스테온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거나 블레이크가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내가 막을 거니까.
우리 블레이크는 이대로 행복하게 지내다 저주가 풀리면 아무런 문제 없이 차기 황제가 될 거다. 리차드가 계략을 세우거나 끼어들 여지도 없이 말이다.
“무슨 일이시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나를 왜 찾아온 거지?
리차드는 계산적인 인간이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원작에서 다이애나한테 접근했던 것도, 그녀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었다는 걸 알고 이용 가치를 느꼈기 때문이다.(로맨스 소설답게 결국에는 여주인공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깨닫긴 하지만.)
백작가에서 버림받고 저주받은 황태자의 아내가 된 나한테는 어떤 용건도 없을 터였다.
“결혼을 하자마자 소란을 피웠더군.”
“소란이요?”
“궁인들을 모두 내쳤다지?”
“아….”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겠다. 내가 내보낸 궁인들 중에서 리차드가 심어놓은 첩자가 있어서 따지러 온 거구나.
조금 놀라웠다.
지금 리차드는 열네 살이었다. 하지만 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첩자를 심었다고 해서 놀란 건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블레이크의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도 원래 리차드의 사람이었고.
내가 놀란 건, 리차드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는 거다.
꽤 조심성 있는 성격 아니었어?
어려서부터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불태운 리차드는 온갖 계략으로 정적을 하나하나 제거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는데….
내가 첩자를 내치자마자 득달같이 쫓아올 줄은 몰랐다. 이건 자기가 첩자를 심었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요?”
“너답지 않게 경솔한 행동을 했구나.”
뭐지? 그는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했다. 리차드랑 앤시아 사이에 접점이 있었던 건가?
“경솔하다니요?”
“하멜 후작 가문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다. 후작의 장남을 감옥에 가둔 건 경솔했다. 다른 궁인들도 모두 폐하께서 직접 고른 자들이다. 함부로 내치는 건 옳지 않아.”
너랑 네 가족들이 심은 첩자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그레 웃었다.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곁에 둘 수는 없죠.”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는 아량이 필요한 법이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단번에 내친다면, 충심을 얻을 수 없지.”
필요 없어지는 순간 누구보다 가차 없이 주변 사람을 내치는 리차드가 할 말은 아니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늘어놓는 걸까?
“무례하군요. 영식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 보세요.”
리차드와 앤시아의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가 보려 했지만, 헛소리가 이어지니 짜증이 차올랐다.
불쾌하다는 의사를 단호히 밝히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리차드는 오히려 한껏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토라진 건가?”
“네?”
“내가 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서 삐친 거냐고.”
이게 웬 개소리야?
“너는 나를 좋아했잖아.”
그가 야수같이 거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리차드가 계략남이긴 하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왕자병도 아니고, 나랑 단둘이 있는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앤시아는 리차드를 좋아했었나 보다.
“앤시아, 네 마음을 거절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나는 서출이야. 어떻게 황제의 명을 어기고 너를 달라 말할 수 있겠어?”
그가 우수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신분의 한계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비련의 주인공 같다.
그가 계략남이 아닌 걸 몰랐다면, 깜박 속았을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이용하고 버린 건가? 어린 녀석이 아주 싹수가 노랗다.
원작의 리차드는 잘났지만 그만큼 오만하고 강압적이며, 야심과 집착 그리고 치밀한 계략으로 똘똘 뭉친 남자였다. 침대 위에서는 더티 토크를 일삼기도 했다.
우리 블레이크가 원작과 달리 아직 토끼라면, 리차드는 성인일 때나 지금이나 성격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활자로 봤을 때도 재수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짜증이 난다.
왜 저런 녀석이 인기가 많은 거야? 우리 블레이크가 백배 천배는 나은데?
“앤시아, 너는 착하니까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뭐래? 리차드 영식, 망상이 지나치시네요. 누가 그쪽을 좋아한다는 겁니까?”
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자, 리차드의 오만한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뭐…?”
“그리고 리차드 카실, 무례는 거기까지입니다. 일개 귀족 영식 주제에 황태자비에게 하대를 하다니. 지금 황실을 모욕하는 겁니까?”
“앤시아, 아직도 화가 난 건가?”
그는 당황하며 나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여자를 유혹하고 싶으면 스킨십부터 하고 보는 건 어렸을 때도 똑같군.
리차드의 손을 쳐내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전하….”
