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 아인 내 아이라고
모든 걸 잃은 남자 앞에서 가질래를 씻겼다고 말하다니, 은우가 태윤의 기죽은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거 태윤도 이판사판이다.
“안에다 제대로 사정했는데, 혹시 좋은 소식은 없나요? 버림받는 마당에 2세라도 남기고 싶었는데.”
“안에다 했다고요?”
질래가 은우의 허벅지를 타고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마냥 견고하던 커플의 얼굴에 악몽이 깃들자, 태윤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실은 파리에서 둘이 얼마나 많이 잤을까 싶어 지레짐작하고 그냥 지른 거였다.
문제는 도둑이 제 발 전다고, 생리 소식이 없던 질래는 태윤의 거짓을 진실인 양 믿어 버렸다. 정말 태윤의 아이를 임신했으면 어쩌지? 순간 밀려오는 별의별 생각에 질래의 머릿속 책장이 무너졌다.
그때 질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바로 은우였다. 다시는 태윤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제 안에 그녀를 꽁꽁 가두었다. 물론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질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은우의 가슴을 찔렀다.
“그날부터 생리를 안 했어.”
은우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또렷하게 들렸지만, 모르는 척, 은우는 일부러 질래의 정수리에 다정스레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태윤을 노려봤다.
“윤태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너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내 결말이 과연 그럴까? 혹시나 하는 이야긴데 표정을 보니까 뭔가 일이 벌어지긴 했나 보네.”
악에 받친 태윤이 능수능란하게 대응해 오자 이에 질 수 없는 은우였다.
“질래가 만약에 임신했다면, 그 아인 내 아이야. 내가 죽을 때까지 키울 거니까. 넌 감옥에서 절대 못 나와.”
제 여자를 지키겠다며 맹수로 돌변한 은우를 보자니 태윤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면 이참에 어린놈을 더 짓밟아 주고 싶었다.
혹 가질래가 임신했다면, 그건 저 새끼의 자식일 테니까.
“미친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연예인 하겠다면서, 애 아빠라. 정말 한 치 앞밖에 못 보는구나.”
태윤의 확신에 찬 말투가 마치 없던 애도 만들 지경이었다. 은우 역시 어느 순간 질래가 태윤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도 은우가 질래를 사랑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 놓고 죄책감도 못 느끼는 범죄자보단 내가 훨씬 더 좋은 아빠가 될 거 같은데. 누구 씨든, 질래 애니까 그 아인 내 아이라고. 알아들어?”
쐐기를 박는 은우의 그 한마디가 태윤을 실성한 사람처럼 실소케 했다. 한참 동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은우의 마음을 교란시킨 후 줄래의 영정사진을 응시했다. 마음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우린 참… 지독하게 닮았어.”
“뭐?”
“같은 과라고, 너나, 나나, 쟤나.”
태윤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나에 꽂히면 아무것도 못 보는 외골수들. 하지만 누군가는 쟁취하고 누군가는 빼앗기는 잔인한 관계 사슬 안엔 분명한 승패가 있었다. 다만 저는 패자일 뿐이었다. 태윤은 한 손을 이마에 댄 채로 상주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제 더 이상 발악할 것도 없었다. 제 상황으로는 이은우보다 더 좋은 카드를 질래 앞에 내밀 수도 없었다. 가정만 회장 이후 남자에게 꼬리를 내린 건 처음이었다. 묘한 상실감이 한숨이 되어 쏟아졌다.
“가질 수 없는 걸 갖고자 한 게 그렇게 큰 죈가?”
“미친 소리 그만하고 고인한테 인사나 하시죠.”
고고한 척, 패자를 향한 승자의 배려는 옛적에 날아갔다. 은우는 태윤이 질래를 범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반면 태윤은 둘의 지옥이 그다지 즐겁지 않음을 깨달았다.
줄래의 사진을 보니 모든 게 더 부질없이 느껴졌다. 태윤은 진실을 말하고자 입술을 뗐다.
“질래 씨, 그렇게 경멸하듯 바라보는 그 눈빛 좀 거둬줘요. 아파 죽겠어.”
태윤의 애처로운 시선이 질래에게 향했다.
“뭔 개소리야!”
은우가 태윤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하지만 힘줄이 시퍼렇게 불거진 은우의 손목을 잡은 건 질래였다. 그녀가 제 밑에서 고개를 젓는다. 윤태윤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를 잡고 있는 질래만 아니었다면 윤태윤을 당장이라도 헌신짝처럼 너덜너덜하게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질래를 위해서 윤태윤의 얼굴로 날아갈 뻔한 주먹을 은우가 거뒀다. 그러자, 윤태윤이 사실을 고백했다.
“나라고 안 하고 싶었을까, 빌어먹을. 그렇다고 쓰러진 사람 데리고 할 만큼 내 마음이 가볍진 않았다고. 혼인 신고도 그래. 하고 싶었지만 기다렸어. 적어도 가질래 씨가 원할 때까지 나도 기다렸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영화 식스 센스도 아니고 돌연 반전 같은 이야기에 질래의 침울해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꼭 쥔 작은 주먹에 순간 힘이 실렸다. 절로 벌어진 입술이 윤태윤을 향해 다급하게 질문했다.
“안 잤다는 거예요?”
“알아들었네.”
