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9화 (9/11)

9장.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주체를 못하고 몸을 떨었다. 뭘 해야 할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라이에게 맹렬하게 주먹을 날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그녀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떠났다. 그는 문자 그대로 그녀의 옷들과 모든 개인적인 소지품들을 훔쳐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지만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포기할 수없는 단 한 가지, 바로 그녀의 원고였고, 당장은 그것을 되찾을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라이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고 그의 전화번호는 전화국 안내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정신없이 떠났지만 어디선가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만했고 결국 버스를 내려 습하고 더운 오후의 태양 속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보도를 걷다가 피곤에 지쳐 그냥 길가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시 라이를 보지 않고 원고를 되찾는 방법을 궁리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생각은 더욱 산만해져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원고를 찾으려면 라이가 어디 사는지 알아야 하고 사는 곳을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현재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인 그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녀의 원고를 가져간 것은 그녀를 꼼짝없이 마비시켜 움직일 힘조차도 뺐어간 것과도 같았다. 그녀는 간단히 다시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봤지만 똑같을 리가 없었다. 세부 사항들이나 정확한 문장들을 완전하게 기억할 수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털어 버리기 위해 소리를 내며 울고 나서 라이의 사무실로 전화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너무 오래 지체했음을 깨달았다. 모두가 퇴근을 했을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TV를 보았다 그러다가 잠으로 빠져들었고 이른 아침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주문했던 점심도 먹지 않았고 저녁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배가 고픈 데다 빈 위장이 쓰라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이처럼 몸을 구부리고 다시 엉엉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정말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하지만 라이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남자임을 이미 쓰라린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시간은 거의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나서 몇 번의 심호흡을 한 후에 전화기 옆에 앉았다.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와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는 회사 전화번호를 돌렸고 베인즈 씨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아만다가 전화를 받았고 샐리는 라이와 통화를 할 수 있는지 묻기 전에 간신히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신이 전화하면 즉시 연결하라고 했어요."

아만다가 기분 좋게 대답했고, 라이와 전화 연결이 되기를 기다리던 샐리의 신경은 예민해져서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샐리."

그의 허스키하면서도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자, 그녀는 될 듯이 깜작 놀라 저도 모르게 수화기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수화기가 부딪힌 충격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오고 시작했다.

"어디에 있어, 달링?"

그녀는 침을 삼키고 목 쉰 소리로 말했다.

"내 원고를 돌려받고 싶어요, 라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는데?"

"원고를…"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원고는 잊어버려!"

그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말했고,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에서부터 튀어나오려는 흐느낌을 삼키려고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더 참을 수가 없었고 곧 아이처럼 수화기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붙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이… 당신이 훔쳐갔잖아요!"

그녀가 흐느낌 사이로 그를 비난했고, 그녀의 말들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원고 없이는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고 당신이 훔쳐갔잖아요! 당신이 미워요, 알겠어요? 난 당신이 증오스러워요! 다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울지 마."

그가 거칠게 말했다.

"베이비, 제발 울지 말고, 어디에 있는지 말하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거기로 갈게. 원고를 돌려줄게, 약속해."

"다 부질없어요!"

그녀가 손등으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면서 조롱했다. 그가 조급한 숨을 내쉬었다.

"샐리, 당신이 다시 원고를 찾고 싶으면 나를 만나야 해. 그게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 같군. 난 그걸 이용할 거야. 점심에 나를 만나…"

"안 돼요."

그녀가 자신의 구겨진 바지와 윗도리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끊었다.

"난… 난 옷이 없어요."

"그러면 내 아파트에서 점심 식사를 하도록 하지."

그가 재빨리 결정했다.

"내가 허먼 부인에게 전화해서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 테니 거기서 12시 30분에 만나는 걸로 해. 거기라면 단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난 당신이 어디 사는지 몰라요."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항복하며 고백했다. 그를 다시 보는 것이 실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 원고를 포기하고 다시 쓰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잊어버려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그 원고 없이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집 주소와 찾아가는 길에 대해 알려 주고 나서, 전화를 끊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괜찮아?"

