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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1화 (8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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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 갈라질 수 없는 데까지 갈라지는 기분이 황홀했다. 할딱이면서 그의 힘에 짓눌려 머리를 침대에 대고 있었다. 그것조차 좋았다. 안정적이었다.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내 어깨를 물기 시작했을 때는 다시 교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제대로 된 말을 못 한 채로 비명만 질렀고 그는 계속 질주했다. 내가 나중에 쾌감 때문에 엉덩이를 들지 못하자 그가 힘으로 내 엉덩이를 들어서 박아 댔다. 그리고 마지막 사정하는 순간에 그는 내 목을 콱 물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입을 벌리고 소리도 못 낸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까 목을 놓은 그가 내 목에 남은 자국을 핥아 주었다.

시녀들은 우리 사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스트럼과 스틸라드에서 넘어온 시녀들은 그런가 보다 하는 듯했지만 왕궁 시녀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난처해했고 시종장은 이든에게 곤란하다고도 말한 모양이었다. 일단 왕비인 나는 드레스를 잘 입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툭, 이든이 내 곰방대에 불을 붙여 주었다.

시종장은 이걸 질색했다. 왕인 이든이 왕비인 내게 불을 붙여 주는 것. 그는 내가 완벽한 왕비가 되기 위해 연초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 내게까지 닿지도 못했다. 왕인 이든이 ‘한 번만 더 내 왕비에게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논하면 네 목을 잘라 독수리에게 그 눈이 파먹히도록 만들어 주겠다.’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시종장의 이야기는 늘 이스트럼 출신의 시녀들을 통해 내 귀에 들어왔다. 솔직히 나는 그가 참 가여웠다. 그는 전통주의자일 뿐이고 사실 직위를 생각하면 그의 그런 가치관은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이든에게 호된 소리를 듣고 말았다. 나야 이든이 그냥 한 소리라는 걸 알지만 시종장은 목숨으로 위협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든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왕세자가 아니던가. 그는 아주 무시무시한 왕이었다.

“하스트레드에는 언제 가셔요?”

시녀들이 재잘거렸다. 그녀들은 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좋아했고 내 검을 닦는 것도 좋아했다. 여검사, 특히 성검사인 왕비를 모시는 게 그녀들에게 꽤 즐거운 일인 듯했다. 왕궁 시녀들은 왕비가 성검사라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겨서 내가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날에는 내심 아쉬워했다. 이든이 내 시중을 드는 걸 보는 게 난처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던 모양이다.

“모레.”

“시녀 중에서는 누구를 데려가십니까?”

시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녀들이 서로 손을 들며 스스로를 내세우기 전에 손바닥을 보여 제지했다.

“말을 타고 밤낮없이 달릴 거라서 너희를 데려가긴….”

“저 말 정말 잘 탑니다, 전하. 밤낮으로 탈 수 있어요.”

시녀 하나가 스스로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 있게 나섰다. 내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희 집 목장 했었어요. 진짜 잘 타요, 저.”

목장에서 자란 여성들은 대체로 말을 정말 잘 타기는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말을 잘 다루는 것에 더 가까워서 장시간 말을 타는 건 힘들어했다. 내가 저 목장 딸이라는 말에 속아 한 번 내 하녀를 데리고 가다가 그녀가 힘들어서 탈진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연한 게 그녀는 나처럼 아주 장거리를 움직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데 대비되어 있지 않다.

“나중에.”

“비전하.”

“나중에, 나중에. 내가 좀 여유를 가지고 어딘가를 갈 일이 있으면 다 같이 가도 좋겠지. 하지만 이번엔 안 돼.”

내 말에 시녀가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못 따라갈 운명이었던 시녀들은 좀 고소하다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쫓아가는 게 뭐라고 또 이런 걸로 다들 시기하고 질투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별거에 다 질투를.

곰방대에 다시 연초를 채워 넣고 불을 붙여 넣었을 때였다. 갑자기 불이 확 타올랐다. 주황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불은 마법의 불이다. 내가 곰방대를 집어 던지며 근처에 있던 시녀들을 끌어당겨 내 뒤로 빼자 다른 시녀들이 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모조리 내 뒤로 달려왔다. 오른손을 뻗었다. [와라.]라고 언령을 외치기 직전이었다.

곰방대에서 솟아오른 불꽃이 더 색색으로 변하더니 곧 무지개색 연기로 변했다. 뭉게뭉게 피어올라 반짝거리는 연기는 마치 수많은 보석을 깎아 만든 구름처럼 보일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악의, 혹은 적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여뻐서 내가 눈살만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실리.]

