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2화 (2/11)

2장.

샐리는 거울 앞에 서서 열여덟 살 때 찍었던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찾아보았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통통한 볼이 있었던 곳에 이제는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를 약간 덮을 정도의 짧은 보브 스타일 머리가 이제는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 스타일로 변했다는 것, 변하지 않은 단한 가지는 그녀의 눈이었다. 커다란 짙푸른 색의 눈. 하지만 라이를 만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늘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면 그녀의 정체를 계속 숨길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방향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후에 그녀는 라이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라이가 호의적으로 그녀를 대할 가능성은 아무래도 조금 희박했다. 까다롭고 다혈질에 절대 예측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라이였다. 최고의 방법은 가능한 그를 피하고, 그렉이 고향 옛 친구인 샐리를 모르겠냐고 소개하는 상황을 막는 길뿐이었다.

라이는 그 날 아침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잡지사가 라이든 베인즈에게 팔렸다는 것과 그가 특파원 생활을 그만두고 그의 시간과 재능을 시사 잡지 발행에 헌신할 것이며 방송일은 때때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다루는 것 정도가 될 것이라는 뉴스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빌딩 전체가 그 뉴스로 들썩거렸다. 베테랑 기자들조차 갑자기 불편해져서 그들의 해 온 작업과 경력을 라이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리포팅 방식과 비교했다. 그리고 사내의 여직원들은 수도 없이 라이든 베인즈가 너무 잘생기지 않았냐고 떠들어 댔다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유부녀 기자들조차 라이와 일한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단순히 유명 기자 정도가 아니라 이미 유명 인사였다.

샐리는 이미 이런 모든 소동에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웠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그렉에게 달려가서 당장 일을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떠나 있고 싶었다. 이미 3주 이상이나 취재를 나가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불안해 보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카리아의 자선 무도회까지는 아직도 한 달 이상의 기간이 남아있었고, 그렇게 오래 사무실에서 내근이라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갑자기 시간을 의식한 그녀는 서둘러 거울 속의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감청색 바지에 푸른색 실크 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 인 저리어 우먼처럼 보였다. 머리는 뒤쪽으로 당겨서 한 줄로 길게 땋아 내렸고, 짙은 색 선글라스를 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갑자기 그를 보면 눈이 아픈 편두통이 생겼다고 할 참이었다. 아주 짙은 색은 아니어서 일하면서 착용하고 있어도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서둘러 그녀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갈 정도로 느린 엘리베이터 대신에 계단을 이용해한 번에 두 계단씩 바쁘게 뛰어 내려가 순식간에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 내려갔다. 버스의 문이 막 닫히는 중이었다. 크게 소리 지르며 그녀는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며 기사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어디 계시나 했습니다. "

그가 농담하듯 말했다. 사실 그녀는 거의 대부분 이렇게 버스 문을 두드리는 상습 지각 승객이었다. 1분을 남기고 겨우 지각을 면하고 사무실에 뛰어 들어간 그녀는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묻고 어떻게 교통사고 없이 차도를 건널 수 있었는지 감탄했다. 적어도 여섯 번은 차에 치일 뻔했던 것이다. 쿵쾅거리며 혈관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출근하는 길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면, 취재 차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징조였다.

"안녕!"

브롬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 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됐어?"

"취재 나갈 준비는 언제든지‥‥"

그녀가 대꾸했다.

"너무 오래 사무실에만 있었어, 머릿속이 거미줄로 꽈 차 것 같아. 그렉에게 대들어서라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바보 같이 굴지 마."

브롬이 퉁명스럽게 알려 주었다.

"오늘 그렉이 저기압이란 말이야. 내일 하는 게 좋을 듯싶은데"

"못 참겠어. 행운 빌어 줘"

샐리가 밝게 말했다.

"언제는 안 그랬나 싶지만… 어? 갑자기 웬 선글라스야? 눈에 멍이라도 든 거야?"

