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10화 (10/11)

10장.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성취감은 기자로서 맛보았던 그 어떤 짜릿한 경험을 모두 초월할 것이었다. 끝이 났다! 더 이상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퇴고와 교정, 윤문 등의 많은 작업을 거쳐야 하지만 그녀가 의도했던 모든 목적이 포함되어 완성된 것이다.

그녀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라이에게 전화해서 그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현기증에 다시 의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현기증은 금방 사라졌지만 현기증이 가신 다음에도 그녀는 계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이에게 전화를 걸려던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이번 주에만 벌써 네 번째… 계속되는 증상이었다. 그렇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 계속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저 그 생각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책이 그녀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독차지했고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그녀는 자신을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원고를 완성한 지금 그녀의 무의식이 임신 사실을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탁상 위에 놓인 달력을 흘깃 본 후 그녀는 사카리아에서의 첫날밤이 그 날이었다고 확신했다.

"달리 언제 그럴 수 있었겠어?"

그녀는 혼자 무심코 중얼거렸다. 7년 만에 처음 라이와 관계를 가졌는데 바로 임신이 된 것이다. 스스로를 조롱하는 미소를 지었지만 곧 그 미소는 부드러워졌고 그녀는 달력을 가까이 끌어와서 날짜를 셌다. 이른 봄이 되면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새로운 출발에 어울리는 멋진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아기는 제대로 태어날 것이다. 이 아기는 단순히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일 뿐 아니라, 그녀와 라이를 이어주는 끈으로 그들의 결혼을 단단히 묶어 줄 것이다. 라이는 이제 수년 전보다 훨씬 더 훌륭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다큐멘터리 촬영 일정이 다음 달로 잡혀 있는데…. 라이는 그녀와 함께 가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 함께 떠났다가 돌아올 때까지는 임신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 없이 라이 혼자만 떠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또 다시 과거는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긴 시간을 떨어져서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우선 의사를 찾아가야 하고 모든 과정이 정상이고 여행이 아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필요한 비타민 섭취를 시작해야 하고 또 새로운 옷가지들도 장만을 해야 했다.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마칠 즈음이면 이미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 맞지 않을 테니까. 부풀어 오른 배로 뒤뚱거리며 걸어 다닐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첫 번째 임신 기간 동안 라이는 그녀의 옆에 거의 없었고, 그래서 모든 힘든 과정을 그녀 혼자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 스스로 처리했어야 했던 모든 일들, 침대 밖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려야 하는 그런 소소한 일까지도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의 해결할 때 그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 라이는 늦는다고 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밤 늦는 건지… 5시쯤 전화를 한 라이는 피곤에 지친 목소리로 아마도 8시나 그 후가 되어야 집에 도착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먼저 식사해."

그가 말했다.

"대신 뭔가 따뜻한 음식을 남겨 줘. 샌드위치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

실망감을 억누르며 그녀는 알았다고 말하고 대신 농담조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마감 맞추는 데는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 제안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가 한숨지었다.

"하지만 당신은 원고에 집중하도록 해. 가능한 한 빨리 집으로 갈게."

"오늘 원고 끝냈어요."

그녀는 수화기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 쉴 거예요."

그녀는 그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먼저 말했다.

"뭘 했다고? 오, 이런… 맙소사."

그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입은 듯 샐리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야근 대신에 당신을 데리고 나가서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축하해 줘야하는 건데… 정말 가능한 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겠어. 우리 둘만의 개인적인 축하시간을 갖도록 하자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당신, 피곤하잖아요."

샐리가 웃으며 말했고 그의 듣기 좋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곤해, 하지만 시체는 아니라고."

그가 더욱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도록 빨리 갈게."

미소 지으며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혼자 먼저 저녁 식사를 먹은 후 샤워를 하고 서재에 앉아서 그녀의 원고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행간에 고칠 말이라던가, 변경할 내용을 쓰면서 천천히 읽어 나갔다. 작업하는동안 엄청나게 집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원고를 옆으로 치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현기증이 덮치자 의자를 붙들고 잠시 서 있어야했다.