"괜찮아요."

그녀가 냉랭하게 말하고는 소리 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빗고 깜짝 놀라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눈은 움푹 들어갔고 옷은 꾸겨져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라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방엔 립스틱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돈이 있었고 호텔의 1층에는 상점이 있었다. 결정을 내린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서둘러 작은 꽃무늬가 매력적인 하얀색 여름 드레스와 굽 높은 샌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다른 상점에서는 화장품과 향수를 샀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화장을 하고 눈물과 근심으로 얼룩진 얼굴을 매만졌다 그 후 예쁜 면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었다.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늘어트렸다.

점심시간의 붐비는 버스를 타기에는 너무 신경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라이의 아파트까지 택시를 탔다. 그의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이미 약간 늦은 상태였다. 그녀는 택시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표정 없는 어두운 얼굴의 라이가 불쑥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해요."

그녀는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을 감추려 노력하며 서둘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상관없어"

그가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한쪽으로 비켜서 그녀가 들어오도록 했다. 그는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버리고 셔츠도반쯤 풀어 헤친 상태였다. 그의 맨가슴이 셔츠 사이로 엿보였다. 그의 남성적인 육체에 눈길이 쏠리자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단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접점 더 어두운 빛을 띠었다.

"이 짓궂은 마녀…"

그가 중얼거리면서 긴 손가락을 셔츠로 가져갔다. 그는 남아 있는 단추들도 풀어버리고 바지 밖으로 셔츠를 끌어내어 벗은 다음 바닥에 떨어뜨렸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가슴을 비추자 가벼운 땀방울이 맺힌 어깨와 단단한 근육이 전부 드러났다.

샐리는 그 따뜻한 피부와 그 아래 강철 같은 근육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에 노골적으로 서린 굶주린 욕망이 그녀를 못 박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원해."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그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미약한 저항을 하며 그를 피하려 했지만 헛된 시도였을 뿐이었다. 긴 팔로 그녀를 끌어당긴 그는 그의 벌거벗은 상체에 그녀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의 열정과 그의 욕망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의 체취, 온기, 생생한 떨림까지 바로 전해지며 그녀를 흠뻑 취하게 해서 그를 밀어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삼켜 버릴 것 같은 탐욕스러운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공격했다. 그 입술에 모든 힘이 빨려 나간 것처럼 그녀는 그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굴곡진 몸을 어루만지며 관능을 일깨울 때도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감고 키스를 되돌리면서 그의 자제력을 불태워 버리고 그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숨을 헐떡거리는 동안 그녀는 애처롭게 그에게 기대 있었다. 그의 입가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미소에서 그가 자신의 승리와 그녀의 복종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은 듯, 천천히, 여유 있는 움직임으로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내리자 옷이 미 끄러져 그녀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욕망으로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느끼고 반응하는 것뿐이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그의 사랑의 행위 앞에선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느끼는 욕망만큼은 되돌아왔다. 희미하게나마 그가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들어 올려 침실로 안고 갔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의 옆에 누워 미처 벗지 못한 옷가지들을 벗겨 냈다. 그녀가 그에게 전혀 무방비한 만큼이나 그녀를 향한 그의 욕구 또한 숨길 수가 없었다. 거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이는 토막토막 흩어진 말들과 문장들은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반응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점점 그가 일깨우는 감각의 파도 속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세상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그의 품안에 누워 있었고, 그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 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그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대고 중얼거렸다.

"먼저 대화를 나누고 점심을 먹고 나서, 교양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할 계획이었어. 하지만 당신을 본 순간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군."

"이게 당신이 나한테 원하는 전부 아닌가요?"

그녀가 지친 음성으로 씁쓸하게 말했다. 그가 생각에 잠겨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그것에 대해서도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먼저 점심을 먹자고."

"식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 앉으면서 물었다.

"스테이크와 샐러드야. 샐러드는 냉장고에 있고 스테이크는 그릴 위에 준비되어 있어. 허먼 부인에게 오늘 하루 쉬라고 했으니까 방해받는 일은 없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계획대로죠, 그렇죠?"