바로 블레이크였다.
블레이크는 리차드의 손을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앤시아가 싫어하잖아.”
리차드는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벨라시안 영애와 저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이며….”
“리차드, 벨라시안 영애가 아니라 황태자비야.”
블레이크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리차드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실언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해. 한 번만 더 황태자비한테 무례를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아.”
“네, 전하.”
리차드는 새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왜 저러지?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무시했다. 겉으로는 존중하는 듯하지만 사실 황태자의 권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텐데.
“꺼져.”
블레이크는 집어 던지듯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리차드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도망쳤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리차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보지 마.”
“네?”
“앤시아, 다른 남자 보지 마….”
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풀 죽은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안 봐요. 그리고 저건 남자가 아니라 ‘개’예요.”
“개?”
“완전 개자식이잖아요. 제가 자기를 좋아한대요. 미쳤나 봐요.”
“…안 좋아해? 리차드는 인기가 많잖아….”
블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는 질색을 했다.
“어우, 저렇게 느끼한 스타일은 딱 질색이에요. 저는 귀엽고 토끼 같은 남자가 좋아요.”
“헤헤.”
블레이크가 해맑게 웃으며, 나의 손에 자신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짜증 나는 인간 때문에 뒤집힌 속이 한 번에 편안해질 만큼 충격적인 귀여움이었다.
“전하는 어떤 여자가 좋으세요?”
“앤시아.”
“어떤 타입이 좋으시냐고요.”
“나는 앤시아가 좋아. 앤시아만 있으면 돼!”
블레이크가 내 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복슬복슬 귀여운 강아지 같아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나도 그를 꽉 안아주었다.
“저도 전하만 있으면 돼요.”
***
황태자의 주변에 심어놨던 첩자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앤시아가 수석 시종과 궁인들을 대거 해고한 것이다.
카실 공작과 이복형 프랭크는 분노했다. 고작 열 살짜리 계집애 하나 때문에 황태자의 감시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번 일로 자신이 심어놓은 첩자만 날아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이복형의 사람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다.
목욕 시중을 들었던 하녀는 꽤나 공을 들였었기 때문에 다소 아쉽긴 했지만, 자신에게는 더 훌륭한 카드가 남아 있었다.
바로 황태자비가 된 ‘앤시아’였다.
앤시아는 리차드를 좋아했다. 언제나 자신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감정을 숨길 줄을 몰랐다.
그녀는 백작 가문의 천덕꾸러기였다. 가족의 사랑을 갈망하는 어린 소녀를 구슬리는 것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앤시아는 황태자와 결혼하던 날 밤 자살하려 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괴물 황태자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겠지.
외로움과 절망에 사무친 꼬마를 유혹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황태자비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 열 명의 첩자를 부리는 것보다 효과적일 거다.
리차드는 가볍게 웃으며 황태자궁에 향했다.
“앤시아, 너는 착하니까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애정에 목마른 소녀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리차드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는 앤시아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단번에 빗나갔다.
페리도트를 박은 듯한 눈동자에는 리차드를 향한 짜증이 한껏 담겨 있었다.
리차드는 당황했다.
앤시아가 저렇게 예뻤던가?
원래도 얼굴은 예뻤다. 사교계는 어린 나이에도 화사하게 피어오른 다이애나의 미모에 주목했지만, 사실 객관적인 이목구비만 따지면 다이애나보다 언니인 앤시아의 미모가 훨씬 출중했다.
하지만 주눅 들고 소심한 성격과 애정에 목말라 있다는 게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은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빛을 잃은 보석은 돌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당당한 위엄을 갖춘 그녀는 그저 열 살 소녀가 아니라 완벽한 ‘황태자비’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황태자비가 돼서 약간 쓸모 있어진 멍청한 여자애라 여겼다.
그런데 하찮은 돌멩이가 아니라 보석이었던 건가?
“앤시아, 아직도 화가 난 건가?”
리차드는 왠지 조급해져서 앤시아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막히고 말았다.
황태자인 블레이크였다.
괴물 주제에 감히 이 몸을 건드리다니.
리차드는 저주의 계승자가 타인에게 저주를 옮긴다는 소문을 믿진 않았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저주받은 괴물을 상대해줄 생각은 없었다.
분노한 리차드는 블레이크의 손을 쳐내려 했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몸에서 강렬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붙잡힌 손을 통해 서늘한 마나가 리차드의 몸을 꿰뚫을 것처럼 들어와 거칠게 일렁거렸다.