브롬이 추궁하듯 물었다. 샐리가 싸움에 휘말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의 눈빛이 유쾌하게 밝아졌다.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샐리는 선글라스를 벗어 그녀의 눈이 멀쩡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곤 다시 선글라스를 코에 걸쳤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햇빛을 보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편두통이 있었어?"

브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 여동생도 늘 두통 때문에 햇빛만 보면 머리가 더 아프다고 했는데…"

"편두통 같지는 않은데…. 그냥 너무 오래 사무실에 있다 보니 답답해서 그런 것 같아."

브롬이 껄껄 웃었다. 그녀가 원했던 바로 그 반응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그렉에게로 갔다. 라이가 도착해 모든 일이 틀어지기 전에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그렉의 사무실에 다가갔을 때, 열린 문 사이로 그렉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고 부러지는 것처럼 딱딱한 말투에 샐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 특유의 급한 성격을 가진 그렉 이지만, 경우에 어긋나는 편은 아니라고 늘 생각했었다. 지금 그의 목소리나 말투로 봐서 그다지 정상적인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브롬이 옳았다. 오늘의 그렉은 평소보다 훨씬 짜증이 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의심할 바 없이 라이가 오늘 도착한다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전화기를 부숴 버릴 것처럼 세게 내려놓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문틈으로 고개를 빼 꼼이 내밀어 말을 꺼냈다.

"커피 한 잔 드시면 어떨까요?"

그녀의 목소리에 그렉의 검은 머리가 획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의 입술이 팔자를 그렸다.

"오늘 마신 커피를 합하면 헤엄을 쳐도 좋을 지경이야."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빌어먹을, 이 빌딩에 이렇게 많은 멍청이들이 일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니까. 다시 한 번 더 바보 같은 녀석이 전화를 해대면…"

"모두들 긴장해서 그렇죠. 뭐."

그녀가 달래듯 말했다.

"자네는 안 그런 것 같은데."

그가 다시 짜증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웬 선글라스야? 너무 유명해져서 다니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선글라스를 쓴 이유야 분명히 있죠."

샐리가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약스럽게 물어보시면 얼굴을 가리고 절대로 대답 안할래요."

"마음대로 해"

그가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무실에서 당장 나가."

"취재 보내 주세요."

샐리가 다급히 본론을 꺼냈다.

"나야말로 당장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상태라고요"

"빌딩 내의 다른 모든 여자들처럼 자네도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사무실에 있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렉이 대꾸했다.

"어쨌든, 당장은 취재를 내보낼 만한 일이 없어"

"이러지 마세요, 부탁해요."

샐리가 애원했다.

"뭔가 기삿거리가 될 만한 정보가 있으시겠죠? 폭동이나 자연 재해, 아니면 정치적인 유괴 공작 따위…. 무엇이든지 있지 않겠어요?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취재를 할 기삿거리가 있을 거라고요!"

"내일이 되면 생길지도 모르지…. 왜 이렇게 다급하게 징징거리는 거야? 어울리지 않게…. 샐리, 새로 온 그 사람이 까다롭게 굴면 나야말로 자네가 필요할지도 몰라. 오래된 친구에겐 좀 유하게 굴지 않겠어?"

"저를 사자 굴에 밀어 넣으시겠단 말씀이세요?"

샐리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렉이 갑자기 미소 지었다.

"이봐, 애송이 기자, 걱정하지 말라고. 자네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뭐 조금 으르렁거리기는 하려나…"

"그렉,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해요."

샐리가 다시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벌써 3주 동안이나 사무실에 박혀 있었어요. 월급 값은 해야 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해."

"도대체 전혀 동정심이라곤 없으시네요!"

그녀가 언성을 높이다가 다시 애원조로 말했다.

"그렉, 제발 부탁해요."

