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3화 (3/17)

3장.

두 번의 전쟁 같은 시험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마세준에게 특훈을 받으며 수학을 독파하고 있었고, 마세준은 점점 단호한 스승이 되어 갔다. 가끔은 끝없이 우는 창밖의 매미들보다 이 새끼가 더 독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적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 살아생전 그런 수학 성적은 받아 본 역사가 없다. 나는 다짐했다. 마세준 선생님께 뼈를 묻기로.

오늘은 오래간만에 갖는 진정한 휴일이었다. 나는 에어컨 앞에서 머리카락을 펄럭거리며 땀을 식히다가, TV 광고가 끝나기 무섭게 그 앞으로 가 앉았다.

[네, 저희는 현재 모스크바에서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중계를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중계방송에 캐스터 임잔디, 아나운서 최기범입니다.]

“야, 또 뭘 그러고 보냐.”

마세준은 테이블 위에 팝콘을 내려놓으며 못마땅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KTX 타고 가면서 봐도 수영 중계 아니야, 딱 보면 모르냐고. 얘는 가끔 꼭 저렇게 괜한 걸 묻는다.

“수영 보잖아. 조용히 좀 해 봐.”

나는 수영 중계 특유의 울림이 좋다. 카메라는 고공에서 화면을 잡고, 물결이 일렁이다가 선수들이 입장하고, 웅- 환호가 울리고, 마침내 숨 막히는 긴장을 깨고 푸른 수면으로 뛰어드는 나의 마틴 하워드…….

[지금 세 번째 레일의 파란색 모자를 쓴 선수, 리빙 레전드죠. 영국의 마틴 하워드 선수입니다. 이 선수, 다가오는 8월에는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하게 되는데요.]

“팝콘 안 먹어?”

“지금 팝콘 먹을 때가 아…… 마틴! 마틴! 아, 미쳤다 진짜. 어깨 더 넓어진 거 봐. 아, 어떡해. 미쳤나 봐!”

“그놈의 마틴 하워드가 밥 먹여 주냐.”

“아, 조용히 해 보라니까.”

나는 마세준을 노려보려다, TV에서 시선을 떼기 아까워 그냥 말로 갈음했다. 마틴은 한 마리의 잘빠진 물개처럼 물살을 가르고 있었고, 그 모습은 가히 내 심금을 울렸다. 저거거든. 저 풍채, 저 어깨거든. 나는 양손을 마주 쥔 채,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려 들어갔으면…….

[네! 이제 마지막 턴입니다. 아, 엄청난 기록입니다. 월드 레코드보다 무려 0.12초 앞서 있습니다! 좋습니다! 마지막 50m를 남겨 두고 있는데요. 매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는 중국의 신예 리쉬엔 선수와 그야말로 기량이 최대치에 달해 있는 마틴 하워드 선수! 아, 말씀드리는 순간, 마틴 선수! 영국의 마틴 하워드! 금메달! 금메달입니다!]

“…….”

TV 화면으로 ‘마틴 하워드, 금메달’이라는 자막이 큼지막하게 들어섰고, 나는 그대로 긴장이 풀려 바닥에 철퍼덕 엎드렸다.

“가지가지 해라, 진짜.”

마세준은 팝콘을 먹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고,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마세준을 노려봤다.

“넌 몰라, 마틴이 아직 미혼이라는 게 내게 얼마나 큰 희망이자 고문인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한다고.”

내가 가련하게 말하자, 마세준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너 저 인간이 몇 살인지나 알고 결혼 타령이냐.”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어깨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팝콘으로 손을 뻗었다. 잘 튀기긴 튀겼다. 역시, 팝콘 하면 마세준이다.

* * *

“세준네 내일 카페 하루 쉰다고 그러네. 같이 어디 근교라도 놀러 갈까 싶은데.”

“그래? 세준 아빠 그런 말 않던데.”

마세준네 얘기였다. 마세준네 부모님은 번화가에서 큰 디저트 카페를 운영하는데, 장사가 무지 잘된다. 밤낮으로 디저트를 구워도 매일같이 동이 나는 탓에 새벽부터 나갔다가 야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신다. 그래서 마세준이 맨날 우리 집에서 탱자탱자 하는 거고.

“어, 세준 엄마가 조금 아까 문자 보냈더라고. 푹푹 찌니까 오븐 앞에 있기가 너무 지긋지긋하대. 하루만이라도 쉬어야지, 안 되겠다고.”

“이 무더위에 어딜 꼭 가야 하나? 그냥 뭐, 모여서 맛있는 거나 좀 사 먹고 때우지 그래.”

엄마 아빠는 식탁에서 소주에 노가리를 먹고 있었고, 나는 거실에서 쥐포를 뜯고 있었다. 산초는 그 내내 내 앞에 앉아서 쥐포를 갈구하고 있었지만, 나는 쥐포 대신 연어 캔을 뜯어 부어 주는 것으로 산초를 달래 주었다.

“어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드가 없어? 오랜만에 콧바람도 좀 쐬고, 어디 개천에 발이라도 담그고 오면 좀 좋아?”

“개천? 엄마! 수영? 나도 할래. 나도 갈래.”

나는 식탁으로 호다닥 달려가서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를 뒤따라온 산초는 식탁 위로 올라와 킁킁- 노가리 냄새를 맡았다.

“잎새! 똑바로 앉아야지. 궁둥이 붙이고 앉아, 얼른.”

“아, 물놀이 가는 거냐고. 그러면 나도 가! 나도 데려가!”

엄마는 네 번째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더니, ‘그럼, 내친김에 애들 데리고 가 볼까?’ 그랬다.

“뭐, 당신 내키는 대로 해.”

“어떻게, 세준 엄마한테 전화라도 한번 해 봐?”

“해 봐! 엄마, 해 봐. 나 계곡 가고 싶단 말이야.”

“어휴, 가만히 좀 있어 봐. 어떻게 될지 봐야 알지.”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엄마 휴대폰을 잡아채 대령했고, 엄마는 내 설레발에 혀를 차며 웃었다.

“어, 세준 엄마. 집에 들어갔어? 그래, 가끔 그렇게 일찍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야지. 어, 저기. 내일 말이야…….”

* * *

나는 마세준한테 튜브 꼭 챙겨 오라고 밤에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고, ‘지금 가방에 넣었다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나서 같이 장을 보러 갔다. 아빠랑 엄마들이 먹을거리를 사는 동안 나랑 마세준은 동물 용품 코너로 갔다. 반나절 동안 혼자 집에 있을 산초에게 바칠 사죄의 선물을 하나 가득 사고는, 얼마 뒤 부모님들과 다시 뭉쳐서 차에 탔다.

