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렇게 열다섯이 되도록 나는 이잎새에게 마음을 제대로 내비치지 못했다. 어쩌다 나도 모르는 새 티를 낸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이잎새는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다.
그간 이잎새는 ‘나중에 네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면 내가 걔 인생을 아작 내 주겠다’는 둥, 내 속을 긁는 소리를 숱하게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백도 못 해 보고 대차게 까이는 기분이었다. 분명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이잎새와 나는 남매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 간다는 거였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이잎새를 꼬시기로.
일단은 어깨를 준비해야 했다. 망할 놈의 마틴 하워드만큼은 못 되더라도, 일단은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나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 * *
{과외 1시}
[왜?]
이렇다 할 이유도 들려주지 않고 과외 시간을 미뤘는데, 돌아오는 거라곤 무심한 답장이 전부였다. 더 기다려 봐도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더 오질 않았다. 내가 이잎새한테 뭘 바라냐 싶어 쓴입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고 간다는 게 수영장이라 기도 안 찬다.
차가운 물살을 가를 때도, 타일에 팔을 얹고 숨을 몰아쉴 때도, 젖은 머리를 털어 낼 때도, 이잎새는 불현듯 생각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운동화를 보면 혼자서 신발 끈을 묶지 못하는 이잎새가 생각났고, 젤리나 사탕을 볼 때마다 나는 좀처럼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이잎새가 사이다를 고르면 나는 자연스레 콜라를 골랐다. 그런 것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졌다. 이잎새를 떠올리는 빈도도 곤란할 만큼 잦아졌다.
수영을 마치고 이잎새네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누르자, 한참이 지난 뒤 이잎새가 나왔다. 얼굴에는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잎새는 말없이 내게 문을 열어 주고는 입을 두드리며 하품을 했다. 오늘도 이잎새는 그 자주색 고쟁이를 입고 있다. 저놈의 고쟁이는 낡지도 않는다. 그게 이잎새가 날 어떻게 여기는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야, 너한테 락스 냄새나.”
별안간 이잎새가 내 목덜미로 붙어 들었다. 그러고는 스스럼없이 냄새를 맡았다. 살갗에 이잎새의 숨이 닿자 목이 바짝 탔다. 몸이 굳으며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머리도 젖었네. 너 수영하고 왔어?”
“…….”
“야, 수영하고 왔냐고.”
“어.”
“그린 스포츠센터? 이거 거기 있는 거 아니야? 그, 구청 사거리에. 근데 웬 수영? 이 겨울에.”
네가 죽고 못 사는 어깨라도 키워서 너 꼬셔 보려고. 그 말은 차마 안 나온다. 해도 지금은 아니다.
“웬 수영이냐니…….”
“여자 꼬시려고.”
“뭐?”
왜냐하면.
“놀고 있네.”
이잎새는 나를 이렇게 여기고 있으니까.
* * *
“야, 김용호.”
“왜.”
바람 빠진 농구공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으며 겨우 입을 뗐다. 김용호는 뻥튀기를 먹으며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차라리 저렇게 반쯤 정신 팔렸을 때 슬그머니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너 고미호랑 사귈 때, 뭐라고 그러고 사귀었냐?”
“뭐, 우리야 미호가 알아서 착착 다 했지. 그건 왜.”
팔자 좋은 새끼. 나는 침대 위로 늘어지게 누우며 한숨을 벅벅 쉬었다. 조언을 구할 상대를 잘못 짚었다.
“왜 그러냐? 이잎새랑 맘처럼 안 돼?”
김용호는 실실 웃으며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누굴 바보로 아나. 너 얼굴에 이잎새 좋아한다고 써 놓고 다니는 거 모르냐? 난 가끔 네 명찰이 ‘이잎새 좋아하는 애’로 읽혀요.”
“…….”
“새끼, 지도 양심은 있어서 아니라곤 못 하네.”
하기야, 어차피 모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이잎새 같은 바보나 내 속을 못 읽는 거지. 온 세상천지 알 사람은 다 알 거다. 아마 산초도 알겠지.
“넌 고미호한테 왜 넘어갔는데.”
