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화
‘그러고 보니 아르비체는 자택에서 죽었다고 했어’
나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사건 수첩을 펼쳐 들었다.
사건 수첩에는 여전히 아르비체가 그린 저택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 내가 그린 저택에 살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지 않는 건가?’
아르비체가 거주지를 옮긴다는 전제하에 모든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한낱 NPC 엑스트라에 불과한 배역이니까…… 아르비체가 다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은 산정되지 않는 걸까?
‘내가 한 말과 생각 그대로 움직일 거라는 가정하에 모든 게 바뀐 거라면…….’
한번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나는 가방에 든 짐을 황급히 방 안 여기저기 풀어 놓고, 누가 봐도 여기서 오래 지낼 사람처럼 배치한 뒤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 완전 꿀 직장인데 절대 사직하지 말아야지.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야지.”
유의미한 실험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소리 내 혼잣말을 하고 있자니 아주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거주지 : 레이커스 리어먼드 저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다시 사건 수첩을 펼쳤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건 수첩을 팔랑 넘겼다.
어지럽게 붙어 있는 스크랩 기사 옆에 써 있던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이름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당장 죽음을 선고받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의 일면에,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살인마가 살고 있는 고저택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막힌 거니까.
‘좋든 싫든 이 집에 살고 있어야 당장 살아남을 수 있는 모양인데.’
뭐야.
‘이게 대체…… 뭐야.’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대답했지만 문이 열리는 대신 다시 한번 소리가 났다.
똑똑.
“아, 나가요!”
급하게 일어나 문을 열자, 집사 블리에 씨, 그리고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은 큰 키의 눈부신 미남이 서 있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는 처음 그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살인자들의 밤>의 예약률을 엄청나게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을 만큼 잘생긴 놈이었다. 망한 게임이 되고 나서도, 다들 그의 얼굴 하나 때문에 환불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곱고 얇은 쌍꺼풀에 아이라인을 그린 것보다 길고 짙은 속눈썹, 그윽한 잿빛 눈.
좋은 놈도 아닌데 그리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정말 제작진들이 이를 갈고 캐릭터 디자인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포가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을 쉽사리 이겼다.
나는 공포심을 숨기려 애를 쓰며 뒤로 슬쩍 물러나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커스 님, 어쩐 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하군요. 좀 할 말이 있어서.”
레이커스의 차가운 눈이 이를 악다문 내 표정을 관찰하듯 쳐다보더니,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요새 영지 내에서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네…… “
“제가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그린 양께서 잘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샤인과 루나가 답답해하더라도 저택 안에서 지내고 밖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샤인, 루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으로 그가 아르비체에게 맡기고 있는 아이들일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내가 못 미덥다는 듯 바라보더니,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아르비체 그린 양,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들어요. 우리는 자선 사업 하자고 그린 양을 불러 놓은 게 아닙니다. 이 일을 못 하겠으면 그냥 못 하겠다고 하시죠.”
어쩜 말을 저렇게 싹수없게 할까?
나는 기분이 팍 상했지만, 아르비체 그린의 태도가 지금까지 미적지근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보면 고용주로서 못 할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원래의 아르비체였다면 이 말을 듣자마자 일을 팽개치고 나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럴 입장이 못 된다.
이 저택을 벗어나면 오갈 곳도 없고 돈도 없는 데다 살해 유력 후보가 되게 생긴 내 처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당분간은 여기 붙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마냥 식객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 봐야지.
다행히도 대학생 때 과외라면 지겹게 해 봤으니 나름 경력자가 아니겠는가.
난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공작님.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제가 지쳐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이제야 겨우 제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됐는데…… 너무 성급하신 것 아닌가요?”
레이커스의 잿빛 눈이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생물 보듯 바라보았다.
아주 의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더니, 그가 아주 작게 픽 웃었다.
“그런 눈도 할 줄 아셨습니까?”
“네……?”
“생각보다는 재밌는 분이신 것 같군요. 그럼, 그 실력 기대해 보죠.”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12/189)
호감도 퀘스트 : 샤인과 루나와의 식사]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호감도가 오른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다른 캐릭터에 비해서 레벨 1을 다 채우기 위한 필요 호감도가 너무 많은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퀘스트까지 있다니…….
‘살인마 주제에 가지가지 하네, 정말.’
“아, 맞다. 아침 식사 자리에 참석하실 거죠?”
“……네? 아…… 그게…… 물론이죠.”
<살인자들의 밤> 게임 속에서는 호감도 퀘스트가 있는 경우, 그 퀘스트 조건을 충족시켜야 다음 레벨의 호감도를 진척시킬 수 있다.
