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황녀의 튜터를 선발하는 1차 면담이 전부 끝난 뒤.
니나렛은 네리아 발렌티스가 황녀궁을 떠난 후에도 붉어진 뺨을 쉽사리 식힐 수가 없었다.
‘그 분홍색 눈은 뭔데 사람을 그런 낯간지러운 눈으로 쳐다봐?’
귀찮음도, 불쌍함도, 의무적인 예의도 아닌 그런 시선. 니나렛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천사? 천사는 무슨.’
고작 꽃을 밟지 않은 게 칭찬을 받을 일이야? 어차피 아부하려고 되는 대로 갖다 붙인 거겠지.
“앞으로는 꽃을 보면 마구마구 밟고 다닐…….”
니나렛이 말을 전부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꽃을 밟아 버린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니나렛이 고개를 세게 젓고는 네리아가 두고 간 보석함을 열었다.
그러자 악기가 없는데도 음악이 흘러나왔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통통 튀는 맑은 멜로디에 니나렛은 아까처럼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황녀 전하.”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시녀장 앨마 부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보들을 만나 보니 어떠셨나요?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셨나요?”
“기억에 남는 사람?”
없지는 않았다. 니나렛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왔던 그 분홍색 눈. 그렇다고 칭찬하는 건 아냐.”
예쁜 인형 10개 사이에 못난이 인형 1개가 끼어 있으면 특이한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거니까.
‘…그 사람을 못난이 인형에 비유하는 건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예쁘긴 예뻤다.
얼굴도 목소리도. 그래서 수확제에서는 저도 모르게 쳐다봤었다.
하지만 알 게 뭐야? 니나렛이 흥 하고 코웃음을 내뱉었다. 재밌는 물건을 가져다 준 건 고맙지만.
“시녀장, 나 이런 거 더 사다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발렌티스 영애의 선물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그냥 특이해서 그래.”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할까요?”
시녀장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저건.”
니나렛이 침묵했다.
토끼는 좋아하지 않는 동물이었다. 약하니까.
그러니 저 쓸모없는 토끼 인형도 버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지?
‘직접 만든 거라고 했었지.’
니나렛이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진 토끼 인형 옆에 쭈그려 앉았다.
인형의 붉은색 눈도, 한쪽 귀에 달린 백금색 리본도 니나렛의 외형을 본떠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아까는 분홍색 눈에게 이겨야 했으니까 던져 버린 거였지만…….’
그런데 어째서 진짜 버리려니 신경이 쓰이는 걸까. 비싼 보석들과는 다르게, 놔뒀다가 나중에 팔아 봤자 돈도 안 될 물건인데.
사 온 물건은 잔뜩 받아 봤지만, 상대방이 직접 만든 수제품을 받은 건 처음이라서?
“버리도록 할까요?”
“버리지는 말고… 대충 놔둬.”
니나렛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했다.
***
3일 뒤, 2차 면담이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오늘 면담의 주제는 학자와의 구술 평가를 통해 지식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황궁 안을 걸어가며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1차 면담이 끝난 후, 7명의 후보 중 4명이 건강을 핑계로 사퇴 의사를 전해 왔다고 했던가.
반 이상이 나가떨어진 것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그녀들에게 황녀의 튜터 자리는 저속한 폭언을 들어 가면서까지 가져야 할 매력 있는 지위가 아니었으니까.
‘황족이라는 뒷배경이 필요한 나한테나 절실한 자리지.’
참고로 니나렛이 클로이를 처음 보자마자 했던 말이 바로.
‘네 녹색 눈을 보니 더럽게 맛없는 시금치가 생각나서 구역질 나!’
…였다고 한다. 클로이에게 받은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유월의 녹음을 연상시킨다고 찬사받던 클로이의 녹색 눈을 그런 식으로 비유하다니.
다른 영애들에게도 예외는 없었을 테고, 아무리 상대가 황족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문제 제기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황녀의 과거가 불우하고 아직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사연 때문.
결국, 황녀의 튜터 자리로 제국 최고의 귀족 영애가 정해진다는 경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로서는 경쟁자가 줄어서 잘됐다고 해야 할까? 다른 영애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목적지인 황녀궁 방향으로 발을 옮기려던 때였다.
“앗!”
놀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앞에서 걸어오고 있던 여자가 들고 오던 책들을 와르르 떨어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설마 곤란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도와주는지를 몰래 지켜보고 도덕성을 평가한다든가?’
-와 같은 일을 귀족 영애에게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만, 혼자서 책들을 줍는 모습이 조금 불편해 보였기에 도와주기로 했다.
“괜찮으신가요?”
멀리 떨어져 있던 책을 주워서 건네주다가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을 가진 평범한 느낌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면 그녀의 왼쪽 뺨에 칼에 베인 듯한 상처가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
“저기……?”