옷을 입으면서 별 흥미도 없지만, 그냥 물었다. 그가 침대를 빠져 나와 바닥에 서서 그녀의 무기력한 동작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가 날카롭게 질문을 퍼부은 뒤 다가와 그녀의 턱을 잡고 창백한 안색을 살펴보았다.

"당신 어디 아픈 거야?"

갑작스러운 그와의 사랑을 나눈 뒤에 한껏 치솟았던 정열이 가라앉자, 온몸이 아팠고 우울했다. 우스울 정도로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병은 라이에 대해서 어떻게든 상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 외엔 24시간 동안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그의 관심을 무시하며 말했다.

"단지 배가 고픈 것뿐이에요. 어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요."

"잘하는 짓이야."

그가 반쯤 호통 치면서 말했다.

"좀 더 몸무게를 늘여야 해, 적어도 45킬로그램은 나가야지. 누구든지 당신이 식사를 제대로 하는지 감시할 사람이필요할 것 같아, 이 바보."

그는 아마도 그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와 다투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옷을 입고 그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서 그를 따라 깔끔하게 꾸며진 식당으로 따라갔다. 그는 그녀가 아무것도 돕지 못하게 했고,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스테이크를 굽고 식탁 위에 접시를 놓았다.

그는 식사와 함께 마실 캘리포니아 레드 와인을 개봉했고 잠시 후에 그들은 침묵 속에 식사를 했다. 샐리는 샐러드에서 시선을 들지도 않고 그에게 물었다.

"내 원고는 어디 있어요?"

"읽고 있는 중이야."

그가 대답했다.

"글재주가 있더군. 좋은 글이야."

그녀가 화가 나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구 마음대로요? 당신은 그 글을 읽을 권리가 없어요!"

"내가 없다고?"

그가 차갑게 물었다.

"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당신이 썼을 그 원고를 읽을 완벽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급여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당신에게 할당된 기사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잖아. 당신 자리에 당신을 조용히 앉혀 두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면 몇 주 전에 해고했을 거야."

"당신이 잡지를 인수한 이후로 내가 받은 급여는 전부 갚겠어요."

그녀가 격렬하게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 당신은 여전히 읽을 권리가 없어요!"

"고양이처럼 할퀴려 들지는 말라고."

그가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난 이미 원고를 읽었고, 그것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대신, 건설적으로 생각해 봐. 커다란 가능성을 가진 원고를 쓰고 있지만 또한 이직은 거친 구석이 있고 그걸 다듬으려면 상당히 많이 일을 해야겠지. 방해하지 않으면서 작업할 공간이 필요하고 확실히 아파트 관리비나 식료품비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걱정하면 어때서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많은 작가들이 다 그런 걱정을 해요."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럴 필요가 없었지."

그가 지적했다.

"살아오는 내내 당신은 재정적으론 안정된 삶을 살았고 그것에 익숙해 있을 거야. 어제 부로 사직 처리가 되어서 이제 들어올 월급도 없을 테니, 당신 저축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걱정이 되겠지. 책 한 권을 써서 시장에 내놓을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그 전에 돈이 먼저 떨어질 거야."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일하는 게 두렵지 않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도 그건 알아. 하지만 여기서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해야 하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도 있고, 저금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표면적으론 이성적인 제안이었지만 오직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그녀를 끌어들이려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정신이었다면 비록 원고를 버리더라도 그냥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벌써 그런 기회를 저버렸고 너무 늦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녀는 다시 어리석게도 라이를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고, 육체적인 욕망의 만족을 제외하고는 보답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 싫증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간단하게 그녀를 떠나 버린다면? 다시금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입을 기회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샐러드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녀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가 재빨리 숨을 들이쉬었다.

"그냥 그렇게? 아무런 논쟁도, 조건도 없이? 질문도 없이?"

