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18화 (17/94)

<☆18ㅡ>깜

소피의 어깨에 짐짝처럼 실려 가면서 “놓치면 말짱 헛수고라니깐.” 하고 투덜거렸지만 소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소피는 평민 출신이지만 평민들의 아픔에 묘하게 차가운 구석이 있는데 크라이스는 ‘평민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것 같다’고 했고 리온은 ‘소피 자신은 힘이 있기 때문에 무력한 사람들을 보면 분통이 터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여하간 소피는 평민에게 좀 차가운 편이었다. 그녀는 내가 평민들을 위해서 마물 토벌에 힘을 쓰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소피의 어깨에 걸쳐진 채로 막사로 실려 와 소피에 의해 갑옷이 벗겨지고 그대로 목욕통에 눕혀졌다. 기사단장의 좋은 점은 이런 때에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점인데 지금 이 순간은 진짜 엄청나게 대단한 특혜처럼 여겨졌다. 솔직히 왕이 안 부러울 지경이었다.

“주군.”

뜨거운 물에 몸이 노곤노곤 풀리는 걸 가만히 느끼고 있는데 막사에 소피가 다시 들어왔다. 갑옷도 벗었고 씻기도 한 소피는 뭘 먹었는지 입가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내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내 턱을 두드려 보이자 소피가 손등으로 슥 턱을 닦았다.

“아, 배고파 뒈지는 줄 알았어요.”

“지안 앞에서도 뒈진다는 말 쓰는 거 아니지?”

지안은 소피의 막내아들이고 올해 고작 다섯 살이다. 소피가 아하하, 하고 웃는 걸 보니 쓰는 것 같다. 어쩐지, 몇 년 전에 만났던 폴의 말투가 험상궂더라니 엄마에게 배웠구나. 나는 속으로 폴의 예절 교사에게 애도를 표하며 소피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서신이 왔습니다아.”

“서신? …아.”

내가 누구의 편지인지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하자 소피가 능글맞게 웃었다.

“낭군님께서는 참 열렬하게 편지를 쓰십니다?”

실없는 소리 하고 앉았네.

픽 웃음이 났다.

“열다섯 살 어린 낭군님 말이지?”

내 말에 소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즐기세요. 언제 열다섯 살 어린 낭군을 맞아 보시겠어요?”

“정확히 하자면 약혼자지, 배우자는 아니고.”

내 말에 욕조 옆 나무통에 앉은 소피가 코웃음을 쳤다.

“배우자면 큰일 나죠. 열다섯 살 어린애랑 뭘 합니까.”

“전하, 전하. 너 언젠가 그 말버릇 때문에 큰코다칠 거야, 소피.”

“예, 예. 열다섯 살 어린 전하.”

소피가 피식거렸다. 이제 다른 이가 이든의 검술 선생이 되었고 소피와 이든은 볼 일이 없어졌다. 나는 이든과 약혼을 한 뒤 그와 며칠 지내지도 못하고 변경으로 출발했고 그 이후로는 이든을 볼 수 없었다. 못 본 지 어느새 2년. 만난 시간보다 못 본 시간이 훨씬 길었고 어린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만도 한데 그는 꾸준히 내게 서신을 보내오고 있었다.

[  사랑하는 실리.  ]

어느새 서신의 첫 문장은 늘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약혼한 사이인 데다 저 문장 자체는 통속적인 문장이니 문제는 없다. 하지만 나는 저 단어를 볼 때마다 함정에 걸린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  그곳은 날씨가 어떤지 모르겠어. 여기는 요즘 날씨도 분위기도 뒤숭숭해. 올해도 나는 이스트럼에 왔어. 사교계 데뷔도 안 했는데 초대장은 산처럼 쌓이고 있고 라이즌은 답신을 보내느라 울상이야. 내가 도와주려 했지만 그는 나의 체면이 깎인다며 거절했어. 홀로 애쓰는 거 보면 딱해.

내 재산은 착실히 늘고 있어. 리살은 내게 여러 투자를 권했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직은 안전한 방식으로만 투자하고 있어. 리살은 불만이 많지만 나는 당신 말대로 불안한 건 하지 않았어. 재산이 너무 많다는 게 피곤하다는 걸 알았어. 한쪽에서는 재산이 계속 늘고 한쪽에서는 내 재산을 빼앗아 가려는 사람들의 연락이 줄을 잇고 있어. 그중에는 당연히 ‘국왕 전하’도 계시고.  ]

이든은 ‘국왕 전하’라고 적었다. 왕에 대해서 적을 때면 늘 ‘국왕 전하’라고 강조했다. 약간 비웃는 듯한 어조라서 볼 때마다 피식 웃게 되었다.

[  공부는 잘되어 가고 있어. 아니, 조금 답답하긴 해.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약간 초조하게 만드는 것 같아. 선생들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데 사실 대공을 앞에 두고 못하고 있다고 말할 간 큰 선생이 어디 있겠어? 뭐, 없진 않지만 그들 대부분은 요즘 변경에 나가는 게 유행이 되어서 말이야.  ]

대공을 앞에 두고 쓴소리할 수 있는 선생들은 다 변경에 있다. 즉 내 기사들이라는 이야기였다. 내 기사 중에는 소피밖에 선생으로 둬 본 적이 없는 분의 이야기셨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들 아첨에는 재능이 없는 편이니까.