천천히. 이제 그녀는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기 억해야했다.

라이가 서재로 들어섰다.

비치는 검정 나이트가운과 로브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라이의 피로에 지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재킷을 벗어 옆으로 던지더니 넥타이를 풀어 그 위로 얹었다.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속옷만 입고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는 마음을 이해하겠어."

그는 그녀를 안아 올릴 듯 껴안고 그녀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아드레날린 주사라도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야."

"이런 장면을 너무 좋아하지는 말아요."

그녀가 경고했다.

"달리 할 일이 없는 관계로 일찍 샤워를 했을 뿐이에요. 많이 배고파요?"

"못 참을 정도로 고파"

그가 으르렁거렸다.

"기다리라고 할 거야?"

"식사 이야기하는 거 알잖아요!"

그를 보고 웃으면서 그녀는 문 쪽으로 가로질러 갔다.

"식탁을 차리는 동안 씻고 나와요. 음식을 따스하게 데워야겠어요."

"식당에 따로 차리지는 마."

고가 그녀에게 말했다.

"주방에서 먹는 것도 좋아. 치우기도 훨씬 간단하고"

그가 말한 대로 그녀는 그의 음식을 주방의 간이 식탁에 차려주었다. 곧 주방으로 들어온 라이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 이야기를 했으며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책을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았어요."

샐리가 반대했다.

"오늘부터 수정 작업에 들어갔거든요."

"에이전트에게 지금 당장 읽어 보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

라이가 주장했다.

"초고잖아. 바바라도 지금 당장 완벽한 원고를 기대하지 않을 거야."

"여자예요?"

샐리가 귀를 종긋하며 물었다.

"응, 여자야."

그가 눈빛을 빛내며 놀리듯 말했다.

"바바라 호프웰 이라는 이름의 깡마른 불도저 타입이지. 다만 나보다 20년 연상이니 손톱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샐리가 그를 노려봤다. 그녀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약 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잠시 자신이 그에게 너무 얕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왜 그리 급히 서두르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유럽에 있는 동안 당신이 원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우리가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그 책 문제를 처리하고 싶다고."

그녀를 일부러 도발한 것에 내심 화가 난 그녀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그를 일부러 도발했다. "이제 원고를 쓰는 작업이 끝났으니, 여기 하루 종일 집에만 머무르는 것에 대해 내가 싫증을 느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유럽을 헤매는 것보다 차라리 직업을 찾을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를 자극하고 싶었다면 결과는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다시 분노로 붉어졌다. 그는 포크를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식탁 위에 내려놓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는 자신도 일어서며 그녀도 따라 일으켰다.

"상처를 후벼 팔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전혀 놓치지를 않는군, 응?"

그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가끔은 당신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

그리고 그는 그녀를 그의 몸으로 바싹 잡아당겨 안고 그녀의 입술에 난폭하게 키스했다. 뭔가 그녀가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말 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고 그렇게 입술을 마주 댄 채 그녀의 무릎 뒤로 팔을 넣어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올렸다. 샐리는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갑작스럽게 그가 그녀를 획 잡아끄는 바람에 걱정스러울 정도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절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왜 그렇게 난폭하게 반응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상처를 후벼 판다는 표현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도 그를 화나게 해 버렸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자신이 유일하게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입술과 몸을 내주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과 몸을 굶주린 듯 갈구했다. 그의 입술이 상처를 주듯 난폭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다가 곧 반응을 구하는 달콤한 것으로 바뀌었고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격정적인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잠들 듯 말 듯한 상태로그에게 몸을 구부리고 붙인 채 특유의 남성적인 체취를 맡으며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복부를 어루만지며 둥그런 어깨를 따라 키스하고 있었다.

"너무 거칠었어? 혹시 아픈 곳은 없어?"

그는 중얼거리며 그의 난폭하기까지 했던 다급한 사랑의 행위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괜찮다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려다가 멈추곤 잠시 기다렸다.

"흠… 이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샐리는 깜짝 놀라서 벌떡 침대에서 될 듯이 몸을 일으켜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깜짝 놀라 거칠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오늘에야 겨우 알았는데?"

