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음탕한 한의원
“저기, 은우야.”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 질래는 조바심이 났다.
기 회장 집에 얹혀 생활하는 것도 눈치 보이건만, 예상치 못한 영상통화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한의원이면 침을 놔야 하나? 하긴 그렇게 굵은 침은….
타닥. 화면에서 은우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휴대폰을 떨어뜨린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질래가 있어야 할 화면에 갑자기 기 회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랬다. 질래는 휴대폰의 방향을 틀어 방 안에 혼자 있는 게 아님을 은우에게 조용히 알려줬다.
밑도 끝도 없는 보약 드립에 부끄러움은 온전히 커플의 몫이었다.
휴대폰을 주웠는지 다시 영상 속에 나타난 은우는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한없이 초조해 보였다.
이런 와중에 기 회장이 카메라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잔뜩 긴장하던 그 순간.
“보약 침이 그렇게 실하니? 아픈 환자를 벌떡 세울 만큼 효과가 좋다면, 소개받고 싶구나. 요즘 허리가 안 좋아서.”
기 회장이 뭘 알고 저러는 건지,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황은 우스워졌다. 이 와중에 은우의 웃음보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기 회장의 말이 요즘 말로 돌려 까기였음을 금방 깨달았다. 농담 속에 칼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은우야, 보약도, 침도 다 좋은데 질래 씨는 지금 환자고, 넌 모함 받고 있잖니? 어떠한 순간에도 방심하지 말란 이야기 꼭 해주고 싶구나.”
기 회장이 뿜어낸 냉기가 어느새 LTE 통신망을 타고 은우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긴, 이 심각한 상황에 은우의 모습이 기 회장 눈엔 철없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우는 이 사태를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윤태윤의 약점을 쥐고 있는 까닭에 진실이 아닌 일로 마음을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실체 없는 불안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 여자 앞에선 무조건 센 척을 하는 게 남자이거늘.
“새겨듣겠습니다.”
은우의 답변하자 청춘남녀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놓은 기 회장이 그제야 방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퇴장할게요.”
그러자 질래가 다급하게 기 회장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아, 아니에요. 전화 끊겠습니다.”
질래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하자, 이번에는 기 회장이 따뜻한 미소로 질래의 손동작을 멈춰 세웠다.
“그러지 마요, 나이 먹고 눈치 없는 노인네 소리 듣고 싶진 않으니까. 통화 계속해요.”
“그래도, 아까 하실 말씀이 있다고….”
기 회장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그제야 해야 할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참! 은우도 듣고 있겠죠? 익명의 제보자, 질래 씨가 말한 그 사람이 맞아요. 가능한 빨리 저택으로 불러볼게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아쉬운 사람이 와야죠. 윤태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래 씨가 아내라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인데. 그런데 말이죠….”
‘윤태윤의 아내’란 워딩이 진실이 아님에도 질래에겐 장미꽃에 달린 가시처럼 따끔했다.
결국 기 회장에게 저란 존재는 현재 손자의 여자도 윤태윤의 여자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인 것 같아서, 뒷말을 듣기가 두려웠다. 귀를 막고 싶던 그때였다.
“질래 씨, 나도 내 예비 손자며느리, 지킬 거라고요. 이 말, 해주고 싶었어요.”
꾸벅. 질래는 고개를 숙였다. 감동의 전율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너무 고마워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쿵쾅쿵쾅, 감동의 회오리가 심장 안에 휘몰아쳤다.
실수로 영상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지도 모를 만큼, 그 가슴 벅참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홀로 간직하고픈 질래였다.
그 사이 기 회장이 자리를 비웠다.
그녀는 은우에게 전화 거는 대신 지나의 휴대전화에서 찾아낸 증거들을 제 폰과 테블릿 PC에 각각 전송했다. 그리고는 그 증거 몇 가지를 은우에게 보내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휴대폰 메시지 창을 열었다.
[은우야, 지나 폰에서 나온 메시지 캡쳐한 거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보내.]
문제는 다음이었다. 전송 키패드 근처에서 왔다 갔다 뱅뱅 맴돌던 손끝이 한참 후에야 드디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 떠나야 하는 은우를 위해 뭐가 옳은지 고민됐던 까닭이었다.
어쨌든 이제 더 이상 당하지만은 않으리라. 윤태윤, 어쩌다 보니 악연이 된 약혼자에게 제대로 반격할 때가 온 것이다.
질래는 고 작은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
한편 질래와의 영상통화를 강제 종료 당한 은우는 지킬 앤 하이드처럼 두 가지의 상충된 생각이 저를 괴롭혔다.
일단, 기 회장의 입에서 나온 ‘예비 손주며느리’라는 말에 어릴 적 첫사랑의 설렘처럼 마냥 가슴 뛰었다면, 윤태윤이 저를 살인자로 몰았다는 사실엔 정의 내릴 수 없는 분노가 잡탕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럴 때 은우는 늘 좋은 감정으로 악함을 이기곤 했다. 그럼에도 인과응보는 필요하다는 게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남 실장님, 허위 제보로 소송 걸 수 있지 않나요?”
“음, 그런데 이사님이라고 특정 지은 게 아니라서 명예 훼손으로 걸기 애매할 것 같습니다. 혹 근거가 있다고 해도 아마 윤 본부장 밑 선에서 꼬리 자르기를 할 겁니다.”
“하.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요? 기분 더럽네요.”
“소송을 진행해도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은 미비할 것 같습니다.”
“아….”
