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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2화 (2/68)

2화.

2년 뒤.

경상남도 남해에 위치한 H호텔 패밀리 룸.

새벽같이 일어난 지한이 욕실 앞 세면대에서 가볍게 세수한 뒤 미니바로 향했다.

3성급 호텔답게 스낵이 빈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봉지 커피가 아닌 캡슐로 내려 마실 수 있는 커피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는 롱고라 적힌 캡슐 하나를 집어 머신 안에 넣었다.

기계를 막 작동시킨 그때였다.

Rrrrrr. Rrrrrr.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니, 발신자는 아침부터 불쾌하게도 ‘아버지’였다.

지한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

-맞선 자리 잡아 놨다.

그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고작 일주일 만의 통화이긴 하나, 안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맞선 자리를 잡아 놨다니.

-주안제약 딸이다. 바이오 사업에 도움 될 게다.

“안 나갑니다.”

-전자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지?

“설마요. 할아버지 소원인 결혼도, 전자 복귀도 당연히 합니다. 한데, 분명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선 강요하지 마시라고요.”

-뭉그적대니 그러는 거 아니야. 일주일이 됐는데 영 소식이 없어! 노인네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

“내일이요.”

-뭐?

“내일 점심 약속 있으면 비워 두세요. 갑작스러우시겠지만, 리조트 일로 바쁜 와중에 무리하게 잡은 약속이니 양해해 주세요. 맞선 자리는 취소하시고요.”

단호한 지한의 말에 태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만나는 여자가 있었어? 뭐, 좋다. 점심 스케줄 비워 두마. 어느 집안이냐.

지한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말을 아꼈다. 그러자 강태규 회장이 다시금 강한 어조로 말했다.

-노인네, 인생 말미에 욕심이 사라졌는지 몰라도 우상그룹 체면이 있어. 아무 계집이나 식구로 들일 수는 없는 것 명심해.

지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재산도 받고 싶고, 회사도 더 키우고 싶다? 도대체 저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 가늠할 수는 있을까.

“아버지나 저나 회사 관련해선 참 깐깐하죠. 그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 찾기 힘들 텐데, 너무 늦어서 할아버지 재산 한 푼도 못 얻게 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사업적인 이득을 위해 하는 결혼은 아무리 빨리 조율하려 해도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죠.”

아들이 찔러 온 정곡에 태규는 할 말이 없는 모양인지 못마땅한 듯한 신음만 낼 뿐, 더는 별말은 없었다.

그새 커피 샷 하나가 내려졌다. 지한은 새 캡슐을 캡슐 머신에 넣고, 버튼을 눌러 샷 하나를 더 추출했다.

“그러니 재산 원하시면 어떤 여자를 데려오든 제 판단에 맡기세요. 할아버지 소유 우상전자 주식, 반드시 상속받게 해 드릴 테니.”

-……내일까진 꼭 데려와.

“그럴게요. 아침 일찍 리조트 부지 둘러보러 가야 해서요.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하러 가겠습니다.”

강 회장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한은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와는 고작 그 정도 사이였기에.

전화가 끊기자 지한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핸드폰을 내려 두었다.

그는 에스프레소 샷 두 개가 담긴 머그잔을 집어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동고를 열어 프런트에 부탁해 받아 둔 얼음을 에스프레소 위에 가득 퍼 담고, 생수병을 하나 따 그 위에 물을 부었다.

그러곤 미니바에 있는 낱개 설탕 두 봉을 집어 들어 완성한 진한 아메리카노 안에 설탕 가루를 넣었다.

지한은 단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차가운 커피에 녹지도 않는 설탕을 넣어 마시는 건 좋아한다.

쓴맛 뒤에 따라오는, 은근하게 씹히는 달달한 설탕 알갱이의 맛과 식감이 좋았다.

설탕 시럽을 탄 것과는 다른 종류의 달달함을 느낄 때면 잠으로도 다 풀지 못한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지한은 머그 컵을 입가에 가져가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흔적을 참…… 많이도 남기고 갔어. 커피 취향까지 바꿔 놓고 말이야.”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중얼거렸다.

“결혼이라.”

