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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55화 (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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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묵고 간 방을 정리하는 바쁜 엄마를 따라다니며 가현은 20분째 설득했다.

“나랑 서울로 가요.”

“난 그 사람들이 너랑 나를 찾고 있을까 걱정돼. 여기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이 엄마와 가현을 찾지 않는다고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었다.

“이젠 그들이 우릴 찾지 않아요. 언제까지 숨어 살 수 없어요.”

“너희 아빠처럼 죽는 것보단 나아.”

자신은 기억이라도 잃어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엄마는 그 기억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자신처럼 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찾던 중에 우리 잡아갔던 사람들이 장형원이라는 조직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들이 실수로 아빠를 죽였다고 했어. 사실인가 의심했지만 사실인 거 같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서울 가면 엄마에게 다 말할게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서울로 돌아가요.”

가지 않으려는 엄마를 겨우 설득해 짐을 꾸렸다. 엄마의 짐은 단출했다.

자신이 지한의 집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고 기사는 지한의 지시를 받았는지 엄마가 지낼 거처로 데려다줬다. 고 기사가 주는 열쇠를 받아 지한은 엄마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아담한 아파트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엄마는 당연히 가현이 함께 지낼 것으로 생각했는지 가현이 어디로 가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엄마 사실은 나 결혼했어요.”

엄마는 당황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뭐? 누구와 결혼을 할 수 있어? 6개월 만에 누구와 결혼했다는 거야.”

“날 두 번이나 구했던 사람요.”

가현은 지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지한과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그 사람을 만난 게 다행이라 말했다.

하지만 가현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를 만난 게 다행이 아니라 평생 답이 나오지 않을 인연이었다.

“엄마 내일 올게요.”

“그래 다음에 그 사람을 함께 봤으면 좋겠어.”

“네 조만간 같이 봐요.”

가현은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엄마는 창가에 서서 가현이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가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지한의 서재 앞에 서서 노크하려다 멈췄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그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기 두려우면서도 그가 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양가감정이 자꾸 혼란스럽게 했다. 가현은 마음이 잡히지 않아 돌아섰다. 문 앞에서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그와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나니 축 처졌다.

그런 그녀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켜보고 있어 주춤했다.

지한이 어두운 복도에 서서 가현을 보고 있었다. 소등해 어슴푸레한 조명에 가린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지한은 말없이 가현을 보았다.

지한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왜 노크를 안 하고 포기해?”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자정 넘어도 깨어 있는 건 알잖아.”

“…….”

그가 조목조목 따져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일 이야기해요.”

스쳐 지나가는 가현의 팔을 잡았다. 가현이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가현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어머니가 지내실 집은 괜찮았나?”

“네, 세심하게 마련해 줘서 고마워요.”

“지내시면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

가현이 그를 보던 시선을 떨구었다.

“괜찮아요.”

더 이상의 호의는 거절하는 가현을 지한이 내려다보았다.

“나도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어요. 엄마가 지내는 집에 가 있을게요.”

“기억 안 나나? 나와 결혼해서 내 여자가 되면 죽어도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한 씨.”

가현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여러 감정이 얽힌 가현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난 우리 가족에게 있었던 일을 평생 지우지 못해요.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잖아요.”

“…….”

마주한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현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나를 붙잡고 나와 살 수 있어요?”

“…….”

“내 원망받으면서 평생 살 수 있냐고요.”

“…….”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그를 보고 지내는 지금이 힘들었다. 바보같이 이 남자가 그래도 붙잡아 주길 바랐다.

마음은 갈팡질팡해도 잡아주지 않는 대답 없는 지한이 더 원망스러워 잡힌 팔을 비틀어 빼고는 뛰어갔다.

***

가현은 엄마가 지내는 집을 오가며 지냈다.