다소 잊기 어려운,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은 기묘한 목소리가 내 침실 안을 나른하게 채웠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안다. 고작 열두 살 무렵에 들었을 뿐이지만 나는 이 목소리를 명확하게 기억한다. 알긴 아는데…. 이거 성검을 불러야 돼, 말아야 돼?

문제는 첫째, 이 목소리의 주인이 현재 살아 있는 것인가.

둘째, 살았다면 나에게 호의적인가?

죽었다면, 무엇 때문에 이 목소리는 발현되었는가?

아버지는 저주사를 당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그래, 그는 ‘사람’이 아니지, 애초에.

내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을 때 연기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마법사였다. 이마에는 초승달 무늬가 새겨져 있고 양쪽 눈의 색은 달랐으며 그의 체구는 남성처럼 뼈대가 굵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성처럼 선이 부드러웠다. 시녀들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인간은 성별이 확정되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 혼란스러워한다. 그가 어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해 주길 바란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니까.

하지만 이 사람, 헤스르란은 결코 성별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현자, 헤르스란은 이미 성별은 물론 인간의 한계도 뛰어넘은 존재니까. 그는 불사의 몸이 되었고 모든 것에서 멀어진 첫 존재가 되었다. 그는 드래곤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간 지가 벌써 몇백 년째였다. 그가 헤르스란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이 왕궁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 일리가 갔다지.]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최근 백 년 동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서적 수집가였고 헤르스란이 원하는 책 몇 가지를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탓에 이어진 인연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자시여.]

[사실은 안 만나야 되는 인연인데, 일리가 맡겨 둔 게 있어서 말이야.]

헤르스란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혀를 쯧 찼다.

[일리는 네가 왕세자의 복위를 도울 거라고 하긴 했지만 왕비가 될 거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일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헤르스란 님, 아버지께서 맡겨 두신 건….]

[아아, 그렇지.]

헤르스란은 피식 웃었다. 그는 번거롭다는 얼굴로 무언가를 뒤졌다. 그제야 나는 그의 주변까지 같이 연기가 비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레어’라고 부르는 그의 공방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탈인간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집을 레어라고 부르고는 했는데, 나는 그게 좀 허세처럼 느껴져서 어릴 때는 슬며시 웃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얼마나 대단한가. 그는 자신이 원할 때 이토록 쉽게 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어떤 마법사도 이런 일은 하지 못할 텐데.

불편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드는 기분은 불편함이었다. 내가 어떻게도 제어할 수 없는 대상이 몇 발짝 앞에 있다. 그는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우리가 이룬 모든 것들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솟는 걸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의 거부감은 근거가 없다. 옳지 않아.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나의 경계심은 잔뜩 날이 섰다. 만약에 저 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적이 되면 그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그의 전력조차 잘 모르겠는데.

[아, 찾았군.]

헤르스란이 기어코 뭔가를 찾아내어 내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순간 무척 놀랐다. 내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을 것이나 사실 엄청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나의 두 배는 되어 보일 정도로 큰 사람이었다. 이렇게 컸던가? 내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아아, 하고 헤르스란이 웃었다.

[귀찮아서 말이야. 꼬마 때는 너무 울 거 같아서 조금 외모를 바꿔 줬었지만 이젠 다 컸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잖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른인데도 놀랐는데, 그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헤르스란이 내민 것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었다.

그건 어떤 의뢰서였다.

저주를 의뢰하는 의뢰서. 만약을 위해 담보로 작성하는 그 의뢰서에는 아버지의 필체와 ‘일리드 사리안’이라는 단정한 사인이 들어 있었다. 이런 저주사를 의뢰하면서 본명으로 의뢰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는 일부러 이 의뢰서를 작성하셨다는 뜻이 된다.

내게 보여 주기 위해서.

오늘을 위해서.

[일리드 사리안, 너와의 계약을 이행하였다.]

헤르스란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헤르스란의 몸에서 픽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는 분명 계약의 속박이 사라질 때 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헤르스란에게 대가를 걸고 오늘 이 의뢰서를 보여 주라고 계약을 요구하셨던 게 분명했다.

왜, 왜 자신을 저주해서 죽이신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이걸 알려 주시는 거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상태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헤르스란은 보석 구름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놀라서 한 손을 뻗었지만 그에게 감히 대지는 못하고 허공에 멈춘 상태로 물었다.

[왜,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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