지한은 결혼이란 제도를 혐오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정략결혼을 숙명으로 삼아야 하는 삶.

부모가 거울이 돼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그런 결혼도 나름 할 만하다고 여길 수 있었겠지만, 지한의 부모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는 사랑 없이 결혼한 여자를 평생 방치해 왔다. 돈과 명예만 좇으며 아내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아도 외면했다.

사망 선고를 받은 그 순간까지도.

지한에게 결혼은 불행의 상징이었다. 결혼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할 테고, 조건을 보고 한 결혼의 결말은 좋아 봤자 쇼윈도 부부니까.

그렇기에 평생 혼자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는데…….

부동산 재벌로 이름을 떨친 지한의 외조부, 권호재가 한 달 전에 1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병. 가족 내력이 있는 지병이었기에 순응한 권호재는 곧장 재산 정리를 시작했고, 한때 사위이자, 우상그룹 회장 태규에게 제안했다.

‘1년 남짓 남았다더군. 내가 가진 우상그룹 모든 계열사 주식, 그리고 부동산 몇 개 처분해서 내 손자 지한이에게 상속할 생각이야. 다만, 우상전자는 자네에게 다 넘기지. 조건은, 지한이 결혼시켜. 지 좋다는 여자애하고.’

권호재는 돈 욕심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본래였으면 친자식에게 전부 상속했을 테지만, 장녀이자 지한의 친모였던 권희영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하나 남은 아들 권우영은 상속받는 대로 재산을 전부 탕진할 인물이라 모든 걸 맡길 수 없었다.

친손녀인 권우영의 두 딸 또한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쇼핑이나 좋아하지, 돈을 제대로 굴릴 줄 아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럼 남은 인물은 외손자, 지한뿐.

대를 이을 핏줄은 아니지만, 아끼던 딸을 닮아 인물이 훤했고, 친부를 닮아 사업 수완이 좋았으며, 핏줄이라고 외조부인 호재 또한 닮아 돈 굴리는 눈이 밝았다.

사위인 태규와는 척을 졌어도, 잘난 손자만큼은 아꼈기에 권호재는 재산의 큰 부분을 지한에게 상속하고 싶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지한이 서른셋이 됐음에도 좀처럼 여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연애야 본인 마음이라고 쳐도, 보수적인 권호재는 가정은 꼭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조건을 걸었다.

지한이 결혼하면, 자신이 죽은 뒤 태규가 그토록 탐내던 우상전자 주식을 그에게 모두 상속하게끔 당장 유언장을 쓰겠노라고.

엄한 놈에게도 재산을 나눠 줘야 한다니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비와 달리 돈 욕심이 없는 손자는 재산 상속으로 설득할 수 없을 테니 태규를 이용해야만 했다.

권호재는 덧붙여 말했다.

‘결혼을 한다면 다시 전자에 불러들이겠다는 조건이면 되겠지.’

지한은 2년 전 정보 유출 사건으로 우상전자에서 WS호텔&리조트 사업부로 좌천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시 우상전자에 복귀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조건으로 걸라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지한이 우상전자 전무 자리로 복귀하는 조건이라면 결혼하겠다고 했다.

지한이 외조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역시 우상전자로의 복귀.

또 하나는, 정략결혼이 아닌 지한이 선택한 여자면 된다는 것.

권호재는 딸 희영의 실패한 결혼을 반면교사 삼아 출신 성분이나 외모, 학력 대신, 자손을 낳을 수 있는 조건이면 누구든 만족하겠다고 했다.

자손에 집착하는 외조부를 이해하는 건 아니나, 다른 조건은 일절 보지 않겠다니. 그나마 마음이 동하는 조건이었다.

결국엔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지한은 반드시 자신이 고른 여자와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혼할 것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뒤에.

외조부를 기만해야 한다는 게 유쾌하진 않았지만, 지한의 인생에서 결혼은 불필요했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우상그룹 회장 자리뿐이었다. 그러니 필요에 의해 결혼을 해 주고, 무난히 이혼해 줄 만한 여자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사색이 될 얼굴, 볼만하겠군.”

지한이 냉소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곤 어느새 거의 바닥을 보이는 머그잔을 미니바 위에 내려놓았다.