“그냥 나 좋다니까 나도 좋던데. 어떤 미친 새끼가 미호가 사귀자는데 안 사귀겠어. 아니다, 너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이잎새밖에 모르는 새끼.”
김용호는 만화책을 탁 덮더니, 뻥튀기를 먹던 손을 탁탁 털었다.
“그냥 고백해. 좋아한다고. 너 거부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 나 같아도 날름 받는다.”
“징그러워, 미친놈아.”
김용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잎새가 널 싫어하지는 않는데, 그냥 아직 남자로 인식하지 못한 거 아니냐? 나는 인간적인 애정이랑 이성 간의 애정이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본다.”
“그 한 장이 어떤 건데.”
“그걸 또 굳이 말로 해야 아냐? 당연히 물리적인 접촉이지.”
“장난하냐?”
김용호한테 이런 걸 물은 내가 미친놈이었다. 저 새끼가 지금 읽고 있는 저급한 만화책만 봐도 사이즈 딱 나오는 거였는데.
“아니, 난 진지하다니까? 잘 한번 생각해 봐. 그게 꼭 그렇게 불순한 것만은 아니거든. 누가 입술 박치기라도 하랬나. 그냥 뭐, 손잡고 그런 것도 다 물리적 접촉이지.”
김용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곧 다시 빨간 만화책을 펼쳐 들었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수영 가방을 들었다.
“간다.”
“어, 가라.”
그날, 수영하는 내내 김용호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어 봤다. 하지만 그런 식은 안 됐다. 그건 다 이잎새가 날 좋아하고 나서야 생각해 볼 문제였다.
* * *
저녁 타임에 수영을 갔다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고열이 끓어 썰매장은 고사하고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약을 몇 개 주워 먹고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붙들고 간신히 이잎새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이어 이잎새에게 전화가 왔지만, 그 진동마저 골을 울려 그냥 끊어 버렸다.
그대로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환장할 초인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전까지는. 저 상식을 벗어난 횟수는 이잎새가 아닐 리 없다. 그것만 생각하며 천 근 같은 몸을 일으켰다.
“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도 안……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뭐 하러 왔냐. 혼자 가라니까.”
하얗게 질린 이잎새가 깜짝 놀라 내 얼굴을 살폈다. 아픈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이잎새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이잎새 얼굴을 보니 반가우면서도 괜히 더 아팠다.
“너, 내 전화는 왜 안 받아? 입 뒀다 뭐에 쓰려고. 어?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그러면 그만이잖아.”
가라고 해야 하는데,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괜히 심술이 돋았다. 그래서 현관문을 모조리 잠갔다. 걸쇠까지 채웠다. 그러고는 머리가 띵해 다시 내 방으로 가 뻗었다.
“밥은.”
곧 이잎새가 방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누운 그대로 물었다.
“네가 내 밥걱정할 군번이야 지금? 잠이나 자라.”
틱틱대는 이잎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또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한참이 지나 눈을 떠보니, 베개 위에 젖은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얼마나 물을 흥건하게 먹였는지 머리며 베개 솜까지 다 젖었는데도,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걸 아프지 말라고 얹어 준 거냐, 아니면 더 아프라고 고사를 지내고 간 거냐.
물이라도 마시려고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서 꾸물대는 인영이 보였다. 이잎새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 내내 웃었다. 좋았다. 이잎새가 여기 있는 게. 이잎새는 초록색 스웨터에 흰 목도리를 두른 채 자고 있었다. 불현듯 공항에서 처음 이잎새를 봤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잎새는 딱 이런 색의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자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물론, 그대로이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이 그랬다. 그때는 분명 그냥 좀 이상한 애였는데, 지금은…….
“이잎새.”
나는 가만히 이잎새를 불러 봤다. 깨어도 그만, 안 깨어도 그만이었다. 아니, 깬다면 좋겠다. 지금은 이잎새와 눈을 맞추고 싶었다. 곧 이잎새가 깨어나더니 잠이 묻은 까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하냐, 너.”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뒤늦게 아차 싶었다. 말은 여기서 뭐 하냐며 핀잔을 주는데, 표정이며 어조는 그게 아니었다. 부드럽게 흘러나온 음성은 내 것이 아닌 듯 다정하기만 했다. 약 기운에 취해 들뜬 것이 화근이었다. 당황한 이잎새는 곧 내 시선을 피해 눈길을 돌렸다. 좌절스러웠다. 이잎새는 내게 보인 적 없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어났냐. 너 잠깐 자지 말고 있어 봐. 약이라도 사 오게.”