"이렇게 급하게 애원하는 이유가 뭔데?"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샐리, 젠장, 왜 이러는 거야. 오늘 새로운 발행인이 오기로 되어 있단 말이야. 게다가 우리 쪽 일을 모르는 신출내기도 아니고. 전혀 재미없을 하루를 앞두고 있으니 나를 그만 좀 괴롭히라고. 게다가 그 사람이 자네를 보자고 할지도 모르고. 그때를 대비해서 사무실에서 가만히 있어. 알겠어?"

샐리는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렉에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크게 나왔다. 그렇지 않고선 그렉이 그녀를 취재 내보낼 리가 없었다. 또 그렉이 아는 것이 그렇게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를 라이와 무턱대고 대면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초래할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그는 알 권리가 있었다.

조용히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그렉, 라이가 나를 보면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셔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렉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왜 그렇지? 그와 자네는 친구 사이가 아녔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친구인지 아닌지 말씀드리기가 참 애매하네요. 난 7년간 그를 본 적도 없어요. TV에서는 봤지만요. 그리고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데…. 원래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셔야 할 듯싶어서. 제가 결혼했었던 것은 아시죠? 단지 꽤 오래 남편과 별거중이라는 것도"

그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 번도 언급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처녀 때 성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건가? 그래?"

"네, 혼자 힘으로 완전히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 그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원치 않아서요. 매우 유명한 사람이어서요. 사실 내 남편은… 그러니까… 라이든 베인즈예요."

그렉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는 다시 침을 삼켰다. 샐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때론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고 정직한 여자가 샐리니까. 하지만 라이든 베인즈 라니? 그 바늘구멍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빡빡해 보이는 남자와 이 연약하고 늘 웃는 눈을 가진 여자가 결혼했었다고? 그는 숨을 몰아쉬듯 말을 이었다.

"맙소사. 샐리, 자네 아버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이가 많잖아?"

샐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그렇게 나이 들지 않았어요! 저보다 열 살 연상이죠. 전 스물여섯 살이라고요. 열여덟 살이 아니라. 어쨌든 내가 취재 차 출장을 나가는 것이 좋은 이유를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라이로부터 더 멀리 가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7년 동안 별거 중이지만 라이는 여전히 제 남편이에요.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관계는 일을 꼬이게 만들잖아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렉은 믿기 어려운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었다. 샐리? 이 조그만 샐리 제롬과 그 키가 크고 냉혹한 남자가…?  허리까지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푸른색 계열로 옷을 입고 있는 샐리는 차라리 사춘기 소녀 같았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한테 싫증났었어요. 라이가 말예요"

"자네한테 싫증이 났다고?"

그렉이 반문했다.

"이봐, 샐리.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녀는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는 지금하고 전혀 달랐어요. 진짜 겁쟁이에다가 매일 징징거리기나 하고, 라이가 나를 버리고 간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요. 그의 일 때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전혀 참지 못했어요. 그이가 해외에 나가 있을 때면 편집광처럼 걱정을 하다가, 그가 돌아오면 죽기 살기로 그를 들들 볶으면서 괴롭혔죠. 결국 나를 버리고 나가 버리더군요. 그를 탓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오래 참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니까요."

그렉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샐리가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겁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자라고 생각을 할 정도니까. 어떤 것이던 바로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고, 그것이 위험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즐겼다. 절대로 겉보기만의 행동도 아니었다. 사건이 어렵고 위험하면 할수록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반짝이며 빛났고 얼굴엔 생기가 도는 샐리였다.

"자, 그럼 정리를 해 보자고."

그가 중얼거렸다.

"자네가 이곳에서 일하는 것을 그 사람은 모르겠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밝게 대답했다.

"6년 동안 전혀 연락을 취했던 적이 없으니깐 요."

"하지만 여전히 자네들은 결혼한 상태이고. 하지만 그래도 다달이 생활비는 보내지 않았을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의 표정을 보고 그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물론, 자네는 거절했겠지?"