“오랜만에 이렇게 다 같이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세준네 갓 귀국했을 때는 이렇게 잘 놀러 다녔는데 말이야.”

“그래. 그때가 좋았지. 자영업이라는 게 그렇네.”

마세준네 엄마랑 우리 엄마는 옛이야기에 젖어 있었고, 나는 에어컨 바람을 약하게 낮췄다. 그러고도 좀 춥기에 팔짱을 꼈다.

“세준 엄마, 그나저나 나 너무 고마워. 세준이 덕에 우리 잎새 수학 안 처지고 잘 따라가.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니까.”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바빠서 세준이 못 챙겨 줄 때마다 잎새네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어. 아침마다 바래다주고, 밥 챙겨 먹이고, 그게 어디 보통 일이야?”

“세준이가 먹어 봐야 뭘 얼마나 먹는다고. 말은 또 좀 예쁘게 해?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세준이 같은 아들이면 열둘도 키우겠더라고 진짜.”

아우, 낯간지러워.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걸 택했고, 얼마 안 가 내 다리 위로 툭, 마세준의 셔츠가 내려왔다. 짜식, 이러니까 우리 엄마가 예뻐하지.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 * *

“아, 입기 싫다니까. 좀 타면 뭐 어때.”

“아유, 엄마 말 좀 한 번에 들어! 너 또 등이며 팔이며 다 까져서 감자 바를 거야?”

“그래서 선크림 발랐잖아. 안 입어도 돼.”

“물에 들어가면 아무 소용도 없다니까. 너 좋은 말 할 때 이거 걸쳐. 얼른!”

나는 결국 툴툴대며 무릎까지 오는 남방을 걸쳤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우리 집은 아니다. 우리 엄마 이기는 이잎새 없다.

“스읍! 단추 안 잠글래!”

결국, 엄마의 명령에 따라 단추까지 꾹꾹 잠근 뒤에, 그늘에 주저앉아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너무 열심히 불었는지 어질어질한 시야로 하얀 별이 둥둥 떠다녔다.

“마세준, 빨리. 빨리 들어가자. 나 더워.”

잠시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느슨하게 바람이 들어간 튜브를 허리에 낀 채 마세준에게 말했고, 막 그늘막 설치를 마친 마세준은 나를 돌아보더니 ‘팔 들어 봐.’ 그랬다.

“왜?”

“바람 덜 들어갔잖아.”

마세준은 내 몸에서 튜브를 벗겨 내더니, 말릴 틈도 없이 주입구를 톡 뜯어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야! 입 대고 불면 어떡해.”

마세준은 내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고 계속 바람을 불었다. 하긴, 저거 쟤 거였지……. 엄연히 말하자면 쟤 물건에 내가 입을 댄 거다. 그나저나 키가 크면 폐도 큰 건지, 몇 번 불지도 않았는데 튜브에 바람이 빵빵하게 올라왔다. 진작 얘한테 불어 달라고 그럴 걸 그랬다.

“이제 가자.”

나는 마세준이 내미는 튜브를 다시 허리에 끼웠고, 마세준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가로 끌고 갔다.

“잎새, 세준이, 조심히들 놀아!”

“네에!”

나는 마세준이 먼저 밟아 나간 바위를 따라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샌들 아래 숨겨진 발등으로, 드러난 다리로, 서늘한 물이 감겨들었다. 진저리가 나도록 차가운 물이었지만 튜브에 바람을 넣는 내내 땡볕 더위에 지쳐 있던 터라 마냥 좋기만 했다.

“이잎새, 여기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앞서 걷던 마세준이 이끼가 앉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끄러워 주춤거리던 참이라,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마세준의 팔을 붙들었다. 그래 놓고는 혹시 마세준이 내 손을 떨쳐 내면 어떡하나 살금살금 눈치를 봤다. 다행히 마세준은 별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넘어져도 혼자는 못 넘어지지, 내가.

어느덧 수면은 허리춤에서 어른거렸다. 내 몸에 두른 펑퍼짐한 셔츠는 물속에서 우스꽝스럽게 부풀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도 좋았고, 손가락 틈으로 흐르는 물결도, 저 멀리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 부모님들의 목소리도 전부 좋았다. 그때 마세준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반쯤 틀어 나를 내려다봤다.

“……거야?”

마세준이 뭐라고 물었는데, 저 멀리 엄마가 깔깔대며 웃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손 안 뗄 거냐고 그러는 것 같았다.

“……좀 붙잡고 걸으면 안 되냐? 닳는 것도 아니고. 무서워서 그러는데. 바위에 긁히면 진짜 아파.”

마세준은 내가 붙들고 있는 제 팔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완전히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튜브 탈 거냐고 물어봤어.”

뜻밖의 물음이었으나 고민할 가치는 없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캬아, 좋다.”

나는 튜브 위에 몸을 누인 채 둥둥 떠 있었다. 햇볕이 좀 뜨겁긴 해도 물이 워낙 차가워서 뼛속까지 다 시원했다. 고개를 뒤로 기울여 머리카락을 수면 아래로 쑥 밀어 넣으면, 여기가 무릉도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신선놀음 중인 반면, 마침내 30분간의 튜브 셔틀에서 벗어난 마세준은 혼자 되게 바빴다. 물이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데서 뭔 수영을 저렇게 열심히 하냐. 누가 보면 국대인 줄 알겠네. 그건 그렇고, 슬슬 배가 고팠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도 스멀스멀 났다.

“야!”

마세준은 용케 내 목소리를 듣고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그 와중에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나, 혼자 영화를 찍네. 더러운 세상……. 내가 하면 물미역인데 쟤가 하면 영화다. 마세준은 한술 더 떠 양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 올렸다.

“마세준, 나 일으켜 줘. 나 배고파.”

마세준은 금방 나한테 다가와 놓고, 정작 손만 쥐었다 폈다 하며 이도 저도 못 했다.

“뭐 해? 내려 달라니까. 나 못 내려간단 말이야.”

내가 칭얼대자, 마세준은 잠시 주저하다가 내 목 뒤랑 무릎 뒤로 손을 넣어서 나를 안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내 발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나를 냅다 내려놓았다.

“……읍!”

나는 졸지에 물을 먹으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순간 발이 닿지 않아 당황한 탓에, 허우적대며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난 뒤 마세준이 나를 허겁지겁 안아 올렸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마세준을 죽을 듯이 노려보다가,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도 몰랐는데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었다. 마세준은 아연실색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마세준의 가슴팍을 마구 쳤다.