“약 먹었어.”
이잎새는 제법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되도록 쌀쌀맞게 대답하자, 이잎새는 곧 주방으로 가더니 물을 마셨다. 황급히 잔을 비우고는 제 옷을 펄럭이며 열을 식히려 했다.
“그만 가.”
낭패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파에 드러눕고는 이잎새더러 그만 가라고 했다.
“안 그래도 가려고 그랬거든?”
이잎새의 목소리에서 정제되지 않은 당황이 느껴졌다. 이잎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능숙하게 풀어내더니, 나를 내버려 두고 집을 나섰다. 와중에 이잎새가 누워 있던 자리가 따뜻했다. 나는 바닥으로 다리를 늘어뜨리며 비스듬히 누워서는, 손목으로 눈을 가렸다.
* * *
내 방 침대에 누우면 정면에 방문이 보인다. 나는 거기에 이잎새가 놓고 간 옷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부러 아침저녁으로 그걸 바라봤다. 내 성급함이 우리를 어떻게 그르쳐 놨는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건 이잎새가 가장 아끼는 겨울옷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려주어야 했는데, 도저히 이잎새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다. 아무리 얼떨결이었다고는 하지만 대체 어쩌자고 그런 눈으로 잎새를 바라본 건지, 수습조차 하지 못할 일을 저지른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나흘 동안 이잎새를 보지 못했다. 그건 우리가 만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잎새가 보고 싶었지만, 이잎새를 볼 자신은 없었다.
그 와중에 이잎새에게 서운함이 싹텄다. 내 마음을 알게 된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옹졸하다는 걸 안다. 그래도 서운했다. 이잎새는 그동안 정말로 내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나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이잎새는 그간 한 번을 연락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게임 아이템을 요구해 오던 메시지조차 뚝 끊겼다. 나도 똑같이 그러고 있으면서 괜히 이잎새 탓을 했다.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허망하게 마음을 전할 생각은 결단코 아니었다.
집에 가만히 있어 봐야 마음만 답답했다. 열도 얼추 떨어져, 머리라도 식힐 겸 간만에 수영을 갔다. 평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수영을 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는 이잎새 말마따나 머리를 꼼꼼하게 말렸다. 그러고는 이잎새 생각에 정신이 팔려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등을 두드리기에 뒤를 돌았더니, 또래 여자애가 서 있었다.
“이거, 카운터에 놓고 갔길래. 걸음이 빨라서 이제야 따라잡았어.”
휴대폰이었다. 잘 않던 짓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고맙다.”
휴대폰을 받아 들고 곧장 뒤를 돌아 걷는데, 그 여자애가 다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성현초 마세준 맞지?”
나를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 너랑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 안 나?”
“미안한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솔직히 말해 성가셨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애였다. 그대로 길을 걷는데 여자애가 옆으로 따라붙어 걷기 시작했다. 내가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 대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보폭을 맞췄다.
“서운하네. 그래도 1년을 같은 반에서 지냈는데.”
“나 여자 친구 있어.”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쟤가 나한테 무슨 의도로 말을 걸었건 상관없다. 나는 지금 이잎새 생각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어이없어 하는 애를 뒤로하고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 휴대폰을 열었는데 이잎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안심이 됨과 동시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잎새, 내 생각을 조금은 했다는 거네. 오후 내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누르려다 말고, 결국 밤이 다 되어서야 전화를 걸었다.
이잎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 날 문자를 남겨도 답장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집으로 찾아갔지만, 이잎새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가!’, ‘꺼지라고!’ 그런 말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에는 다행히 아주머니가 집에 계셔서 문을 열어 주셨다. 나는 이잎새의 옷을 내려놓고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방문을 두드렸다. 이잎새는 인기척조차 내지 않았다.
“세준아, 잎새 쟤가 정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줌마가 진짜 세준이 얼굴 볼 낯이 없어. 미안하다. 분명 저러다 말 거야, 다음에 다시 와. 응?”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찾아갔다. 이잎새가 제일 좋아하는 젤리랑 초콜릿을 한가득 사 가도, 이잎새는 절대 나를 보려 들지 않았다.