“장난친 거라고? 어떻게 사람이….”
질래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태윤이 그녀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어떻게 사람이… 한 번을 안 봐 주냐! 저 새끼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지금 누가, 누구한테 더 잔인한데! 어? 나한테 왜 이러냐고요! 원래 우리가 약혼한 사이였잖아.”
태윤은 처음으로 질래에게 성내봤다. 어쩌면 이게 저 혼자 사랑했던 여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보는 화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줄래한테 왜 그랬어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다. 질래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태윤도 생각이 많아졌다. 다만, 최후의 발언일 것 같아서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닮아서… 가질래 씨랑 닮았길래.”
딱 봐도 기가 찬 표정이었다. 하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답변이 질래 귀에는 가장 저질스럽게 들렸으리라. 그래서 줄래는 저를 부럽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윤태윤과 완벽한 남이어서 부러웠던 걸까. 태윤의 답변에 화가 나기보단, 마음속이 텅 빈 듯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줄래는 태윤 씨 많이 사랑했는데, 왜 저 같은걸….”
“줄래? 같이 도망가자더니, 한마디도 없이 혼자 가버린 여자야. 왜 당신 자매들은 나를… 자꾸 버려.”
태윤의 눈시울이 투명하게 차올랐다.
“차라리 희망을 주지나 말지. 난 죽을 용기도 없는데, 영원히… 도망쳤어.”
질래는 태윤의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줄래가 죽은 건 태윤 때문이면서도 태윤 때문이 아닌 걸 알아서일까.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차마 둘 사이에 꼬여버린 관계를 태윤에게 말해 줄 수 없었다.
‘당신 동생이라고.’
이 한마디가 앞니까지 튀어나온 걸 겨우겨우 줄래를 위해서 참아낼 뿐이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여자였는데, 줄래는 내 자존감이었어.”
“그쪽 자존감 때문에 결국 이용했단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윤태윤의 거지 같은 발상에 욱한 질래의 표정을 본 은우가 태윤의 감춰진 본심을 찔렀다. 그러자 모든 걸 내려놓은 태윤이 은우를 보며 질문했다.
“마음이 어긋난 걸 누구 탓도 할 순 없잖아. 안 그래? 가줄래가 날 사랑했듯 나도 가질래 씨 많이 사랑했는데. 그걸 비난할 순 없잖아? 안 그래?”
태윤이 질래의 눈을 회피한 채 멀거니 허공을 바라봤다. 느슨하게 벌어진 아래턱에서 한숨이 길게 내뿜어졌다.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은우가 잠시 전화 받으러 나간 틈에 질래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제 와 진심이 무슨 소용이겠어… 난 하루아침에 테러리스트가 됐고, 저 자식은 GH 일가 후계자라는데. 나 보단 저 새끼한테 가는 게 지금의 가질래한텐 더 낫겠네. 난 지킬 힘을 잃었으니까.”
“…정말로 절 사랑했어요?”
“…….”
대답을 미루던 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굴복의 눈빛으로 질래를 힘없이 바라봤다. 그러자 질래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찢어진 가슴에 한 번 더 비수를 꽂았다.
“그럼 한 번만 더 져주세요. 죗값 받아요, 전부, 그리고, 은우랑 제 관계 못 본 거로 해주세요.”
“…저 자식을 위해서?”
“아니요, 나도… 살고 싶어서요.”
태윤이 이번에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파에 기대어 상주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표정은 매우 단조로워졌다. 줄래 없는 세상에서 홀로 느끼는 소외감이란 지독했다. 방향성을 완전히 잃은 지금 그는 무기력하게 두 눈을 끔뻑이며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그래, 들어주자.
사랑하는 여자의 마지막 부탁이라니,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제 자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후줄근하고 추레했다.
붙들 지푸라기조차 없는 허상 같은 사랑에 목맨 세월이 아쉬워서.
혹 눈물을 들킬까 봐 벌떡 일어나 속히 빈소로 발길을 트는 태윤이었다.
이것이 그녀를 위한 제 마지막 눈물이 되리라며, 이제 세상을 떠난 가줄래를 위해 울어주리라, 다짐하는 그였다.
다만 이것이 가질래와의 마지막 조우일 것 같아서 그는 저만이 알고 있는 마지막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
이건 죗값을 받으라며 부탁해온 질래에게 주는 마지막 힌트 같은 거였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려 했던 숨겨진 사실이기도 했다.
“그거 알아? 사하라 여사, 당신 아버지가 죽인 거.”
“말도 안 돼.”
“테러 사실, 그 여자가 알아버렸거든. 그걸로 협박당했지, 가 회장님이.”
“…….”
“그런데 결국은 회장님도 실수로 돌아가셨네.”
“…….”
“사는 게 우습지? 지금 내 꼴처럼 말이야.”
질래는 태윤의 패배에 찬 억지 미소를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 소름 끼치는 시간에 통화를 마친 은우가 제 곁으로 돌아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 줄래를 찾아와 질래에게 마지막 사랑 고백을 남기고 떠난 자.
여전히 진실을 모르고 돌아서는 그에게 줄래의 유언은 그야말로 딱이었다.
[태윤 오빠가 불쌍해, 나도 불쌍해….]
누군들 안 불쌍할까.
달려가야 할 골대가 어긋난 순간 우린 이미 다,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만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