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저택으로 귀가한 후.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저택의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듀이와의 수업 일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수한 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기에, 니나렛에 관해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어?”
“저도 방금 왔어요! 어…….”
먼저 도착해 있던 듀이는 내 등장을 반기는가 싶더니, 금세 어색해하며 허둥거렸다.
원인은 알고 있다. 내 머리카락에 꽂힌 나비 머리핀 때문이겠지.
매일은 아니더라도 종종 선물 받은 머리핀을 하고 다녔는데, 듀이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쩐지 민망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듀이, 언제까지 그럴 거야? 정작 선물을 준 사람이 그렇게 불편해하면 어떻게 해?”
“그렇지만…….”
놀리듯이 타박하자 듀이가 난감해하며 울상을 지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난을 치는 것일지도.
“…제가 기사가 되면 급료를 모아서 더 좋은 걸 선물해 드릴게요! 네리아 님에게 어울리는 걸로요!”
“난 이것도 충분히 좋은걸. 그보다 방금 말, 확실히 기사가 될 자신이 있다는 거 맞지?”
“그, 그건!”
듀이가 대답하지 못하고 허둥거렸지만, 사실 그 문제로 걱정할 일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검에는 재능이 차고 넘치는 그가 실기에 불합격할 리 없고, 공부도 이대로만 계속한다면 필기시험에 수월하게 합격할 수준은 되었다.
애초에 필기 자체도 문관을 뽑는 시험처럼 어렵지는 않으니까.
나는 여유로운 기분으로 듀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내가 미리 만들어 온 간단한 시험지였다.
“자, 오늘은 간단한 테스트부터 시작할게. 저번에 배운 내용이야. 30분 안에 풀 수 있겠지?”
“네!”
듀이가 의욕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사각사각 종이에 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잘 맞히고 있잖아?’
답안지가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의 저녁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였다.
어느 순간, 듀이가 슬그머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네리아 님…….”
“어려운 부분이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응? 그렇게 보였어?”
“네… 평소랑은 달라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듀이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 오기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이 있긴 한데, 심각한 건 아니고 튜터 선발 문제로 잠깐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니나렛 황녀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듀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낮에 황녀궁을 나오면서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던 문제였다.
그랬기에 사소한 의견이라도 들어 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사람들에게 나쁘게 보이려고 일부러 심술궂게 행동하시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황궁으로 복귀하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 사람들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그보다는 좀 더 니나렛의 근본적인 부분에 닿아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황녀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민은 과연 뭘까?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때요?”
“그게 가능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만큼 마음의 문을 연 게 아니라서.”
“어, 음. 그러면.”
듀이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든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머리를 짜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괜히 말한 건가?’
가벼운 질문이었지 부담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는데.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려고 했건만 듀이가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황녀님이 지쳤을 때를 노려서 물어보시는 건요? 몸이 힘들면 정신도 흐물흐물해져서 방심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지쳤을 때를 노려?”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하고 자신감 없게 말하는 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몸이 힘들 때면 신경이 무뎌지거나 반대로 날카로워지기도 해, 안 해도 될 말을 내뱉기도 하니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않아?’
어떻게 니나렛을 지치게 만드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의견 고마워! 참고하도록 할게.”
듀이에게는 다시 시험지를 풀게 하고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
마지막 3차 면담일.
후보 중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클로이를 포함한 나머지 영애 두 명도 2차 면담 후에 곧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황녀에게 바칠 보석까지 사들이며 경쟁 열기를 띠었던 초반과 비교하면 상당히 초라해진 마무리였다.
“그렇다고 그게 너를 내 튜터로 뽑는다는 의미는 아냐.”
니나렛은 오늘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시비조로 입을 열었다.
“시녀장이랑 3차 면담까지는 전부 끝마치기로 약속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널 만나 주는 거지. 사람을 꼭 뽑는다는 조건은 없었거든.”
“그런 조건이 붙어 있었군요. 전하께 잘 보여서 튜터가 될 수 있게 오늘은 최선을 다해야겠어요.”
“아니-! 그럴 일은 없으니까 너도 일찍 포기하는 게 좋을걸?”
“그건 두고 볼 일이 아닐까요?”
“두고 볼 것도 없어!”
빽 소리를 내지르는 니나렛을 보며 웃다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어차피 후보가 저밖에 남지 않았으니 3차 면담의 방식은 제가 제안해 볼까 하는데요.”
“제안?”
“네. 저랑 같이 황궁 밖으로 외출을 나가는 거예요. 어떠세요?”