그게, 이잎새의 대답인 모양이었다.
* * *
포기가, 되면 했겠지만. 불행히도 안 됐다. 전혀.
이제 나한테 중요한 건 이잎새랑 사귀냐 마느냐, 이잎새가 날 좋아하느냐 마느냐,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이잎새가 보고 싶었다. 이잎새가 내게 친구 자리밖에 내어 줄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이잎새 곁을 지키고 싶었다.
개학 날, 나는 혹시나 해 새벽부터 이잎새네 집 앞에 서 있었다. 해가 막 뜨려 할 때, 이잎새네 현관문이 열렸다. 아저씨이길 바랐다. 그런데 이잎새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늦잠을 밥 먹듯이 자는 이잎새가, 고작 나를 피하겠다고 이 새벽에 집을 나섰다.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또 울컥 화가 났다.
자기를 기다리는 내내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이잎새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그랬다면 이렇게 쌀쌀맞게 나를 스쳐 가지는 못했을 거다. ‘이잎새, 내가 그렇게 싫어?’ 그 말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이잎새와 내 관계를 돌이키러 온 것이었지, 내 감정을 토로하러 온 게 아니었다. 자칫 그랬다가는 이잎새가 영영 도망칠 게 뻔했다.
내가 따라 탈까 봐 성급하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는 이잎새가 못내 미웠다. 그런데, 좋았다. 이잎새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따라 타자, 이잎새는 곧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득달같이 따라 내려 계단을 내려가는 이잎새를 막아섰다.
“이잎새.”
내가 앞을 가로막자 이잎새는 뒤를 돌아 계단을 올랐다. 나는 계단을 세 칸씩 올라 얼른 그 앞을 또 막아섰다.
“이잎새, 대체 왜 이래 너.”
내가 그렇게 싫냐. 얼굴도 안 보게.
“내가 뭐.”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이잎새가 눈을 맞춰 왔다. 근 두 달 만에 보는 이잎새의 얼굴이었다.
“왜 나 피하는데.”
찰 땐 차더라도, 친구는 계속할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언제.”
이잎새는 그런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나는 눈뜨고 코라도 베인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내가 언제? 너 두 달을 내리 그랬어.
“야, 안 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바로 저거였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내 마음쯤이야 묻어 둘 수 있었다. 나는 곧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내가 할 수 있는 건 되도록 그 일련의 사건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거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 되었다. 이잎새는 상당히 협조적이었으니, 나만 마음을 다독이면 됐다. 확실히 비참한 일이었지만, 이잎새와 연을 끊는 것보다야 백배는 나은 선택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이잎새와 반이 갈렸다. 그거야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만큼 자주 보러 가면 되었다. 문제는 이잎새가 임성재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거다.
그 새끼는 1학년 때 이잎새 책상에 초콜릿을 내려 둔 장본인이었는데, 내가 이잎새 곁을 비운 틈을 타 종종 말을 걸고는 했다. 임자인지 낭자인지 하는 고양이를 무기 삼아서. 설상가상, 귀여운 것에 약한 이잎새는 그 자식한테 자주 웃어 주고는 했다. 나한테는 그렇게 안 웃어 주면서.
근데 하필이면 이잎새가 그 새끼랑 짝이 됐다. 그러니 내가 출석 도장을 죽어라고 찍을 수밖에. 가끔은 이잎새가 나더러 왜 제 짝꿍 자리를 뺏어 앉느냐며 그 새끼 역성을 드는데, 그럴 때마다 열 받아서 살 수가 없었다. 내 맘을 모르기나 하면서 그러면 내가 또 모른다. 다 알면서 저러니 속이 타 죽는다.
그렇게 분노의 학기 초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김용호가 기막힌 소리를 했다.
“야, 넌 보기보다 포기가 빠르다? 되게 진지한 줄 알았더니.”
농구를 마치고 코트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김용호를 얼른 돌아봤다. 저 새끼는 곧잘 저렇게 개소리를 한다.
“무슨 소리야.”
