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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17화 (16/94)

<☆17ㅡ>깜

이르시아스 대공.

나의 작위는 그런 이름이 되었다. 이르시아스라는 건 고대어인 온의 글자인데, ‘태양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어떤 유명한 영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태양은 왕을 뜻하니 말 그대로 순종하고 결코 무엄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이기도 한 셈이었다. 어린 나도 그 경고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라 다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쓰게 웃어 버렸다.

“어떠십니까?”

일주일간 대공으로서 내가 가진 권리와 의무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왕이 보낸 자들이 직접 내게, 그리고 나와 같이 있는 실리의 고용인들에게 교육했는데 나는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실리의 고용인들은 메모까지 해 가며 매우 열성적으로 공부했다.

우리는 회의실로 꾸며진 홀에 앉았는데 나는 중앙 상석에 앉고 왼쪽에는 왕궁에서 온 사람들이 오른쪽에는 실리의 고용인들이 앉아 있었다. 왕궁에서 온 사람들이 교육을 하는 동안 실리의 고용인들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이 질문을 시작하면 왕궁에서 온 자들이 대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논쟁이 발발했으며 종종 사람들은 내게 의향을 물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도록 쉬운 것들을 물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언제 자는 것이 좋은가’, ‘디저트는 뭘 좋아하는가’ 같은 것들이었다. 내 대답은 간단했지만 왠지 모르게 고용인들과 왕의 사자들의 논쟁은 더 활활 불타올랐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이해할 수 없어진 나는 그들 뒤에 있는 태피스트리 같은 걸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스트럼은 책이 많았다. 실리의 말에 따르면 실리의 부친, 일리드 지 사리안 선대 하스트레드 공작은 독서광이자 책 수집가였다고 한다. 그는 실로 엄청난 책을 사들였는데 소피는 ‘아마 저 책을 다 팔면 성 서너 개는 너끈히 살 걸요.’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은 책 중에는 아름다운 그림책들도 많아서 교육 두 번째 날부터는 일리드 사리안의 서재에서 그림책을 잔뜩 가져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질문에만 답을 해 주었다.

실리의 고용인들은 성격이 하나같이 깐깐하여 왕의 사자들은 그들을 싫어하는 걸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게다가 실리에 대한 충성심도 강해서 실리에 대한 말이 조금만 엇나가도 왕의 사자고 뭐고 한판 붙을 기세였기에 홀은 늘 아슬아슬하게 불바다를 면하고는 했다. 잘은 모르지만 왕의 사자들은 관습을 지키고 싶어 했고 실리의 고용인들은 나의 편의나 실리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어 했으므로 주로 이 간극에서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여하간 늘 싸움박질이었다. 두 그룹은 싸우다가 식사도 내팽개칠 지경이었다.

내 재산의 반은 왕에게로 넘어갔다. 왕가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은 나에게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지참금이 그러하였다. 유일한 자식인 나에게 어머니는 많은 것을 남기셨고, 외가에서도 많은 것을 남겼다. 금광, 미스릴 광산, 엄청난 농지, 네 개의 성과 엄청난 보석들, 그리고 채권과 부동산 등이 나의 재산이었는데 나는 사실 이 많은 것들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실리는 내가 내 재산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매우 난처해했다.

“리살은 아주 좋은 회계사입니다만 돈에 관해서는 사람을 너무 믿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왜?”

“돈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마력이 있으니까요.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라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마치 수면 마법을 걸면 사람이 잠드는 것처럼요.”

잠드는 사람이 나약해서 잠드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실리는 내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변하는 걸 봤다. 애초에 내 삼촌이 변하지 않았는가. 나에게는 부모보다 훨씬 가까운, 키워 준 부모 같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길렀고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그러니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실리가 애쓰는 게 조금 가엾고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선량하고 사람을 믿는 아이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게.”

“예, 전하.”

실리는 버릇처럼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열두 살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그리고 곧 실리는 7차 마물토벌전에 출정하여 우리는 긴 이별을 맞게 되었다.

♡  네 번째 앞장. 약혼  ♡

마물 토벌전은 2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대체로 마물이 나오는 격전지들은 외곽에 있었고 마물들은 한 번에 소탕을 못 하면 다시 숲을 점령하고는 했다. 그럼 지역민들은 마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그 주변의 마을은 결국 마물들의 차지가 되기 마련이라 기사단들은 언제나 마물들을 토벌하는 데 총력을 다해야 했다. 특히나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경우 정예 중의 정예라 온갖 곳에서 벅차다 싶으면 불러 댔기에 하스트레드는 셋으로 넷으로 심하게는 일곱으로 쪼개져 각각의 장소에서 선봉으로 싸워 이겼다.

[와라.]