"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죠. 라이가 떠나고 나서 스스로 돌보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그러는 가운데 내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생기더군요. 스스로 홀로섰다는 것이 너무 좋고 중요해요."

"이혼 소송을 한 적은 없었고?"

"네, 없었어요."

그녀는 코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요. 아마 그 사람도 다시 원하지는 않았나 봐요. 그래서 두 사람 다 이혼 소송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의 생활을 전혀 참견하지는 않지만, 법적인 아내가 있는 것이 어쩌면 그에겐 더 편리했던가 싶기도 하고. 구속하지 않은 채 묶여 있으면, 다른 여자들로부터도 안전하니까요."

"자네 기분은 어때? 그를 다시 보는 것이 괴롭지 않겠어?"

샐리가 라이든 베인즈와 결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충격을 받았던 건지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를 다시 보는 거요? 아뇨"

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오래 전에 그 사람과의 일은 극복했어요. 그렇게 해야만 했죠, 살아남기 위해선. 어떤 때는 정말 믿기지 않지만, 그와 결혼했었고, 지금도 결혼해 있는 상태예요"

"당신을 다시 보는 것이 그를 괴롭힐까?"

그렉이 고집스럽게 질문을 계속했다.

"감정적인 괴로움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에게도 이미 끝난 일일 테니까. 그리고 집을 나가 버린 사람도 라이였다고요, 하지만 라이의 성질을 생각해 보면, 비록 이름은 틀리다고 해도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내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그의 생활을 방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의 사생활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는 모를 테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죠, 내가 취재 차 출장을 나가는 것이 제일 좋다니까요. 적어도 처음 한동안은 그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요. 지금의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고 그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어."

그가 중얼거렸다.

"뭔가 자네에게 맡길 만한 일을 찾아보지. 하지만 만일 그가 자네가 그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날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일부러 멍청하게 모르는 척 되물었고 결국 그렉은 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샐리는 그렉을 더 이상 다그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재빨리 자신의 책상으로 되돌아갔다. 브롬은 자리에 없었고 그녀는 혼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파티션으로 구분된 그들의 자리는 주변의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소리에서 확연히 구분된 듯 독립된 기분을 갖게 했다.

브롬이 김이 오르는 커피를 들고 돌아올 무렵에 그녀의 기분은 느긋해졌고, 라이의 시야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는 그렉의 약속 덕분에 그녀의 고민도 사라졌다. 작성하던 기사를 끝내고 읽어 본 그녀는 결과에 만족했다. 단어들을 조합해서 뚜렷한 생각으로 형성해 가는 그 과정이 너무 좋았고 특히나 생각했던 대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녀는 짜릿한 전율까지 느꼈다.

막 10시가 되었을 무렵, 사무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샐리는 고개를 들지 않고서도 라이가 그들의 사무실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는 머리를 돌리고 책상 서랍에서 물건을 찾는 척했다. 잠시 후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의 톤이 높아진 것은 라이가 사무실을 흘깃 돌아보고 가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 맙소사!"

여러 사람의 목소리 위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드높게 들려왔다.

"어쩌면 좋아! 생각해 봐. 저렇게 멋진 킹카가 아직도 독신이라니!"

샐리는 그 목소리의 임자가 린제이 월리스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린제이는 사무실내에서도 모두들 인정하는 수다스런 섹스 찬미자였고, 라이의 잘생긴 외모에 혹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남편이 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샐리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15분 후 샐리의 전화가 울렸고, 그녀는 튈 듯이 놀라며 그 전화를 받았다. 브롬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어서 빌딩 밖으로 빠져 나가라고. 빌어먹을! 서둘러…"

그렉이 중얼거리듯 빠르게 말했다.

"직원들 모두를 만나 보겠다고 지금 내려가는 중이야. 어서 집으로 가. 오늘 밤 중으로 출장 갈 일을 만들어 주겠어."

"고마워요."

그녀는 감사의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서 일어나 지갑을 든 채 브롬에게 간단하게 인사했다.