“꺼져.”
블레이크가 손을 놓자마자, 리차드는 예도 갖추지 못하고 도망치듯 황태자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궁을 빠져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주받은 괴물 주제에 어떻게 이런 강력한 힘을 쓸 수가 있는 거지?
황제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황제가 황태자를 외면하는 척하지만, 실은 아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리차드는 불길함에 입술을 짓씹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나친 생각이다.
황제 텐스테온은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혼돈의 계곡으로 떠났다. 아들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리차드는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황궁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황태자의 손을 뒤덮은 저주의 문장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오싹한 저주의 기운이 흘러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미 저주에 먹히기라도 한 듯 어두웠던 황태자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리차드, 벨라시안 영애가 아니라 황태자비야.”
그는 리차드를 노려보며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황태자가 변했다. 힘을 사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무언가가 변했다.
설마 앤시아 때문인가…?
앤시아의 존재가 그 괴물에게 영향을 끼친 건가?
그 순간 리차드의 붉은 눈동자가 짙은 소유욕으로 번뜩였다.
재미있군….
리차드는 스스로 욕심이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황제’의 자리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탐이 나는 것이 생겼다.
‘앤시아.’
그 아이를 갖고 싶어졌다.
***
다음 날, 리차드가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왔다.
‘이 자식이 왜 이래?’
내가 이용 가치가 있어 보였나? 나를 유혹해서 황태자의 첩자라도 만들 생각인 거야?
제법 단호하게 거절한 것 같은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욕을 퍼부어줄걸.
나는 그의 선물과 편지를 돌려보냈다.
편지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멜리사가 말했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그 오만한 자식이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물은 그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도착했다. 물론 나는 계속 거절했다.
그러자 선물이 끊기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스케일이 커졌다.
“비 전하, 리차드 공자께서 선물을 보내 왔습니다.”
시종 한스가 고했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그냥 거절하라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선물 공세를 펼치길래, 아예 보고도 올리지 말라고 명을 내렸던 참이었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귀한 보물인지라.”
“보물?”
“네. ‘인어의 숨결’로 만든 반지입니다.”
미친.
나도 모르게 욕을 뱉을 뻔했다.
‘인어의 숨결’은 바다의 힘을 가진 마나석으로, 그 모양이 마치 진주처럼 생겼다고 하는 보석이었다.
전 세계에 몇 개 없는 특별한 보물인 ‘인어의 숨결’을 원작에서는 리차드가 다이애나에게 선물했었다.
그런데 다이애나한테 줄 선물을 왜 나한테 줘?
황태자궁에 첩자를 심고 싶어서 눈이 아주 뒤집혔나 보네.
솔직히 ‘인어의 숨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소설에서 아름답다고 극찬을 한 보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리차드 그 자식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 알고….
“필요 없어. 마나석 광산을 줘도 안 받으니까 다시는 보내지 말라고 해.”
“네. 비 전하.”
한스는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선물이 왔다는 말을 전하긴 했지만, 막상 내가 거절하니 기쁜 것 같았다.
***
한스는 기분이 좋았다.
앤시아가 오고 나서부터 어두웠던 황태자궁에 따스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리차드가 황태자비에게 관심을 보여서 잠시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분은 단호하게 리차드의 선물과 편지를 거절했다.
진귀한 보물들을 거들떠보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아했다.
앤시아는 매일 장부를 정리하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며, 괴상하지만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다.
밤이 되면 황태자의 목욕을 돕고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드셨다.
리차드 공자의 노골적인 구애는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스와 멜리사, 에드온은 그런 황태자비를 보며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인어의 숨결까지 거부하실 줄이야….’
전 세계를 뒤져도 서른 개가 채 되지 않는다는 보물을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한스가 마음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황태자를 위한 다과를 준비하는데, 작은 인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스는 소년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 주방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황태자는 좀처럼 자신의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블레이크에게 관심이 없었고, 궁인들은 그를 괴물이라 경멸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하거나 저주받은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슬픔, 분노, 외로움, 심지어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공허한 눈으로 혼자 침실에 머물렀을 뿐이다.
당장 저주에 먹혀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 메마른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숨은 붙어 있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황태자가 변했다. 웃고, 울고,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냈다.
