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 밤
01
새벽녘 서울 외곽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단 한대였다. 차량이 오가지 않는 도로는 옅은 안개까지 깔려 을씨년스러웠다.
작은 소리까지 예민해질 정도로 고요한 밤을 달리는 차 안의 공기는 밖을 보는 날카로운 남자의 눈빛만큼 싸늘했다.
유독 말썽이던 사업체 하나를 박살 내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인생 또한 바닥을 치게 만든 날이었다. 단 10분 만에 모든 것을 일단락하고 돌아서 차를 탄 남자는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코너를 돌아 경기도 외곽으로 빠져나가 2차선 도로를 따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은신처로 향했다. 종종 큰일을 치르고 나면, 휴식을 위한 펜트하우스로 잠적 아닌 잠적을 하곤 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얼굴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창밖을 응시하던 지한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던 참이었다.
끼익!
급브레이크를 밟은 명 비서가 연신 고개를 돌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안 다치셨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상한 물체가 튀어나와서 부딪힐 뻔했습니다.”
그때 차 보닛을 짚고 일어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으아아.”
명 비서는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 괴성을 질렀고, 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흰색 옷을 입은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보닛을 짚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눈가는 눈물로 얼룩져 있고 얼굴과 머리조차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진흙 같은 더러운 것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여자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는데도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에 자꾸 눈길이 갔다.
여자는 반응 없는 차가 떠날까 불안했는지 급하게 보조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도와주세요. 제발.”
놀란 명 비서와 짜증 나는 상황에 휘말린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던 지한도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여자는 다짜고짜 뒷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열린 문을 사이로 여자를 마주했다.
찢어진 치맛단으로 허벅지가 훤하게 드러나고 흰 원피스에 군데군데 피가 스며들어 엉망이었다.
누군가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한 듯한 행색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가시면… 죽어요. 제발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하는 말에 지한은 미동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는 애가 탔던지 덥석 지한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잡힌 팔로 그녀의 열기와 떨리는 손이 느껴졌다.
“딱 한 번만 112에 연락만이라도 해주세요. 저쪽에….”
급하게 말을 이어가던 찰나 여자의 눈물 가득한 눈동자가 서서히 감겼다. 동시에 여자의 몸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그가 무너지는 여자에게 팔을 뻗어 반사적으로 받았다.
팔에 안긴 여자의 몸은 불덩이였다. 지한은 정신을 잃고 축 처진 여자를 보며 괜한 상황에 휘말렸다고 생각했다.
“젠장.”
명 비서가 운전석에서 내려 달려왔다.
“어떻게 합니까? 제가 여자분을 조수석에 태우겠습니다.”
명 비서가 여자를 받아 안으려는 걸 제지했다.
지한이 차에서 내려 여자를 뒷좌석에 눕혔다.
“됐어. 병원으로 가. 그리고 재킷 벗어.”
“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 네 알겠습니다.”
명 비서가 영문도 모른 채 벗은 재킷을 지한이 낚아채어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지한은 옷의 기능을 아슬아슬하게 하는 흰 원피스가 신경 쓰였다.
“뭐해? 운전 안 해?”
“네, 출발하겠습니다.”
당황해 서 있는 명 비서를 향해 삐딱하게 말하며, 지한은 먼저 조수석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늘 자신이 운전하거나 뒷자리에 앉았지, 보조석에 앉아본 기억이 많지 않았다. 그만큼 고용한 자들과의 선을 지키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만큼 보조석에 앉은 오늘은 특이한 날이었다.
차를 출발한 명 비서는 가까운 병원을 찾는 듯했다.
티끌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일해 온 차지한을 끌어 내리고 그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다.
일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그에게 납작 엎드려 있는 이들도 그가 허점을 보이면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를 일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 하나로 빌미를 줄 수는 없다.
지한의 눈이 차게 식었다.
“서 닥터가 있는 병원으로 가.”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 지한의 생각을 읽어낸 명 비서는 빠르게 세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도 오랜 기간 그를 따른 수족이라 눈치가 빨랐다. 지한이 유일하게 두말하지 않는 자이기도 했다.
미리 명 비서가 전화로 상황을 전달해, 서 닥터가 응급실이 아닌 후문 쪽 외진 입구에 스트레쳐 카를 가지고 대기해 있었다.
차를 세우고 지한이 보조석에서 내렸다.
“뒷좌석.”