“이 나쁜 새끼야! 놀랐잖아, 놀랐다고!”

“이잎새, 괜찮아?”

“엉엉. 안 괜찮아.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미안, 미안해. 잎새야.”

마세준은 내 상체를 힘주어 안아 당기며, ‘괜찮아, 괜찮아.’ 숱하게 속삭였다. 마세준이 괜찮다고 그러니까 괜히 안심이 되면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쪽팔린 줄도 모르고 마세준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마세준에게 제대로 빡이 쳤고, 고기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엄마는 어디 착하디착한 세준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느냐며, 그만 화해하라고 닦달을 했고, 마세준네 엄마 아빠는 마세준을 엄청나게 혼냈다. 마세준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당연하지! 지가 할 말이 어디 있어. 마세준이 와장창 깨지는 걸 봐도, 내 화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다 엄마한테 팔을 붙들렸고, 죽상을 한 채 동상 앞에 서야만 했다.

“잎새 너 기억 안 나? 세준이랑 너랑 여기서 찍은 사진만 몇 장인데. 세준아, 뭐 해? 그러고 있지 말고 같이 서. 응? 오래간만에 놀러 나왔는데 사이좋게 사진 몇 장이라도 남겨야지. 응?”

“네.”

마세준은 군소리 없이 내 곁에 섰고, 나는 마세준을 노려보며 옆으로 한 걸음 떨어졌다.

“어유, 이잎새. 저 성깔머리. 자, 찍는다. 셋, 둘, 하나!”

그와 동시에 마세준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 * *

여름방학이 끝난 개학 첫날, 미호는 나를 스리슬쩍 교실 밖으로 꿰어 내더니 폭탄선언을 했다. 사실은 여름방학 전부터 김용호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놀라 휘둥그레지자, 미호는 좋아 죽으려고 했다.

중간고사와 한 번의 운동회, 기대보다는 시시했던 축제와 기말고사, 그런 것들을 치르고 나니 어느덧 2학기 끄트머리에 와 있었다.

1월 1일, 우리 집은 마세준네 가족이랑 모여서 떡국을 먹었다. 나는 두 그릇을 비운 뒤, ‘야, 이제 누나라고 불러라.’ 그랬지만, 마세준은 나를 한 번 째려보는 것 외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한 살 더 처먹었다고 그만큼 재수 없어지다니…….

다음 날에는 마세준이 피자를 들고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마세준이 리모컨으로 영화를 고르는 동안,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피자 박스를 열고 있었다.

“야, 잠깐만. 아까 그거 봐 봐. 아니, 위쪽으로 한 칸.”

“이거?”

“어, 그거. 그거 보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야, 이거 15세 관람가야.”

마세준은 나를 쓱 보더니, 큰일 날 소리 한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으휴, 갑갑한 자식. 선비 납셨다, 선비 납셨어.

“야, 내가 내 집 거실에서 15세를 보든, 19세를 보든, 뭐 어떠냐? 경찰서에서 잡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나 나나 어제부터 열다섯 살인데 뭐가 문제야. 실컷 떡국 먹어 놓고 실없는 소리를 하냐.”

마세준은 지가 생각하기에도 할 말이 없었는지 잠자코 확인 버튼을 눌렀다. 공부 잘하면 뭐 해. 지 나이도 모르고 산다.

“그래도 19세는 보는 거 아니야.”

그러더니 기어코 덧붙였다.

“안 봐. 내가 변태냐? 보라고 그래도 안 봐.”

나는 피자를 집어 마세준의 접시에 올려 주며 투덜댔다. 사실 영화 채널에서 나오는 걸 몇 번 봤지만, 그건 내 죄가 아니다. 아무 데나 틀어 놨더니 나오는 걸 뭐 어쩌겠어.

광고가 세 편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됐다. 제작사 로고 속의 사자가 무시무시하게 포효하자, 피자 앞에서 껄떡대던 산초가 재빠르게 베란다로 도망갔다. 그게 귀여워 입이 찢어져라 웃는데,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너 본 거 아닌데. 이산초 본 건데.”

툭하면 이산초 핑계야.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 말았다. 영화가 시작돼서.

“미친.”

나는 접시를 통째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간이고 콩이고 다 빼 줄 것처럼 굴던 남주 새끼가 바람을 피웠다. 저래서 남자는 풀어 주면 안 돼. 어떻게든 뒤로 딴생각을 한다니까.

“아오! 미친 새끼. 저런 새끼는 확 그냥 불알을 떼어 버려야 해.”

마세준은 잘 마시던 콜라를 뿜더니, 물티슈를 뽑아 다급히 제 상의를 닦아 냈다.

“야, 넌 무슨 애가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해.”

“내가 뭘, 너야말로 왜 아까운 콜라를 뿜고 그래.”

“안 뿜게 생겼냐.”

마세준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불알이 뭐 어때서. 국어사전에 찾아봐라. 멀쩡한 단어지. 그리고, 욕 듣기 싫으면 바람을 피우질 말았어야지.”

“그래. 그건 죽을죄인데, 그렇다고 어떻게 사람 불…… 고…… 아무튼 그걸 떼냐고.”

“알 게 뭐야. 누가 진짜로 뗀대?”

“하……. 말을 말자.”

마세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목 언저리를 닦았다. 영 시원치 않았는지, 급기야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콜라를 닦아 냈다. 나는 물끄러미 피자를 바라보다 마세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근데 너도 나중에 여자 친구 있는데 저 지랄 할 거냐? 막, 다른 여자랑 껴안고, 키스하고.”

“미쳤어?”

마세준은 얼굴까지 새빨갛게 붉혀 가며 화를 냈다. 누가 들으면 불알이라도 뜯긴 사람인 줄 알겠다.

“그래. 그게 정상이거든. 근데 현실은 아니더라.”

마세준은 느닷없이 피식 웃었다.

“뭐가 우스워서 웃는데.”

“현실을 뭐 얼마나 봤다고 그런 말을 하냐.”

“그럼 하고많은 영화 속 불륜들은 다 판타지게? 다 세상에 있는 얘기니까 등장하는 거지.”

마세준은 ‘그러냐.’ 하더니, 물티슈를 테이블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곧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마세준 접시에 남아 있는 피자 꽁지를 훔쳐서 갈릭소스에 찍어 먹어 치웠다.