내가 온 어로 명하자 멀리서 하늘이 으르렁거렸다. 오른손을 뻗자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고 그 번개는 땅속에 박혀 지진으로 화했다. 땅이 갈라지면서 번개가 내게로 달려오더니 내 손에 검의 형상이 생겨났다. 아군이 환호와 경탄을, 마물들이 두려움으로 비명을 질러 대며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분위기가 바뀐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렸다. 몇을 베었는지 세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외눈박이 거인뿐. 크게 뛰어올랐다. 마력의 힘으로 도약을 하여 겨우 외눈박이의 눈까지 닿았다. 웬만한 성탑보다 높은 위치였다.

[저리 가!]

괴물이 온 어로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휘저었다.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죽을 것이나 피할 여유는 충분했다. 도리어 팔을 밟고 도약하여 두개골 중앙에서부터 검을 꽂아 넣으며 외쳤다.

[대형화!]

내 언령에 부응하여 괴물의 머리 정수리에 꽂힌 검이 순식간에 커졌다. 검은 커지면서 머리에서부터 땅까지 거인의 몸을 일자로 꿰뚫었다. 아아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거인의 몸이 터졌고 마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

내 고함을 필두로 각 상급 기사들이 마물을 쫓으라고 일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가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 놈이라도 놓치면 마물은 다시 증식한다. 우리는 여기를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어렵다. 설사 돌아온다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동안 백성의 피해는 커질 것이다. 반드시 일망타진해야 한다.

마물의 보라색과 초록색 피가 끈적끈적하게 갑옷에 붙어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에 올랐다. 나의 말인 산드라가 히이잉,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쳤다. 어디로든 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녀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고삐를 당겼다.

언덕으로 달렸다. 얼마나 뒤쫓고 있는지 방향은 어디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언덕까지 내달리는 동안 마물 둘을 없앴는데 둘 다 은신 기술을 써서 땅속에 얌전히 숨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 기술에 속은 적도 있었다. 멀리 도망치는 마물들은 다 죽였는데 정작 마물의 시체 사이에 은신법을 써서 숨은 마물들을 못 찾아내고 그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마물이 다시 득세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릴 때, 경험 없을 때의 실수다. 이제는 은신 기술을 쓴 것들을 가장 먼저 죽인다. 나뿐만 아니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은 지금 마력을 눈에 할당해서 은신 기술을 쓴 마물들을 찾아내어 보는 족족 죽이거나 기사들에게 알려 주고 있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보이는 건 네 방향으로 각각 달리고 있는 무리들. 이런저런 외모가 다른 마물들이 온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고 그 뒤를 기사들이 말을 타고 쫓고 있었다. 아무리 마물들이 빨라도 훈련된 말이 조금 더 빠르기 마련인 데다 마력을 쓰는 기사들은 불꽃을 쏘거나 안개를 깔거나 하여 진로를 방해하고 마력을 못 쓰는 기사들은 석궁을 쏘거나 하여 그들을 맞추고 있었기에 점차 다들 따라잡히는 모양새였다.

[활.]

언령을 부여하자 내 성검이 활 모양으로 변했다. 나는 활을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활시위에 빛의 화살이 다섯 개 걸렸다. 역사적으로 아주 고귀하고 위대했던 성검사는 빛의 화살을 일곱 개도 다루었다는데 나는 다섯 개를 다루는 게 한계다.

활시위를 그대로 놓자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들은 내가 지정한 마물들에게 가서 박혔다. 주로 비행 마물들이었다. 추격하기 제일 까다로운 비행 마물들은 언덕에서 내가 잡아 주는 게 가장 빠르다. 물론 내가 안 잡아도 다들 잡아내기는 한다.

몇 번 활시위를 더 당기자 마물들 대부분이 내 화살이든 누군가의 화실이든 혹은 공격 마법에든 당해서 다리를 절든 바닥에 엎어지든 이동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전부 없앨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자 성검을 없앴다. 성검은 마력과 신력을 동시에 쓰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아니나 다를까, 성검을 없애자마자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주군!”

크라이스가 달려와 나를 서둘러 부축했다. 그가 손을 뻗음과 동시에 그대로 그 손에 내 몸을 맡겼다. 꼿꼿하게 서 있고 싶었지만 솔직히 한계였다.

“힘을 너무 오래 쓰셨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소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무래도 소피가 편하지. 나는 소피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가 크라이스의 건틀렛 위에서 소피의 건틀렛 위로 내 몸을 옮겼다. 아이고, 하면서 내 몸을 옮기는 걸 보고 둘 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무리하시지 말라니까요.”

크라이스가 잔소리의 포문을 열었다.

“이러다가 쓰러지시면 마물이고 뭐고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건장한 남정네들이 다 질질 짠다니까요.”

소피가 이어지는 잔소리로 내 귓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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