서 닥터의 지시에 차 문을 열어 본 의료진이 여자를 보고 순간 당황했다. 진흙으로 엉망인 몸에는 팔목과 발목에 묶였던 자국과 군데군데 피멍 자국이 선명했다. 거기다 찢어진 흰 원피스에 묻은 핏자국들은 보통 일이 아니라 말해 주고 있었다.
의료진이 여자를 안아 스트레쳐 카에 뉘는 걸 보고 지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 닥터의 눈이 커졌다.
“저 여자는 누굽니까? 무슨 일입니까?”
평소라면 단번에 지한에게 질문을 쏟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생전 가야 허점 없던 그에게는 여자라고는 주위에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의사라도 심상치 않은 상태로 실려 온 여자를 보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병원과 믿을 수 있는 의료진을 급하게 차출했다. 서 닥터의 의문점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했다.
“나도 알고 싶군.”
서 닥터의 질문에 토를 달지 않고 지한도 진심을 말했다. 지한이 스트레쳐 카가 이동하며 열린 자동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가 뒤를 따라붙는 서 닥터에게 말을 함축했다.
“뭐든 해서 깨어나게 해.”
“네, 알겠습니다.”
서 닥터가 검사 조치를 지시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서민호 교수라 명패가 붙은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상석인 방의 주인이 앉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피곤한 하루 끝이 좋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자연스럽게 지한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가지고 들어와 그의 앞에 놓았다. 주인도 없는 방안은 짙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고 서 교수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지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검사 중입니다.”
서 교수가 지한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차 대표님, 저 여자분 상태를 보아 성폭행 여부를 검사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지한의 눈이 날카롭게 서 교수를 쏘아보며 음습해졌다.
“누가?”
“네?”
“누가 저 여자 몸을 검사했나?”
“제 밑에 있는 여자 레지던트가 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지한의 질문에 당황한 서 교수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서 교수.”
“네, 차 대표님.”
“내 약점이라도 잡고 싶나?”
보통 사람보다 큰 체격, 음습한 낮은 목소리, 날카롭게 위험한 존재인지 가름하는 눈빛.
누구라도 거짓말은 할 수 없을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낮은 지한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던지 서 교수는 바짝 엎드렸다.
“아닙니다.”
“궁금한 건 참을 줄도 알아야 해.”
지한은 각을 잡고 대답한 그에게 경고하고는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 피곤한 머릿속을 각성시켰다.
잠시 후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서 교수가 통화를 끝내고 그녀의 검사 상황을 보고했다. 서 교수는 지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환자는 심한 탈수증상으로 탈진한 상태입니다. 크게 문제 되는 상처는 없고 팔다리에 묶인 타박상과 일부 몸에 있는 멍과 작은 상처만 있습니다. 지금은 응급처치와 검사를 하고 병실로 옮겼습니다.”
“언제쯤 깨어나겠나?”
“열이 떨어지면 의식을 찾겠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
지한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어 서 닥터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가보시겠습니까?”
“병실은 어디지?”
“문제 소지를 생각해서 VIP 305호로 옮겼습니다.”
지한은 위치를 확인하고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서 닥터와 밖에 있던 명 비서가 뒤를 따랐다.
병실에 도착해, 서 닥터는 수액과 의료진이 처치한 조치를 확인했다.
“잠시 나가 있지.”
지한의 말에 방안에는 명 비서와 둘만 남게 되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지한이 침대에 누운 여자를 살폈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이 20대를 겨우 넘긴 거로 보였다. 목에 난 상처와 턱에 남은 멍, 생채기가 난 손목에 남은 묶인 흔적과 멍에 눈길이 갔을 때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무엇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 비서.”
“네, 대표님.”
“한적한 시골 2차선 도로에서 감금되었다가 도망칠 확률은 얼마일까?”
“네?”
“그렇다면… 그 꼴로 60킬로로 달리는 차에 뛰어들 확률은?”
의중을 알 길 없는 상사의 질문에 명 비서는 당황했다.
“네? 글쎄요.”
“…희박해.”
단정하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일할 때 이성적인 판단으로 확률 싸움을 하듯 말하는 말투였다.
지금까지 주위에 인간들이 약점을 잡으려 붙였던 여자들과 다를 확률이 희박하다고 생각한 지한에게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알아봐. 발견된 근처도 탐문하고.”
“네 알겠습니다.”
지한이 돌아서 나오다 여자를 다시 한번 쏘아보았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