"다음에 봐."

"다시 날아가는 거야?"

언제나처럼 브롬이 물었다.

"그런가 봐. 그렉이 짐을 꾸리라고 했으니까"

손을 흔들며 그녀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라이가 내려오기 전에 되도록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복도로 들어서다가 그녀는 심장이 거의 멎을 뻔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라이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 명의남자와 예전의 사주 오웬 씨와 더불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대신에 눈을 내리깔고 눈에 뜨이지 않게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비상계단 쪽으로 갔다. 하지만 라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맥박이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간발의 차이였다!

아파트에서 그렉이 전화하는 것을 기다리느라 거의 미칠 것처럼 답답해진 그녀는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냉장고 청소를 하고 찬장 정리를 다시 했다. 하지만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도 해서 식기류나 음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금세 끝났다. 결국 그녀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았다. 여행 가방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짐 싸는 것이 좋았다. 여행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그것들을 가방의 적당한 장소에 담는 것이 좋았다. 여러 가지 취재 도구들과 노트북, 대체 건전지, 형광등 등은 그녀가 취재를 나갈 때마다 늘 같이 가지고 가는 것들이 먼다.

짐을 정갈하게 다 챙겼을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그렉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와서 그녀에게 취재임무를 맡겼다. 더할 수 없이 반가웠다.

"지금으로선 이 건이 내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어쨌든 도시 밖으로 나가게 해 줄 테니까. 아침에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라고. 한 상원의원의 부인이 모 장군이 파티에서 취해서 장군이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뭔가 냄새가 나네요."

샐리가 말했다.

"크리스 미커와 함께 작업하게 될 거야."

그렉이 말을 계속했다.

"상원의원의 아내와 먼저 이야기를 해 봐. 아마 장군에게는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허용이 안 될 거야. 크리스가 자네에게 줄 간단한 파일들을 갖고 있어. 내일 새벽 JPK 공항에서 5시30분 미팅 이네."

목적지를 알게 되자, 샐리는 가방의 짐을 꾸리는 것을 끝낼 수 있었다. 보수적인 취향의 드레스와 정장 상의 바지 등은 자신이 평소 선호하는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인터뷰를 위해서는 이런 점잖은 의상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상원의원의 아내는 그녀를 더욱 신뢰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 날 밤 그녀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취재를 나가기 전엔 언제나 잠을 설쳤다. 사무실에서 곧장 공항으로 출발을 하게 되면 이런 생각할 시간이 없어서 차라리 편했다. 앞으로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라이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한 밤이었다.

사진 기자인 크리스 미커는 다음 날 새벽 공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렵한 체격에 키가 큰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졸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안녕, 미녀 기자님"

그의 조용하고 느긋한 목소리에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크리스가 좋았다. 무슨 일이든 그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서둘게 하는 일도 절대 없었다. 그는 후미진 산호초 섬처럼 조용하고 깊은 사람이었다. 쳐다만 봐도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크리스였다.

숱 많은 모래 빛 머리카락, 어두운 갈색 눈동자, 그리고 평화로운 눈썹과 고집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단단한 입매일어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이상한 수작을 건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어린 여동생처럼 늘 애정 어린 태도로 대하며 조용히 그녀를 보호해 주었고,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거나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한 농담도 건 적이 없었다. 남자들과 로맨틱한 관계가 되는 것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는 샐리 로서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위 아래로 훑으며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런, 드레스 차림이야?"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약간 놀란 듯 이야기했지만 크리스의 성격으론 그것이 아주 많이 놀랐다는 뜻이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샐리는 다시 미소 지었다.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정계 쪽 취재야."