기분 더럽다고 했건만, 묻지도 않은 팩트 나열이라니. 이럴 때 보면 업무 능력과 별개로 남 실장의 공감 능력이 몹시 의심되긴 했다. 혹은 이 또한 은우의 기분을 긁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이거나. 갈수록 그의 본심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음흉하게 바라봤다. 아주 신경 쓰여 죽으라고. 상사인 은우가 줄 수 있는 소심한 복수를 시행한 것이다.
지이이잉.
하지만, 복수전도 잠시. 그토록 기다리던 질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영상통화 대신 문자라니. 은우는 아직도 기 회장과 함께 있나 싶어 얼른 문자함을 열어보는데. 그 안에는 질래가 쓴 글과 함께 이미지 파일 여러 개가 첨부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파일이 하나 있었으니.
[왜 안 받아?]
[장난해?]
[다 니 탓이야!]
[전화 받으라고]
[야!!!! 안 받아?]
[딱 기다려, 지금 갈 거니까. 청담동 지하 사무실 맞지?]
12월 25일 새벽 4시경 윤태윤이 지나에게 보내 메시지였다. 분명 은우와 질래가 닭발집에 있던 시간이었다.
설마하니 지나를 죽인 범인 역시 윤태윤?
여러 정황상 의심이 들었지만 우선 쓸데없는 추측은 버리고 사실만 확인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둘이 밀접한 관계였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이브 날 호텔 와인바 펜트하우스에서 둘이 술을 마셨다는 것을 인증하는 어설픈 셀카 사진도 있었다.
이정도 증거라면….
“남 실장님, 윤태윤 개새끼랑 당장 미팅부터 잡읍시다. 지금 당장이요.”
은우의 요청에 또다시 헛기침을 쏟아내는 남 실장이었다. 이내 고개를 돌려 은우를 주시하는데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은우를 향한 원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세 가지만 부탁하신다더니…. 그게, 맘대로 시간 내라 마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윤태윤 번호 아세요? 아니다. 기 회장님한테 물어보면 되겠구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아니요, 이 메시지를 보내면 윤태윤도 당장 만나고 싶어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그렇게 멈춰 선 세단 안에서 남 실장의 도움 없이 한참을 이리저리 연락하던 은우가 드디어 다음 행선지를 알려왔다.
“기사님, TY그룹 본사로 가 주시죠.”
남 실장도 은우의 추진력에 항복한 듯, 운전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공항에서 돌아오고 있다는 남자의 도착 시간이 꽤나 늦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질래의 속을 타들어 가게 할 때 즈음.
똑똑, 똑, 똑똑, 똑.
딱 6번. 은우였다. 은우가 돌아온 것이다. 물론 몇 시간 후에 떠날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열린 문틈 사이로 그가 보이자 질래는 불과 한 시간 전에 몇 번이고 연습했던 그 담담한 대사를 싹 다 잊어버렸다. 대신.
“왜 이렇게 늦었어? 아까 출발했다며.”
이런! 짜증 섞인 구질구질한 멘트 따위나 날리고 말았다.
“아니, 한의원 차리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무슨 있지도 않은 한의원을….”
“되게 보고 싶었나 보네. 예쁘다. 가질래.”
“아니거든?”
잔뜩 날선 질래를 보며 은우가 분리불안증에 시달리는 강아지 달래듯 그녀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뚱하니 있는 여자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질래의 말캉한 볼을 잡은 채로 살짝 흔들었다. 곧바로 이마와 콧등을 맞댄 후 부비부비하니. 하-.
“너무 좋다. 가질래 냄새. 미안해, 많이 늦었지.”
사과를 받은 질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걱정이 돼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동안, 가질래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누가 봐도 달달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잘못 건드리면 깨질 수도 있는 유리 같은 여자라서 은우는 조심스레 그녀를 품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가로질러 통통한 귓불을 물었다 놓은 후 귓가를 간질이듯 조용히 속삭였다.
“나, 윤태윤 만나고 왔어.”
“혼자?”
걱정이 담긴 동그래진 여자의 눈매가 은우의 광대를 내내 웃게 했다. 애지중지, 얼른 핥고, 빨아주고 싶을 만큼 첫눈처럼 소복소복 제 마음에 설렘을 쌓는 여자였다. 그 위에 제 발자국 외엔 어떠한 불순물도 남겨두기 싫어서 오해의 여지를 불식시켰다.
“그 빌어먹을 익명의 제보. 허위 제보로 협의 봤으니까 걱정 말라고.”
“순순히 그래 준대?”
“잃을 게 더 많은 사람이 순해져야지.”
은우는 질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자연스레 여자의 젖무덤을 그러쥐며 그녀의 숨결을 마음에 새겼다. 제법 큰 손임에도 다 담기지 않는 그녀의 가슴 역시 제 안에서 심히 뛰고 있었다. 마치 질래가 저를 향해 달려오는 듯했다.
순시에 남녀의 욕망은 서로를 향해 그대로 관통했다.
“가질래한텐 잃을 게 없어서 그런가, 자꾸자꾸 난폭해지고 싶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잃을 게 많아서 당신 앞에서 순한 양이 된 게 아니거늘. 이은우, 너한테 만큼은 사랑받는 여자이고 싶어서, 일부러 스스로를 놓은 거였다.
은우는 항상 말만 난폭했지, 신줏단지 모시듯 저한테 한없이 다정다감했다. 알고 보면 그 따스한 포악함이 닫혀 있던 질래의 마음을 열었다. 닫혀 있던 질래의 다리마저도 벌렸다.
그 사이 여자의 허벅지를 지나 팬티 위로 향하던 남자의 손끝에 끈적한 애액이 딸려 나온다. 저를 원하는 듯한 눈빛도, 흥건히 젖어버린 속옷도 모두 남자를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