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라윤은 납치 사건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급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치졸한 행동에 지한을 옭아매려 엮이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백 회장의 생신에 지한은 잠시 얼굴을 비쳤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럴 정신이 없던데 안사람은 괜찮냐?”
소문이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선물은 그 사람이 준비했습니다.”
“그 와중에 고맙구만.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함께 봤으면 좋았을걸.”
“내년에는 함께 오겠습니다.”
백 회장은 예전과 달라진 지한을 보고 빙글 미소 지었다.
“아픈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결혼하더니 좀 바뀌었다.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는데 철이 좀 드냐?”
“결혼했으니 책임질 사람이 늘었을 뿐입니다.”
앞에 앉은 라윤은 지한의 달라진 태도에 불편했다.
지한이 가현과 결혼한 건 자신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한의 달라진 눈빛과 가현에 대한 태도는 불편하다 못해 불쾌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한의 모습이 낯설고 자신의 몫이 아닌 게 미치게 아까웠다.
“저 잠시 실례할게요. 일로 이야기 나눌 게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전 없어도 되죠.”
“일 봐라.”
라윤이 서재를 나가고 백 회장이 라윤이 나간 걸 확인했다.
“하필 인연도 묘하게 엮였어. 오래 살아도 살아봐야 아는 게 있구나.”
“……해결해 봐야죠.”
“네 와이프. 아버지가 죽고 자기 집을 풍비박산 낸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너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말이다. 좋은 인연은 아니야.”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 회장이 차를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시고 소파에 푹 기대었다.
“웬일이냐?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이 녀석.”
“저도 결정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손쓰기 어려운 일이야. 네 선택권이 필요할까? 결국 네 안사람이 견뎌내느냐지.”
“…….”
엿들으려 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두고 나온 물건을 가지러 다시 돌아서 문고리를 돌리고서야 알고 말았다.
“회장님께서 장형원 조직 손대는 걸 말리셨던 걸 들었어야 했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지. 사업으로는 내 예상을 빗나가서 잘 됐지만 결국 인연은 이렇게 되었어.”
백 회장은 안타까워하며 차를 마저 마셨다.
“그놈들도 너한테 고마워해야 해. 장형원을 네 녀석이 손에 넣고 그 바닥을 쥐락펴락하게 되고 견제하는 조직이나 나쁜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녀석들을 막았어. 그게 아니었으면 장형원 조직은 이미 공중분해 됐겠지.”
“하지만 깡패는 깡패지 뭐가 다르겠습니까. 결국 제가 시키지도 않은 과잉 충성으로 이런 참극을 만들었죠.”
“시간이 가면 좋든 싫든 해결이 될 거다. 시간에 맡겨.”
지한이 가져온 선물을 열어본 백 회장은 가현이 선물한 다기를 아주 흡족해했다.
이후 라윤은 선물한 당사자 때문에 보기 싫어도 백 회장은 가현이 선물한 다기를 이용해 매일 보아야 했다.
청록색의 다기에 차를 우려내며 백 회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악연이야 악연.”
라윤은 열었던 문을 소리 없이 닫고 자리를 떠났다. 창밖을 바라보며 라윤이 생각에 빠졌다.
생각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골은 아무리 생각해도 라윤에게는 기회였다.
가족과 엮인 악연은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랑만으로 살기엔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너무 큰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다.
라윤은 아버지와 지한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생각보다 두 사람 사이 문제가 빨리 생겼네.”
그녀의 인생도 기구하다 생각하지만 그런 연민으로 지한을 놓칠 마음은 없었다.
라윤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정가현 씨 오랜만이에요. 나, 백라윤이에요.”
- …….
“내 연락 달갑지 않겠지만 중요한 일이에요
- 무슨 일이시죠?
“우리 만나죠. 만나서 이야기해요.”
자신감 있는 표정의 라윤은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라윤은 이번 같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 기회는 놓치지 않을 거야.’
