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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9화 (8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9화

모리슨 알터가 배후도 없이 본인이 원해서 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에게 왕궁에 몰래 숨어 들 능력이 있을 리도 없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해도 레이커스만을 경계할 이유도 없으니까.

이번 일에는 배후가 따로 있는 게 틀림없다.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난 이 말도 안 되는 테러의 목적을 좀 알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라고 다들 생각해 버릴 거 아냐.’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면 그게 범인이 바라는 바일지도 몰라.’

지금 이 상황에서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니라고 설득한들, 도대체 누가 믿어 주겠는가?

‘더 최악인 건, 만약 범인이 바라는 게 그거라고 한다면…… 어쩌면 모리슨 알터도 공주님도 이 자리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럼 이번 사건은 그냥 미제 사건으로 남는 거다. 가뜩이나 수사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마당에, 이건 너무 최악의 이벤트였다.

‘배드 엔딩으로 향하는 급행열차가 따로 없네.’

난 흘끗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차려입은 화려한 슈트가 아깝게,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 따로 불려 나와 무릎 꿇려 있었다.

손발이 묶인 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를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는 대단한 무력을 보여 줬으니까.

그런 그까지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만큼의 상황인 거다, 지금이.

‘나도 모르게 그를 많이 믿었나 봐.’

대단한 왕궁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 것보다, 그가 저렇게 무력해진 게 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나한테 리볼버가 있긴 해. 하지만 공주님을 피해서 모리슨 알터를 맞출 수 있을까?’

모리슨 알터는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블란테 공주의 몸이 그의 몸을, 공주의 풍성한 흑발이 그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레이커스에게서 사격을 배우기 전이였다면, 상태창에 표시되는 조준점을 맹신하고 그것에 한번 걸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격에 너무 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동을 견뎌 내는 것, 내가 오른손잡이라는 것, 총을 쥐는 법인 파지법.

반반? 아니, 어쩌면 반도 안 될지도 모른다.

레이커스 덕분에 실력이 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다른 경우의 수는 뭐가 있지? 경비병들? 아니면……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국왕이 어떤 방법을 쓸 수가 있나? 아니면 경찰?’

아마, 해결할 방법이 없지는 않을 거다.

현대처럼 저격용 총은 없을 테지만, 여기에는 널리고 널린 게 왕궁 경비병이다.

시간을 끌기만 하더라도, 모리슨 알터는 반드시 잡힐 거다.

‘문제는…… 공주도, 모리슨 알터도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이 자리의 누구도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는 사이에 레이커스가 모리슨 알터를 향해 입을 뗐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어. 적당히 하고 그만둬.”

모리슨 알터는 레이커스가 갑자기 말을 걸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지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총을 든 손을 눈에 띄게 벌벌 떨었다. 그러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조, 조용히 해 주세요. 그, 그렇지 않으면 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조용히 할 건데, 그전에 당신은 여길 점거해서 뭘 어쩔 셈이지? 요구 사항을 먼저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

나긋한 레이커스의 목소리에, 모리슨 알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 요구 사항…… 그, 그건…… 그런 건…… 처, 처형…… 입니다.”

큰돈이나 금덩어리 같은 걸 요구했다면 좋았을걸.

‘……대체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난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마치 외운 대본을 읊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는 모리슨을 바라보았다.

“아, 아르비체, 아르비체 그린을…… 여, 여기 이, 이 자리에서…… 주, 죽여라. 그러면 공주를 놔, 놔주겠다.”

동시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흘끗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귀족들 사이에는 이제 술렁이는 소리조차 없었다.

‘아차.’

난 뒤늦게, 그 납치범이 줄곧 나를 노려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레이커스의 얼굴이 한껏 짜증으로 구겨진 것을 보다가, 나는 눈알을 왼쪽 위로 굴려 두 개 남아 있는 하트를 바라보았다.

‘……이건 예상 못했네.’

이제 이 반갑지 않은 테러 이벤트가 왜 생겼는지 알겠다.