그는 그녀가 그를 오히려 놀래 켰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옆으로 세우고 있던 몸을 바로하며 털썩 베개에 누워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그녀를 품안으로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라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원고를 쓰는 일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날짜가 언제인지도 몰랐을 텐데. 달링, 당연히 알고말고. 이런 일에 완전 초보도 아닌데다가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거든. 임신했다는 것을 알면 내가 기뻐할까 봐 당신이 일부러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내 성격을 정말 굉장히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군요."

그녀는 약이 올라서 중얼거리고 고개를 돌려 장난스럽긴

하지만 힘을 줘서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가 아픈 듯 장난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곧 자신이 물었던 자리에 키스를 해 주고는 대들 듯 말했다.

"쌤통이네요."

"당신의 연약한 몸 상태를 고려해서 그냥 가만히 놔두는 거야."

그가 봐 준다는 듯이 말하더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가 꽤 오래 키스했다.

"사실… 당신에게 곧장 이야기하려 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잠시 후 고백했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그녀의 턱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녀는 그대로 꼼짝도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당신과 함에 유럽에 가고 싶어서요."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임신한 걸 알면 이곳에 있으라고 할까 봐 두려웠어요."

"절대 아냐. 예전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매일매일 당신 옆에 있을 거라고, 베인즈 부인. 물론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입회하고 싶어."

잠시 심장이 멈춘 듯하다가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입을 열기엔 감정이 너무 복받쳐서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온 힘을 다해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말했던 여러 가지들, 그리고 그가 절대로 말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라이가 그녀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라이, 오… 라이!"

그녀는 목멘 소리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녀가 보이는 격렬한 반응을 오해한 라이는 그녀의 머리를 꼭 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그가 그녀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아기는 건강할 거야. 내가 약속할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를 대령해 줄 테니까. 그리고 온 집안을 아이들로 가득 채우자. 두고 봐."

그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샐리는 그저 이 아기가 무사하기만 해도 만족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라이의 사랑이 있다면 그녀의 인생은 완벽해질 것이다. 유럽으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들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다. 옷가지뿐만 아니라 라이의 옷들도 챙겨야 했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마감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라이는 매일 야근을 했다 그녀도 초고를 재검토하는 작업으로 정신이 없어서 거의 다른 일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의사는 그녀의 건강이 양호하며 조금만 더 체중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진단했고, 아기는 별 탈 없이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식사를 제대로 먹는 것을 꼭 지키기만 한다면 유럽으로 여행가는 것도 괜찮다는 말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4개월 전에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라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 자리로 그녀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취했던 강제적인 방법은 여전히 화가 나지만 그가 그녀의 거부를 최종적인 대답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내심 기뻤다. 그리고 불안정했던 사춘기 소녀 시절에 그를 사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아마도 조금은 더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느낌도 더욱 강해졌고 생각과 감정도 더욱 성숙되었다.

요즘 들어 그는 그녀가 그의 눈이 뜨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거의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행동했고,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자랑스러워해서 그녀의 목에 곧 출산 예정이라는 푯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가끔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불행은 그들이 유럽으로 출발하기로 한 날짜로부터 1주일 전에 찾아왔다.

사진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처럼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따스한 햇살과 푸르디푸른 하늘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가을 날, 하지만 대기는 어딘지 모르게 다가오는 겨울을 느끼게 해 주는 듯 쌀쌀함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런 날씨였다. 샐리는 진짜 마지막으로 쇼핑을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물건들을 사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샐리는 쇼핑해 온 옷가지들을 이것저것 펼쳐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예감은 늘 정확했지만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고 가정부인 허먼 부인에게 자신이 문을 열려 나가겠다고 말할 때,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하였다.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문을 열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코럴 월리엄스의 모습을 보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모델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에 언뜻 보이는 상처 입은 듯한 표정에 그녀는 내심 라이가 어쩌면 잘못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를 만나지 못하게 된 코럴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집으로 들어오겠어요?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고마워요."