그녀가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렉이 내게 보여 줄 파일을 당신에게 보낸다고 했는데…"

"여기 대령 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짐은 벌써 붙인 거야?"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그들이 탈 비행기에 대한 탑승 안내 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보딩 구역으로 향한 둘은 금속 탐지기를 거쳐 비행기에 탑승했다. 수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샐리는 그렉이 준비해 준 리포트를 주의 깊게 읽었다. 시간이 거의 없었음에도 여러 가지 세부 정보들을 포함시켜 놓아서 그녀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추론하며 리포트를 정독했다. 보통 그녀가 다루는 분야의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렉이 현재 무리를 해서 그녀에게 맡겨준 임무이기에 그녀도 최선을 다해서 그 호의에 보답할 생각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서 알아본 상황은 단지 그녀의 최선을 다하는 것으론 부족했다. 크리스가 의자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동안, 샐리는 상원의원의 부인에게 전화를 해서 그렉이 그 날 오후로 일정을 잡아 놓은 인터뷰 시간을 확인했었다. 하지만 베일리 상원의원 부인이 고용인들에게 남겨놓은 약속 취소 메시지만 들을 수 있었다. 정중하지만 최종적인 거절에 화가 났다. 그렉이 맡겨준 임무에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1시간 정도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여러 소스들을 동원해서그녀는 그 날 파티를 주최했던 여주인과 전화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 만취 파티에서 장군이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그녀의 질문에 여주인은 극구 부인에 부인을 거듭했지만, 장군과 상원의원 부인이 모두 참석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연 파티가 구설수에 오른 것에 자존심 이상해 있었던 여주인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이라는 말을 흘렸다. 거기에서 샐리는 베일리 여사가 사랑에 외면당한 여자라는 감을 잡았다.

가능성이 있었다. 장군은 은회색 머리카락과 웃으면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는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타입이었다. 크리스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논의한 결과, 그 또한 샐리의 가정에 동의했고, 그들은 그 각도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48시간 후, 피곤하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가지고 둘은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두 명의 당사자들, 장군이나 베일리 여사 모두 그녀의 이론을 확증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장군에 대한 베일리 여사의 악평 뒤에 숨은 이유를 아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곳저곳 알아보기 시작하자, 수도의 유명 레스토랑 중에서 장군이 베일리 여사의 용모와 거의 일치하는 미모의 여성과 식사를 나누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베일리 상원의원은 갑자기 해외여행을 취소하고 아내 곁에 머물기 시작했다. 장군의 아내 또한 10킬로그램 정도 살을 뺐으며 흰머리를 부드러운 금색으로 염색했고 돌연히 남편의 옆에 꼭 붙어 다니게 되었다. 또한 장군이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야기는 오직 베일리 여사의 고발만 있었을 뿐, 다른 참석자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거들지 않았고, 언론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군대 내 보직도 변경되지 않았다.

샐리는 그렉에게 전날 밤 전화를 걸어서 그녀가 알아낸 사실과 그녀의 추론을 알렸고, 그렉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기사는 그 주의 특종에 실릴 예정이었고, 그녀는 마감을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라이에 대해서 그렉은 상당히 말을 아꼈다. 하지만 라이가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녀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짐작했다. 즉각 다른 임무를 맡고 싶었지만 맡을 일이 없었고 경비 정산서와 취재 보고서도 올려야 했다. 다행히 주말이라 사무실에 나가기 전 좀 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출근을 했지만 하루 온종일 라이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샐리는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회사역시 잡지의 포맷 변경 외의 여러 가지 라이가 일으킨 변혁의 바람 때문에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예 위층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보통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장 그렉의 사무실로 뛰어가고 하던 그녀였지만, 이젠 전화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브롬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화요일도 거의 비슷했다. 다만 잡지가 가판대에 배포가 되었고, 그렉이 축하 전화를 했다

"라이가 전화를 했어."

라이라고 줄여 부르는 그녀의 말버릇을 따라한 듯 신임 사장을 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딱딱하게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긴장.

"베일리 상원의원이 오늘 아침 라이에게 전화를 했다더군."

"그럼, 나 고소당하는 거예요?"

샐리가 물었다.

