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신없이 입술을 맞대자 와인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해주는 안 그래도 알코올로 나른해진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평소 참 크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손이 성마르게 블라우스 아래부터 들어와 속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내 길고 두툼한 손가락부터 맨살에 와 닿았다.
“하아, 하아.”
생경한 감촉이 어색했던 것도 잠시, 그 손이 더 깊숙이 들어오자 해주의 숨이 더워졌다.
“윤해주 씨, 이렇게 예쁜 줄 몰랐는데.”
“상무님은…… 예상했던 그대로세요.”
달뜬 숨을 뱉으며 대답하는 해주를 보고 지한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요? 어떻게 예상했는데?”
“완벽, 완벽할 거라고요. 슈트 입으실 때…… 멋지세요.”
“아. 내가 슈트발이 좋긴 해요.”
지한은 웃음 띤 얼굴로 작게 읊조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티 한 번 안 내더니, 속으론 나 관찰했던 모양이에요?”
그러곤 그가 은근하게 귓불을 씹어 대자, 해주는 간지러움에 어깨를 웅크려 댔다.
“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일부러 본 게 아니면. 본능적으로 끌렸어요?”
지한이 해주의 블라우스 속에 파고들었던 손을 빼냈다. 그러곤 위쪽 단추부터 빠르게, 그러나 품위 없이 성급하진 않게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손에 블라우스가 완전히 풀어 헤쳐졌다.
브래지어 사이에 자리 잡은 얕은 가슴골이 드러나자 해주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는데, 그는 기어코 그녀의 팔을 치워 내며 웃음 지었다.
“더 깊숙한 곳까지 볼 텐데 뭐 하러.”
“그래도…….”
“나 봐요. 내 눈 쳐다봐요.”
명령과 회유 사이 그 어디쯤의 말에 해주는 애써 지한과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지만, 차마 똑바로 그를 바라보진 못했다.
대단한 남자. 다정한 손길. 이토록 잘생긴 얼굴. 그 모든 이유에 심장이 떨려 그렇기도 했지만.
실은…… 술이 조금씩 깨자, 해주는 쾌락보단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윤해주 씨. 원래 이렇게 예뻤어요? 아님 내가 취했나?”
“아무래도 술을 드셔서…….”
말을 끝마치지 못한 해주가 숨을 흡, 들이마셨다.
“그런가?”
지한이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해주의 턱선을 부드럽게 매만진 것이다. 이내 그는 그녀의 볼을 감싸 쥐며 말했다.
“한데, 그거 압니까?”
“어떤 걸요?”
“내가 윤해주 씨 자주 훔쳐봤던 거.”
“상무님이…… 저를요?”
“그땐 술도 안 마셨는데 왜 예뻐 보였는지. 아. 내가 원래부터 당신에게 관심이 있었을지도.”
지한이 피식, 웃음 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스스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잇새로 흘러나온 흐린 웃음소리는 알코올 기운이 섞여 그런지 야릇했다.
이 고급 주택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한 1년 동안, 해주는 이토록 많이 웃는 지한을 처음 봤다.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
일 때문에 인상을 자주 찌푸리고 있는 그는 그 모습마저도 근사하게 느껴질 만큼 멋있었지만, 그렇기에 단 한 번도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한데 이런 부드러운 모습도 있다니. 웃는 얼굴은 더 멋지구나, 생각하며 해주는 그에게 새삼 설렜다.
역시, 그럴수록 마음은 더 착잡해졌지만.
여태 그를 좋아하지 않고 감정을 잘 다스렸는데, 마지막 날 결국 그에게 마음도 몸도 줘 버렸다.
왜 하필 오늘일까. 운명의 장난이라는 게 이런 건가?
“무슨 생각 해요?”
해주가 제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지한은 짓궂게 고개를 내렸다. 한순간, 그의 입술이 해주의 완만한 둔덕 위로 내려앉았다.
“아.”
생경한 감촉에 해주는 움찔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손을 탄 적 없는 은밀한 곳이 지한의 타액으로 범벅 되어 갔다.
