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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작, 그래, 안나는 차라리 그렇게 살아야 했어.”
이드리드의 눈이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여백작인 안나와 대공인 자신이 만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나는 이드리드에게 훨씬 마음을 열었을 것이고 둘은 더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이드리드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눈을 뜬 채로 그는 어느 꿈속에서 웃다가 조금 울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다시 웃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을 날을 받아 둔 노인처럼 허리는 구부정해졌고 머리는 백발에 목소리는 다 쉬어 버린 남자가 죽은 아내와의 로맨스를 상상하며 웃는 것이 서글펐다.
“그래….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는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어. 대가로 자네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지. 뭐가 궁금해서 왕비씩이나 될 자네가 계속 나를 찾아오는 거지?”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그가 검지를 들었다.
“단, 하나만 대답해 줄 거니까 질문은 신중히 고르도록 해.”
악의에 찬 신.
이든은 자신의 삼촌인 이드리드가 악의에 찬 신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라. 궁금한 게 꽤 많았는데 한 가지라. 눈을 감고 몇 가지 질문을 추려 보았다. 반드시 한 가지를 물어야 한다면….
“제 아버지를 죽였습니까?”
내 말에 이드리드가 ‘응?’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그의 웃음이 탑 안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웃음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죽였을 수도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제스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그는 어쩌면….
그때 이드리드가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드리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 자네는 일리드에게는 ‘아이’로군. 어이가 없어. 일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 질문을 어이없어할 걸세. 내가, 일리를 죽였냐고?”
그 말을 하고선 이드리드는 또 웃었다. 정말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나는 어느 부분이 우스운 건지 몰라 눈살을 찌푸린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윽고 그가 말했다.
“일리드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아버지는….”
“그래, 그는 저주사를 당했지.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일리드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내가 눈을 발작적으로 깜빡이자 이드리드가 웃음을 또 터뜨렸다.
“아가였네, 아가였어.”
그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나가 보라는 듯이. 나는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
아버지는 저주사를 당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이게 무슨 말이었을까.
“나는 그의 말을 다 믿진 않아.”
내가 골몰하고 있는 걸 본 이든이 내 몸에 담요를 덮어 주며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짓 하나하나가 애틋해서 눈을 감으면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내려왔다.
“내 어머니는 독살당했다고 하더군.”
그 말투는 아주 서늘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이든이 웃었다. 유감이라는 것처럼. 뭐가 안타깝고 마음에 들지 않을까. 그가 겪은 어려운 일이 한둘이 아닌데 이든은 내 일만 유감인 것처럼 웃었다. 그게 안타까워 손이 나갔다. 그의 뺨을 쓰다듬자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증인도 증거도 확보되어 있어. 리, 그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그는 지금도 정치적 줄타기를 하고 있는 거야.”
죽음의 앞에서조차 정치적 줄타기를 이어 가는 사람이라고 이든은 내게 경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의 모친이었던 왕비의 죽음은 앓다 죽었다기에는 확실히 이상한 점이 많았고, 독살이라고 해도 의아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독살을 했다면 아마 이드리드가 맞을 것이다. 그 당시 왕궁은 이미 반쯤 이드리드의 지배하에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말만은 진실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저주사를 당했지만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어서도 내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하스트레드를 구하는 일이었다. 하스트레드 기사들은 여전히 투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지위를 되찾아 주는 것. 그리고 하스트레드를 다시 평온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할 일이었다.
왕의 대관식이 열리기 전까지 하스트레드는 명예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왕비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왕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리라도 끌어와야 할 판이었다. 하스트레드는 현재 역적의 편에 끝까지 선 것으로 되어 있어 위험한 상태였고 나는 그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려면 하스트레드로 가야 했다. 하스트레드의 구조 조정이 필요했다. 명분을 만들고 그 명분으로 대항하여 지지를 끌어내야 했다. 정치에서는 명분 싸움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하스트레드 영지로 떠난다고 했을 때 이든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왠지 모르게 그는 다급해 보였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나는 그의 앞에서 죽었고 다시 되살아났다. 아마 그에 대한 고통이 다 사라지지 못한 것 같았다. 안쓰러워서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저는 곧 돌아올 겁니다, 전하.”