"아니. 상원의원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더니, 그의 아내가 직접 장군에 관해서 말했던 그녀의 주장을 모두 취소할 거라고 이야기했다는군. 이봐, 애송이 기자, 한 건 한 것 같아."

"내 말이 맞다 고 했잖아요."

샐리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럼, 이제 할 일을 주셔야죠?"

"이봐, 샐. 등 뒤나 조심해. 내가 아는 몇몇 편집장들만 해도 지금 악마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다니까. 어떻게 바로 코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자네 혼자만 알아냈느냐고 말이야."

그녀는 깔깔 웃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전화 통화로 샐리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같이 샌드위치나 먹으러 가자는 크리스와 함께 건물 내 작은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점심 먹으러 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샌드위치나 커피, 스프, 소프트드링크 등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한 터라 샐리 역시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크리스와 그녀는 소형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서 샌드위치와 블랙커피를 마시며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막 일어나려는 순간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샐리는 경고처럼 뒷덜미가 선뜻해지는 걸 느꼈다.

"보스가 왔어"

크리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자친구도 같이 왔고"

샐리는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지만, 눈 꼬리 옆으로 점심을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엔 왜 왔대?"

그녀가 중얼거렸다

"음식 맛을 보려고?"

크리스가 라이의 옆에 선 여자를 대놓고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회사 내의 모든 일을 다 직접 챙기려고 하나 봐. 세세한 것까지 모두 점검에 들어갔다던데? 그렇지만, 음식 맛까지 확인해야 하는지는… 샐! 저 여자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누군지 알겠어?"

크리스의 성화에 못 이긴 샐리는 여자 쪽만 중점적으로 살폈다. 덕분에 라이를 잠시 동안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맞아. 익숙한 얼굴인데. 혹시 코럴 월리엄스 아냐? 모델 말이야."

그녀는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 거의 확신했다. 그 정도의 완벽한 금발 미인이 그리 흔할 리가 없었다.

"그렇군."

크리스도 동의했다.

그때 라이가 쟁반을 손에 들고 몸을 돌려서 테이블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샐리는 서둘러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겼지만 그의 얼굴을 이미 본 터라 심장이 잠시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늘씬하고 근육질의 체격에 머리카락도 예전처럼 새카만 검정색 머리였고, 강인한 느낌이 저절로 번져 나오는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햇볕에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도. 덕분에 그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가진 코럴 월리엄스는 우아한 나비처럼 보였다.

"가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크리스에게 말하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라이의 고개가 자신들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크리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카페테리아 밖으로 나왔지만 그의 시선이 마치 달군 바늘처럼 날카롭게 박히는 걸 느꼈다. 그가 그렇게 그녀를 바라본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혹시 누군지 알아차린 걸까? 그녀의 걸음걸이가 익숙해 보인 걸까? 아니면 그녀의 머리 때문일까? 긴 머리를 하나로 길게 땋아 내린 모습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까, 머리를 잘라 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온 샐리는 라이와 마주친 충격으로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 이제껏 라이처럼 그녀를 매혹시킨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반해있었다. 그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섹시하고 치명적이었다. 라이를 보는 순간 그의 품에서 보냈던 밤들이 떠올랐다. 감정적으론 그에게서 벗어났을지 모르지만, 육체적으로는 아직 라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는 순간 밀려든 거친 감정의 격랑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샐리는 그렉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그렉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자리에 없었고 샐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잠자코 앉아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본능이 뭔가 빨리 행동을 취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브롬에게 두통이 심해서 조퇴를 하겠으니 그렉에게 전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사무실을 나섰다. 그렉 이라면 메시지를 읽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이해하겠지만 브롬까지 진실을 알 필요는 없었다. 무언가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지만, 라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

그가 자신의 남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남자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가 아는 유일한 남자이기 때문에? 라이는 그녀의 유일한 연인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라이에게 반했던 것처럼 끌리는 남자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습관은 아닐까? 샐리는 라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단지 오래된 습관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또한 자신이 코럴 월리엄스에 대해서 일말의 질투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다. 자신이 라이의 존재를 극복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가 느끼는 것은 성적으로 끌리는 이성을 봤을 때 느껴지는 기본적인 욕구일 뿐이었다. 그런 단순한 느낌이라면 이미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지난 7년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 샐리는 그렉의 전화를 받았다. 그렉은 제법 불퉁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크리스와 내가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라이와 코럴 월리엄스가 들어왔었어요."