그 사실에 해주는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몹시 흥분했다.
“아무,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거짓말.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 거짓말 잘 잡아낸다고.”
“그냥, 상무님 정말 잘생기셨다고 생각했어요.”
“봐도 봐도 보고 싶은 얼굴이긴 하지, 내가.”
지한은 순순히 대답해 주면서도 이젠 제게 집중하라는 듯, 이번엔 혀로 해주를 뜨겁게 만들었다.
해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저 와인에 취하게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불쌍한 사연으로 그의 동정심을 자극해 싸구려 와인 한 병을 같이 마시는 게 목표였다.
술이 약한 지한을 취하게 만들고, 그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게 하는 것만이 계획이었는데.
물론 키스 한 번 정도는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와 지독하게 얽히면 무슨 기분일까 상상해 본 적도 있긴 했다.
후줄근한 차림을 해도 늘 빛이 나는 남자였다. 큰 키와 비율 좋은 몸매는 늘 가슴 설레게 했고, 뉴욕 명문대를 졸업한 우수한 지성, 매번 뉴스에 크게 실릴 만큼 손대는 프로젝트마다 성공시키는 리더십, 그리고 재벌이라는 매력적인 집안 배경은 그를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누구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마주할 때마다 저 아래 숨겨 둔 욕망이 어쩔 수 없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최대한 본능을 억누르고 일에 충실하려 애썼다. 황금 같은 직장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
그렇게 입주 가사 도우미로서 한집에서 산 기간이 꼬박 1년.
그간 선을 긋고, 예의 차리며 지내 온 날들이 거짓말 같았다.
‘죄송해요.’
지한의 뜨거운 숨과 말에 해주는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기분을 느끼며 마음으로 사과했다.
***
AM 2:00.
암막 커튼을 쳐 두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침실.
해주가 조용히 몸을 틀어 상체를 세워 앉았다. 이내 다리를 하나씩, 조심히 침대 아래로 내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해주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사타구니가 쓰라렸다. 난생처음으로 한 잠자리를 세 번이나 했고, 전부 다 저돌적으로 했으니 그럴 수밖에.
걸을 때마다 비명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해주는 고통을 참아 내며 조용히 속옷부터 청바지와 티셔츠까지 주워 들었다. 그러곤 곤히 잠들어 있는 지한을 바라봤다.
“상무님 자는 얼굴은 처음 보는데.”
어둠 속에서 아주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이 정말 잘생겼다. 남자다운 외모. 평소 서늘하다고 느꼈던 눈빛이 감긴 눈꺼풀 속으로 감춰져 있으니 좀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마에서 코, 입술로 이어지는 선은 어찌나 예쁜지. 이런 멋진 남자와 정을 나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한이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으니 술이 깬 지금은 현실감이 돌아왔지만, 아마 잠들었다가 깼다면 잠결에 달콤한 꿈이었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1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해주는 목소리를 낮춰 진심으로 사과했다.
스물여섯, 입주 가사 도우미로 일하기엔 어린 나이임에도 그녀를 믿고 일을 시켜 주었다.
나이 어린 가사 도우미를 존중해 주었고, 명절마다 공휴일마다 보너스며 휴가도 선의로 넉넉히 챙겨 주었다.
언젠가 일을 그만둘 때 큰 선물 하나 해 드리고 싶었는데, 선물은커녕 큰 배신만 하게 됐다.
앞으로 제가 하는 행동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상그룹 회장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니 큰 피해는 가지 않았으면.
“평생 사죄할게요. 행복하세요…….”
해주는 걸음을 돌렸다. 침실을 나서며 다시 한번 그가 곤히 자는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옷을 갖춰 입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비밀번호가…….”
그녀의 목적지는 이제 지한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지한이 취기에 흘리듯 말해 준 비밀번호로 우상전자 보안 서버를 열고, 새 디스플레이 기술 자료를 들고, 영영 사라질 작정이었다.
[결혼 협상]
정가 :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