"당신 대답에는 관심 없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당신과 싸우는 건 피곤해요. 그냥 내 글을 끝내고 싶어요. 그것 말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자존심 한 번 크게 세워 주는군."

그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당신은 내 모든 걸 짓밟았어요."

그녀가 비난조로 대답했다.

"내가 부드럽게 대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다 됐잖아요. 내 직업을 빼앗고 당신과 함께 살게 하고. 그러니, 내게서 맹목적인 숭배를 요구하지는 말아요."

"그런 것은 애초부터 바란 적도 없었지."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야. 당신도 아는 이유 때문에 당신이 그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뿐이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건 다만 함께 살면서 한 번 잘 해 보자는 거야. 만일 6개월 후에도 함께 사는 걸 당신이 견딜 수 없다면 그때 이혼을 생각해 보자고. 하지만 그때까진 서로 최선을 다해서 지내보는 거야."

"만일 잘 되지 않으면요? 그땐 이혼해 줄 건가요?"

그녀가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의 굳은 표정을 힐끗 쳐다보며, 그녀는 그가 이혼을 약속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좋아요, 6개월이에요. 하지만 난 글을 써야 해요. 따라서 난 당신을 위해 요리나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일 잘하는 바지런한 가정주부를 찾고 있다면 실망할 거예요."

"아는지 모르겠는데. 난 부유한 편이야."

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가사에 전념하는 아내를 바란 게 아냐."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 일에서 얻는 게 뭐예요, 라이? 내 말은 잠자리 상대 말고요. 그리고 잠자리 상대조차도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고도 아무 때나 즐길 수 있잖아요."

그의 눈썹이 회색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난 당신을 원해. 거기까지만 생각해 "

놀랍게도 그들의 약정은 원활하게 잘 돌아가서 그들은 곧 일상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라이가 먼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하기 전에 그녀를 키스로 깨웠다. 샐리는 아침 시간을 서재에서 일하면서 보냈다. 통통하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허먼 부인은 그야말로 살림의 귀재였다. 언제나처럼 아파트를 청소하고 샐리의 점심식사를 만들어 주고, 저녁 식사준비를 해 준 다음 라이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퇴근했다.

저녁 식사를 차리는 담당은 샐리였고, 식사를 하는 동안 라이는 잡지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거나 글의 진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진정한 부부 사이의 정을 나누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와 놀랄 정도로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둘 다 자신들의 일정 부분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처럼 강한 자아를 가진 두 사람이 함께 살려는 시도를 할 때 그것은 어쩌면 미리 예상되었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언제나 상대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종이처럼 약한 그들의 결혼생활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다시 붙일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늘 저변에 깔려있었다.

며칠은 곧 몇 주가 되고 원고 매수가 점점 많아질수록 그녀는 라이의 경륜 어린 충고가 반가웠다. 그녀의 문체는 직설적이고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는 가장 기본적인골격이 남을 때까지 생각들을 벗기고 분석하는 데 천재적이었다. 저녁 식사 후 그녀가 그 날 쓴 것을 프린트하여 그에게 주면 그가 그걸 읽어보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정해진 일과가 되었다. 그녀가 쓴 것 중에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는 정확히 자기 의견을 말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녀가 쓰고 있는 작품 자체에 대해선 후하게 점수를 주었다. 때때로 라이의 비평에 의거하여 그의 비평을 받은 부분을 전체적으로 다 파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미 전달이 더 정확하다고 여겨질 때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판단을 고수했다.