신붓감을 데리러 가기 전, 중요한 업무가 있다.

오늘, 드디어 완성된 리조트 부지를 확인하러 가는 날이었다.

우상전자로 복귀하더라도, 지한은 정성 들인 일은 제 손으로 끝까지 마무리 짓고 싶기에 마지막까지 리조트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협력사의 부동산 개발자를 대동해 동산 꼭대기에 오른 지한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바라봤다.

지어진 지 오래된 집들이 모인 마을 몇 개, 폐공장 터, 조각보처럼 여러 개가 엮인 밭들. 그리고 땅끝 너머에 펼쳐진 수평선이 먼 에메랄드빛 바다.

나중엔 WS리조트 부지가 될 그 땅들을 보며 지한은 미리 건축 디자이너와 예상 설계한 설계도를 눈으로 그렸다.

도로를 깔고, 도로를 제외한 땅을 잔디로 뒤덮고, 조경을 꾸미고, 곳곳에 다양한 버전의 숙박 시설을 만들고, 골프장 손님을 위해 클럽 하우스도 설치할 것이다.

지한은 이곳에 국내 최대 규모의 리조트 단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지난 2년간 WS호텔을 먼저 공격적으로 키워 나갔고, 사업을 시작한 지 꽤 됐음에도 여태 입지가 모호했던 WS호텔을 기어이 올해의 선호 호텔 순위 1위에 오르게 했다.

당연히 그 지표를 가지고 투자를 성공적으로 끌어왔다.

이제 리조트 차례다. 끌어모은 투자금으로 이 빈 땅에 머릿속에 있는 모습을 실현시켜 우상그룹을 대표하는 무역, 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인 WS호텔&리조트로 도약할 생각이었다.

모든 건 전자로 돌아가기 위해. 언젠가 우상전자를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서였다.

“그 여관 사장, 마지막까지 말을 몇 번이나 바꾸던지. 설득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오천이나 더 올려서 달라는데, 그 땅이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거든요. 충분히 값을 쳐줬는데도 참……. 그래도 잘 해결돼서 다행이지 뭡니까.”

지한의 감상을 잠시 기다려 준 부동산 개발사 책임자가 말했다.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지한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습니다. 정 비서.”

지한이 옆에 서 있던 비서, 정윤을 쳐다보자 윤은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돈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저희 전무님께서 수고해 주신 데 감사하는 뜻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이 넓은 대지 중, 오백 평을 가지고 있던 땅 주인이 시세보다 큰 보상을 바라며 마지막까지 거래를 애먹였다.

책임자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결국 기존에 제시했던 금액으로 땅을 사들인 상황.

지금 건넨 봉투는 노력해 준 데에 대한 대가였다.

“약소하지만, 직원분들하고 회식하시라고 넣었습니다.”

“어휴, 안 주셔도 되는데요.”

“작은 성의 표시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어휴, 그럼…….”

마지못해 받는다는 듯 돈 봉투를 챙겨 잠바 안주머니에 넣은 책임자가 말을 이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사무실에 가서 계약 도장 찍는 건 어떠십니까? 들어가는 길에 괜찮은 가마솥 밥집이 있는데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

오후 1시.

지한은 개발사 책임자와 식사를 하고, 계약서 도장까지 찍은 뒤, 서류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호텔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운전석에서 차 시동을 켠 윤이 뒷좌석에 오른 지한에게 말했다.

지한은 슈트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내 윤에게 내밀었다.

“여기 먼저 들러.”

윤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라일락커피’라는 상호와 그곳의 주소가 함께 적혀 있었다.

윤은 의아했다. 상호명이 다소 촌스러워서. 이름을 보아 동네 개인 카페 같은데, 지한은 커피 맛에 까다로운 편이었다.

“커피 드시고 싶으신 거면 프랜차이즈를 찾아볼까요?”

“아니. 거기로 가.”

지한은 그 말과 함께 또 다른 일을 위해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금세 일에 집중해 버린 지한에게 더는 물을 수 없어, 윤은 유명한 바리스타라도 있겠거니, 생각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결혼 협상]

정가 :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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