여덟 살 소년답지 않은 허무한 절망으로 뒤덮였던 눈동자에 환한 빛이 어렸다.
다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앤시아가 옆에 있을 때뿐이고, 아직은 다른 사람이 익숙지 않은 듯 한스를 바라보는 표정이 다소 굳어 있었다.
“한스.”
“네, 전하. 말씀하십시오.”
앤시아와 결혼한 이후, 블레이크는 궁인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그저 명령을 내릴 뿐, 특별히 이름을 부르거나 궁인들과 관계를 쌓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앤시아는 언제 와?”
블레이크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한스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대장간에 가셨으니까 금방 오실 거예요.”
앤시아는 ‘가마솥’이란 걸 만들겠다며 대장간에 갔다. 결혼하고 나서 첫 외출이었다.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오랜만에 외출이시니 다른 곳도 들르시겠죠.”
“광장에는 위험한 사람이 많다던데….”
블레이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저주의 계승자다. 남쪽 섬에 유폐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반발하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런 황태자가 황궁을 떠나 자유롭게 외출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블레이크에게 광장은 미지의 세계였다. 혼돈의 계곡이나 북쪽의 설산처럼 오직 상상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블레이크가 읽은 소설 속의 광장은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 문제의 근원으로 묘사되었다.
“제도의 치안은 전 대륙에서 으뜸이죠. 게다가 에드온 경이 함께 가셨으니까 걱정하실 것 없으십니다.”
“응….”
“또 마음 쓰이는 일이 있으세요?”
블레이크의 표정에 어린 먹구름이 걷히지 않자, 한스도 걱정이 일었다.
“혹시 떠난 건 아니겠지….”
블레이크가 마음속을 계속 짓누르던 불안을 뱉어내었다.
앤시아가 처음으로 목욕을 도와주었을 때, 블레이크가 떠나지 말라고 하자 앤시아는 동요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블레이크는 그때 앤시아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어느 날 불쑥 자신을 떠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블레이크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저주에 걸린 그를 버렸다. 궁인들은 그를 경멸했다.
동정을 보이다가도 막상 저주의 문장을 보면 도망쳤다.
블레이크는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했다. 절망은 그의 친구였다.
하지만 앤시아가 떠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한스는 고개를 떨구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담담히 받아들이던 블레이크의 눈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전하께서 언제나 웃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감정이 마모된 것보다는 좋은 신호였다.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비 전하께서는 절대로 전하를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한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는 앤시아를 지켜보았다.
세간에는 저주의 계승자를 둘러싼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난무했다.
성별과 나이, 신분, 학식을 떠나 그저 불길하다는 이유만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열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헛된 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한스는 황태자를 향한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시아를 보며 반성했다.
그분은 블레이크 황태자에게 진심이었다. 절대로 황태자를 떠나실 분이 아니다. 이 작은 소년에게 상처를 줄 분이 결코 아니다.
“그럴까…?”
블레이크가 눈을 반짝거렸다. 한스가 괜찮다고 말해주자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 내리시는 분께서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시종에게 직접 물어보고, 또 저렇게 좋아하실까.
한스는 두 분이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멜리사, 에드온과 함께 대장간에 가서 가마솥 제작을 의뢰했다.
대장장이는 내가 그린 가마솥 그림과 설명을 듣고 흥미로워하며 도전 정신을 불태웠다.
생소한 물건이라고 무시하면 어쩌나 했는데,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의뢰를 마치고 대장간 밖으로 나오자, 멜리사가 물었다.
“비 전하, 다른 곳에 들르시겠습니까?”
“아니. 궁으로 돌아갈래.”
앤시아로 빙의한 이후 첫 외출이었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광경들이 신기했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다. 실제로 여러 장소를 돌아다닐 생각이기도 했고.
하지만 가마솥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게다가 블레이크를 두고 광장을 구경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황태자궁으로 돌아가자, 작은 그림자가 후다닥 뛰어와서 내 품에 쏙 안겼다.
“잘 다녀왔어?”
“네. 잘 다녀왔어요.”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위험한 일은 없었고?”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혹시 걱정하셨어요?”
“응. 앤시아가 너무 늦어서.”
역시 곧장 황궁으로 돌아오길 잘했다. 우리 신랑한테 단단히 걱정을 끼칠 뻔했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블레이크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서 그런지, 내 방보다 블레이크의 방이 훨씬 편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가면을 벗겼다. 그에게 적대적인 사용인들은 모두 내보냈음에도 블레이크는 언제나 가면을 착용했다.