“곧이 언젠데? 하스트레드는 멀어, 리.”
하스트레드가 마치 왕궁 사냥터같이 가까운 곳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며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그의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우는 게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밤, 며칠 전과는 달리 달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세상은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왕비의 침실은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그 규모 탓일까, 아무리 장작을 때고 마력석을 써도 어쩔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심리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따뜻한 곳이었으니까.
이든은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하스트레드로 떠난다는 나를 붙잡지도 못한 채로 그저 괴로워만 했다. 그는 왕이 되었는데도 내게 가지 말라는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워만 했다. 어떤 예감이 그를 괴롭히는지, 내가 죽어 갈 때 그에게 남긴 어떤 괴로움의 흔적이 그의 발목을 잡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힘든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은 넓고 말라서 옷 위로 뼈가 느껴졌다. 뼈를 손가락으로 더듬자 그가 몸을 비틀었다.
“리, 하지 마.”
그의 뼈는 촉감이 좋다. 가끔 눈으로 보지만 그때마다 뼈마디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예쁜 뼈를 생각하며 어루만지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잡았다. 내 턱을 움켜쥐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오랜만의 키스였다. 처음에는 눈이 크게 떠졌는데 그다음에는 허리가 녹는 것 같았다. 그의 혀가 내 혀를 어르다가 천천히 끌어당겨 자신의 입 안에 가두고는 빨아 당겼다. 음란하게 빨리는 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든의 손이 황급히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도 그의 옷을 벗겼다. 내가 그의 속옷을 벗기려고 했을 때 그가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탁한 신음을 토했다. “만져 줘.”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속옷 위로 문질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그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턱을 다시 잡아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얼굴을 보라는 듯이. 내가 시선을 돌리려고 하자 “리.” 하고 나를 불러 다시 시선을 붙들었다.
“젖었어?”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가 곤란해서 입술을 짓씹었다. 거기에 답하기엔 아직 내가 이런 말에 익숙하지 못했다. 얼굴을 본 이든이 대답을 알겠다는 듯이 내 손목을 잡고 침대로 끌어 나를 침대에 집어 던지다시피 눕혔다. 내가 엎어지자 그는 내 뒤를 차지하고는 내게 남았던 마지막 속옷을 벗겼다. 속옷이 벗겨지는 순간 속옷을 적셨던 액이 끈적하게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이든의 손가락이 들어와 내 안을 훑었다.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는 그 순간에도 허릿짓을 하고 있었다. 발정 난 짐승처럼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내 귓불을 씹어 댔다. 하고 싶어.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에서 그 애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바로, 넣어도 돼?”
이미 젖어 있는 입구에 자신의 것을 들이민 채로 그가 물었다. 넣고 싶은데, 혹시 몰라서 마지막 제어를 하고 있는 듯했다. 흐으읏. 나도 모르게 신음이 마구 샜다. 안 그러고 싶지만 엉덩이가 움직였다. 넣고 싶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불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고 싶었다. 아, 못 한 지 오래되었구나. 순식간에 내가 이든과 몸을 겹친 지 얼마나 되었나 생각하자 더 애가 닳았다. 당장 한 몸이 되고 싶었다.
“리, 어서, 대답을 해 줘.”
흐, 으읏.
“빨리, 응? 아, 읏, 제발.”
그가 애원하며 자신의 성기를 내 입구에 마구 비벼 댔다. 단단하고 큰 것이 문질러질 때마다 내 입구가 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고 싶어. 허리를 죽 빼 봐도 그는 넣지 않았다. 단 하나의 걱정이 그를 멈추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에 나는 고개를 돌려서 힘겹게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에.
그가 내 머리를 침대에 누르면서 그대로 내 안에 자신의 것을 처박았다. 강한 삽입에 내장까지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아픔이 왜 기분 좋은지는 모르겠다.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그가 들어온 게 실감이 나서? 아픔은 아픔대로 존재하는데 머리가 확 타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자 그가 짐승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도 그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