그녀가 가장 작업이 잘되는 시간은 이상하게도 저녁에 라이가 같이 서재에 앉아서 그 날 집으로 가져온 일거리를 하거나 신문을 읽을 때, 아니면 3개월 안에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는 다큐멘터리 작업의 사전 조사를 하는 동안이었다. 그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불안정해 보였던 흔적들도 모두사라지고 마치 모험을 원하던 그의 욕구 자체가 완전히 소진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면에선 그녀도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책을 창작해 내는 정신적인 자극은 그녀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조화롭게 가끔 그렉이 전화를 주거나 서로에게 말을 걸 때를 제외하곤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함께 작업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쾌 지나 늦은 밤이 되어 샐리가 먼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을 하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라이는 여전히 일을 했다. 때론 그녀가 침실로 간 뒤에도 한 시간 넘게 일을 하기도 했지만, 때론 그녀가 올라온 다음에 바로 올라와서 샤워를 하고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눕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때엔 서재에서의 억제된 예의바른 태도는 사라지고 굶주린 듯 거의 야만적인 수준의 광폭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의 열정이 곧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욕구는 늘 항상 고조되어 있었다. 함께 일을 하다가도 일에 몰두한 그의 얼굴을 보며 저렇게나 고요하고 침착해 보이는 사람이 그녀가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키스를 하기 시작하면 곧장 섹스에 중독된 사람처럼 변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를 유혹하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해 행동에 옮기고 싶어 안달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기자로 일하면서 개인 업무를 깊이 존중하게 된 터라 그런 장난기는 마음속에만 묻어 둔 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 처음의 몇 주 간 단 두 가지 사건이 표면적인 조화를 깨뜨렸다. 첫 번째는 이른 저녁 그녀가 저녁 식사 후 식기들을 설거지 기계에 치우고 있을 때에 일어났다. 라이는 이미 서재로 가서 그 날 작업한 그녀의 원고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방에서 전화를 직접 받았다.

"라이 있나요? 바꿔 줘요."

차갑고 세련된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자 샐리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죠, 코럴 양. 잠시만 기다려요."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전화기를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재로 갔다. 그녀가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그가 다시 그의 손에 들고 있는 프린트 된 페이지들을 내려다보면서 무심코 물었다.

"코럴 이에요. 당신과 통화하고 싶다는데요."

샐리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하던 일을 끝내려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주방의 전화기로 내용을 듣고 싶은 유혹이 잠시 들었지만 그녀는 곧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또 타일렀지만 질투심이 그녀의 마음을 좀 먹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기 그지없는 코럴은 라이와 통화하고 싶으면 그가 저녁에 집에 있는 시간도 상관치 않고 걸 수 있는 여자였다. 여전히 그들은 만나고 있는 걸까? 라이는 점심에 외출했었는지, 회사에만 있었는지, 외출을 했다면 누구와 했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했다. 책을 쓰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그의 일정에 진심으로 신경을 써 본 적은 없었고 늘 맞춰야 할 마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럴은 숨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여자가 보내는 애정 공세에 어떤 남자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라이가 그녀를 계속 만난다면 자신은 그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은 라이에 대한 감정을 다 극복했기에 라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전혀 상관없다고 스스로에게 얘기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어벽도 모두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그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알게 된다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은 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가 사랑을 입에 올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만 그런 고백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서재로 오지 않자 라이가 그녀를 찾아 주방으로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손을 꽉 쥔 채 가만히 주방카운터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서재로 오지 않을…"

그는 말을 꺼내다가 그녀의 긴장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녀를 계속 보는 것을 그만두라고 당신에게 말하진 않겠지만 집으로 전화하는 것만은 절대로 참을 수 없어요! 그런 일은 두고 보지 않겠어요!"

그녀가 화가 치밀어 오른 목소리로 그에게 격하게 소리쳤다. 그의 얼굴도 검어지면서 화가 났는지 그의 턱이 단단히 다물렸다. 서로에게 예의바르고 점잖게 대했던 시간들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첫 번째 전투 사인이 떠오르자마자 그들의 성질은 마치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전에 먼저 제대로 사실을 직시하는 게 어때?"

라이가 그녀를 쏘아보며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내 행동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다면, 여기 있는 전화로 무슨 말이 하는지 듣지 그랬어! 사실을 듣고 싶다면 말해 주지. 코럴이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 내 대답은 거절이었어."

"흥, 나 때문에 당신이 고행할 필요까지 있나요."

그녀가 더욱 강도가 세게 비꼬아 말했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머금어졌다.

"이런, 어쩌지? 바로 그런 당신 때문에 내가 거절을 했는데."

