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상갓집 짐승 새끼
일부러 이렇게 보냈구나.
확인이 필요했다. 파리에서 못 와서 이렇게 화환 세레나데라도 부르는가 싶어 질래는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뭐지?
파리에서 울려야 할 벨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더니 질래 앞에 돌연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펼쳐졌다.
멸종 위기에 처했다지만 여전히 늠름한 자태와 위엄을 자랑하는 시베리아 호랑이.
휑한 허허벌판을 눈부신 꽃길로 만들어 버린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그림 같은 남자. 바로 은우였다.
몇 달 전, 사하라 여사 장례식장에서 봤을 때와 놀랍도록 비슷한 순간이었다.
다만 그때는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면, 지금은 화사한 꽃다발이었다.
반갑다며 굳은 입술이 미소로 찢어질 타이밍이 아님에도 절로 반응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례식장의 묵직한 기운도 베어버릴 듯 시리도록 날카로운 콧날을 선두로 만화책을 찢고 나온 슈트 핏이 훌륭한 남자. 홀로 핀 조명이라도 달고 다니는 건지, 은우의 등장만으로도 어두침침했던 장례식장은 드라마 세트장이 됐고, 패션위크의 런웨이로 돌변했다.
은우는 먼저 고인의 영정사진 밑에 줄래가 좋아하는 노란색 장미 꽃다발을 둔 후 상주인 질래에게는 매혹적인 보라색 꽃다발을 선물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모를 카메라를 의식해 질래가 은우를 공손하게 맞이했다. 실은 GH그룹 기 회장 측과 은우의 새로운 매니저가 부탁한 내용이기도 했다.
질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태윤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혹 그들의 파혼 이유가 은우로 지목될 가능성을 우려해 둘의 관계를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알려져 봐야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은우 역시 내키진 않았지만 질래를 위해서 동의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튀는 장미 꽃다발에 화한 꽃길까지 열다니. 모든 게 과했지만, 사람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 꽃들이 질래의 우울했던 기분을 익숙한 남자의 체향처럼 향기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배달된 꽃 중에서도 가장 크고 수려한 꽃이 다가온다. 질래에게 바짝 붙더니 그녀의 귓가를 간질간질 자극하듯 속삭였다.
“밥은?”
별말 아닌데, 눈가가 시큰시큰한 게 없던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생긴 모양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던 그녀의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실은 줄래가 죽은 이후, 질래는 단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그제야 제가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알아차릴 정도였다,
은우는 꽃다발을 주면서 사실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질래를 보는 순간,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에 저도 모르게 엄마처럼, 그 흔하디흔한 한 마디가 나오고 말았다.
보나 마나 한 끼도 안 먹었을 게 분명했다. 어릴 때도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식욕부터 잃는 질래를 은우는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처한 상황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끌고 들어가 먹여주고, 씻겨주고, 그녀의 몸을 저로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본능대로 행동했다가 졸지에 그녀를 환승녀로 만들어 버릴까 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구설수에 오르기 좋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 않은가.
아홉 살 연하의 모델. 알고 보니 GH기업의 친손자란다.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가질래가 강화그룹을 왜 그리 쉽게 버릴 수 있었는지 알겠다는 등의 말이 나오기 딱 좋았다.
그래서 TY그룹의 윤태윤이 팽당했구나.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꼬투리 잡을 아이템들이 다분했다.
그래서 은우는 참는다.
“뭐라도 먹고 와.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 게.”
하지만 은우의 말을 질래가 고분고분하게 들을 리 없었다. 푹 꺾인 고개를 힘없이 나풀대는 게 거절 의사였다.
은우는 옷걸이처럼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죽을 뻔했다. 대신 뜨끈한 입술을 그녀의 귓전으로 은밀하게 내렸다.
“내 말 안 들으면, 확 먹어버린다.”
“…….”
그의 숨결이 간질이듯 질래의 귓바퀴를 쓸었다. 촉촉한 입술이 천천히 귓불을 스쳐 지나가자 꺼진 촛불처럼 기력 없던 여자의 눈망울에 불현듯 불꽃이 일었다. 은우를 향해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들자, 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은우는 질래의 정수리를 꾹 눌러 분홍 장미 같은 얼굴을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정면만 응시해. 아무것도 티 내지 말고.”
질래는 귓전에서 울리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잠복 중인 기자가 플래시를 실수로 잘 못 누른 듯, 그 사람의 어설픔이 두 사람을 살렸다.
은우가 질래를 상주실로 밀어 넣은 후 불빛이 터진 곳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질래는 줄래의 빈소가 차려진 이후 처음으로 상주실을 제대로 훑어봤다.
리모델링된 상주실은 침대부터 화장대까지, 마치 작은 평수의 콘도 같았다. 상주가 지내기엔 오버스러울 만큼 안락해 보였다.