“미친! 지금 저 새끼 용서해 주는 거야? 미친 거지? 어? 미친 거 아니냐고.”

환장할 스토리였다. 바람난 새끼를 뭐가 예쁘다고 받아 줘? 둘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아주 난리들도 아니었다. 염병 잔치들을 하고 있다, 진짜.

“넌, 상대가 바람피우면 용서 못 할 것 같아?”

내가 지랄을 하는 동안에도 잠자코 있던 마세준이 가만히 물어 왔다.

“그걸 말이라고. 바람피웠다가는 바로 쫑이지. 관계만 쫑이냐? 그 새끼 인생도 다 쫑이야.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파멸시킬 거야.”

마세준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넌 용서할 수 있어?”

내가 되묻자, 마세준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내가 뭘 물었는지 잊어버릴 즈음 입을 열었다.

“진짜 사랑하면 용서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덤덤한 마세준의 목소리에 곧장 뒷목을 잡았다. 마세준을 노려보다가, 리모컨으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야, 너 여기 딱 앉아. 내가 오늘 오랜만에 너 교육 좀 시켜야겠어. 뭐? 사랑? 사아랑? 너 놔두고 바람피우는 인간을 뭐 예쁘다고 봐줘? 아주 당장에 찢어져야지. 너, 진짜로 그랬단 봐.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뜯어말릴 거야. 네가 못하면 내가 그 인간 인생 끝장내 준다고. 알아들어?”

마세준은 뭐가 좋은지 피식피식 웃었다.

“에? 뭘 웃냐? 내가 그냥 하는 소리 같아?”

“그래, 그래 주라.”

그러고는 또 실없게 웃었다. 저 바보 같은 게 진짜로 그렇게 호구 짓을 하면 어쩌나 싶어서, 나는 피자는 까맣게 잊고 한참을 떠들었다.

* * *

종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제 김용호랑 최제훈은 마세준에게 조르는 대신, 애초부터 나를 찾아와 졸랐다. 농구 하게 해 달라고.

“야, 어차피 빨리 끝나는데 마세준 두 시간만 빌려줘라. 어? 3학년 형들 졸업하면 이제 같이 뛰고 싶어도 못 뛰어.”

“야, 그래. 이잎새. 야, 착하고 예쁜 이잎새. 좀 봐줘라. 끝나고 떡볶이 사 줄게.”

“새끼들이,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마음대로 해.”

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고, 김용호랑 최제훈은 욕봤다면서 서로의 등을 두드려 줬다. 저 새끼들이…….

일찍 마친 탓인지, 오늘따라 농구 코트가 붐볐다. 나는 여느 때처럼 미호와 구령대에 앉는 대신 농구 코트 가까이 가 자리를 잡았다. 땅이 너무 차가워서 마세준 가방을 깔고 앉았다. 나더러 잘 갖고 있으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하면 내 엉덩이도 안 시린 데다 아무도 못 가져간다. 미호와 내 손에는 경기 전 김용호가 뽑아다 준 캔 음료가 한 개씩 들려 있었다.

“너네 곧 200일이라며?”

“응. 내일모레.”

“와, 되게 금방이네.”

“그렇지, 초여름에 만났으니까.”

미호는 생각만 해도 설렌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 겨울에 얘만 혼자 봄이었다. 뭔 얼굴에 꽃이 저렇게 사방팔방 피냐. 내가 다 홀리겠다.

“미호야.”

“어?”

“넌 어떻게 김용호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펴?”

“좋으니까 그렇지.”

얘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미호가 얼굴을 붉혔다. 그 화통한 고미호가, 김용호 얘기만 하면 이렇게 된다.

“넌 김용호가 그렇게 좋아?”

“음…… 좋지. 근데, 마냥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아.”

“그럼? 싫은 것도 있어?”

좋아 죽겠다는 말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미호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싫은 구석이 있다는 게 아니라, 좋은 마음 안에 이것저것 있다고. 괜히 가여운 것도 있고, 짠한 것도 있고. 고맙고 미안한 것도 있고.”

“……되게 복잡한 거네.”

“그래도 좋은 게 제일 커.”

나는 미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좋은 거네, 그럼.”

“어.”

눈을 맞추며 잠깐 웃다가, 이대로 있다가는 미호한테 홀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얼른 농구 코트를 바라봤다. 어깨에 걸친 마세준의 교복 재킷을 당겨 추스르며, 새콤한 레모네이드를 조금 넘겼다.

경기 분위기는 그 짧은 사이 꽤 고조되어 있었고, 다들 춥지도 않은지 사방팔방을 누비며 뛰고 있었다. ‘야, 인마! 이쪽!’, ‘패스! 패스!’ 뭐 이런 고함이 계속 오갔다. 3학년 오빠들은 마세준이랑 김용호를 집중적으로 마크했고, 그럴 때마다 애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쏟다가, ‘아 왜 자꾸 세준이 건드리는데요!’, ‘페어플레이 몰라요?’ 이러면서 소리를 질렀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리기 직전, 김용호는 마세준의 어시를 받아 역전 골을 넣었다. 농구 코트는 곧 뜨거운 열기로 뒤집혔다. 선수들은 김용호를 붙잡아다 공중에 던지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환호했다. 마세준도 기분이 퍽 좋은 모양이었는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미호가 장해 죽겠다며 김용호를 껴안고 예뻐라 하는 동안, 마세준은 나를 향해 다가와 내 손에 들린 음료수를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단숨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 버렸다. 제 것인 양 입을 대고 마시는 거야 좀 아니꼬웠지만, 어차피 반도 안 남았던 데다, 저러고 뛰어다녔으니 오죽 목이 탔겠나 싶어서 시혜적인 마음으로 그냥 두었다.

그러다 텅 빈 음료수 캔을 구기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왜? 뭘 봐?’ 하는 눈으로 마주 바라보자, 마세준은 곧 미호와 김용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호와 김용호는 마치 이 세상에 저들 둘뿐인 것처럼 볼을 문지르고 뽀뽀를 하고 난리가 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었다, 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다, 역시 우리 용호다. 미호는 낯 한번 붉히지 않고 그런 말들을 쏟아 냈다.

치열한 경기 앞에 장사 없는지, 그 평온하던 마세준의 얼굴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저러고 찬바람 맞으면 감기 들 텐데……. 가방을 주워 올리는 마세준의 드러난 목 역시 조금 쌀쌀해 보였다.

“마세준, 이거 받아.”

내내 어깨에 걸치고 있던 교복을 양심 있게 벗어 건네자, 마세준은 잠시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아까부터 또 뭐가 불만인데.”