엄마를 찾았어도 가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엄마는 말 못 할 고민이 있는지 물었지만, 가현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가현과 엄마가 나타난 것을 알고 조금 남은 재산을 서로 가지려 싸우던 작은 아버지 두 사람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피붙이에게 아버지 장례식을 물으려 했지만, 그들은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형님 재산 공중분해 되고 형수님과 가현이까지 사라진 통에 장례 뒷수습하고 두 사람 찾는다고 돈을 더 썼죠. 돌아오시고 난감하시겠지만, 저희도 도와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예전보다 좋은 집에 형편이 좋아진 게 확연히 보이는데도 뻔뻔하게 두 사람을 찾느라 돈을 더 썼다며 앓는 소릴 했다.

그때, 가현과 한 살 터울의 사촌이 뛰어 들어오며 아빠에게 갖은 애교를 피우는 요구 사항에 헛웃음이 났다.

“아빠! 나 애들이랑 이번 방학에 유럽으로 여행 가기로 했어. 거기 피렌 호텔에서 효재 생일 파티하기로 해서 드레스도 필요해. 해줄 거지 응? 응!”

“철딱서니 없이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빠아.”

“큰어머니랑 가현이에게 인사부터 해.”

작은아버지는 눈치를 보며 말을 막았다. 두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던 사촌 동생은 오랜만에 보는 친척을 떨떠름하게 보고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큰어머니. 언니도 왔네.”

화려하게 꾸미고 명품가방을 든 그녀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가현은 한숨이 나왔다.

아버지는 두 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그만큼 작은아버지도 아버지를 따르고 우애는 돈독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그 동생들이 보인 행동은 씁쓸했다.

작은아버지 집을 나와 엄마는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삼촌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돈 말고는 할 말이 없어? 내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건 알아야 하잖아. 아휴, 당신이 바보였어. 저런 동생도 동생이라고 그렇게 끌어안고 먹고살게 해줄 거라고 그렇게 했어? 바보 같은 양반.”

남보다 못한 피붙이를 보고 엄마는 아버지가 안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에게 섭섭하지만, 자신은 욕할 수 없었다.

돈 앞에 형제애조차 없는 그들보다 자신이 더 배은망덕하단 생각을 했다. 돈보다 더한 악연을 놓지 못하는 친딸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빠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엄마,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갑자기 술은 무슨.”

“엄마도 속상하잖아.”

“술 내가 사 올게.”

엄마는 가현의 제안에 놀라다가 나쁘지 않았는지 술을 사 오겠다 일어나려 했다.

“내가 사 올게요. 엄마는 안 주나 마련해줘.”

술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오며 지한에 대해 엄마에게 숨기는 것이 죄책감이 들어 속상했다.

맥주에 엄마가 만든 소시지 야채 볶음을 먹었다. 엄마와 마주 앉아 술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딸이 크니 좋네. 술친구도 되어주고.”

“엄마 이렇게 술 잘 마셨어?”

“네가 네 아빠 때문에 술이 늘었잖니.”

“우리 아빠가 엄마 속 썩이긴 했지.”

“말해 뭐해.”

두 사람은 옛 추억이 새록새록 해 오랜만에 웃었다.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마시지 않던 술에 몽롱하게 취기가 올랐다.

이 와중에 지한이 떠올랐다.

그가…… 보고 싶었다.

‘미친.’

자신을 욕하며 입을 말아 물었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뭘 잘했다고 눈물이 나.’

그래도 이미 떨어진 눈물은 참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가현이 오늘 일이 속상해 우는 줄 알고 가현의 손을 잡고 달랬다.

“속상해하지 마. 너 좋은 사람 만났고 나도 이렇게 네 얼굴 보고 살면 됐지. 아빠도 이해하실 거야. 우리 잘 사는 모습 보면 편하게 지내실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가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우리 떠날까 먼 곳에 가서 둘이 살까?”

“결혼 한 애가 무슨 소리야.”

“엄마 말처럼 문경에 그냥 있을 걸 그랬어. 그랬으면 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현이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 당황했다. 엄마는 가현의 등을 두드리며 속도 모르고 이제는 괜찮다고 달랬다.

“엄마, 우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다 잊고 다시 시작해요.”

“너 힘든 거 알아. 그만 울어.”

가현이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엄마에게 떠나자 떼를 썼다.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가현이 술을 빌려 목놓아 울었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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