하지만 질래의 마음에는 평안함이 없었다. 혹 은우와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건 아닌지 쿵쿵, 쿵쿵 가슴을 빠르게 내달렸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해 잠시 침대에 걸쳐 앉는다는 게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점점 세상이 뿌옇게 뒤바뀐다.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던 그때, 질래 앞에 뚝.
줄래가 떨어졌다. 사지가 꺾인 동생이 제 앞으로 기어왔다.
“언니가, 부러워.”
피범벅으로 만신창이가 된 줄래가 손을 내민 채 저를 불러댔다.
“아니야, 줄래야, 그런 거 아니야, 이러지 마.”
줄래가 저를 옥상 난간 위로 끌고 가 함께 뛰어내리려던 그 순간.
“가질래!!”
꿈이었다.
저를 애타게 부르는 은우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런데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눈을 뜨고 싶은데 계속 줄래의 환영이 질래 앞에 머물렀다. 그 끔찍한 모습이 무서운 게 아니라 오히려 안쓰러웠다. 질래의 감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언제쯤이면 나는 너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참 후 질래가 눈을 떴을 땐 그토록 기다리던 은우의 드넓은 품에 안긴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질래만의 치유의 숲. 이은우 품이 좋아서 그를 향해 저도 모르게 힘 빠진 미소로 빙그레 웃어주기도 잠시, 이곳이 장례식장임을 깨달은 질래가 그만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
제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여자를 은우가 제 안에 꼭 가뒀다.
“개미 한 마리도 안 지나가더라. 조금만 쉬어. 누가 봐도 가질래, 지금 정상 아니야.”
“사진은?”
“쫓아가서 지웠어. 돌려보냈고.”
“그냥?”
제 위에서 등불처럼 빛을 발하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몰래 찍어놓고 놓고 돈까지 챙겨가다니.
하지만 한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어느새 남자의 오뚝한 콧날에 썰릴 만큼 은우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보고 싶었어. 가질래.”
“일어날래.”
침대에서 끼 부리는 섹시한 호랑이에게 홀리기 전에 질래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문제는 제힘으로 밀릴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은우가 질래를 제 곁으로 끌어왔다.
“작년엔 상주실에 들어가 볼 생각도 못 했는데, 빈소 옆, 수납공간, 기억나?”
“그때는….”
“여기.”
은우가 상복에 눌려 동그랗게 튀어나온 탱탱한 젖가슴 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키스했잖아.”
“이러지 마, 줄래가, 마지막에 뭐라 그런 줄 알아?”
“뭐라 그랬는데?”
“…….”
눈물샘이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줄래 생각만으로도 스위치가 가동됐다. 또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질래는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그의 거대한 몸통을 있는 힘껏 양팔로 감아 안았다.
“…부럽대… 내가 부럽대.”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몰아쉬는 게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악몽을 꿔서 그런지 질래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라리 욕을 하지. 부러워서 죽는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줄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은우는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제 옷에 슬픔을 적시는 중이란 것을. 그래서 질래의 잘게 떨고 있는 등을 쓰다듬으며 묵묵히 들어줬다.
얼마나 아픈지, 그 괴로움의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빌어먹을 몸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감성과 따로 노는 몸.
분위기 파악이라곤 이만큼도 못하는 눈치 없는 몸뚱이가 은우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슬퍼하는 여자의 육감적인 몸이 자꾸자꾸 은우의 숨어 있는 육욕을 자극했다.
저에게 매달린 여자의 풍만한 가슴골이 은우의 목울대를 먹었고 흔들리는 무릎이 아까부터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남자의 수줍은 부위를 툭툭 건드렸다.
급기야 단단하게 솟은 남자의 분신을 여자가 제 가랑이 사이에 가둔 줄도 모르고 어찌나 들썩이던지. 남녀는 각각 다른 이유로 고통을 토해냈다.
“은우야, 마음이 너무 아파. 내가 정말 나쁜 년이었어.”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며, 은우는 스스로에게 욕하고 말았다.
제길. 짐승만도 못한 새끼. 이 상황에 발기라니.
당장이고 그녀의 상복을 벗겨 상주실 침대에서 그녀를 할짝할짝 핥으며 맛보고 싶었지만, 상주와 고인에 대한 예의라며, 애써 헐떡이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제 본능 때문에 질래에게 더 큰 죄책감을 안겨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저 커져 버린 제 분신의 크기만큼이나 부서져라 그녀를 품고 또 품었다.
그녀의 아픔이 다 제게로 흡수될 때까지….
질래는 은우 안에서 제 회한을 다 풀어낸 후에야 그가 들끓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제 음부 틈새로 은우의 분신이 꾹 눌려 있었다니. 본능과 사투 중인 남자가 보였다. 얼른 브레이크를 건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알지? 지금은 아닌 거.”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