괜히 마세준한테 투덜대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한 물음이었다. 교복이고 가방이고 기껏 잘 갖고 있다 얌전히 건네줬는데, 마세준은 영 뚱한 얼굴이었으니까.

“나한테 할 말 없어?”

잠자코 있던 마세준이 난데없이 물어 왔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맡겨 놓은 것 같은 표정이라,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고파. 빨리 떡볶이 먹고 싶어.”

“……그런 거 말고.”

그렇게 받아치는 마세준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없기는, 할 말이 왜 없겠어? ‘짐 맡아 줘, 영혼이야 좀 없었지만, 응원도 몇 번 해 줬다. 집에 같이 가겠다고 이 추운 날 밖에서 기다려 주기까지 했는데. 왜 네 심기가 불편하냐? 너야말로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 내가 물은 아껴도 말은 아끼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해? 그리고, 너 죽을래? 왜 입 대고 마셔?’ 그 외에도 한 백만 마디쯤은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냅다 늘어놨다가는 싸움 나기 딱 좋지. 그러면 떡볶이가 멀어지고.

“……너 왜 내 음료수 말도 없이 마셨어? 오늘만 봐준다.”

할 말을 갈음하고 갈음해서 되도록 점잖게 말했다. 멍하니 섰던 마세준은 곧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더니, 제 옷을 받아 들며 고개를 틀었다. 왜 저래?

어느덧 다가선 미호가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한산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 나왔다.

미호랑 김용호랑 최제훈까지 합세해, 다섯이서 즉석떡볶이 집으로 갔다. 양배추랑 쫄면을 왕창 넣어 주는 즉석떡볶이 집으로, 내가 어릴 때부터 마세준이랑 종종 오던 집이었다.

“어이구, 잎새 학생, 세준 학생, 오랜만에 왔네. 친구들이랑 왔어? 그래, 어여들 앉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희 왔어요. 아니, 너희 셋이 이쪽으로 앉아. 내가 마세준이랑 옆에 앉을 테니까.”

나는 애들끼리 모여 앉게 하고는, 마세준 팔을 붙들고 옆 테이블로 가 앉았다.

“어떻게 줄까?”

“어, 저쪽은 보통 맛 3인분이요. 이쪽 2인분은 안 매운맛으로 주시고요. 튀김은 오징어로만 주세요.”

“잎새 너, 매운 거 못 먹어?”

가끔 나와 매운 어묵을 조지곤 했던 미호가 놀라 물었다.

“아니, 마세준이. 덩칫값 못 하는 새끼 이거.”

마세준은 내 앞으로 포크를 놓아 주다 말고 날 노려봤다. 잘 해 줘도 지랄이야.

내가 물을 떠 오는 동안, 마세준은 김치랑 단무지를 날랐다. 떡볶이는 변함없이 맛있었다. 애써 데려온 보람이 충만하게, 애들도 허겁지겁 냄비를 비워 나갔다.

밥까지 야무지게 볶아 먹고 나오자 벌써 까무룩 해가 지려고 했다. 애들이랑 다음 주에 썰매장 가기로 약속을 하고는, 거의 텅 비다시피 한 버스에 올랐다. 마세준이 문 뒷자리에 앉기에, 나는 그 뒷자리에 앉았다.

좀 춥다고 생각하며 반쯤 정신을 놓으며 잠들었는데, 마세준이 나를 흔들어 깨울 즈음엔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따뜻한 버스에서 내리자, 냉랭한 저녁 바람이 내 뺨을 때렸다.

갑작스레 추위에 내몰린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밀어 넣고 목깃으로 고개를 묻었다.

“아, 진짜 대박 춥다. 그냥 패딩 입고 올걸.”

옷감에 파묻힌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뭉개졌다. 곁에 서 있던 마세준은 나를 마주 본 채로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호빵 먹자.”

그러고는 대뜸 호빵을 먹잰다.

“내가 돼지야? 방금 밥 먹고 나왔는데 어떻게 또 먹어. 그리고 너, 이리 와서 똑바로 걸어. 애도 아니고.”

“얼굴 따가워.”

“그러니까 옷을 잘 입고 다녀야지. 옷도 많은 게 겉옷은 다 어따 팔아먹었어?”

우리는 별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집까지 걸었다.

* * *

[과외 1시]

{왜?}

마세준은 뜬금없이 과외 시간을 통보하고는 묻는 말에 답장도 없었다. 엄연히 11시 과외인데, 두 시간씩 막 늦추고 그래도 돼? 마세준이 이거, 값싼 과외라고 이제 막 나간다. 인간이 말이야, 그러면 쓰냐고.

전화라도 걸려다, 그도 귀찮아 그냥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따라 들어온 산초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내 다리 사이에 들어가 포옥- 누웠다. 웃으며 팔을 뻗어 가슴께로 안아 올리자, 산초는 쩍 하니 하품을 했다. 귀를 만져 주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마세준이 내 별명을 3초라고 지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커다랗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가까스로 일어나 문을 열자, 마세준이 서 있었다. 손에는 에나멜 재질의 시커먼 ‘그린 스포츠 센-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뭐 저런 걸 가방으로 들고 다니나 했는데, 마세준이 내 곁을 스쳐 지나자 훅, 물 냄새가 났다.

“야, 너한테 락스 냄새나.”

나는 마세준의 뒤를 따라붙으며 목덜미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장 냄새. 그러다 마세준의 가방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머리도 젖었네. 너 수영하고 왔어?”

마세준은 말없이 거실 테이블 앞에 앉더니, 가타부타 말을 않았다. 저럴 때마다 진짜 속이 터질 것 같다. 말 그까짓 거 아껴서 어따 써먹으려고.

“야, 수영하고 왔냐고.”

“어.”

“그린 스포츠센터? 이거 거기 있는 거 아니야? 그, 구청 사거리에. 근데 웬 수영? 이 겨울에.”

마세준은 대답을 하는 대신, 테이블 아래 놓인 문제집을 뒤적였다. 오늘따라 말 한마디가 더럽게 비싸다.

“웬 수영이냐니…….”

“여자 꼬시려고.”

“뭐?”

마세준은 별안간 종이를 펄럭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또 말이 없다.

“놀고 있네.”

나는 아낌없는 조소를 날려 줬다.

* * *

학수고대하던 썰매장은 결국 못 갔다. 왜냐하면.

