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탈진해 초췌하지만 투명할 정도로 뽀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지한은 되려 인상을 찌푸리고 더는 볼일이 없는 듯 병실을 나가 버렸다.
“다른 이상한 점이나 나온 물건은?”
“지니고 있던 물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네, 액세서리조차 착용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
병실 밖에서 기다리던 서 교수에게 더 나올 정보가 있는지 물었지만, 실속이 없었다. 몸뚱이 하나 외엔 흔한 귀걸이조차 없는 것이 더 걸렸다. 가타부타 다른 지시도 없는 지한이 발길을 돌렸다. 지한을 따르던 서 교수가 눈치껏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가 굳은 얼굴로 뒤따르던 명 비서를 불렀다.
“그만 가지.”
“네, 대표님.”
명 비서가 먼저 사라지자, 로비에 선 지한은 서 교수에게 당부했다.
“깨어나면 연락해. 도망가지 못하게 사람 붙이고.”
지한의 눈이 차갑게 서 교수를 내려보았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군인처럼 각을 잡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로비에 서자 서 교수가 달려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지한이 차를 타고 출발하기까지 서 교수는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
눈을 떴을 때는 실내를 밝히는 환한 햇살에 낮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눈이 부셔서 빛에 적응하는 데 오래 걸렸다.
꼭 밝은 빛을 처음 겪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고 손에 꽂힌 링거줄이 불편했다. 손을 들어 올려 주렁주렁한 링거줄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건 왜? 병원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간호사를 휙 돌아보았다. 그녀가 깨어 있는 자신을 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이제야 깨어나셨네요. 의식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안 깨셔서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들….’
누구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요?”
간호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푸근한 인상으로 링거를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서 환자가 깨어나지 않는데 걱정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왜 병원에 있죠?”
머릿속이 백지라 질문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제가 아침에 보고받은 건 새벽에 의식을 잃고 들어오셨다 들었어요. 열도 많이 나시고 찰과상과 탈수 증세까지 있었다 들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
묘한 가현의 표정을 보고 걱정이 됐던지 그녀의 몸을 살피며, 질문이 이어졌다.
“혹시 크게 불편하신 곳이 있으세요?”
“몸이 무겁고 조금 쳐지는 것 외엔 없어요.”
“그건 열 때문에 더할 거예요.”
미간을 찌푸린 가현의 표정이 돌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라는 존재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생소했다.
생각을 떠올리려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말이 없는 가현에게 다행이라는 듯 간호사는 아침 보고를 위해 방을 서둘러 나갔다.
“우선 깨어나신 건 말씀드리고 올게요. 다행이에요. 오늘 안 깨어나셨으면 심각했을 거예요. 쉬고 계세요”
“…….”
미소를 지은 간호사의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곤 이마에 올려진 손을 내려 얼굴을 쓸어보았다. 분명 자기 얼굴인데 떠오르지 않았다.
다급하고 애가 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깡마른 여자가 창백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낯선 얼굴에 낯이라도 가리는 것처럼 얼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쓸어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인상을 썼다. 찌푸린 얼굴이 두려움을 담고 눈을 맞추었다.
깨어나 점점 각성이 되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지금 상황이 피부로 와 닿았다. 심각함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렵기까지 했다.
기억이 없다는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서 닥터는 관련 의사 몇몇과 함께 입원실을 찾아왔다. 뒤에 선 의사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무얼 쓰는지 열심히 써 내려갔다.
서 닥터는 안경 너머로 속내라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가현에게 물었다.
“환자분 정말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까? 이름이나 사는 곳 말입니다.”
“네, 정말 모르겠어요.”
“몇 년 몇 월 며칠 인지도 기억이 없나요?”
딱딱한 질문에 오히려 답답해진 가현은 자신을 입원시켰다던 사람이 궁금했다.
“네, 아무것도…… 저 입원시킨 분이 누구예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습니다.”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 절 알고 있으니 입원시켰겠죠.”
그렇게 마지막 희망이라도 걸고 싶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 것 같았다.
“우선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죠.”
서 닥터가 차트에 무언갈 꼼꼼히 적어 내려가더니 뒤에 선 의사에게 차트를 넘겼다. 그는 더는 가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며칠 후 정신과 전문의를 만났고 결국, 가현은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란 병명을 판정받았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충격에 따라 기억상실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현에겐 그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이길 바랐지만,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기억은 늘 백지상태라 실망만 더해갔다.
역시나 실망이 하루 더 쌓이는 날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병실 벽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입원해 깨어난 이후 기억도 없는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게 아침의 시작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키가 큰 건장한 남자가 문을 열고 저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기억도 없지만, 상대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뜯어보는 차가운 시선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들어섰다.
시선을 떼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만 있자 남자도 말이 없었다.
남자도 자신을 관찰하는 듯했다.
가현은 용기를 내어 뒤돌아서 그를 응시했다. 분명히 이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다급해졌다.
“저… 기억이 없어요.”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만 오고 갈 뿐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다.
남자의 말을 기다리며 기대했다.
“……그래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생각지 않은 대답이 돌아와 멍하니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라고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내가 누군지도 기억을 못 하는데 이게 큰일이 아닌가요?”
“그건 그쪽 사정이지.”
자비 없는 눈빛만큼 냉정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
“기억을 잃었다고요. 그쪽 기억이 아니니까 괜찮나요?”
“…기억이 아무것도 없나?”
약간 격양된 반응에 지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의심이 섞인 되묻는 질문에 화가 났지만, 그에게 정보를 들어야만 했다. 그 밖에 자신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스무고개를 하듯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한시라도 자신의 이름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저와 가족이세요?”
“난 그쪽 같은 동생은 없어.”
단호한 표정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이 남자는 내가 입원한 병실에 왜 있는 걸까?’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사이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럼, 혹시… 저와 사귀는 사이인가요?”
“내 곁에 여자 따위는 두지 않아.”
‘그렇다면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걸까?’
자신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에 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꼭 길을 잃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머릿속이 백지장 같아 막막했다.
남자는 지금의 상황이 참기 힘들다는 듯이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을 빼내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녀의 궁금증 따위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할애할 시간은 그 정도인지 그의 태도는 오만해 보였다. 병실 문을 여는 그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
병실 문을 연 남자가 사라질까 다급하게 문으로 걸어갔다.
“가지 말아요. 내가 누군지 말해줘요.”
손에 꽂힌 링거줄은 신경도 쓰지 않고 허겁지겁 지한에게 다가왔다. 링거줄이 당겨지고 결국은 바늘이 빠져 팔에서 피가 흘렀다.
지한이 가현의 꼴을 보고 눈앞에 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남자의 손은 체온이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무심하게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 커다란 손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
가타부타 말도 없는 남자는 가현의 다른 손을 잡아, 지혈하던 팔을 감싸 잡아 누르게 했다.
“누르고 있어.”
남자는 비상벨을 눌렀다.
가현은 맨발로 다시 지한에게 다가섰다.
“내가 누군지 말해줘요.”
“나도 몰라.”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왜 당신이 날 여기에 입원시켰죠.”
“…….”
그의 시선을 쫓아 눈을 응시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적어도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내가 알 권리는 있잖아요.”
“…….”
지한은 애원하는 가현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에 차갑게 얼어붙을 것 같았다. 뒤돌아 걸어온 그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말하는 내용은 냉정했다.
“엉망인 채로 내 차에 뛰어들어서 길바닥에서 주웠어.”
“주…. 주워요.”
생각지 않은 표현에 망연자실했다. 그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도 없이 냉정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