그녀는 책을 받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런 식의 시선을 받은 적이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생긋 웃어 주었더니, 그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이 책을 받아 갔다.
“고맙습니다, 레이디.”
“별말씀을요.”
나는 그렇게 대답을 끝낸 뒤, 다시 황녀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반갑습니다, 발렌티스 님.”
2차 면담을 위해 먼젓번과 같은 위치에 자리했다.
그때와 다른 부분이 있다면, 황궁 소속의 학자와 마주하고 있다는 점일까. 나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학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분홍색 눈, 내가 알아봤는데 넌 8년을 하녀로 살았다며? 배운 게 없어서 머리에 든 것도 없을 텐데 문제를 맞힐 수나 있겠어?”
그리고 니나렛이 그 주변을 신이 난 얼굴로 쫄랑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시빗거리를 찾아내면서까지 싸움을 거는 점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까놓고 말해서, 너한테 얼굴 예쁜 거 빼고 무슨 장점이 있어?”
“저 예쁜가요? 자주 듣는 칭찬이지만 어린 황녀님께 들으니까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드네요.”
“칭찬 아니거든! 너는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는 거야?”
오늘도 본전을 찾지 못한 니나렛이 혼자 씩씩거리며 의자에 앉자, 학자의 질문이 금방 시작되었다.
“과거, 알레프 제국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정복 전쟁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은 군인들 사이의 차별 문제 때문이겠지요. 사기 진작을 위한 방책이었다고 하나,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제국군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또한…….”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학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으나, 내가 머뭇거리거나 대답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내 공부를 넘어 동생의 학습 진도까지 신경 쓰던 나에게는 어렵지도 않은 문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이익-!”
하지만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니나렛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학자에게 화를 냈다.
“똑바로 못 해? 더 어려운 문제를 냈어야지!”
“하지만 황녀 전하…….”
학자가 난감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면담의 목적은 황녀의 곁에 있기에 모자라지 않을 자격을 알아보기 위함일 뿐,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고로, 니나렛의 요구는 명백한 억지였다.
“됐어! 내가 할 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까 너는 나가.”
“…알겠습니다, 전하.”
앞선 후보 영애 때도 비슷한 일로 시달렸던 건지, 학자는 반쯤 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의 방을 떠나는 그 뒷모습이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학자가 퇴장하자, 니나렛이 어디선가 책 한 권을 가져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거만하게 보이고 싶었는지 불량하게 다리를 꼬기도 했지만,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아 솔직히 귀여웠다.
“이제 내가 문제를 낼 거야. 너 이 책 읽어 본 적 있어?”
“철학자 이안 티엘르가 남긴 저서네요. 제국 귀족의 필독서이지요. 물론, 저 또한 읽어 보았어요.”
“좋아! 그럼… 이 책의 57페이지에 나오는 첫 번째 단어는 뭘까?”
“…….”
“모르는구나? 아까는 잘난 척 굴더니 너도 어쩔 수 없네.”
“전하, 억지 부리지 마세요.”
“억지라고? 분홍색 눈, 너 그거 황족 모욕이야! 시녀장! 시녀장-!”
니나렛이 호들갑을 떨며 앨마 부인을 찾았지만, 그녀는 오늘도 면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에요. 그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 기억 능력으로 유명한 자비에 님밖에 없을걸요?”
“뭐래? 모르니까 괜히 부끄러워서 자비에까지 끌고 나오는 거지? 네가 멍청이인 걸 인정하도록 해!”
니나렛은 허리에 손까지 얹은 채 바락바락 떠들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에게 이기고 싶어 하는 건지. 그렇다고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런 니나렛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녀님은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
“못됐으니까 못되게 굴지!”
“사실은 못되지 않았잖아요. 진짜 못된 사람은 들꽃을 밟지 않으려고 넘어지지 않아요. 황녀님은-”
어딘가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니나렛의 침대 옆에 내가 만든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못된 척, 심한 말을 하고 다니시는 거죠?”
“뭐, 뭐어?”
“왜 그렇게 행동하시는 거예요?”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니나렛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 나쁜 아이처럼 보이려고 고의로 행동을 꾸며 내고 있다고.
‘지금도 그래.’
니나렛이 저지르는 횡포라고 해도 단지 황족답지 않게 입이 험할 뿐, 이야기를 나눌수록 평범한 아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도 평판이 나빠진 이유라면 니나렛이 다른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니나렛은 어째서 나쁜 척을 하며 행동을 연기하는 걸까?’
바라거나 노리는 게 무엇이길래?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계속 저런 식이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 외로워질 텐데.
“…….”
역시나 정곡을 찌른 걸까.
니나렛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내가 황녀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