코럴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곤 샐리 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라이는 집에 있나요? 그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사무실에 있지 않다고 해서… 어쩌면 집에 있지 않나 싶어서 왔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샐리의 마음에 동정심이 차올랐다. 그녀야말로 라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고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코럴을 동정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라이를 그녀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라이가 원한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뇨. 집에 없는데요."

샐리가 대답했다.

"요즘은 사무실을 자주 비워요. 유럽으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준비로 무척 바쁘답니다."

"유럽이라고요?"

코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그녀의 얼굴에 바른 볼 터치가 떠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창백하고 정랑으로 차려입은 검은 드레스로 인해 더욱 마르고 연약해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랍니다."

샐리가 설명했다.

"아마 3개월 정도는 유럽에 가 있을 거예요."

"그럴 수는 없어요. 가면 안 돼요!"

코럴이 주먹을 꼭 쥐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냉기가 샐리의 등줄기를 따라 흐르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충격을 감당이라도 할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라이에게 뭘 원하죠?"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코럴도 몸을 굳히고 월등한 신장의 이점을 이용하여 샐리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사적인 일이에요."

"그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라이가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제게 상관이 있는 일이에요. 알겠지만, 그이는 내 남편이에요."

그녀가 차갑게 말을 맺었다. 코럴은 마치 샐리가 자신을 한 대 때리기라도 한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곧장 비꼬듯 샐리에게 대들었다.

"남편이라고요? 그런 남편도 있나요? 당신들이 별거해있는 동안 라이가 당신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을 것 같아요? 보통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라이에게는 그보다 더한 진실은 없는 것 같아요. 매일 밤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를 했죠.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예요."

샐리는 그 예쁘장하게 그려진 입술을 있는 힘을 다해 치고 싶은 충동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항상 생각해 왔던 것들을 그 여자가 대신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가 아무리 다른 여자들과는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해도 사실 속으로는 늘 그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라이의 행동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지만 말이다. 그처럼 상냥하게 아내를 돌봐 주는 남편을 찾기 어려울 듯이 달콤하게 행동했었다.

"라이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선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샐리가 확고한 어조로 차갑게 말했다.

"돌아와 달라고 하면서 당신에 대한 일을 모두 내게 말했었어요."

"오, 정말 그랬나요?"

코럴이 찢어질 것처럼 높은 목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절대 아닐 걸요. 세부적인 일들은 너무 사적인 것이어서 과연 그랬을까 싶네요!"

갑자기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다는 생각이 든 샐리는 다시 문을 열고 코럴에게 떠나달라는 손짓을 했다.

"미안하지만 이만 나가 줘요."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는 내 남편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그의 과거가 어땠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그를 잃어서 당신이 힘든 것은 안겠지만 이미 기정사실이니까, 이제 당신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이는 당신에게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코럴이 이성을 잃은 듯 갑자기 무례하게 큰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분노로 비틀려서 일그러졌다.

"내가 할 이야기를 그가 들으면 그는 내게 돌아올 거라고. 알아? 당신 같은 여자는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듯 그렇게 당신을 버릴 거라고!"

코럴의 악독한 말에 샐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를 떠올린 그녀는 라이가 자신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임신 중이에요. 우리 아기는 3월이면 태어나죠. 당신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라이에게 자식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해요."

코럴이 마치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뒤로 휘청거려 샐리는 깜짝 놀라서 바라보았지만 그 여자는 곧 회복하고 미친 듯이 조롱이 가득한 웃음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진짜 굉장해!"

그녀는 숨을 쉬기 어려울 듯 깔깔대며 웃었다.

"라이가 여기 있으면 정말 재밌겠는데 그래. 그 사람마저 여기 있었으면 진짜 올해의 코미디상감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샐리가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자르며 명령했다.

"이만 나가 줘요."

코럴의 조롱하는 듯 악의가 가득한 눈빛을 바라보며 샐리는 마음이 불편했다. 빨리 그 여자를 보내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다시 찾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너무 확신하지 마!"

코럴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엔 이젠 노골적인 증오가 가득했다.