[이잎새]

[오늘 혼자 가]

{왜???}

{야}

{야야야}

[나 못가]

{왜??}

마세준이 무려 당일 아침에 날 바람맞혔다. 암만 문자를 기다려도 답이 없기에 냉큼 전화를 했다. 통화 연결음이 세 번 울리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내 인내심도 뚝 끊겼다. 전화를 끊어? 말도 없이? 나는 씩씩대며 양말을 신었다. 수면 양말을 한 겹 더 신는 와중에도 명치 아래에서 화가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래, 좋아. 안 가? 그럼 지 손해지. 누가 아쉽대? 나는 마세준 말마따나 그냥 혼자라도 갈 심산으로 털모자에 목도리에 스키 장갑까지 야무지게 끼고 집을 나섰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게 놀 거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결국,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려 마세준네 집으로 쳐들어갔다. 네 번째 초인종을 누르려던 무렵 문이 열렸다.

“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도 안……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눈가가 새빨개져 가지고는 초점이 반쯤 풀린 마세준이 문을 열어 주었다.

“뭐 하러 왔냐. 혼자 가라니까.”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일단은 마세준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너, 내 전화는 왜 안 받아? 입 뒀다 뭐에 쓰려고. 어?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그러면 그만이잖아.”

마세준은 현관문을 걸어 잠그더니, 별말 없이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꽉 닫지는 않았기에 대충 한 번 두드리고 따라 들어갔더니, 벌써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뒤통수만 봐도 아파 보였다.

“밥은.”

“네가 내 밥걱정할 군번이야 지금? 잠이나 자라.”

앓아누워서는 내 밥을 지가 왜 챙기고 앉았냐고. 나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미호한테 문자를 보냈다.

{미호야 마세준 몸살난듯 나 간호해줘야될거같ㅇ애 미안}

보내고 보니 오타가 있었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 머리를 안 말리고 다니니까 감기에 걸리지.”

투덜대며 침대를 들여다보니 마세준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열이 심한지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로, 살겠다고 이불은 턱 끝까지 알아서 잘 덮고 있었다. 아픈 애한테 걱정은 못 해 줄망정 계속 지랄만 한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좀 그랬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서 주방을 기웃거리다, 먹일 게 딱히 없기에 그냥 수건에 따뜻한 물을 묻혀서 방으로 갔다. 괜히 깨우는 대신 이마에 수건을 얹어 주고 나왔다. 마세준이 아픈 건 처음 본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플 때 마세준이 어떻게 해 줬더라……. 그걸 생각해 보니 쉽게 답이 나왔다. 나는 그냥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으면 된다. 마세준이 자다 일어나서 거실에 나왔을 때, 괜히 외롭지 않게.

“이잎새.”

소파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어느새 잠든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쭈그리고 앉은 마세준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무릎에 턱을 괴고서는. 그런데, 그 눈이.

“여기서 뭐 하냐, 너.”

마세준은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잠깐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냐. 너 잠깐 자지 말고 있어 봐. 약이라도 사 오게.”

“약 먹었어.”

나는 눈을 비비며 아무 말이나 던져 댔다. 되도록 자연스레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잔 따랐다. 잔을 순식간에 비우고는, 셀프 멱살을 쥐고 스웨터를 펄럭였다. 목과 턱에 와 닿는 미지근한 바람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그 눈이, 미호가 김용호를 보던 눈빛이랑 비슷했다. 겨울을 순식간에 봄으로 만드는. 미쳤어? 왜 자기가 날 그렇게 봐?

“그만 가.”

소파에 쓰러지듯 누운 마세준이 내게 말했다.

“안 그래도 가려고 그랬거든?”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는 도망치듯 마세준네 집을 나왔다. 겉옷을 홀랑 두고 나왔다는 건 우리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곧장 내 방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발치에 와 누운 산초를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다.

마세준이 왜 나를 그렇게 봤을까. 배가 아파 끙끙 앓았던 초등학교 6학년 소풍날, 자다 일어나서 거실에 뻗은 마세준을 봤을 때, 그때는 내 감정이 어땠더라. 그때 나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마세준 옆에 앉아서 별 재미도 없는 막장 드라마를 봤었던 것 같다. 아니면, 축구 중계였던가.

잘 모르겠다. 그것도 모르겠고, 마세준이 나를 보던 눈빛의 의미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 것 같았다. 근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정말로 말이 안 돼. 근데, 그 눈빛은 도저히 다른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명한 것이었다.

미호한테라도 털어놓을까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가, 받지 않기에 그냥 말았다. 시간을 보니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 미호한테 전화가 왔지만, 어째선지 ‘미안해서 걸어 봤어.’ 그러고 말았다. 그날 밤은 괜히 속이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건 다 지랄이었다. 맹세컨대, 지랄이었다. 뭐? 겨울? 봄? 미호 눈이 뭐가 어째? 나는 과거의 나를 소환해서 매우 치고 싶었다.

그날은 마세준이 또 전화를 안 받기에, 혼자서 와플을 사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였다. 마세준 것까지 두 개를 사서 마세준네 집에 가 볼까 했다. 입맛을 다시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세준이 보였다.

마세준은 길 건너에서 그놈의 ‘그린 스포츠 센-타’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웬 여자애랑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내 기분은, 진짜, 당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싶은 거였다. 까닭도 모른 채 울고만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펑펑 울었다. 여자 꼬시려고 수영 다닌다기에 콧방귀나 꼈더니, 진짜였어. 진짜였다고. 기껏 같이 있어 줬더니 그만 집에 가라고 한 것도, 다 저 애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썰매장을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아팠던 날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내 전화 안 받은 적은 없었는데, 오늘 전화까지 쌩 깠으면서 여태 문자 한 통 없다. 문자 하나를 안 보낸다. 그것도 저 애 때문인가 보다. 그게 진짜, 죽어라고 서러웠다.

집에 오는 길에 죄 없는 와플을 휴지통에 내동댕이쳤다. 아무렇게나 벅벅 눈물을 닦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다시는 그딴 눈빛에 안 넘어가. 내가 다시 그것 때문에 설레서 잠을 못 자면, 인간도 아니야, 인간도 아니라고.

과외고 뭐고 방학 내내 마세준을 안 만났다. 찾아와도 가라고 그랬다. 내 겉옷을 돌려주고 갔기에, 이번에는 죄 없는 겉옷을 막 두들겨 팼다. 주먹으로 꿍꿍 치다가 속이 안 풀리기에 발로 막 찼다. 초인종을 누르면 꺼지라고 그랬다. 뒤늦게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지만 다 씹었다. 나중에는 수신을 차단했다.