***
그녀가 일방적으로 끊은 전화에 화가 났지만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걱정됐다.
가게 문을 열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녀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검은 슬랙스에 타이 블라우스는 그녀를 더 자신감 넘치는 지식인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정가현 씨.”
“안녕하세요.”
가현이 최대한 태연하게 인사했지만, 경계는 티가 났다.
라윤은 자리에 앉아 음료를 주문하고 가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부럽기까지 했다.
“무슨 일로 만나자고 했죠?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너무 무례했어요.”
“내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일방적이어서 미안해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사과는 필요 없었다.
“용건이 뭐죠?”
“납치사건 이야기 들었어요. 유감이에요.”
“그 말 하려고 부르시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맞아요. 그 일 이후로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자 그녀가 본론을 말했다.
“지한 오빠 때문이라면서요. 아버지 사망사고와 기억상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아버지 생신날 지한 오빠가 인사차 왔죠.”
라윤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와 자기 일을 다른 이가 알고 있다니 불쾌했다. 그것도 지한을 탐내는 라윤이 안다는 건 가현을 민감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회생 불가능한 관계 이야기를 듣고 놀랐어요.”
“회생 불가능? 그걸 누가 판단하죠?”
따지고 드는 가현의 전의는 그녀의 질문에 무너졌다.
“서로가 그걸 알고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과 함께 산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는 괜찮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난 지한 오빠를 잘 알아요.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가현이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이 그에게 매달려 했던 결혼이었다. 앵무새처럼 ‘결혼해요’를 반복했던 결혼의 실체를 듣고 나니 아팠다.
외사랑은 이제 잡을 명분도 없이 누가 보아도 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라윤이 대표로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추진하는 결혼을 피하려고 당신을 택했다는 걸 모를 줄 알아요?”
“…….”
“차지한은 당신을 사랑해서 택하지 않았어요.”
선뜻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쯤에서 지한 오빠와 마무리해요. 서로에게 상처예요.”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데 그래도 그를 놓을 용기가 아직 없었다. 라윤이 나서 하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우리 두 사람의 시작이든 끝이든 그건 우리 둘이 결정해요. 백 본부장님이 나서서 헤어져라 말할 일이 아니에요.”
“난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지한 오빠는 충분히 힘들어하니까.”
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 든 가현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걸어갔다.
“만약 헤어져도 다른 사람 말 때문에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다른 이도 아닌 그녀에게 듣는 지한의 상태가 불편했다.
‘그는 힘들어한다.’
라윤은 어떤 말보다 지한과의 관계를 마무리하길 권유했다. 시끄러운 마음을 겨우 잠재우고 있던 가현은 작은 돌에 파문이 일듯 마음속이 소란스러워졌다. 속 시끄럽던 마음은 그녀의 말에 더 흔들렸다.
자신보다 한 뼘은 가까워 그의 상태를 알고 말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가현은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슴이 휑했다.
“아직은 아니야. 난 그 사람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 바람이 불었다.
라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은 아팠지만 그를 놓는데도 시간은 분명 필요했다.
한 번 열린 문은 쉽게 닫을 수 없었고 아직도 그만 보면 설레는 마음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루에 여러 번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해도 아직은 이라며 마음은 제동을 걸었다.
지한은 어떠하든 그에게 열린 마음의 문을 닫으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최대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어도 보았고 장원댁이 하는 음식을 배워보거나 돕기도 했다.
그의 결혼생활이 일상인 것처럼 조용히 지금을 넘기고 싶었다.
지한과의 관계를 오래 유지해 보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세뇌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사막에서 함께 봤던 별이 쏟아지던 밤하늘, 그와 나누었던 온실에서의 뜨거운 정사, 자신의 숨을 잠재우던 그의 숨결.
어느 것 하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잊히긴 힘들었다.
가현은 각오하고 밀어낼 준비를 했지만, 그의 목소리만 들으면 무너졌다.
‘가현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차곡차곡 쌓아가던 마음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