아무리 익숙하다 하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편할 리가 없었다.
“후웅. 앤시아는 맨날 나를 벗기려고 해.”
이 19금 피폐물의 서브 남주님께서 요즘 잠잠하나 했더니, 또 오해받을 말을 하시네.
“남편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그러죠.”
“헤헤. 나도 앤시아를 보니까 행복해.”
“저랑 둘이 있을 때는 가면을 쓰지 마세요.”
“응. 알았어.”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왠지 오늘따라 유난히 안기는 느낌이다.
“전하,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없었어.”
“정말이요?”
“…솔직히 앤시아가 떠날까 봐 조금 겁났어.”
“…….”
“하지만 앤시아가 날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괜찮아.”
확신에 찬 목소리와 달리 그의 손이 떨렸다. 사실은 아직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떨어지려고 하는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안 떠나요.”
“정말?”
블레이크가 환하게 웃었다.
“네. 정말이죠. 하지만 만약 전하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곧장 물러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너무나도 싸늘한 반응에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랑은 정략결혼이잖아요. 폐하께서 정하신 거지, 전하가 원하신 것도 아니고요. 나중에 전하께서 성장하시면 진정한 사랑을 찾으실 수도 있잖아요.”
아스테릭 제국은 결혼을 일찍 하는 편이었다. 특히 신분이 높을수록 결혼이 빨랐다. 황족과 귀족들의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고 정부를 들이거나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이른 나이에 결혼한 경우 성인이 되어서 다시 한번 선택을 할 기회를 준다.
어렸을 때는 결혼 서류만 작성했다가, 성인이 되고 난 뒤 신전에 가서 정식으로 결혼 서약을 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여는 경우도 흔했다.
황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앤시아와 블레이크도 약소한 결혼식을 올렸을 뿐, 신전에는 고하지 않았다. 서로가 원한다면 헤어지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앤시아밖에 없어.”
블레이크가 낮은 음성으로 뱉었다.
“전하께서 어른이 되시고 저주도 풀리시면, 엄청 잘생기고 멋있어질 거예요.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두 전하를 좋아할걸요.”
블레이크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이애나를 사랑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앤시아가 가장 아름다워.”
“에이, 크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바뀌지 않아.”
“아직 어려서 그러시….”
“부인.”
블레이크가 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두 음절의 단어를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인’이라는 호칭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부인은 오직 앤시아뿐이야. 그리고 나는 앤시아의 남편이야.”
“전하….”
“부인, 내 말을 명심해.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혹시 부인은 다른 남자가 필요해?”
그저 어린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블레이크에게서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끌린 듯,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 없어요.”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내 진심이었다.
“저도 전하만 있으면 돼요.”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이애나뿐이다. 하얀 거짓말이라 해도 선을 넘지 않으려 했는데, 블레이크와 이대로 계속 함께 있고 싶다는 진심이 나도 모르게 나와버렸다.
위험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 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듯 블레이크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함께 있어 줘.”
“…….”
“욕심내서 미안해.”
담담한 고백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눈물이 차올랐다.
“안 죽어요!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앤시아,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정말로 안 죽어요! 저주 따위는 이겨내실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앤시아….”
“저는 빛의 힘을 지닌 벨라시안의 사람이에요. 제가 반드시 방법을 찾을 테니까, 그런 걱정을 하지 마시고 행복한 생각만 하세요.”
“응. 그럴게. 그러니까 울지 마.”
블레이크가 자신의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 마세요. 옷이 지저분해지잖아요.”
“괜찮아.”
“아휴, 목욕해야겠어요. 물을 받을게요. 전하께서도 어서 목욕 준비하세요.”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이크의 옷은 깨끗했다. 하지만 내가 물이 필요했다. 차가운 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작게 투덜거렸다.
“부인은 맨날 나를 벗기려고 해….”
“‘목욕’해서 벗는다고 말씀하셔야죠.”
얼른 19금 피폐물 서브 남주님의 언행을 단속했다. 그리고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블레이크의 얼굴이 그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욕을 도와준 게 몇 번인데 아직도 부끄럽나 보다.
“앤시아는 웃는 게 제일 예뻐.”
내가 웃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전하도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우세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스가 들어왔다.
“전하,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블레이크의 아버지이자,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인 텐스테온이 드디어 황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