엄마가 눈치 없게 문을 열어 주는 날에는, 내 방에 들어가 꼼짝도 안 했다. 마세준이 방문을 두드려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산초가 보고 싶어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꾹 참았다. 젤리고 초콜릿이고 산더미같이 가져다 줘도 쳐다도 안 봤다. 마세준 얼굴을 봤다가는 또 등신같이 울 것 같았다. 내게는, 갑자기 터져 버린 감정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개학 날은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다. 현관문을 닫는데, 복도에 서 있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쌩하니 마세준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세준이 따라 타기 전에 닫힘 버튼을 무자비하게 눌렀지만, 마세준은 기어코 나를 따라 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내렸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앞이 가로막혔다.

“이잎새.”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몇 초도 못 지나 또 보란 듯이 시야가 막혔다.

“이잎새, 대체 왜 이래 너.”

“내가 뭐.”

나는 그제야 마세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사이 키가 더 컸는지 목이 더 아팠다. 잘난 얼굴도 조금 어른스레 바뀐 듯했다. 인상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왜 나 피하는데.”

마세준은 엄청 화가 난 것 같았다.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엄청나게 고소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개미 눈물만치 남아 있던 화가 다 풀렸다.

“내가 언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삐죽 웃음이 나오려 했다. 보란 듯이 마세준을 지나쳐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8층에 머물러 있었다.

“야, 안 타?”

열림 버튼을 누르며 마세준을 불렀더니, 마세준은 금방 나타나 볼멘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 * *

우리는 2학년 6반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랑 미호는 6반, 김용호 마세준은 7반, 최제훈은 1반. 그런데, 아무래도 김용호, 마세준은 우리 반을 지네 반처럼 여기고 사는 게 분명했다. 한 번을 안 빼놓고 우리 반으로 왔다. 저 새끼들은 화장실도 안 가나? 하루에 네다섯 번은 쳐들어온다.

김용호가 쭐레쭐레 미호를 보러 오면, 마세준은 억지로 끌려왔다가 나한테 한 번씩 시비를 걸고 갔다.

“야, 너 수학 공부는 아예 접었냐?”

“무슨 소리야. 이미 다 했거든? 방학 때 1학기 분량 다 끝냈거든? 과외 그까짓 거 뭐 필요도 없더구만.”

열심히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으면 꼭 와서 저 지랄을 하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와서 갈 생각을 않았다. 내 짝꿍이 자리를 비우면, 수업 종이 칠 때까지 앉아서 가질 않는 거다.

“야, 빨리 너희 반 가. 왜 맨날 우리 반에 눌러앉아 있는데? 너 친구 없어?”

“없는데?”

마세준은 징그럽게 낮아진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지나가던 애랑 인사를 했다. 누구 약 올리냐? 어디서 뻥카를…….

“야, 아무튼 가라고. 너 때문에 내 짝꿍 못 앉잖아. 야! 임성재. 빨리 와, 왜 그러고 있어? 비키라고 하면 되지. 네 자리잖아. 야, 마세준. 너 얼른 가. 이제 종 쳐.”

“두 걸음이면 가는데 뭐하러 미리 가냐? 종 치고 가면 되지.”

그래, 네 다리 길다. 수업 종이 치자마자 지네 반으로 사라지는 마세준의 뒷모습을 보는데, 너무 억울했다. 저 새끼는 키가 껑충 더 커서 교복도 새로 샀다. 이제 3학년 형들보다도 컸다. 나는 씩씩대며 그 꼴을 노려보다가, 그제야 내 옆자리에 앉는 임성재를 바라보았다.

“야, 임성재. 너 왜 어제 임자 사진 안 보냈어?”

“요새 임자 종일 잠만 자.”

“무슨 소리야, 자는 사진이 더 씹덕 터지는데. 오늘은 꼭 찍어서 보내. 나도 그만큼 산초 사진 보내 줄 테니까.”

임성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칠판을 쳐다봤다. 얘랑 나누는 문자창에는 말 한마디 없이 고양이 사진만 오간다. 가끔 내가 독촉 문자를 보내긴 한다. {왜 답장이 없어? 등가교환 몰라 너?} 그러면 머지않아서 답장이 왔다. 애는 착했다. 그러게 누가 애초에 임자 자랑을 하랬나. 귀여운 걸 못 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 * *

나는 마세준에게 그 여자애랑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묻지는 않았다. 같이 있는 걸 봤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마세준이 혹시나 불필요한 소식을 전할까 봐 수영 비슷한 얘기가 나올라치면 얼른 말을 돌렸다. 듣기 싫어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뭐 아닐 수도 있고. 나도 잘은 모른다. 내막을 들여다볼 생각은 딱히 안 했다. 나는 이대로가 편했다.

다행히, 마세준도 다시는 그 지랄 맞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너무 아파서 돌아 버렸던 것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내가 좋아 죽겠다는 눈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왜, 아프면 평소에 않던 짓을 하고는 하니까.

그날은 내가 마세준에게 급하게 교과서를 빌린 날이었다. 전날 수학책을 집에 가져갔다가 그대로 두고 온 탓에, 종이 치기 1분 전에 달려가서 책을 빌렸다. 쪽팔린 것도 모르고 ‘마세준! 나 수학!’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책상에 앉아서 떠들고 있던 마세준은 곧 서랍에서 책을 꺼내어 내게 건넸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교과서를 낚아채 교실로 돌아왔다. 종이 칠까 봐.

의자에 앉아 숨을 들이쉬는데 심장이 다 떨렸다. 근데, 저 새끼는 이 짓을 어떻게 맨날 하지? 역시 사람은 다리가 길고 봐야 한다. 나는 씩씩대며 허공을 노려봤다. 허공에 서 있는 가상의 마세준한테 딱밤을 일곱 대쯤 때렸다.

사실, 1학기 수학을 미리 다 끝내긴 개뿔……. 다 구라였다. 나는 감조차 잡지 못한 채 수학 시간을 날렸다. 내 나름 팽팽 머리를 쓰다가,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어떡하지. 자존심 다 내팽개치고 마세준한테 다시 도와 달라고 할까. 아니면 진짜로 이제라도 최규훈네 형아한테 부탁을 해 볼까. 그러다가 역시나 3초 만에 기절을 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쉬는 시간이 다 지나가 있었다. 억울했다. 분명 10초밖에 안 잔 것 같은데 10분이 다 지나가다니……. 멍하니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책상에 곰돌이 젤리가 놓여 있었다. 마세준 이 새끼 또 왔다 갔나 보네. 그러고 말았다.