처음부터 납치범이 내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정말로 내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날 잡아서 레이커스를 협박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레이커스의 연인이라고 소문이 난 내가 정말 죽어서 레이커스가 고통을 받든, 연인을 구하겠다고 저를 사랑하는 이 왕국 공주님의 목숨을 저버리고 지탄을 받든…….

레이커스가 어느 쪽을 골라도 고통받도록 만들고 싶은 거다.

‘진짜 그 정도 집착이면, 그 납치범은 레이커스를 사랑하는 거 아냐?’

아니, 다 좋은데…….

‘……레이커스의 관심을 끌겠다고 왜 자꾸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게 만드냐고.’

난 짜증을 내며 인상을 구겼다.

모니카를 구하겠다고 참여한 연회인데, 블란테 공주나 내가 죽게 생겼다.

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모리슨 알터는 내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역시 모리슨 본인이 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야. 모리슨도 피해자고, 나도 피해자고, 공주도 피해자야.’

역시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이벤트는 원래 게임 속에는 없었던 이벤트니까.

나라는 존재가 생겨남으로 인해서, 원래 금방 죽었어야 할 조연인 아르비체 그린이 지금까지 계속 살아 있으므로 인해서 모든 것이 뒤틀려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 사건의 해결 방법도 틀림없이 내게 있을 거야. 생각해. 생각을 해 봐. 모리슨 알터는 범인도 아닌데 왜 저러고 있는지.’

난 옆으로 길을 터 주는 귀족들 사이를 아주 느릿하게 지나며 모리슨 알터의 시야가 닿는 곳들을 한번 유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본 것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지……?’

“거, 걸음이 너, 너무 느려!”

다시 한번 돌아보려는데, 모리슨이 나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재촉해 레이커스의 곁을 지나는데, 그의 잿빛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아직, 빛이 살아 있었다.

그는 의지가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레이커스가 뭘 할 수 있겠어?’

자칫했다간 내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나는 머리를 팽팽 굴리며 모리슨 알터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레이커스의 옆자리에 가서 섰다.

돌아서자 귀족들의 얼굴들이 잘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감히 귀족들의 연회를 망쳐 놓는 모리슨에 대한 불쾌함과 분노, 그리고 나에 대한 존경 같은 것들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눈에 내 당당함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의연할 수 있는 건 내게 마지막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공주도, 나도 동시에 살 수 있는.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려 시야의 왼쪽 위에 표시된 두 개의 하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하트 하나를 여기서 소진하고 돌아간 다음 진엔딩을 다시 노려?’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안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거쳐 온 루트를 더 빠르고 깔끔하게 지나올 수 있기도 하고.

어쩌면 아이템이나 돈 파밍도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쩐지 싫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문득 레이커스가 했던 말이 이 순간에 갑자기 떠올랐다.

‘이번 한 번의 삶에 모든 걸 걸겠다고 결심했으니까.’

레이커스의 말의 뜻이 내가 이해하는 뜻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로맨틱하자고 해 본 소리일 게 분명하지.

그는 게임 속 사람이지 플레이어 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갑자기 심장을 때렸다.

‘정말로 나야말로 이번 생에 걸고 싶어.’

호감도 창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내게 소중해져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배드 엔딩을 본다는 건, 이제 그냥 진엔딩으로 가는 루트에 실패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나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루나와 샤인이 나를 잊어버리길 바라지 않았고, 르뮈에와 밀로라드와 라떼와 모르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공주님이나 앰버와도…… 그리고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레이커스와도.

그렇게 생각하자, 순식간에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아, 아르비체 그린은…… 무기를 하나 골라. 처, 처형당할 땐 좋, 좋아하는 무기로 하게 해 주지.”

모리슨 알터가 더듬더듬 말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난 경비병들이 내놓은 무기들이 한 데 쌓여 있는 것을 흘끗 바라봤다. 그중에는 총기도 있었다.

난 좀 놀라서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저기서 뭘 고른다 해도 그에게 덤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정말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는 범인이다.

‘……나는 힘없고 연약한 여자라서?’

아마 그렇겠지.

‘그리고 범인은 내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니까. 인질이 있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레이커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눈빛으로 내게 하는 말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어디 한번, 성과를 보여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난 레이커스를 향해 고개를 슬쩍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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