“아니, 뭐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난 네가 아직 이잎새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미호가 그러던데. 이잎새가 너 좋아하는 여자애 따로 있다고 그랬대. 이미 학교에 소문 쫙 퍼졌을 건데.”
나는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이잎새네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 주시는 아주머니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제 방에서 나오려는 이잎새 앞으로 갔다.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무슨 소리야?”
그대로 걸어서 이잎새를 방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나도 뒤따랐다. 달칵 문을 닫았다.
“말해 봐. 내가 누굴 좋아하는데.”
내가 싫어서 두 달 가까이 얼굴 한 번 안 보여 줘 놓고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헛소리까지 퍼뜨리고 다니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 싶었다.
이잎새는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더니, 결국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 그, 무슨, 그린 스포츠센터, 거기, 수영. 걔. 내가 봤어.”
“뭐?”
의미를 알 수 없는 고갯짓과 함께, 이잎새는 내가 다니던 스포츠센터 이름을 거들먹거렸다. 걔는 또 누구야. 뭘 봤다는 거야.
“뭘 모르는 척을 해. 그린 스포츠센터. 그 여자애 꼬시려고 거기 다녔다며.”
스포츠센터. 여자애. 꼬신다. 나는 이잎새를 꼬시기 위해 스포츠센터에 다녔다. 근데 얜 뭔 소리를 하고 있는……. 동떨어져 있던 단서들이 곧 꼬리를 물었다. 휴대폰을 찾아 줬던 여자애가 돌연 떠올랐다.
생각을 뒤집어 보니, 이잎새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던 날과 시기가 딱 들어맞았다. 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달아오르기 시작한 눈가를 잽싸게 가렸다. 이잎새. 방학 내내 나를 피해 다녔던 게, 그 눈빛 때문이 아니었어?
“부끄럽냐? 어? 부끄러운가 보다? 왜 그러고 있어?”
이잎새는 건수 잡았다는 듯이 나를 달달 볶았다. 마치 바람난 남편 잡듯이.
“이잎새.”
“왜.”
“너 어디서 뭘 보고 다녔던 거냐.”
“내가, 어? 와플 사러 갔다가 다 봤어. 뭐, 사이좋더만? 어? 아주 그냥, 철- 썩 붙어 가지고, 쌍쌍바가 따로 없더만.”
철썩 붙기는, 그냥 말 몇 마디 하다 그마저도 따돌렸다. 어떻게 그 찰나를 봤나 싶어 답답하면서도, 한마디 한마디 꼬집듯 말하는 이잎새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왜 이렇게 귀엽냐, 너.
“이잎새.”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잎새를 봤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더 이상 마음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감추지 않아도 좋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말해 봐.”
“뭘? 뭘 말해.”
이잎새는 가감 없는 내 눈길을, 즉시 피했다. 그때처럼.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돌려세우는 귀 끝이 붉었다. 그건 좋은 신호였다.
“내가 수영 왜 다닌다고 했어.”
“여자 꼬시러 간다며.”
이 바보는 답을 쥐여 줘도 모른다.
“그래. 근데.”
“뭐가.”
그게, 너라고.
“이잎새, 너 남자야?”
“뭐?”
“너 남자냐고.”
“이 새끼가 진짜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남자야?”
이잎새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여자 아니라고 하면 이렇게 득달같이 화를 낼 거면서.
“그래. 너 남자 아니잖아.”
“그래. 내가 여자지, 남자냐?”
나는 이잎새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그럼 난?”
“그럼 여자냐? 네가?”
이제 거의 다 왔다.
“그래. 넌 여자고, 난 남자야.”
이잎새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정면을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땅만 보고 있었다.
“누가 그걸 모르냐? 산초도 알걸. 그거는.”
나랑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쫑알대고 있는 이잎새를, 잠깐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안아 보고 싶었다. 따뜻한 몸을 안고 내 마음을 다 들려주고 싶었다. 죄 없는 주먹만 으스러지게 쥐며 참아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나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이잎새를 보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감히 예상치 못했다. 상상이야 숱하게 했지만 실현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막연한 기대치를 상회하고도 남는 짜릿함이었다. 붉은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빠르게 뛰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배가 간지러웠고 귓가에서는 심장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이잎새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