오후에는 최제훈까지 다섯이 모여서 팥빙수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빙수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마자 김용호가 별안간 낄낄거리면서 마세준을 놀려 대기 시작했다.

“얘 오늘 수학 쌤한테 겁나 까였어.”

“야.”

마세준은 뭐가 그렇게 빡치는지 김용호를 매섭게 한 번 쏘아봤다.

“그만하라고.”

제법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이잎새한테 책 빌려줘 놓고, 등신같이 찾으러 갔다가 까먹고 그냥 옴.”

그러나 애초에 김용호는 눈치라는 소양을 갖고 나지 못한 애였다. 홀랑 까발렸다. 마세준은 짜증 난다는 듯 말없이 팥빙수만 먹었다. 중2병이라도 걸렸는가 보다. 지 혼자 별 개폼을 다 잡고 앉아 있다. 그냥 대충 흔들어 깨워 가지고 책 달라 그러면 되는 걸 갖고.

* * *

새 학기 공식 질문. 이제 막 이름을 외울라치면 몇몇 애들이 은근슬쩍 내게 묻는다. 마치 이러려고 친해진 사람들처럼. 그럴 때는 솔직히 속이 상한다. 나는 너네랑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진 건데.

“잎새야, 넌 마세준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너네 사귀어?”

‘아니? 내가 걔랑 왜 사귀어?’라고,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하는 것이 나의 오피셜 답변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는 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이거 말해도 되나? 우리 안 사귀는데. 걔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어.”

그렇게 대답을 해 버렸다. 뭐,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게 질문을 했던 애들은 연신 ‘대박, 대박’을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떴고, 나는 떡볶이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너네랑 안 놀아.

그게 실수였나 보다. 아니,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일주일도 안 되어 마세준이 주말에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왔으니.

“세준이 왔는가 보네.”

딩동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신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우리가 화해한 걸 무척 뿌듯해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때 나는 산초랑 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는데, 산초가 먼저 잽싸게 방문 앞으로 가 문을 열어 달라고 빙빙 돌았다. 마세준 발소리를 기가 막히게 아는 이산초. 우리 똑쟁이. 누나를 좀 그렇게 좋아해 주면 안 될까.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겨우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나서자마자 마세준이 내게 물었다. 산초가 발치를 빙빙 돌아도, 마세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마세준을 따라 뒷걸음질을 쳤고, 마세준의 뒤로 방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세준은 방문 앞에 딱 서서 꼼짝도 안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마세준을 노려봤다. 뜬금도 뜬금도 이런 뜬금이 없었다.

“말해 봐. 내가 누굴 좋아하는데.”

난 또 뭐라고. 내가 헛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갖은 인상은 다 쓰고 있다. 나는 천천히 마세준을 향해 다가섰다.

“너 그, 무슨, 그린 스포츠센터, 거기, 수영. 걔. 내가 봤어.”

내가 구청 쪽으로 턱짓을 하면서 얘기하자, 마세준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짧게 반문했다.

“뭐?”

“뭘 모르는 척을 해. 그린 스포츠센터. 그 여자애 꼬시려고 거기 다녔다며.”

마세준은 잠시간 뭘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싹 굳혔다. 그러고는 바닥에 무릎을 접고 쭈그려 앉아서는 큼지막한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이 와중에 손 하나로 얼굴이 다 가려지네. 이기적인 새끼 같으니라고.

“부끄럽냐? 어? 부끄러운가 보다? 왜 그러고 있어?”

나는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 귀 봐라, 귀 봐. 불났네, 불났어. 아주 부끄러워 죽겠단다.

“이잎새.”

“왜.”

“너 어디서 뭘 보고 다녔던 거냐.”

뭘 봤냐고? 내가 이 두 눈으로다 똑똑히 다 봤지.

“내가, 어? 와플 사러 갔다가 다 봤어. 뭐, 사이좋더만? 어? 아주 그냥, 철- 썩 붙어 가지고, 쌍쌍바가 따로 없더만.”

나도 모르게 홧김에 다 말해 버렸다. 게다가 발음까지 꾹꾹 씹어 가면서 말했다. 마세준은 뭐가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돌연 일어서서 날 내려다봤다.

“이잎새.”

내 이름 닳는다, 그만 좀 쳐 불러라. 그렇게 말하려고 눈을 들여다봤는데, 마세준은, 또, 그 지랄 맞은 눈으로 다시 나를 봤다. 그 지랄 맞게도 지랄 맞은, 좋아 죽겠다는 눈빛. 왜 그래. 너 멀쩡하잖아, 오늘은. 근데 왜 그러고 봐.

“말해 봐.”

“뭘? 뭘 말해.”

나는 끈질긴 눈빛을 잽싸게 피하면서 대답했다. 짜증난다. 진짜 진심으로 짜증난다.

“내가 수영 왜 다닌다고 했어.”

“여자 꼬시러 간다며.”

“그래. 근데.”

“뭐가.”

저 눈 마주하고는 1초도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방학 동안 좀 꽁한다고 해서 다 지워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잎새, 너 남자야?”

“뭐?”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마세준을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뜸 쳐들어와 가지고 뭔 놈의 개소리를 이렇게 정성스레 빚고 있냐고.

“너 남자냐고.”

“이 새끼가 진짜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남자야?”

나는 턱을 치켜세우며 바락바락 물었다.

“그래. 너 남자 아니잖아.”

“그래. 내가 여자지, 남자냐?”

마세준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또 피식대더니,

“그럼 난?”

그렇게 물었다. 아니 이게 웬 성별 논쟁이냐고.

“그럼 여자냐? 네가?”

마세준은 턱을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흡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넌 여자고, 난 남자야.”

쿵 하고, 진짜 말도 안 되지만, 정말 쿵- 하고, 심장이 땅에 가 박히는 소리가 났다.

“누가 그걸 모르냐? 산초도 알걸. 그거는.”

나는 땅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뭔지는 몰라도 속이 메슥거린다. 막, 내 발가락이 바닥에 안 붙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눈치 국밥으로 말아먹은 인간도 아니고, 저 개소리가 뭔 뜻인지, 어렴풋이도 아니고, 어설프게도 아니고, 아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아니, 나도 안다.

그럼 그때 걘 뭔데? 물으려다가, 그것까지 물었다가는 저 새끼가 더 지랄 맞은 눈으로 나를 볼 것 같아서 말았다. 이제 저 새끼 얼굴은 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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