그녀는 주저 없이 설명했다.

"라이가 바로 나를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지만 계속 내 쪽을 쳐다보더군요. 그렇게 나를 쳐다본 것이 벌써 두 번째라서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변명거리였기 때문에 샐리는 주저 없이 그것을 이용했다. 라이를 만나서 그녀가 얼마나 당황하고 떨렸는지, 얼마나 감정이 요동쳤었는지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잘 생각했어."

그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브롬이 자네 메시지를 가져온 지 얼마 안 돼서 내 사무실로 라이가 왔더군. 당신을 만나고 싶어 했어, 개인적으로 만나 보지 않은 기자는 당신이 하나뿐이라면서. 당신의 인상착의를 묻더군. 적당히 설명해 주었는데, 이상한 표정을 지었어."

"그래요?"

그녀는 힘들게 한숨을 삼켰다.

"뭔가 그의 레이더에 걸린 것 같아요. 틀림없어요. 정말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요. 혹시 내가 어디 출신인지도 묻던가요?"

급박한 심정처럼 질문을 하는 그녀의 어조는 속사포처럼 빨랐다.

"샐리, 마음의 준비를 해 당신 고향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지만 대신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아 갔어."

"맙소사."

샐리가 다시 신음을 흘렸다.

"그렉, 어쨌든 최대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라이가 사실을 알아내도, 우리가 꾸민 일은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게요."

그렉이 전화를 끊었고, 그녀는 거실을 왔다갔다 서성대며 전화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목소리를 변조해야 할까? 하지만 오후가 지나 저녁이 되어도 기다리던 전화가 오지 않자, 그녀는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혼란과 걱정이 교차하는 불안한 선잠을 자다가 새벽이 다되어서야 겨우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에 그녀를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쉬지 않고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가 천천히 그녀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엔 자명종 소리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멈추려고 했지만 벨소리는 계속 울렸다. 그제야 전화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서둘려 잠결에 수화기를 들려 했지만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전화기의 코드를 잡아 끌어올려 수화기를 힘들게 그녀의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졸린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는 그녀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샐리 제롬 씨 입니까?"

깊이 있는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는 낮고 거친 음성이었지만, 너무 졸린 나머지 정확히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네, 샐리 제롬입니다."

그녀는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누구시죠?"

"라이든 베인즈요."

그 목소리가 대답했고, 샐리의 눈이 갑자기 벌떡 떠졌다.

"잠을 깨운 거요?"

"네, 그러셨네요."

그녀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대담하게 대답했고,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그녀의 몸에 자그마한 전율이 일었다.

"베인즈 씨, 무슨 일이시죠?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아니오. 그저 당신이 취재한 워싱턴 기사에 대해 축하해주고 싶었소. 훌륭한 기사였소. 시간이 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 당신하고만 한 번도 직접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것 같소. 우리 잡지사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기자인데 말이오."

"그… 그러죠."

그녀가 더듬대며 말했다.

"베인즈 씨, 감사합니다. "

"라이"

그가 고쳐주었다.

"스텝들과는 그냥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오. 그리고 어쨌든 아침에 잠을 깨우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할 것 같은데"

그는 경쾌하게 웃더니 인사를 하곤 전화를 끊었다. 전화통화 후에 시계를 본 샐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진짜 지각이었다. 아무튼 그의 사무실로 그녀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면 라이는 아마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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