아, 한 명 있구나.

아첨에 아주 능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리온이 들어오다 말고 발가벗은 채 목욕통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오, 아름다우시네요.”라고 말했다. 그 말투가 거의 목석과도 같았는데 이 인간은 이게 아주 습관이었다.

“목욕하고 있다고, 리온.”

“예, 예, 압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너무 아름다우셔서 눈이 부신 나머지 보이지가 않네요.”

“앗, 눈부셔. 내 눈, 어디 있지, 내 눈.” 하고 리온이 무심하게, 책을 읽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내 몸을 보면서도 관심이 없었다. 사실 리온은 기사단 업무, 검에 관한 것, 그리고 돈 외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소피아가 리온의 모습을 보다가 “저기, 이런 거 묻기 좀 그렇긴 한데.”라면서도 안 물어볼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요즘도 고자야?”

리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그 단어, 어떤 남자들에게 좀 모욕적으로 들리는 거 인지하고 있어?”

“그게 모욕적으로 들린다는 건…. 아직도 네 핏줄을 볼 가능성이 없는 상태인 거잖아.”

“자기가 다산의 상징이 되었다고 남에게 잘난 척하지 마.”

“에이, 애 셋이 무슨 다산의 상징이야. 하기야, 아이를 낳기는커녕 그 문 앞에도 못 가 본 너에게는 내가 위대해 보이기는 하겠지. 그걸 부정하진 않겠어.”

얼마든지 위대하게 보라며 소피가 고고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리온이  “예, 예, 위대한 다산의 상징이시어.”라고 식어 빠진 찬사를 뱉었다. 사실 아이가 셋이면 적은 편이지만 우리 중에서는 많이 낳은 편에 속했다. 기사는 직업상 떠돌아다니다 보니 아이를 많이 낳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산후 기사로서 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아예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피가 아이를 셋이나 출산했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출산을 장려하는 신관들은 소피에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소피 같은 인사가 있는 반면 리온처럼 아예 여자고 남자고 사람에 관심이 없는(그렇다고 마물에 관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리온이 인간 불신과 인간 혐오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했다. 그가 불신하지 않는 유일한 인간은 나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는데 나도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서신으로 시선을 내리자 단정하고 우아한 필체가 보였다. 흘끗 필체를 본 리온이 혀를 찼다.

“열세 살인데 벌써 글자를 무지무지 잘 쓰시네요. 우아하기도 하시지.”

“예쁘게 쓴 거 같긴 한데 잘 쓴 거야?”

소피가 묻자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잘 쓰는 거지. 나보다 훨씬 잘 쓰는데. 확실히 왕족 피가 보통 피는 아닌가 봐. 교육은 잘되고 있다던가요?”

리온이 물어서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든의 선생들은 내가 붙여 주었고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나에게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잘되나 보더라고.”

아주 잘되는 거 같았다. 선생들은 이든이 천재라는 둥 온갖 수식어를 붙여서 그를 칭찬했다. 내가 붙인 선생들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들도 다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대공이어도 이든이 잘 못했으면 조심스럽게 말을 돌려서라도 못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든의 성과에 대해 잉크가 닳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잘된 건가요?”

리온이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소피가 “왜?”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가 공부 잘하면 좋은 거지 않아? 그녀는 당연한 듯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녀는 평민에서 남작으로 작위가 올라갔고 성도 하사받아서 인생의 고민도 많아진 케이스였다. 남편도 평민 출신이라 아이들을 귀족으로 가르치는 데 매우 고생하는 중이었다. 아이들도 공부에 별 관심이 없어서 남작 작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폴은 나이가 이든과 같은데도 공부는 영 뒷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피로서는 ‘공부 잘하면 좋지 뭘 그래.’라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뿌리부터 귀족인 리온은 이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왕보다 정통성이 위인 입장, 게다가 이든은 마력까지 타고났다. 이든 1세, 즉 건국왕 이든은 마검사였다. 그러니 이든의 마력은 그의 정통성을 더욱 드높이는 결과를 낳아 왕을 위협하게 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이든은 멍청한 척을 하는 게 낫다. 공부를 안 하고 대공의 자리에서 망나니처럼 지내는 걸 과시하면 왕의 경계심이 좀 누그러졌을 테지만 이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공부 욕심을 부렸고 사교계에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사교 시즌마다 하스트레드에서 옌선으로 이동했다. 사교 시즌에 타운하우스로 이동한 수많은 귀족들은 이든을 한 번 보려고 애가 닳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보여 주지 않으면서 몸값을 높이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왕보다 이든을 보기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를 더 매력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이 상황?’

리온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글쎄.”

본인이 그렇게 살고 싶다는데 난들 어쩔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말을 아끼자 리온이 “오늘 전투 보고서입니다. 놓친 마물은 없다는 내용이지만 확인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와 소피가 확인하여 보고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소피 옆 나무통 위에 보고서를 올려놓고는 소피의 어깻죽지를 잡아 나무통에서 끌어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