"그 사람에게 전혀 아무런 흥미도 없는 척하며 그의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쯤 그 남자가 한 여자에게 충실할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어. 어떤 남자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남자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는 남자라도 나는 그를 사랑해.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가 가끔씩 바람피우는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은 1년 안에 그를 질리게 만들 거야.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그 남자가 달라질 것 같아?"

샐리는 허먼 부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성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코럴이 악의에 찬 말들을 쏟아 낼 때마다 가정부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더하는듯했다. 코럴이 저지르고 있는 악의에 찬 소동이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이 싫어진 샐리는 문을 확 열고 같이 소리 질렀다.

"나가!"

"오, 기쁘게 가주지!"

코럴이 비아냥댔다.

"그렇다고 당신 마음대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당신 같은 여자는 생각만 해도 지겨워 잘난 척에, 어떤 남자든 당신을 숭배할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웃기지 마! 그래서 라이가 당신을 해외 특집 기사 담당에서 뺐다고 하더라고. 알아? 쥐뿔도 없는 여자가 남자처럼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말야. 근데 이제 임신까지 했다고? 그래서 정말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잘난 척하지 마. 라이는 여자 임신시키는 데 도가 튼 사람이야!"

코럴이 무슨 말하는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자 코럴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더 악랄하게 공격했다.

"그래! 당신이 임신했다고 치자고. 그 아이만 라이의 아이가 아니라니깐. 나도 임신했어, 알아? 라이의 아기지.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내 아기는 2개월 됐어. 자, 당신의 그 완벽한 결혼이 어떤 상태인지 알겠지? 말했잖아. 라이는 언제나 내게 돌아온다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코럴이 의기양양하게 여왕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집을 나갔다. 그 여자가 한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샐리는 넋이 나간 채 문을 닫고 현관 복도 끝에서 충격을 받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허먼 부인을 바라봤다.

"베인즈 부인."

허먼 부인의 음성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났다.

"오, 베인즈 부인!"

그때서야 샐리는 코럴의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 여자가 임신했는데 라이의 아기라는 소리였다. 2개월째라고 말했다. 그 말은 라이가 코럴과의 관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샐리와 재결합을 한 뒤에도 그녀와 관계를 계속 한 것에 대해 모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몽롱한 가운데 생각하기도 두려웠지만 라이가 야근이라고 하면서 늦었던 밤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사무실에 있는지 체크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던 그녀였다. 라이가 자신의 행동을 조사했다면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기에 그에게도 똑같이 대해 주었건만 라이는 그것을 악용한 것이다. 마비된 것 같은 상태로 샐리는 허먼 부인을 지나서 침실로 향했다.

라이의 침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행복하게 지냈던가. 침대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는 그 침대에서 잠자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옷장의 맨 위에 올려놓은 여행 가방을 끄집어내어 유럽에 가져갈 생각이었던 옷가지들을 마구 집어넣었다. 그녀에겐 돈도 있고, 갈 곳도 있었다. 1분이라도 이곳에서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원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잠시 행동을 멈췄지만 그것은 이미 바바라 호프웰의 손에 안전하게 배달되어 있었고, 그녀와는 나중에 연락을 취하면 되었다. 나중에… 그녀를 난도질하듯 번지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이 잠잠해지면 아마 다시 생각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연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 가방을 복도로 가지고 나오자 허먼 부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방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베인즈 부인, 제발 이렇게 떠나시면 안 돼요! 먼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세요. 남자들이란 늘 그렇잖아요. 뭔가 설명할 사유가 충분히 있으실 텐데…"

"있을 수도 있겠죠."

샐리가 피곤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라이는 늘 훌륭하게 설명을 하곤 하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전혀 듣고 싶지 않아요. 떠날 거예요. 어딘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가서 아기를 낳아야죠. 남편과 그의 정부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베인즈 씨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하지요?"

가정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말 하냐고요?"

샐리는 말을 멈추고 잠시 그 어떤 메시지도 생각이 나지 않아 멍하니 있었다.

"뭐라고 말 하냐면… 뭐라고… 그냥 있었던 일 그대로 말씀하세요. 나도 어디로 가는지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