그가 잇새로 말을 씹듯이 내뱉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허락했으니 내가 윌 거절했는지 당신에게 보여주지!"

너무 늦게 움직였다. 그의 손이 쏜살처럼 움직여 그녀를 잡았고,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화가 너무 난 샐리는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체격과 힘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강한힘 앞에서 무방비 상태였다. 그는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 그대로 그녀를 덮친 뒤 화난 기세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저항은 곧 그의 요구에 대한 순응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각자 쌓인 답답함과 분노를 맹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발산시켰다.

절정의 순간이 지난 후 그는 그녀를 한 손으로 꼭 끌어당겨 안고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맨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코럴은 안 만나."

그가 그녀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전혀 안 만나고 있어. 밤마다 이렇게 당신을 사랑해 주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 돼?"

그가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여자의 전화를 받고 나니 속에 불이 나는 것 같으니 그렇죠."

샐리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머리를 돌려 그의 땀에 젖은 어깨에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살에 닿자 그가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고 그녀를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 질투한 거지."

그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해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다시 그에게 끌려가서 감각이 소용돌이칠 정도로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 사건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는 쇼핑을 가기로 결심했다. 라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가지 개인적인 물품들이 필요한 것도 있고 해서 그녀는 모처럼의 오전 쇼핑을 즐겁게 하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 회사에 갔다가 라이가 바쁘지 않으면 점심 식사나 같이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일하던 기자 사무실에 먼저 들렸을 때 그녀는 예전 동료들로부터 왁자지껄한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취재차 출장 중인 브롬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잠시 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다른 층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반가운 인사를 전하자 자신이 더 이상 자유로운 새가 아니라는 것도 잊게 되었다. 몇 분 후 그녀는 위층의 그렉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비록 현재 자신이 남편과 평화로운 상태라고 해도 라이 편이 되어 버린 그렉을 완전히 용서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렉은 오랜 상사 겸 친구였고 그는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들 사이에 냉랭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간의 다소 어설픈 인사 끝에 그녀와 그렉은 빠르게 예전에 그들이 편하게 지내던 분위기로 돌아갔다. 결국 헤어질 때가 돼서 그렉은 풀타임 남편이 있는 것이 그녀에게 좋은 것 같다고 만족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려다가 그녀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크리스와 마주쳤다.

"이런… 당신, 돌아왔군!"

크리스가 즉각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그녀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와,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워졌어!"

그녀가 뉴욕으로 돌아왔음을 크리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을 그제야 깨달은 샐리는 잠시 당황했다. 물론 그렉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사생활을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떠나지 못했어."

그녀가 그의 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겸연쩍은 듯 사실을 말했다.

"라이에게 잡혔지."

크리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시든 장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지? 그렇지?"

"그러 게…"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렉도 내가 만족스러워 보인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 소리가 모욕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어."

"샐리, 진짜 행복한 거지?"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그의 물음에 농담 기는 전혀 없었다.

"현실적으론 행복하다고 해야겠지."

그녀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천국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마지막이 온다고 해도 난 허물어지지 않을 거야."

"끝장날 것을 확신하는 거야?"

"모르겠어. 하루하루 그냥 되는대로 살고 있어. 요즘은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고, 하지만 늘 이렇지만 않을 것도 같고… 당신은 어때? 에이미 하곤 어떻게…?"

그녀는 말을 중도에 멈추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떠오른 표정만 보아도 그가 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되지 않았어."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곤 그녀의 손을 잡고 복도 끝에 있는 창가로 데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이제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어. 그리고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아."

"이런, 정말 유감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해 버리다니… 그 남자와 올해 말쯤에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임신을 했대."

크리스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지만,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곤 씁쓸한 미소를 띠고 바라봤다.

"내 아기인 것 같아. 다른 남자의 아기일 수도 있지만…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내 아기 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지. 에이미 자신도 확신을 못하는 것 같아. 상관없어. 그녀가 결혼만 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리겠어. 하지만… 에이미 말이 난 좋은 아버지가 되기에는 너무 불안정하대"

"당신과 데이트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잔 그녀인데도 결혼하겠다는 거야?"