황녀님을 어떻게 지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답이 바로 니나렛을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어린이니까 밖에서 신나게 놀다 보면 체력 소모가 되겠지.’
물론 시녀장인 앨마 부인에게 미리 취지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해 두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로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였다.
“외출? 별로 안 내키는데. 보석상 가는 것도 질려서 재미없고.”
정작 니나렛이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포기할 리가 없지.
“번화가의 큰 잡화점에 오르골을 보러 갈 건데요? 저번에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오르골? 어차피 시녀장이 새로 주문해 놔서 필요 없어. 상자도 금으로 맞추라고 했거든.”
“금으로 된 것도 좋지만, 직접 가 보셔도 재미있을 텐데요. 전하, 상상해 보세요. 오르골 수십 개가 동시에 연주되면 각각의 멜로디가 섞여서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수십 개가 동시에……?”
내 말에 솔깃한 듯 니나렛의 눈이 반짝였다. 그 솔직한 반응에 미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 그래. 그럼 한번 가 보지 뭐.”
“잘 생각하셨어요.”
“전하,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황녀 외에 모두가 알고 있던 계획이었기에, 니나렛은 자연스럽게 외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는 니나렛이 외출복을 갈아입는 사이에 앨마 부인을 찾았다.
“시녀장님, 오늘은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감사한 건 저희 쪽이지요. 전하께서 이 정도로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시는 일이 잘 없었거든요.”
앨마 부인이 니나렛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잡화점 섭외에 비용 지원까지 전부 해 주실 줄이야. 말을 꺼낸 건 저인데 정작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죄송스러웠어요.”
“황제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이에요. 딸의 얼굴을 볼 염치가 없으니, 이런 것이라도 해 주고 싶다고요.”
“폐하께서… 그러셨군요.”
나는 앨마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는 뒤늦게 딸에게 애정을 쏟고 있지만, 정작 니나렛을 제대로 만난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니나렛을 별궁에 보낸 자가 황제 본인이었던 만큼, 아이에게 원망받는 것이 두려워서 딸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며.
이번 외출 계획을 논의할 때, 앨마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물질적으로 마음을 표시하기보다는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물론, 이건 내 의견일 뿐이지만.
“가자, 분홍색 눈!”
앨마 부인과의 대화가 적당히 마무리되자, 마침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니나렛이 나타났다.
연노랑 드레스를 입고 모자까지 쓴 귀여운 모습이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아이의 곁에 다가갔다.
“그럼 같이 출발해 볼까요?”
***
번화가의 고급 잡화점.
“어서 오세요!”
점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니나렛과 함께 발을 들이자, 잡화점의 가장 넓은 벽 쪽 선반 전체가 모두 오르골로 전시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오르골은 유행이 지난 물건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종류가 많고 다양하지는 않다.
하지만 황족이 방문할 예정이라는 전언과 소정의 사례금이 더해진다면 세상에는 안 될 일이 없는 법.
잡화점은 이틀 만에 뚝딱 오르골 전시대를 만들어 냈는데, 이를테면 니나렛 한 명만을 위한 특설 코너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우와! 오르골이 잔뜩 있어!”
그리고 그 광경을 발견한 니나렛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선반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연노랑 외출복을 입어서인지 그 모습이 마치 병아리가 뛰어노는 모습 같기도 했다.
“황녀 전하, 천천히 구경하시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주세요.”
“오르골은 수명이 지난 마력석만 교체한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답니다!”
“종류가 다양하니 특별히 찾으시는 물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응!”
점원들의 말에 니나렛이 잔뜩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르골 몇 개의 덮개를 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는 멜로디와 함께 작은 크리스탈 인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있었는데, 니나렛이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기도 했다.
“신기해! 게다가 오르골을 동시에 들으니까 음악 소리가 더 예쁘다. 분홍색 눈! 잠깐 이쪽으로 와 봐!”
“네, 전하.”
“난 이쪽을 열 테니까, 넌 저쪽을 열어. 혼자 하려고 했는데 저기까지는 손이 안 닿는단 말야.”
“왜 혼자 하려고 하셨어요. 손이 닿아도 같이 하면 더 좋죠.”
“빨리, 빨리!”
“네, 분부 받들겠어요, 전하.”
두 사람이 사이좋게 움직이며 오르골을 열자, 잡화점이 맑은 음악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우와아…….”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멜로디 속에서 니나렛의 표정도 반짝였다.
어느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악마나 망나니 같은 말을 떠들 수 있을까.
내 기억 속의 아이와도 비슷한 환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은 보석만 집중적으로 수집했는데, 이런 신기한 물건을 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시다면, 제가 황녀님을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