‘여기도 같은 시스템일까?’
만약 그렇다면 거절할 수는 없다.
내가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가 재밌는 일을 찾은 맹수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서 공포와 죽음이 떠오르는 것은 내 탓일까.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면, 이 이상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슬슬 방 안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다행히도 공작이 입을 더 열기 전에 블리에 씨가 먼저 나섰다.
“주인님, 또 들르실 곳이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셨는데, 돌아가신 주인님과 점점 똑 닮아지신다니까요…… 어서 가셔요.”
레이커스는 아직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먼저 발을 옮기기 시작한 블리에 씨를 흘끗 보곤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네,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린 양.”
“네, 샤인과 루나가 멀리 가지 못하게 신경 쓸게요.”
“감사합니다.”
탁.
그가 떠나자 곧장 문을 닫았다.
‘휴.’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도대체 살인마와 한집에서 어떻게 산담.’
나를 일부러 죽이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심장 떨려서 당장 죽게 생겼다.
나는 가볍게 씻고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고서 방 안 여기저기에 펼쳐 놓은 아르비체의 짐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아르비체는 검소한 건지 가난한 건지, 아무튼 그렇게 크게 가진 물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랍장이나 옷장, 책꽂이 여기저기를 보아도 생활에 필요한 것 이외에 취미 생활을 한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와 모자나 신발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고, 이불 한 채, 편지 한 뭉치, 수업할 때 쓰려고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수업 노트와 책들이 끝이다.
얇은 갈색 노끈으로 묶인 편지들을 뒤집어 겉봉만 죽 훑어보았다. 고모와 주고받은 것들 몇 개가 전부였다.
무슨 NPC 주제에 이렇게 속사정이 있고 일일이 설정이 다 있담. 이쯤 되면 설정 과잉 아닌가.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는 아까는 대충 훑어보고 말았던 편지를 하나하나 까 봤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부모는 두 분 다 돌아가셨고, 하나 남은 친척인 고모는 그녀를 짐짝 취급했다.
‘역시…….’
만약 그린가로 돌아갔다고 해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거다.
“어휴, 분통 터져.”
척 봐도 고모로부터도 등골을 빨아 먹히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누구나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거야 뻔하지만, 게임 속에서까지 이런 설정이 있을 이유는 대체 뭔가?
그럴듯한 정보는 없고 속만 터졌다.
나는 빠르게 흥미를 잃고 몸을 돌려 책상에 엎드렸다. 편지 더미는 책상 앞 책꽂이에 처박듯 꽂았다.
그때 문득 책상 아래에 작은 사진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수업 노트를 들춰 볼 때 떨어진 모양이었다.
두 명의 어린아이가 고저택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진이었다. 금발과 은발의 어린아이는 서로 닮아 있었다.
‘이 아이들이 샤인과 루나인가?’
사진을 아무렇게나 꽂아 둔 걸 보면, 아르비체 그린은 어지간히 의욕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에게 관심조차 없었고.
책꽂이에 잔뜩 꽂혀 있는 동화책에 그제야 시선이 갔다. 수업할 때 쓰는 건가?
아무래도 내일부터 당장 아이들을 돌볼 준비를 해야겠다.
프*세스 메*커를 비롯한 온갖 육성 게임에서 수업 파트는 자동으로 재생되고 심지어 스킵도 할 수 있는데 나는 어쩌다 공포 게임에서까지 수업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하나 제목을 읽어 보았다.
<마녀와 뼈와 살>, <인형의 저주>, <드래곤에게 물려 간 인간>, <발푸르기스의 밤> 기타 등등.
‘아니, 이런 것도 동화야? 공포 게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걸 읽고 아이들이 똑바로 자랄 수 있는 거야?’
이미 몇 번 아이들에게 읽어 준 적 있는 책들인지, 혹은 물려받은 책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손때가 잔뜩 탄 것들이었다.
‘정말 큰일이다, 큰일이야.’
나는 내가 아는 동화들을 들려주는 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교재들도 뒤적여 보았다.
그리고 수업 노트를 보니 지금 당장은 간단한 산수와 지리를 배우는 정도인 모양이다. 이 정도라면 그리 큰 문제는 없겠지.
내일 아이들과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대충 생각해 보다가, 나는 사건 수첩을 옆에 펼치고 빈 종이를 하나 더 꺼냈다.
펜을 몇 번 돌리다가, 계획을 적으려고 했던 종이 위에 간략하게 딱 한 줄만 적어 넣었다.
[살아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