샐리가 놀라서 물었다. 그야말로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행동에 대해선 모르겠어.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녀를 사랑해. 그녀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라도 그녀를 갖고 싶어. 지금 그녀가 전화를 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어. 그녀의 남편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는 여전히 고요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평이하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곤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은 짓지 마."

그가 말했다. 다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샐리,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당신이 안 돼 보여서 그렇지."

속이 상한 나머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갑자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빙빙 돌렸다.

"정말 당신이 미칠 정도로 보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에겐 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충고를 받을 엄두가 안 나서…"

"당장 내 아내에게서 그 더러운 손을 떼."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하지만 무척 위험하게 느껴지는 말이 어디선가 들려왔고, 샐리는 크리스의 손에서 벗어나 그 쪽으로 돌아보았다. 라이가 자신의 사무실 문 밖에서 그들을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동으로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에 가서 멈췄다. 주먹을 쥔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말려 있었고, 그의 긴 다리는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올 듯 긴장해 있었다. 어떤 경고도 없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수 있는 자세였고,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두 남자 사이에 섰다. 하지만 라이가 옆으로 걸음을 옮겨 다시 크리스를 사정권에 두었다. 그때 사무실에서 나오던 아만다가 핏기가 사라진 라이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그대로 멈췄다.

크리스는 전혀 감정의 동요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편한 모습으로 입가엔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이런, 그러지 말아요."

샐리가 애써 평 이한 어조로 말했다. 크리스가 특유의 느린 말투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당신의 여자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어요. 지금 내 여자 문제만 해도 골머리가 아파서…"

그 때 샐리가 라이 곁으로 다가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딱딱하게 굳은 근육이 느껴졌다.

"정말이에요."

그녀가 그에게 말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는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그가 사건만 일어나면 당장 다른 나라로 뛰어가지 않고 가정에 정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어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뭔가 익숙한 이야기죠?"

"알았어."

라이가 거의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차가운 분노로 굳게 굳어 있었고, 그는 멈춰 선 아만다를 보고 낮게 소리쳤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다 괜찮으니까."

아만다와 크리스가 떠난 후 그녀와 라이는 복도에서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조금 표정이 풀린 라이가 잠시 후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실로 가지. 복도에 그냥 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가 너무 세고 거칠게 안아서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와 데이트 한 적 없어요."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둘러 말을 꺼냈다.

"당신을 믿어."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뺨, 눈가까지 입술로 어루만졌다.

"단지, 그 녀석의 팔이 당신을 안고 있는 것을 봐 줄 수가 없었을 뿐이야. 당신은 내 거야. 다른 남자가 당신을 만지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샐리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가슴이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가 보인 난폭한 반응은 단지 소유욕으로만 치부하기엔 정도가 너무 강렬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몸을 떨며 그녀를 만지는 그의 손은 마치 벌이라도 주는 듯 거칠고 억셌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녀의 혀에 맴도는 말을 하진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은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냥,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 온 거예요."

그녀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고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그가 으르렁거리며 소파 쪽에 눈을 주었다.

"하지만 점심으로 대신하지."

"스캔들 거리를 만든 것 같아요. 오늘 중에 빌딩 전체에 소문이 돌걸요."

그녀가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 당신을 포옹하려고 했던 모든 녀석들에게 경고가 되었겠지. 구석기 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좋고, 영역을 지키는 짐승 같다고 해도 좋아. 어떤 녀석들도 내 영역엔 들어오게 하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심장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찔린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단지 그가 소유한영역의 일부분일 뿐인가? 조금 전에 그에 대한 그녀의 기분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던 것이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그에게서 깊이 있는 감정을 찾으려 하다니 정말 바보스러운 일이었다. 그에게 그런 깊이가 없다는 것을 항상 알지 않았던가.

그는 원초적이고 본능에 지배되는, 시대를 역행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나면 그뿐, 사랑 같은 바보스런 감정에는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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